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은 프라하 성에 가기 위해 버스를 탔다. 버스는 프라하 시내 여기저기를 가로지른다음, 성이 있는 언덕을 빙 돌아 블타바 강에서 보이는 성의 뒷쪽에 내려주었다. 


거대한 성답게 내부는 화려하진 않지만 잘꾸며진 정원과 커다란 나무들이 가득했다. 오른쪽은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작은 미술관이다.



이쪽은 성 외곽이라서 단체나 패키지 여행객들은 많이 오지 않는 것 같았다. 한적한 정원을 산책하듯 걸을 수 있어서 좋았다.


나무들로 빽빽한 깊은 해자 건너편으로 성 비토 대성당이 보인다.




조금 생뚱맞게도 정원내에 맹금류를 기르는 곳이 있었다. 올빼미나 부엉이부터 독수리, 매까지 10여 마리를 기르고 있었다. 어떤 쓰임이 있는지 모른채 그냥 신기하게 사진만 찍었다.




외성에서 해자를 건너 내성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푸른색 경비복을 입은 군인이 지키고 있다. 옛날 체코를 지배했던 왕들의 거주지였으며 지금은 성의 일부가 대통령궁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아무래도 일반적인 관광지보다 경비에 신경을 더 쓰는 것 같다. 한적했던 외성과는 다르게 내성에는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아침부터 일정을 시작했지만 정원을 거닐고 미술관을 보고 하느라 벌써 점심시간이 되었다. 프라하 성 내부에 레스토랑이 있기 때문에 샐러드와 샌드위치로 끼니를 해결 할 수 있었다. 가격은 외부 레스토랑보다 조금 비싸긴 하지만 유럽 물가치고는 오히려 저렴한 편이었다.


체코의 가장 크고 중요한 성당이라는 성 비토 대성당 앞에 섰다. 고딕양식의 뾰족한 첨탑과 거대한 크기보다 내부의 스테인드 글라스가 무척 아름다웠던 것으로 기억난다.










성 비토 대성당을 나와서 조금 걷다보면 '황금소로'라고 이름지어진 작고 낮은 집들이 모여있는 거리가 나온다. 이 집들은 16세기에 궁에서 일하는 하인, 시종들의 거주지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걸 알고나서 보니 성당과 궁전의 거대한 크기와 비교되어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그 뒤로 연금술사들이 살았다고 해서 황금소로라는 이름이 지어졌는데 프란쯔 카프카가 머물며 소설을 썼던 곳이어서 더욱 유명해졌다. 지금은 기념품점이나 그 때 여기서 살았던 사람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전시장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동화같이 아담하고 예쁜 집들이 모인 거리지만 실상은 전혀 동화같은 삶을 살 수 없었던 사람들의 거리


황금소로를 지나면 달리보르카라는 탑과 지하감옥이 나온다. 지하 몇 층으로 이뤄진 감옥에는 고문실과 햇볕이라고는 들지 않는 작은 감옥들이 빼곡하다. 정말 같은 사람들끼리 어떻게 이런 고문을 했을까 싶은 고문도구들이 전시되어 있다. 중학교 수학여행때 독립기념관에서 본 일본인들이 우리나라 독립투사들에게 행했던 고문이 생각나서 기분이 언짢아졌다. 그다지 사진을 찍고 싶지 않았는지 남은 사진도 없다.


달리보르카를 지나면 성의 후문으로 나가기 전에 프라하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곳이 나온다. 구도심이 잘 보존된 유럽도시 대부분이 그러하듯 프라하의 지붕도 모두 붉은 색이다. 그리고, 프라하 주변에는 산이 없어서 지평선까지 집들 이어져있었다.




단체 관광을 왔는지, 동창들끼리 여행이라도 왔는지 비슷한 나이대에 똑같은 백팩을 맨 아주머니들 포즈도 비슷하게 프라하 시내를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이 재밌었다.



해가 제법 기울었을 때에 시내쪽으로 난 출입구를 통해 밖으로 나왔다. 성이 있는 언덕에서 시내로 내려가는 계단에는 거리의 악사들이 저녁 공연을 준비하러 하나둘 자리를 펴기 시작했다.




프라하 성을 내려와서 블타바 강변을 따라 카를교쪽으로 걸었다. 카를교는 14세기 신성로마제국 황제이며 체코의 왕이었던 카를 4세가 놓은 다리로 무척 멋있으면서도 독특하게 생겼다. 다리 위에는 악사나 미술가, 공연가들과 관광객들이 많아서 분위기 있게 걸을 수는 없다. 인터넷에서 본 안개에 쌓인 카를교 사진을 찍은 사람들은 이른 새벽에 일어나는 수고를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카를교에는 성인들의 상이 많은데 블로그를 하면서 찾아보니 300년 동안 30개의 성인상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 중에 조각상 밑에 손을 대는 사람들이 유독 많았던 성인상이 있었는데 만지면 행운이 온다고 하는 성 요한 네포무크 성인의 상이라고 한다.


이런 역사적인 다리에서 찍었던 사진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다. 빠져 있는줄도 몰랐던 사진들이 블로그에 여행을 정리하면서야 알게되어서 황당하게 만든다.



체코의 지하철은 비교적 훌륭하다. 유럽의 지하철(특히 런던이나 파리, 모스크바 등등)은 만든지 오래된 경우가 많아서 지저분하거나 심하게 낡은 것들이 많이 있는데 체코의 지하철은 깨끗한 편이었다. 하지만 체코 지하철의 문제는 현지인이 아니면 살 수 없는 티켓 자판기에 있었다.


하루 일정을 마치고 지하철을 이용해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첫날 현지인 아저씨가 알려준대로 가장 싼 표를 사서 들어갔다. 잠시 후, 덩치 큰 경찰이 오더니 표를 보자고 했다. 뭔가 이상하다 싶었지만 표를 꺼내 보여주니 경찰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이 표는 성인용이 아니니 벌금을 내야한다고 했다. 현지인이 이거면 된다고 했는데, 미안하다 그럼 표를 다시 사서 오겠다, 억울하다 벌금을 깎아주라까지 해봤지만 전혀 통하지 않았다. 법이 그렇다는데 어쩌겠는가. 정확히 생각나진 않았지만 요금의 수십배에 달하는 벌금(몇 만원 정도)을 내야했다. 


돈이 아깝기도 했지만 경찰은 두둑한 뒷돈을 챙겼을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속이 쓰렸고, 며칠간 좋은 이미지였던 프라하의 인상을 갉아먹은게 더욱 속이 쓰렸다. 그 뒤에 인터넷에 찾아보니 나처럼 당하는 사람들이 꽤 많은 듯 했다. 현지인들은 티켓 검사를 하지 않는데 유독 여행자들을 대상으로 검사하는 경우가 많으며, 나처럼 자판기 사용법을 몰라 잘못 사는 사람들도 많은데 자판기를 바꾸거나 고치지 않는 것 같았다.


여행한지 5달째. 그동안 여행의 댓가로 현지에 내야하는 것들은 속여서는 안된다는 생각으로 여행해왔는데 이런 일이 생기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미리 철저히 알아보지 않은 내 탓이 먼저지만 속기 좋게 함정을 판 듯한 쪽도 나쁘다. 일단 한쪽이 손해를 보기 시작하면 손해 본 쪽도 속이려 하기 마련이다. 속이려면 머리 아프게 방법을 궁리하고 편법을 찾아야 한다. 제발 나를 머리 아프게 하지 말아줬으면...

이탈리아에서 갑자기 여행 경로를 바꾼 뒤로 경로를 확실히 결정하지 못해 고민이었다. 빈에서 오스트리아를 더 둘러보다 스위스로 넘어갈지, 체코와 독일 남부를 거쳐 스위스로 넘어갈지 선택하기 어려웠다. 거리는 오스트리아 서쪽을 통해 스위스로 넘어가는게 훨씬 가까웠으나 결과적으로는 체코를 거쳐 빙둘러서 스위스로 가기로 가기로 한 이유는 체코의 맥주와 음식이 맛있고 물가가 저렴하다는 것이었다. 인터넷에서 찾아 본 오스트리아의 도시들과 알프스 지방은 무척 아름다웠으나 그 아쉬움은 스위스에서 풀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오전에 빈에서 탄 기차는 오후 느지막하게 프라하에 도착했다. 체코하면 생각나는 단어가 '동유럽', '프라하의 봄', '공산국가' 등이라 조금은 어둑하고 딱딱한 분위기를 예상했지만 여느 유럽의 나라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다만, 기차역에 설치된 지하철표 판매기는 구소련시절에 만들어진 듯한 낡은 철제 박스였고, 영어가 지원되지 않아서 사용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판매기 앞에서 한참 헤매고 버벅대고 있었는데 지나가던 아저씨가 가장 저렴한 티켓을 사면 된다고 알려줬다. 경험상으론 가장 저렴한 티켓은 노약자나 미성년자인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상하다 하면서도 현지 사람이 알려준게 맞겠지 싶어 저렴한 티켓을 샀다. 그게 나중에 몇 십배의 손해를 끼치게 될 줄은 그때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예약한 숙소에 짐을 풀고나니 저녁시간이 다 되었기 때문에 론리플래닛에서 봐둔 레스토랑을 찾아나섰다. 이 레스토랑은 구시가로 들어가기 직전 좁은 골목길에 있어서 지도를 보고도 찾기가 어려웠다. 다시 프라하에 간다면 꼭 다시 가고 싶은 곳이지만 찾을 수 있을지 자신은 없다. 프라하에 머물렀던 4박 5일동안 이 레스토랑에만 3번은 갔던 것 같다.


프라하를 대표하는 음식은 흔히 독일 음식으로 잘 알려진 돼지 뒷다리를 구워서 만든 슈바인 학센과 헝가리 음식인 굴라쉬였다. 아무래도 국경을 접하고 있다보니 주변 국가에서도 같은 요리를 즐기는 것 같다.


학센의 크기는 엄청났다. 큼직한 다리뼈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양이 무척이나 많아서 식성이 좋은 성인 남성이 먹기에 충분한 양이었다. 게다가 무척 맛있어서 구워진 껍질은 쫄깃하고 살은 매우 부드러웠다. 개인적으로는 며칠 후, 뮌헨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맥주집인 호프브로이하우스에서 먹은 슈바인 학센보다 훨씬 좋았다.


슈바인 학센 뒤에 있는 맥주는 체코의 유명한 흑맥주인 코젤이다. 원래 기네스 같은 흑맥주를 무척 좋아하는데 기네스 같이 묵직하지 않고 쌉쌀하지만 단맛이 같이 느껴져서 흑맥주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가볍게 마시기 좋았다. 게다가 가격이 무척 저렴해서 500cc 한 잔이 1500원 정도였다.


위의 사진은 이 레스토랑에서 먹은 굴라쉬다. 굴라쉬는 소고기와 야채로 만든 스튜인데 이 곳에서는 속을 파낸 커다란 빵에 담겨서 나왔다. 굴라쉬도 맛있었으나 나는 슈바인 학센이 훨씬 인상 깊었다. 이렇게 푸짐한 음식에 흑맥주 서너잔까지 일행과 둘이서 배부르게 먹었지만 우리나라 돈으로 2만원이 채 되지 않았다. 이탈리아에서는 조금 비싼 레스토랑의 파스타 1인분 가격밖에 안됐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해가 지는 프라하 성과 카를교를 보며 블타바 강변을 걸었다. 여행이 길어질수록 어떤 유명한 명소에서 훌륭한 예술품이나 역사적인 유물을 보는 것보다 이런 시간들이 더 즐겁게 느껴지고 오랫동안 기억이 남았다.


이튿날부터 프라하 시내 관광을 시작했다. 숙소에서 구시가쪽으로 걸어가다보니 고풍스럽게 생겼지만 건물 외벽이 시커멓고 군데군데 파인 흔적이 있는 건물이 나타났다. 이 곳이 세계 10대 박물관에 속한다는 프라하 국립 박물관이었다. 그리고, 기둥의 패인 흔적은 1968년 프라하의 봄 당시 탄환 흔적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유명한 박물관이 하필이면 보수공사에 들어가 박물관으로는 문을 닫았고 저녁에 박물관 홀에서 소규모 클래식 공연만 한다고 했다. 여행은 복불복이라 어쩔 수 없는 일이 많이 생기지만 어째 유럽에 들어서서는 자꾸 빈번해지는 것 같다. 아쉬움에 저녁에 있는 클래식 공연만 예매를 하고 돌아섰다.

프라하 국립 박물관 외벽에 남은 탄환흔적



박물관 앞으로는 프라하의 또다른 명소 바츨라프 광장이 있다. 이 광장의 이름인 바츨라프는 10세기 나라를 구한 체코의 구국영웅이다. 우리나라 광화문 광장에 이순신 장군 동상이 있듯이 바츨라프 광장에는 바츨라프의 동상이 있다. 동상 앞에는 철조망과 십자가, 옷가지들로 만들어진, 사회주의 시절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는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바츨라프 광장에서 바라 본 프라하 국립 박물관


바츨라프 광장의 까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보니 멀리 프라하의 또다른 명소인 화약탑이 보였다.


바츨라프 광장의 주변으로 까페나 레스토랑 그리고 옷가게들이 있는데, 광장 한쪽에서 길거리 농구대회가 한창이었다. 동구권 국가들의 농구실력이야 유명하지만 길거리 농구인들의 실력도 굉장했다. 게다가 이들의 키와 덩치가 아마추어 농구선수치고는 정말 컸다.


점심땐 어제 저녁에 갔던 그 레스토랑에 다시 갔다. 어지간해서는 하루도 지나지 않아 다시 가는 경우는 없을텐데 당시에 정말 인상 깊었나보다. 점심때 주문한 메뉴는 스테이크와 감자튀김 그리고 맥주였다. 이 두 메뉴도 썩 나쁘지 않았고 다른 레스토랑에 비해서 가격도 저렴했다.(스테이크가 1만원대였던...)



두번째가 되니 레스토랑에 대해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가게는 대낮에도 어두침침했고 내부 인테리어는 소박하고 낡았지만 깨끗했다. 가게 안은 사용한지 수십년은 지났음직한 골동품들로 채워져 있었다. 우리와는 생활문화가 많이 달라서 무슨 용도로 사용했을지 도저히 상상이 안되는 물건들도 종종 있었다.



만족스러운 점심식사를 하고 밖으로 나오니


중세시대에는 프라하 성문이었으며 17세기에 연금술사들의 창고와 연구실로 사용되면서 화약탑(Powder Tower)라는 재미있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프라하 구시가 광장에는 항상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다. 그 중에서도 벽의 대형 시계가 매시 정각을 알릴 때는 어디서 나오는지 많은 사람들이 그 시계 앞에 모여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는다. 이때는 프라하의 소매치기들이 시계를 보느라 정신없는 여행자들의 가방이나 옷에서 지갑을 훔치기 가장 좋은 시간이므로 주의해야 한다.



저녁이 되어 낮에 예매해 둔 프라하 국립 박물관에서 하는 연주회에 왔다. 저녁시간인데 프라하의 거리는 아직 훤했다. 유럽에서 체코는 중간쯤 위치한 나라지만 우리나라보다는 훨씬 북쪽에 있기 때문에 여름에는 해가 더 늦게 지는 것 같다.



전시물이 모두 치워지고 관림하는 사람들이 없는 박물관은 또 다른 느낌이었다. 연주가들은 박물관 계단의 중간 홀에서 연주를 하고 청중들은 계단에 앉아 연주를 듣는다.


청주이 많지 않은 작은 연주회였지만 사람들에게 흔히 잘 알려진 비발디나 모짜르트의 현악곡을 섞어서 연주하기 때문에 지루하지 않았고, 공연장은 아니지만 소리가 생각보다 또렷하게 잘 들렸다. 곡이 끝날 때마다 몇 안되는 청중들이 아낌없이 박수를 쳤다. 개인적으로는 빈의 슈테판 성당에서 본 연주회보다 좋았다.


프라하... 처음엔 큰 기대가 없었는데 점점 프라하만의 매력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빈에서 묵었던 숙소는 개인이 자기 집을 빌려주는 곳이었다. 숙소 예약 사이트로 유명한 부킹닷컴이나 아고다에서 보면 아파트먼트로 검색되는 숙소들이 대부분 이런 곳이다. 그렇다고 주인과 같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집주인이 장기 휴가나 개인 사정으로 집을 사용하지 못할 때 혹은 전문적으로 대여를 목적으로 전체를 빌려주는 것이다. 집도 무척 다양해서 한 가족이 모두 묵을 수 있는 방과 욕실이 여럿되는 집에서부터 작은 오피스텔 같은 곳까지 있다.


이런 집을 예약한 것은 빈이 처음이었는데 체크아웃할 때 청소비용을 따로 내야한다거나 주인과 약속 시간을 정해서 그 시간에 체크인과 체크아웃을 해야 한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상당히 이점이 있어서 이후 유럽과 남미를 여행하면서 종종 이용했다. 빈에서 체크인을 해주었던 사람은 여기저기에 잔뜩 피어싱과 문신을 한 집주인의 20대 딸이었다. 첫인상은 놀람, 어색함 그차제였으나 알고보니 무척 친절하고 예의바른 사람이었다.


이런 집의 장점이 더욱 도드라지는 곳은 물가가 비싼 유럽이다. 집에 세탁기며, 주방, 식기 등이 모두 갖춰져 있기 때문에 장기여행자들은 밀린 빨래를 해치울 수 있고 지겨운 현지 음식에 물렸을 때는 식사를 만들어서 먹을 수 있어서 식비를 무척 절약할 수 있다.(물가가 비싸기로 유명한 스위스라도 마트에서 식재료를 사는 비용은 우리나라보다 오히려 저렴했다)


물론 유럽이나 남미에는 배낭여행자들을 위한 게스트하우스가 많고 이런 게스트하우스에는 대부분 주방과 식기가 갖춰져 있다. 하지만 유럽은 게스트하우스조차도 가격이 만만치 않은데다 세계 각지에서 온 여행자들과 이층 침대를 쓰는데 지쳤다면 이런 곳도 괜찮은 선택이다. 게다가 여행중에 만난 마음 맞는 동행들과 비용을 나눈다면 크게 부담스럽지도 않을 것이다.

 

이튿날 빈 관광의 출발은 슈테판 대성당이었다. 신성로마제국의 수도였던 빈의 상징적인 건축물 첫손에 꼽는 곳이 구시가의 중심에 있는 슈테판 대성당이다. 원래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물이었다고 하나 화재로 소실되어 14세기에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고딕양식으로 다시 지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이탈리아에서 보던 성당 양식과는 확연히 다르다. 뾰족하게 하늘로 솟은 첨탑과 직선들로 이루어진 건물이 고딕양식의 특징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오스트리아의 가장 큰 고딕양식 건물이라더니 첨탑의 높이가 꽤 높아보인다.

글을 쓰면서 찾아보니 137m란다. 30층 건물만큼 높다.


성당 내부의 파이프 오르간. 한 대가 아닌듯 성당 내부 여기저기에 파이프 오르간이 많았다.


엄숙하고 조용한 분위기의 성당 내부.

개인적으로 종교와 관련된 건물안의 조용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좋아한다. 사람이 고리타분해서...




이탈리아에서 봐왔던 로마네스크나 르네상스 양식의 성당과는 건물의 외벽뿐만 아니라 내부의 기둥과 벽면의 모양이 많이 달랐다.



어느새 슈테판 광장에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빈에서 제일 골치아픈 것은 음악회 티켓을 팔려는 삐끼들을 뿌리치는 것이다. 음악의 도시답게 빈에서는 매일 많은 클래식 연주회가 있는데 현악 4중주 같은 간소한 연주부터 대규모 오케스트라나 오페라까지 매우 다양하다. 이런 연주회가 많다보니 관광객들에게 소개하고 표를 팔려는 사람들도 무척이나 많다. 광장에 서 있으면 연주회 팜플렛을 끼운 책자를 보여주며 여기저기서 호객을 한다.


빈에 왔으니 연주회에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가장 저렴한 편인 실내악 공연(게다가 공연장이 스테판 성당 내부라니) 표를 샀다. 대형 오케스트라나 오페라 공연은 비싸지만 현악 4중주 형태의 소규모 공연은 그리 비싸지 않았다. 기억으로는 10유로 정도 했던 것 같다.


슈테판 광장 근처의 작은 꽃집


오후에는 벨베데레 궁전에 갔다. 이 곳은 벨베데레라는 건축 양식이 유명해지게 된 곳이며, 대중적으로 매우 인기있는 화가 중 1명인 클림트의 작품이 여럿 전시되어 있는 곳이다.


정원을 사이에 두고 저 아래의 건물과 위의 건물이 마주보게 되어 있다. 이런 구조로 지어진 건물이 벨베데레라고...


벨베데레 궁전의 오스트리아 미술관에는 클림트의 작품 중에서도 유명한 '키스'와 '유디트'를 비롯해 여러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하지만 난 클림트의 그림을 보고도 별다른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예전 유명 미술평론가의 클림트 그림에 대한 해설서도 보고 인터넷에서 찾아보기도 했지만 나에게는 이 사람과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별로 없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나에게 미술을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해서겠지만 그런 능력이 부족한 사람에게조차 어떤 느낌이나 감정을 줄 수 있으면 좋은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평소에도 전문가에게 인정받는 어렵고 난해한 글보다 쉽게 이해되면서 보통 사람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킬 수 있는 글이 좋은 글이라는 고집 때문인지 모르겠다. 하여튼, 클림트의 화려하고 눈부진 색책와 성적인 매력을 풍기는 인물들을 무덤덤하게 보다가 미술관을 나왔다.


저녁에는 다시 스테판 성당으로 가서 실내악 공연을 봤다. 여러 공연 프로그램 중에서 연주곡명을 보고 그나마 들어봤음직한 곡을 선택했음에도 공연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넓은 성당에서 연주되는 현악기의 음률은 그다지 또렷하게 들리지 않았고, 작은 규모에 비해 연주가와 청중 사이의 거리도 지나치게 멀었다.(성당이라는 특성상 어쩔 수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고색창연한 성당에서 연주회를 봤다는 일이 기념할만한 체험이었을뿐이었다.(개인적으로 유럽에서 본 두 번의 연주회 중에서 다음 목적지였던 프라하 박물관에서 봤던 공연이 무척 인상 깊었다.)


오스트리아에 오니 물보다 맥주가 싸졌다. 이탈리아에서는 커피와 와인이 제법 쌌는데 맥주는 그리 싸지 않았었다. 처음보는 맥주들을 종류별로 사서 매일 마셔보기로 했다.(하지만 빈에 머무르는 며칠 동안 마트에 있는 수백종의 맥주를 다 마셔보는건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맘껏 마시고 알딸딸하게 취할 수 해도 내일 출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만으로 참 행복했다.



볼로냐에서 두 번째 날은 페라리 박물관이 있는 모데나로 가려고 했다. 차라고는 경차도 없지만 멋진 차를 구경하는 것은 좋아하기 때문에 은근 기대를 하며 숙소를 나섰다. 버스를 타고 물어물어서 볼로냐에서 모데나로 가는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지만 하필이면 주말이라 모데나까지 가는 버스가 몇 번 다니지 않았다. 그나마 몇 대 있는 버스도 방금 떠났고 한참 뒤에 올 버스를 타고 가봐야 박물관이 문을 닫을때까지 제대로 구경할 수 있는 시간이 부족했다. 페라리 박물관에 대한 아쉬움을 깨끗이 비우고 숙소로 돌아와서 푹 쉬었다.


그 뒤로 볼로냐에서 하루를 더 머무르고 베네치아로 갔지만 한동안 슬럼프에 빠져버렸다. 베네치아는 두번째 방문이어서 그랬는지 돌아다닐 의욕도 없어서 숙소에서 뒹굴거리거나 동네 까페에서 커피를 시켜놓고 시간을 보냈다. 사실 베네치아에 온 이유도 여기가 교통의 요지여서 오스트리아나 크로아티아 등으로 가는 기차나 버스가 많기 때문이었다.


베네치아에서 딱 하루 시간을 내서 다녀온 곳은 베니스 영화제가 열리는 리도섬이었다. 베네치아 동남쪽에 있는 아주 길쭉한 이 섬은 생각보다 커서 목적지였던 해변으로 가려면 한참을 걸어야했다. 아름다운 베네치아의 해변을 상상하며 왔는데 부드럽긴 하지만 시커먼 모래에 바닷물도 그다지 맑지 않았고 가족단위의 피서객들이 주류였다. 영화제 기간이 아니라서 그냥 평범한 유럽의 피서지 느낌밖에 들지 않았다.


이렇게 볼로냐와 베니스에서는 컨디션 난조와 약간의 의욕상실로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고 이탈리아를 떠나게 되었다. 원해서 시작한 여행이지만 항상 의욕에 넘쳐서 다닐 수는 없는 일이다. 분위기가 달라지면 다시 의욕이 날거라는 생각을 가지고 100유로(당시 환율로 15만원)에 오스트리아 빈으로 가는 침대 열차에 올랐다.


아침 일찍 오스트리아 빈에 도착했다. 침대 열차는 버스보다는 훨씬 편했지만 아무래도 숙소에서 자는 것에는 비할 수 없었다. 멍한 상태에서 아침식사를 하고는 근대 유럽의 맹주였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쇤부른 궁전으로 향했다.


16세기부터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궁전이 있었던 이 곳에 지금과 같은 모습의 쇤부른 궁전을 지은 것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통치자이자 유일한 여성 군주인 마리아 테레지아였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세계 역사상 많지 않은 여성 군주이면서도 능력있는 군주였고 미모까지 갖춘 인물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어머니를 닮지 못하고 프랑스 혁명의 이유가 되어버린 사치스러운 '마리 앙뜨와네뜨'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쇤부른 궁전 내부 초상화나 당시 사용하던 갖가지 전시품들은 대부분 마리아 테레지아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하지만 신성로마제국이 많이 쇠락할 시기여서인지, 마리아 테레지아의 성격이 사치를 싫어했던지 궁전 내부가 베르사유 궁전처럼 호화롭거나 눈부시게 치장되어 있진 않았다.











쇤부른 궁전도 전형적인 벨베데레 건축 양식을 하고 있다. 사실 유럽을 여행하면서 여기저기 벨베데레란 말이 무척 많이 나왔다. 궁전에도 벨베데레라는 설명이 있었고(빈에는 벨베데레 궁전까지 있다.), 숙소나 호텔에도 이 말이 자주 쓰였다. 당시 궁금해서 찾아보니 정원을 사이에 두고 궁전이나 저택의 맞은 편 높은 쪽에 전망할 수 있는 건축물을 짓는 건축양식이라고 했다.



쇤부른 궁전을 둘러보고 벤치에 앉아 매점에서 산 맥주를 마셨다.(다들 그렇게 한다.) 오스트리아는 그리스나 이탈리아보다 훨씬 덜 더웠고 그래선지 기분도 나아졌다. 꽤 긴 시간 고대 그리스와 로마, 중세, 르네상스 시대의 유물들을 봐오다가 쇤부른 궁전에서 근대의 건축물이나 전시품을 보니 많이 다른 분위기라 새로운 기분으로 여행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피렌체에서 볼로냐로 방향을 잡은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피렌체의 왼쪽에는 기울어진 탑과 갈릴레오의 실험으로 유명한 피사가 있었고, 북쪽으로는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유명한 베로나 등이 있었지만 사람들에게 덜 알려진 곳, 덜 북적일 곳을 찾다보니 볼로냐로 방향을 잡게 되었다.


목적지를 정하고 나서 볼로냐에 대한 정보를 찾다보니 이 곳이 역사 깊은 대학의 도시라는 것,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가면 가장 흔한 메뉴중 하나인 볼로네제 스파게티의 본고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피렌체에서 기차를 타고 볼로냐 기차역에 내리면 남쪽으로는 성벽으로 둘러쌓인 구시가가 있고, 대부분의 관광지가 구시가를 중심으로 펼쳐져 있으나 피렌체에서 북적이는 사람들과 시끄럽고 시설이 좋지 않은 숙소에 힘들었기에 구시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숙소를 정했다.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하는 불편함은 버스를 타고 지나치며 보이는 것들에 재미를 갖는다면 그리 어려울 것도 없다.


구시가의 중심으로 향하는 도로, 멀리 중세시대에 지은 탑이 보인다.


볼로냐에서 발견한 난생처음보는 피자 자판기.


볼로냐는 구도심의 주요 길거리가 아케이드이다. 아케이드를 네이버에서 검색해 보면 '열주(列柱 : 줄지어 늘어선 기둥)에 의해 지탱되는 아치 또는 반원형의 천장 등을 연속적으로 가설한 구조물과 그것이 조성하는 개방된 통로공간' 이라고 나오는데 대부분 건물이 인도쪽으로 나와있고 건물의 1층은 아케이드로 되어 있다. 덕분에 뜨거운 햇살이나 비를 피해 다니기에는 안성맞춤이다. 볼로냐에 이런 아케이드가 생기게 된 이유가 재미있는데 대학의 도시인 볼로냐는 이탈리아 전역 혹은 전 유럽에서 유학생들이 몰려들었고 비싼 임대료로 인해 사람들이 다니는 인도 위로 집을 만들어 사용한 것이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


걸어도 걸어도 아케이드가 계속 이어진다. 다른 도시에서 볼 수 없었던 볼로냐만의 독특한 모습이다.




중세시대부터 만들어진 아케이드는 중간중간 보수된 곳도 있고 현대식으로 바뀐 곳도 있지만 대부분은 옛날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데 가끔 나무로 만들어진대다 무척 낡아보이는 곳을 지날때면 조금 불안하기까지 하다.


볼로냐 구도심 중앙에는 특이한 탑이 두개 있다. 중세 도시들이 자신들의 세력을 과시하기 위해 하나, 둘 만들었다고 하는데  몇몇 도시에는 아직도 수십 개의 탑들이 남아 있는 곳도 있다. 볼로냐에는 두 개가 남아있었다. 세력 과시를 위해 높이가 수십 미터에 달하는 탑들을 작은 도심에 수십개나 건설했다니 이건 인간의 욕망을 투영하는 대표적인 건축물 바벨탑과 다를 바가 없는 것 같다. 매우 낡고 부실해보여 올라가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다시 이어지는 아케이드. 구도심 중심가에 가까워지자 아케이드도 조금은 호화롭게 바뀌었다.


볼로냐가 대학의 도시로 불리우게 된 이유는 1088년에 볼로냐 대학이 세워졌기 때문이란다. 볼로냐 대학은 유럽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대학이며 단테, 코페르니쿠스, 마르코니 등 수많은 명사들을 배출한 대학으로 아직도 높은 수준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드디어, 아케이드가 끝나고 광장이 나왔다. 광장에서는 무슨 공연이 있었던 듯 무대와 객석을 철거하는데 분주했고 피렌체나 로마같은 유명한 도시만큼은 아니었지만 꽤 많은 시민들과 여행자들로 붐비고 있었다.



시청사 앞에는 작고 낮은 의자가 마련되어 있는데 시민들은 누구나 이 위에 올라가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주요 관광서나 기관 앞에는 항상 집회나 1인 시위가 있지만 이런 식의 발언대는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누군가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시작하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경청한다. 그 사람의 발언이 끝나면 다시 다른 사람이 올라가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무슨 내용인지 알 수는 없지만 톡특한 광경으로 기억에 남는다.

마침, 백발의 할아버지가 목청껏 자신의 주장을 이야기하고 있다.


볼로냐 시청사 내부


중세시대의 볼로냐는 꽤 큰 도시였는지 광장이 무척 넓은 편이었다.


처음 구도심에 들어왔을 때는 뜨겁게 내리쬐던 햇살이 사라지고 어느 덧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숙소로 돌아가는 버스를 타러 가다가 1년간 여행하면서 봤던 많은 길거리 공연 중 손에 꼽을만큼 멋진 공연을 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무엇을 보여주려는지 알 수 없었다. 나이가 지긋한 할아버지가 무슨 인형처럼 생긴 것을 어깨에 메고 앞에는 무릎까지 올 것 같은 긴 부츠를 두고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깨에 맨 것을 위로 치켜 올리며 허리를 굽혀 두 손을 부츠안에 집어 넣으니 할아버지는 사라지고 완벽하게 차려입은 남녀 인형이 나타났다.




  

갑자기 나타난 남녀 인형도 놀라운데 인형들은 제대로 된 왈츠를 추기 시작했다. 남자 인형의 다리는 할아버지의 다리이고, 여자 인형의 다리는 할아버지의 팔이다. 허리를 굽혀 바닥을 짚은 상태로 놀랍도록 날렵한 모습으로 움직이며 2인분의 왈츠를 추고 있었다. 꽤 오랫동안 진행된 춤사위가 끝나자 사람들은 어떤 공연 못지않은 열렬한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멋진 공연에는 당연히 공연료를 지불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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