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나 서둘러 밖으로 나가 하늘이 맑은지부터 확인했다. 어제 날씨가 좋았더라도 다음날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다는 것을 바릴로체에서 실감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하늘은 구름 한 점없이 맑았고, 막 해가 떠오르며 눈쌓인 산을 금빛으로 물들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떠오르는 햇살을 받아 눈쌓인 봉우리가 금빛으로 빛나는 광경을 보기 위해 봉우리가 잘 보이는 곳을 찾아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슬리퍼만 신고 나온 맨발이 시린데다 빨리 걸을 수가 없어서 겨우 봉우리가 보일락말락 하는 곳에서 사진을 찍었다.


어제 사둔 먹거리로 간단히 아침을 먹고, 트레킹 중에 먹을 샌드위치를 만들어서 트레킹을 시작했다. 트레킹을 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제법 큰 언덕을 넘었을 때, 반대편으로 펼쳐진 경치에 절로 발걸음이 멈춰졌다.


그 옛날 빙하가 깎아놓았을 골짜기 사이로 구불구불 휘어진 작은 강이 흐르고 그 앞으로는 눈쌓인 봉우리들이 펼쳐져 있었다.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이 콧속을 지나 가슴속까지 시원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거대하거나 웅장한 아름다움은 아니지만 보고 있으면 마음이 맑아지는 듯했다. 한동안 바위에 걸터앉아 바람을 맞으며 바라보던 이 시간이 1년간의 여행 중에서 손꼽을 수 있을만큼 인상적인 순간이었다.


기후가 혹독한 곳이라 나무들도 크게 자라지 못하고 풀들은 대부분 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려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봄이라 꽃이 피는 식물이 있었다. 아직 완전히 피진 않았지만 강렬한 붉은 색의 꽃봉우리들이 이 곳과는 어울리지 않게 화려했다.



걷다가 문득 하늘을 보니 커다란 맹금류가 기류를 타고 우아하게 날고 있었다. 정확하게 어떤 새인지는 알 수 없지만 파타고니아의 하늘을 유유자적하는 커다란 콘도르였을거라고 믿고 있다. 걸음을 멈추고 콘도르가 나는 방향을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바라보는 내내 조금 더 가까이 와 주었으면 하고 바랬지만 피츠로이가 우뚝 솟아있는 언덕 뒤편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엘 찰텐에서 제법 멀어졌을 즈음, 발 밑에 신기한 것이 보였다. 어떻게 보면 팽이버섯 같기도 해서 손으로 잡아봤더니 얼음이었다. 팽이버섯처럼 생긴 수많은 기둥들이 땅에서 솟아있었다. 트레킹을 하는 동안 곳곳에 이런 작은 얼음기둥들이 있었다. 나중에 찾아봤더니, 일교차 때문에 흙속에 있던 물이 밤새 얼면서 부피가 팽창해 이런 작은 얼음기둥을 만든다고 했다.



얼마나 걸었는지 모르겠지만 피츠로이와 주변 봉우리들을 훤히 바라볼 수 있는 중간 전망대에 도착했다. 해발 3400m가 넘는 높이에 암벽 부분만 1000m에 달하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피츠로이를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보는 행운을 얻었다.





전망대에서 다시 피츠로이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골짜기를 어럿 지나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어떤 산을 돌아 지날 때는 골짜기 건너편으로 산봉우리에서 내려온 빙하가 보였다. 눈사태가 나서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처럼 보이지만 바위와 단단하게 붙은 거대한 얼음 덩어리라는게 믿어지지 않는다. 저런 빙하는 수십년 전만해도 훨씬 아래까지 내려와 있었을텐데 지구 온난화로 점점 짧아져서 산봉우리쪽으로 올라가고 있다고 한다. 지금부터 수십년 후에는 이런 빙하를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길에서 만난 레인저가 어디까지 가는지 물었다. 피츠로이의 바로 밑, 트레킹 코스의 끝까지 간다고 했더니 그곳에는 아직 눈이 많이 쌓여 있어서 위험하니 주의하라고 일러주었다. 그러고나서 몇 시간 뒤에 마지막 오르막이 시작되는 지점에 도착했다. 여기서 키작은 나무숲을 지나서 흰 눈이 쌓인 가파른 길을 올라가야 했다.


여기서 바라보니 조그맣게 밀고, 끌고 올라가는 사람들과 오르다가 포기하고 주춤주춤 내려오는 사람들이 보였다. 오르막에는 내 생각보다 훨씬 많은 눈이 쌓여있었던 것이다. 오후에는 다시 엘 칼라파테로 가는 버스를 타야하기 때문에 여기서 체력을 짜내어 시도해볼 것인가, 다음을 기약하고 후퇴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했다.


산에 익숙하지 않은데다 당일치기 트레킹이라 장비도 허술하고 눈에 젖었을 경우에 갈아입을 옷도 없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니 이미 결론은 정해져 있었다. 다만, 한번 시도해 보고 포기한다면 미련이 없겠지만, 그냥 물러나면 미련이 남을 것 같다는게 고민의 이유일뿐이었다.


미련을 남겨두기로 했다. 미련이 남으면 더욱 갈망하게 될테고 그러면 언젠가 다시 이곳에 오게 될 것이다. 오래 전 세계 여행을 꿈꿔왔기 때문에 내가 여기까지 온 것처럼... 한번 와 봤으니 다시 오는 것은 오히려 쉬울터이다.

저 앞에 있는 눈쌓인 산등성이를 올라야 한다.

마지막 오르막을 앞두고 미련을 남기고 돌아왔다.



엘 찰텐으로 돌아갈 때는 조금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호숫가로 난 길로 돌아서갔다. 호수는 수온이 너무 낮아 물고기도 살 수 없지만 정말 맑고 깨끗했다. 어제 세로 또레를 트레킹 할 때, 생수를 사서 들고 갔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사람들은 빈 통만 가지고 가서는 개울이나 호수를 만날 때마다 통에 물을 채우고 그대로 들이켰다.





푸에르토 나탈레스로 가는 버스를 탔다. 날은 금새 어두워지고 주위는 온통 암흑으로 가득찼다.


1박 2일의 짧은 시간동안 세로 또레와 피츠로이를 트레킹하면서 이 봉우리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깨끗하고 청명하게 보존되고 있는 이곳의 자연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날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트레킹을 하지만 이들의 발자국을 제외하고는 사람의 흔적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자연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레인저들이나 관리하는 사람들의 힘만으로 이 넓은 곳을 이렇게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곳을 찾는 사람들이 불편을 감수하면서 노력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 것이다. 아직은 부족한 우리의 등산문화도 언젠가는 이런 모습으로 되어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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