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아레이에서 나이든 주인 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나이 든 개 '세이지'와 작별하고 뉴질랜드 여행의 출발점이었던 오클랜드로 돌아왔다. 오클랜드는 살기 좋은 도시이며, 바다와 숲과 공원이 어우러진 멋진 도시라는 생각이지만 여행지로서 인상적이거나 매력적인 도시는 아니었다.(흔한 영어권 국가의 대도시일뿐이다.) 그래도 보름정도 뉴질랜드에 머무르는 동안 여러번 거치다보니 어느새 익숙해져서 황아레이에서 출발한 시외버스가 오클랜드에 도착했을 때는 현지인들과 섞여 자연스레 도심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특정 나라나 도시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 그 나라의 시스템에 적응이 되면서 한결 편해진다. 그 익숙함을 도시의 매력으로 착각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내일 이른 아침에 시드니로 가는 비행기를 타야하기 때문에 오후에 오클랜드에 도착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숙소 근처에서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저녁이 지나고 밤이 깊어질 무렵, 숙소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비상벨이 울렸다. 부분적으로 울리는게 아니라 숙소로 쓰이는 6층 건물 전체에 엄청나게 큰 소리로 울렸다. 숙소 매니저나 직원들이 방마다 돌아다니며 밖으로 나가라고 안내하는 통에 조금은 걱정스럽게 밖으로 대피했다. 밖에 나가니 소방차가 들어오고 이내 소방관들이 바쁘게 숙소 건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오클랜드에서 묵었던 숙소 건물. 6층 건물의 꽤나 큰 호스텔이었다.


아마도 화재 비상벨이 울린 모양인데 밖에서 보니 연기도 불빛도 보이지 않아서 안심했다. 누군가 잘못 눌렀거나 오작동한 모양이었다. 겉으로 보기에 문제가 없어 보이고 화재가 발생했는지 확인조차 되지 않았음에도 모든 숙박객을 대피시켰다. 그리고 비상벨이 울리고 소방서에 신고가 된 이상에는 소방관들이 들어가서 이상이 없는지 건물 전체를 점검하고 확인한 후에야 다시 들어갈 수 있었다. 


우리나라는 어떤 절차로 진행되는지 잘 모르겠다. 초등학교 때 누군가 화재 비상벨을 건드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한번도 소방차가 출동한 기억은 없다. 먼저 선생님들이 진짜 화재인지 확인하고 소방서에 신고할지를 결정했나보다. 벌써 30년 전이니 지금은 우리나라의 화재경보 시스템도 당시보다는 훨씬 발전하고 체계화 되었으리라 생각하지만 아직도 우리는 안전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과 잘 짜여진 시스템의 힘보다는 소방관들의 희생과 노고에 기대는 면이 많은게 아쉽다.



숙박객들이 영문도 모른채 모두 나와 대기하고 있다.



소방관들의 점검이 끝나고 숙소로 들어갈 수 있게 되기까지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마침 그 날은 2012년의 마지막 날이었고 이미 11시가 넘은 시간이라 오클랜드에서 새해맞이 카운트다운과 불꽃놀이를 볼 수 있다는 곳으로 가보기로 했다. 도심 한가운데 사람들이 잔뜩 몰려 있는 곳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고층빌딩 사이로 하늘을 쳐다보며 불꽃놀이가 시작되길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사람들이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10부터 1까지 세고 나서 폭죽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솟아올랐는데 불꽃이 이 부근이 아니라 많이 멀어보였다. 그리고, 터지는 불꽃의 숫자나 크기가 한강 불꽃축제에 익숙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많이 부실해보일 정도였다. (짐작컨대 불꽃은 오클랜드의 스카이타워 부근에서 터뜨리는게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불꽃이 크건 작건, 화려하거 소박하건 상관없이 사람들은 새해를 맞아 주위 사람들과 축하하고 그 시간을 마음껏 즐겼다. 생각해보니 그랬다. 친지들과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걸 기념하는데 불꽃이 얼마나 화려한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렇게 태어나서 처음으로 남반구에서 한여름의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맞았다. (위에 찍힌 사진에 털이 달린 두툼한 패딩을 입은 사람의 뒷모습이 찍혔지만 분명히 뉴질랜드의 한여름이었고 대부분은 얇은 옷차림이었다.) 다음날 새벽에 시드니로 가는 비행기를 타야하기에 숙소로 돌아와 잠을 청했지만 밤새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들어야했다. 숙소 근처의 bar나 술집에서는 젊은 여행자들이 밤새 새해 맞이 파티를 즐기는 모양이었는데 술집에서 나오는 신나는 음악들 중에서 30분에 한번씩은 '강남스타일'이 나왔다.


아이러니하게도 차분하고 조용했던 뉴질랜드에서의 마지막 날을 소란스러운 가운데 뜬 눈으로 지새고 마지막 여행지 호주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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