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의 여러 도시들은 각종 매체들이 발표하는 '세계에서 살기 좋은 도시'에서 매년 높은 순위에 오른다. 호주의 동남부 해안가 도시들은 좋은 기후와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으며, 그곳 주민들은 높은 소득을 자랑한다. 그 중에서 인구 500만의 시드니는 호주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도시다. 세계 3대 미항으로 알려진 이 도시는 나폴리처럼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도시도 아니고, 히우 지 자네이루처럼 남미의 독특한 매력을 가진 도시도 아니지만 어린시절 가장 가보고 싶은 곳 중에 하나였다. 그렇지만 나이가 들어서 방문한 시드니는 옛날 상상하던 그 시드니는 아니었다. 시드니의 도심은 관광시설과 고층건물이 들어찬 대도시였지만 그뿐이었다. 


항구도시에 고층건물과 각종 놀이시설들이 들어찬 점에서 홍콩과 매우 비슷한 인상을 받았지만, 홍콩만큼 다양한 문화가 뒤섞여 특유의 매력을 발산하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시드니가 여행하기에 좋지 않다거나 여행지로서 매력이 아예 없다는 것은 아니다. 한때 나도 도시의 명소 구석구석을 찾아다니고 구경하는 것을 좋아하던 때가 있었다. 단지 여행을 다니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내가 좋아하는 여행 스타일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이제는 이런 대도시에 흥미가 없어진 것 뿐이다. 시드니는 어린이들을 동반한 가족여행지로는 나무랄 것이 없는 곳이다.


여러가지 놀이시설을 묶어 패키지로 판매하고 있는데 이런 시설에 흥미가 없는 사람에게는 비싸게 느껴진다.



시드니는 복잡한 해안선과 여러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보니 각종 페리나 여객선들이 쉴새없이 드나든다.


크루즈선 모양의 고급 리조트



항구 해안선을 따라 가게, 주택, 고급 리조트를 구경하며 하버 브릿지로 한참을 걸었다. 오페라하우스와 더불어 시드니의 유명한 랜드마크인 시드니 하버 브리지는 세계에서 4번째로 긴 아치교라고 한다. 1923년 착공하여 1932년 개통하였으며 대공황에서 노동자 계층을 구제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매년 1월 1일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새해맞이 불꽃놀이가 벌어진다고 한다. (위키백과 참조)  호주정부는 이 커다랗고 오래된 다리를 관광자원으로 잘 활용하고 있었다.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철골로 된 다리 아치부분을 걸어서 올라갈 수 있는 투어였다. 안전을 위해서 안전띠로 다리 난간과 여행자의 허리를 고리가 달린 줄로 연결하고 있었지만 아래에서 봐도 아찔할 정도였다. 다리의 역사와 아찔한 액티비티를 동시에 즐길 수 있는 투어로 인기가 높은 것 같았지만 높은 물가로 가격이 꽤 비싼데다 고소공포까지 있어서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블로그에 여러 번 했던 이야기했었지만 우리나라 정부는 어째서 우리 문화재 입장료를 자국인에게 더 높게 책정하는지, 우리가 외국 관광객을 유치할 수 있는 수단이 정녕 할인 쇼핑 밖에 없는지 심각한 고민이 필요하다. 여러나라들이 다양한 관광상품을 개발하고, 관광객을 위한 다양한 시스템을 마련하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이런 부분이 매우 약하다. 이런 관광정책을 마련하는 사람들이 정작 책과 글이 아니라 발로 하는 여행을 해 본 적이 있는지, 외유성 해외여행이나 연수가 아니라 본인들이 여행자가 되어 여행을 해 본 경험이 있는지 궁금하다. 얼마전 인터넷 포털에서 '진짜 광광을 배우기 위해 한류관광공무원을 그만두고 세계여행을 떠난 윤지민씨 인터뷰!' 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기사가 아니라 인터넷 까페글이 메인 페이지에 뜬 것이다.) 글의 내용은 여기서 소개할 필요가 없을 것 같고, 젊은 안정된 직장을 가졌던 윤지민씨가 세계여행을 떠나게 된 사정이 무엇인지 등등은 모두 제쳐놓더라도 이런 사람이 몸소 느끼고 경험한 것들이 우리나라의 관광정책에도 소중하게 활용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책상머리에서 고민한다고 좋은 정책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서민으로 살아본적이 없는 고위층에게 서민들을 위한 정책을 기대할 수 없고, 현장에 나가지 않는 영업사원에게 좋은 영업실적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글에 달린 댓글은 너무나도 내 예상을 벗어나 있었다. 공무원을 그만두고 세계여행을 하려면 금수저만 가능하다며 비꼬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내가 여행중에 만난 장기여행자들 중에 금수저로 보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소위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는 사람이 하루 만원도 안되는 도미토리 침대에서 자고, 우리 버스요금보다 싼 길거리 음식을 먹으며 행복을 느끼긴 어렵다. 그런 사람이 이런 여행을 한다면 오히려 멋지고 훌륭한 일이다. 그 사람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환경을 벗어나 다른 시야로 더 넓은 세상을 볼 수 있는 훌륭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오래된 공장을 레스토랑, 펍, 가게 등으로 재개발한 듯하다. 세계의 여러 도시중에는 이렇게 건물과 역사를 보존하면서도 훌륭하게 재개발한 예가 무척이나 많다.

무조건 싹 밀어버리고 거대한 고층건물로 바꿔버리는 우리의 재개발 방식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이 좁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역사와 전통의 단절로 인해 그 이상의 컨텐츠를 만들어 낼 수가 없다.




하버 브리지 투어를 하는 사람들이 아치 꼭대기에 아주 조그맣게 보였다. 나처럼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은 아예 할 생각도 말아야겠다.






드디어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에 도착했다. 세계적인 명소답게 오페라하우스 주변은 각종 펍과 레스토랑이 성업하고 있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오페라하우스 주변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오페라하우스는 예른 웃손이라는 이름없는 덴마크 건축가가 설계했다고 한다. 1957년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설계공모에서 설계 기준에도 맞지 않는 예비 드로잉보다 조금 나은 수준의 설계를 제출했음에도 그의 천재성에 감탄한 심사위원들의 지원으로 당선되었다. 하지만 디자인을 현실에 옮겨 놓기 위한 능력이 부족했으며 공사비용 초과로 쫓겨나듯 호주를 떠나야했다. 그리고 1973년 오페라하우스의 완공식에도 초대받지 못했다. 이 건물의 디자인은 예른 웃손이 오렌지 껍질을 벗기는 것에서 착안했다고 하며, 14개의 건물 외형을 모두 합하면 구의 형상이 된다고 한다. 이 건물은 200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위키백과 정리) 위키백과를 보기 전까지 이 오페라하우스의 외형이 조개껍질을 형상화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인터넷의 다른 자료들에는 요트의 돛과 조가비 껍질을 형상화한 것이라고도 한다.


현대 건축물 중에서 가장 혁신적이고 뛰어난 건축물 중 하나라지만 완공된지 채 35년이 안되는 건물이 어떻게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는지 의아했다. 물론 이 건물이 가진 건축학적 가치를 내가 모두 이해할 수는 없지만 한편으로는 유네스코가 역사가 짧아 전통적인 문화유산이 없는 호주라는 나라에 뭔가 하나 마련해준 듯한 느낌이 든다. 작년 한국인의 대규모 징용과 비인간적인 학대가 있었던 일본의 군함도를 비롯한 전쟁 기반 시설들이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이라는 명목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것을 보고나서 유네스코 역시 강대국들의 힘의 논리에 지배되는 기관일뿐이라는 생각이 더욱 강해졌다. 그리고 나서는 여행을 할때 만나게 되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라는 간판에 그다지 가치를 두지 않게 되었다.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내부에서 찍은 사진이 한장도 없었다. 떠오르는 기억으로 딱히 특징적인 점은 없었다. 오페라 하우스 내부 공연장에 들어가는 입장료가 비싸서 홀까지만 가고 내부 공연장은 들어가지 않은 것 같다.


글을 쓰다보니 유독 시드니에서는 돈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것 같은데 변명을 하자면, 그건 이곳을 여행한 시점, 장기 여행자로서 어쩔 수 없는 선택에 원인이 있다. 장기 여행자로서의 여행은 생활의 일부로 수많은 선택을 해야한다. 어느 숙소가 가격대비 나은지, 어떤 교통편을 이용해야 될지, 내가 여기서 지불하는 가격이 어느 정도 가치를 가지는지를 매일매일 결정해야 한다. 단기 여행이라면 비싼 비행기요금을 들여 어렵게 휴가를 내고 왔으니 일단 하고싶은 것은 모두 해보는게 낫다. 예상보다 더 들어간 비용은 휴가를 마치고 허리띠를 졸라매거나 일을 더 하면 된다. 하지만, 장기 여행자가 전체적인 계획에서 자꾸 벗어나는 지출을 만들면 결국 예정보다 일찍 귀국하는 수 밖에 없다. 극단적으로 돈을 아껴서 오랫동안 여행했음을 자랑하는 여행자들을 좋아하지 않고, 그게 여행자로서 올바르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지출을 계획하고 소비를 줄여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여행을 노는 것이나 쉬는 것과 동일어로 생각하기도 하는데 (물론 그런 여행도 있지만) 여행은, 특히 장기여행은 일상생활의 밀도 높은 축약이다. 일상생활에서 하루에 10번의 선택을 해야 한다면, 여행에서는 그보다 몇 배나 더 많은 선택을 해야 한다. 그로인해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고 일상에서 얼마나 편하게 살았는지도 돌이켜보게 된다. 그렇지만 일상에서는 하기 어려운 경험과 감동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여행을 한다.


시드니는 물가가 높아서 장기 여행자로서 지출을 함부로 할 수 없는 곳인데다 나에게는 딱히 매력적인 곳이 아니었기 때문에 주머니가 쉽게 열리지 않았다. 호주보다 훨씬 물가가 비싼 스위스에서는 내가 하고 싶고, 보고 싶은 것들이 있으니 주머니가 열릴 수 밖에 없다.



무엇을 형상화했는지 모르겠지만 오렌지껍질보다는 확실히 조개나 가리비쪽이 더 닮은 것 같다.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는 멀리서 보는게 아름답다. 가까이서 보니 그저 독특하게 생긴 건축물일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을 보며 방금 든 생각, 오페라 하우스 근처 펍이나 레스토랑에 있던 많은 사람들 중 상당수는 멀리 보이는 커다란 크루즈에서 내린 사람들 아닐까.


해가 기울어 어스름해질 무렵 오페라 하우스를 떠났다. 새벽에 일어나 뉴질랜드에서 호주에 도착했고, 오후에는 내내 걸어다녀 피곤했음에도 그 어두컴컴하고 지저분한 숙소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숙소에 가서 저녁까지 만들어 먹긴 했지만 지금 생각해도 그 더러운 주방에서 음식을 해야 했던 기억은 하고 싶지가 않다. 워킹 홀리데이 프로그램으로 호주에 와서 일자리를 알아보던 친구들, 어학연수를 온 듯한 친구들, 무슨 이유로 온건지 아리송한, 낮에는 자고 밤에는 외출하는 친구들, 그 외 여러 사람들... 서로에게 인사를 하지도, 아는체 하지도 않으며, 오기 전에 상상한 것과 다른 환경에 조금은 좌절한 듯 생기를 잃은 눈동자... 내가 그 숙소를 회상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이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하랬지만 그러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인생 최고조에 오른 파릇한 젊음들이 그곳에서 당황해하고 난감해하고 있었다. 그 친구들과 제대로 몇마디 나누지도 못하고 이틀 뒤 숙소를 떠난 못난 사람이지만 다음에 그런 상황에서는 조금 달라져 있을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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