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스 트래킹을 하고 싶어서 여기까지 왔지만 경로가 워낙 다양하다보니 어떤 경로를 선택할지가 고민이었다. 짧고 평탄한 노약자를 위한 코스부터 거의 등반에 가까운 최상급 코스중에서 적당한 코스를 고르는 것도 쉽지가 않았다. 인터넷을 뒤지고, 스위스 관광청에서 만든 앱을 다운 받으며 신중을 기한 끝에, 산에서는 완전 초보이기 때문에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갔다가 대여섯시간 동안 걸어 내려 온 다음 산악기차 역에서 째르마트로 돌아오는 무난한 코스를 골랐다.


4500미터에 달하는 마터호른뿐만 아니라 주위에 3,4000미터급 봉우리들이 많다보니 일년내내 만년설로 덮인 곳들이 있어서 한여름이었음에도 스키를 타려는 사람들로 케이블카 정거장이 북적였다. 뿐만 아니라 산악 바이크, 승마, 트래킹, 등산하는 사람들로 째르마트 시내에는 사람들이 무척 많았다. 하지만, 케이블카를 타고 산 위에 올라오니 그 많던 사람들이 다 흩어져 한적하기 이를데 없었다.


째르마트 출신의 유명한 등반가가 좋아했던 장소에 그를 기리기 위해 친지들이 벤치를 만들었다고 쓰여 있었던듯.


먼저 산을 관통해서 올라가는 궤도 열차를 타고 오른 후, 케이블카를 타고 다시 올라가야 한다. 째르마트가 높은 곳에 있는데다 궤도 열차에 케이블카까지 타고 오르니 트레킹을 시작한 높이는 2000미터를 훨씬 넘어있었다.




아쉽게도 이 날도 구름이 많은 날이었다. 마터호른이 보여야 할 자리는 구름에 쌓여 보이질 않았다.


케이블카에서 내려 트래킹을 하기 위해 길을 찾으려 하다가 케이블카 관리소 옆에서 알프스에서 서식하는 산양들을 보았다.  뿔이 커다란 수컷을 중심으로 옹기종기 모여 볕을 쬐고 있었다.


트래킹의 초반부는 멀리 보이는 산장까지 올라가는 완만한 오르막이었다. 하지만 분명 완만했음에도 2500미터에 가까운 높이다보니 생각보다는 힘들었다. 길 주변으로는 다양한 야생화가 무척 많이 피어있었다. 야생화의 특성상 크고 화려하게 피지 않기 때문에 언뜻보면 보잘것 없지만 자세히 보면 무척 특이하고 예뻤다. 알프스에서 본 야생화의 사진들은 예전에 한번 정리해서 썼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한다.



드디어 멀게 보이던 산장에 도착했다. 당연히 산장에서 이런저런 먹을 것들을 팔겠지만 분명 무척 비쌀테니 넓직한 돌에 걸터앉아 숙소에서 싸온 샌드위치를 먹었다. 이런 멋진 자연 속에서 바람을 맞으며 식사를 하는 것은 세상의 어떤 오성급 호텔 레스토랑에서도 맛볼 수 없는 경험이다.


이제 아래로 내려가야 하는데 길이 잘 보이지 않았다. 저 아래 사람들이 지나가는 것 같으니 그 길까지 가기로하고 있는 듯 없는 듯한 길을 찾아 엉금엉금 아래로 내려왔다.




멀리 보이던 빙하가 상당히 가까이 보였다. 빙하 앞으로는 크고 작게 부숴진 바위들이 길을 만들며 산 아랫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불과 수십, 수백년 전만해도 빙하는 내가 서 있는 자리 앞까지 이어져 있었을 것이다. 북극이나 높은 산의 빙하들이 녹고 있다는 것은 뉴스에서도 다큐멘터리에서도 자주 볼 수 있다. 그 이유가 인간의 무분별한 환경파괴로 인한 지구 온난화 때문이든 아니든 간에 자연이 바뀐다는 것은 우리에게 좋은 일은 아닐 것이다.


여행을 하며 이런 거대한 자연 앞에 서게 되면 겸손한 마음이 들고, 내가 가진 것들이 하찮아진다. 조금 더 빨리 승진하려고 욕심을 부리고, 그래서 연봉을 조금 더 받고, 조금 더 비싼 옷과 자동차를 사면 받을 수 있는 만족은 유통기한이 너무나 짧다. 돈으로 사는 것들은 금새 망가지고 낡아버린다.


깎지 못한 머리는 점점 길어져서 어깨를 덮고 배낭에 든 1년 동안 입었던 의복은 모두 합해도 양복 한 벌 값도 채 안되지만 그 1년 동안은 내 인생의 가장 만족스러웠던 시간이었다. 원했던 대학교에 입학하고 대기업에 입사했던 만족감은 얼마가지 못했지만 이 시간동안 얻게 된 감정들은 평생 가지고 갈 수 있다. 그리고 언젠가 그 시간들을 다시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알프스 트래킹 길도 길임을 알려주는 표시가 있다. 제주도 올레길이나 지리산 둘레길처럼 친절하지도 않고 자주 눈에 띄지도 않지만 띄엄띄엄 길이 맞다는 것을 알려주다. 분명히 표시를 봤고 그 뒤로는 갈림길이 없었는데 걷다보니 낭떠러지였다. 십수미터 건너편에 다시 길이 이어지는 것으로 봐서는 산사태나 그런 것으로 길이 끊겼나 싶었다. 아래를 보니 아찔했다. 언제 다시 무너질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조심조심 왔던 길을 돌아나왔다. 그 순간 한눈을 팔며 걸었거나 사진을 찍느라 정신 없었다면 큰일 날 수도 있었다. 산에서는 마음을 풀면 안된다는 것을 다시 깨닫는다.

저 앞은 낭떠러지... 길 없음


앞으로 높은 봉우리가 펼쳐진 멋진 경치를 앞에 두고 벤치가 놓여 있었다. 여기에 벤치가 놓여진 이유는 '하루에 몇 명이 벤치를 이용할 것인가, 여기에 놓는 것보다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는 곳에 두는게 낫지 않을까' 하는 이성적인 생각보다 '이 멋진 경치를 앞에 두고 평생 기억에 남을 순간이 될 수 있는 시간을 오랫동안 편안하게 앉아서 만끽하라'는 감성적인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몇 시간동안 완만한 길을 걸어내려오다보니 나무가 많아지고 날씨가 포근해졌다. 모퉁이를 지나자 보이는 에메랄드 빛 작은 호수가 보석처럼 눈에 띄었다.


한여름에도 높은 봉우리에서 눈이 녹은 물이 절벽을 타고 폭포가 되어 떨어졌다.


산에서는 날씨가 변화무쌍하다는 것은 익히 들어왔지만 내리쬐던 햇살이 순식간에 구름에 가려진다.


째르마트로 돌아갈 산악열차가 다니는 역에 거의 다다를 때쯤 저 아래 째르마트가 보이기 시작했다.



첫번째 알프스 트래킹은 무난하게 끝이 났다. 비록 흐린 날씨 때문에 기대했던 마터호른은 볼 수 없었지만 내일은 날씨가 좋아질지 모르니 기대를 접지 않았다. 


원래 산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특별히 마터호른이 멋진 산이기 때문도 아니다. 바다가 주는 매력과 산이 주는 매력은 완전히 다른 매력이었다.(고양이과 개의 차이처럼?) 여행하면서 자꾸 고양이가 좋아졌던 것처럼 이젠 산이 좋아지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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