이튿날 아침 일찍 라파스에서 코파카바나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라파스에서 코파카바나는 구글맵에서 150킬로미터 밖에 안떨어진 것으로 나오는데, 버스로는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반나절도 채 걸리지 않았던 것 같다.
라파스 버스터미널에서 출발한 버스는 곧 안데스의 고원지대를 달리기 시작했다. 칠레북부에서 볼리비아를 거쳐 페루까지 이어진 이 고원지대는 알티플라노 고원인데 티베트 고원 다음으로 넓다고 한다. 해발 4000미터가 넘는 고원 너머로는 눈덮인 안데스 산맥의 고봉들이 펼쳐져 있고, 그 봉우리 바로 위로 구름들이 손에 잡힐 듯 떠 있었다. 우유니에서부터 계속되는 비슷한 풍경이지만 볼때마다 독특하고 몽환적이었다. 다음번 여행의 최우선 목적지로 안나푸르나 트레킹이 정해진 것은 아마도 이때의 경험이 크게 작용하고 있는 듯하다.
이렇게 높은 곳에서도 밭을 일구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제주도의 오름처럼 부드러운 산등성이 바로 위로 구름이 지나고 있다.
얼마나 갔을까 드디어 호수가 보이기 시작했다. 티티카카 호수는 내 예상보다 훨씬 더 컸다.
버스는 선착장이 있는 작은 마을에 멈췄다. 코파카바나는 볼리비아의 영토이지만 페루쪽에서는 육로로 바로 갈 수 있는데 반해서 볼리비아쪽에서 가려면 티티카카 호수의 수역을 건너야 했다. 반대편에 있는 사람이 보일 정도로 좁은 수역이지만 다리가 없어서 자동차나 사람을 반대편으로 실어나르는 배를 타고 건넌다.
언젠가 여행중에 비슷한 경험을 한 것 같아서 생각해보니 라오스에서 태국 국경을 넘을 때도 배를 타고 건넌 기억이 났다. 정말 오래전 일인 것 같은데 불과 8개월도 채 되지 않았다. 매일 똑같은 방법으로 출퇴근을 하고, 비슷한 일을 하며 지내다가 하루하루 새로운 곳에 가서 새로운 것을 보고 다니다보면 단 몇 개월만에 몇 년치의 기억이 쌓이게 된다. 그래서, 한달전의 일도 훨씬 더 오래된 일처럼 느껴지게 되는 것이다.
버스를 싣는 커다란 배. 사람은 지붕이 있는 작은 배로 옮겨 타야한다.
배를 기다리는 동안 물가에서 본 야마인지 알파카인지...(남미 여행이 끝날때까지 구분을 못했다.)
현지인들과 여행자들이 옹기종기 모여 탄다. 여행 중 이런 경험이 너무 좋다.
반대편으로 건너오니 이쪽 마을이 조금 더 큰 듯했다. 여행자를 위한 레스토랑과 티티카카의 명물 갈대로 만든 배와 잉카 왕의 조형물도 있었다. 구글맵에서 찾아보니 이 마을은 Tiquina로 불리는 곳인 것 같다.
다시 버스에 올라 한참을 가다보니 드디어 코파카바나로 보이는 커다란 마을이 나타났다. 아래 사진 오른쪽의 야트막한 봉우리는 티티카카 호수의 석양을 보려고 여행자들이 많이 찾는 곳인데 게으른 탓에 올라가지 못했다.
코파카바나에 도착하니 점심때가 조금 지나 있었다. 점심은 이곳의 명물인 티티카카 호수에서 잡은 트루차(송어) 구이를 먹기로 하고 나름 괜찮아보이는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맛이 그저 그랬다. 여행자들이 극찬했던 그 트루차가 맞나 싶었다. 대부분의 음식을 다 맛있게 느끼는 내 입맛에 별로라면 이 레스토랑의 음식솜씨에 문제가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에는 여행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번지르르한 식당이 아니라 현지인들로 붐비는 식당에 가리라 결심했다.
점심을 먹고 호숫가에 앉았다. 햇살은 강렬하게 내리쬐였지만 고도가 높아서인지 그다지 덥지 않았다. 위키피디아에서 찾아보니 내가 방문했을 때가 연중 가장 기온이 높을 즈음이었음에도 말이다. 연중 평균 최고기온이 17도 안팎, 연중 평균 최저기온은 영하 0.8도 정도 되는 것으로 나온다. 특히나 겨울에 속하는 7월은 평균 최저기온이 영하 7.5도 이하라니 서울보다 훨씬 춥다.(놀랍게도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보다도 춥다!!!)
어디선가 꼬마녀석이 오더니 긴 작대기와 페트병을 가지고 한참이나 혼자 놀았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장난감이 무척 귀했고, 집안 사정이 넉넉치 않으면 장난감을 한번도 가져보지 못하고 자란 경우도 다반사였다. 대신에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이 장난감이 될 수 있었다. 어떤 것이든 로봇이 될 수 있고, 자동차도 될 수 있었다. 녀석을 보고 있자니 내 어린시절이 생각이 났다.
내일 할 태양의 섬(Isla del Sol) 투어를 신청하고 숙소에서 까무룩 잠이 들었다 일어났더니 어느새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전기 사정이 좋지않아 마을 중심부를 제외하고는 가로등도 없는 길을 걸어 시장인듯 싶은 곳으로 나왔더니 반갑게도 길거리에서 감자를 구운 것과 라파스에서 본 예의 그 샌드위치를 팔고 있었다. 여행자들은 별로 찾지 않는지 감자를 굽고 있던 아주머니는 가까이 가도 팔 생각도 없는 듯 보였다.
감자와 샌드위치를 사들고 가다보니 음악소리와 함께 한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춤을 추고 있었다. 젊은이들이 유행가에 맞춰 멋들어진 춤을 추는 것이 아니라 남녀노소가 모여 자기 맘대로 흔들어 대는 춤이었다. 이들은 혹독한 기후에 경제적으로 팍팍한 삶을 살면서도 흥겨움까지 잃어버리진 않았다.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볼리비아 사람들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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