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 남극과 그린란드에 있는 빙하들을 제외하고 가장 큰 빙하라는 모레노 빙하 투어에 나섰다. 모레노 빙하 투어는 크게 전망대와 유람선에서 빙하를 관람하는 투어와 직접 빙하 위를 트레킹하는 투어 두 가지가 있다. 빙하 트레킹은 TV 여행 프로그램에도 여러번 소개되었고, 제법 구미가 당겼지만 가격이 너무 비쌌다. 이럴 경우에는 내가 이것을 얼마나 원하는가를 잠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러면 대부분의 적당한 욕구는 억제된다.
1년동안 여행을 다녔다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고 싶은대로 다 하면서 마음 내키는대로 다녔을거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일상 생활보다 훨씬 다양하고 많은 선택을 해야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데 욕구나 욕심을 적절히 제어하지 못한다면 계획보다 훨씬 일찍 돌아와야 한다.
이 날, 아쉽게도 하늘이 흐렸다. 햇살 아래서라면 어쩌면 파랗게 보였을지도 모르는 호수도 하늘과 마찬가지로 칙칙한 색을 띄고 있었다.
모레노 빙하는 대부분 엘 칼라파테에서 출발하는게 가장 가깝지만 그래도 2시간 정도 버스를 타고 가야한다. 예전에는 렌트카를 이용해서 공원 매표소가 열리기 전에 입장하는 방법으로 입장료를 절약하는 여행자들도 많았던 것 같은데, 그런 사람들이 많아져서인지 내가 갔을 당시에는 입구에서 승용차나 렌트카의 입장을 막는 것 같았다. 현지의 헛점을 이용해 표를 사지 않는 것은 여행 경비를 절약하는 방법으로 가장 나쁜 방법이다. 보는 것에 대해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 공정여행의 출발점이라는 생각이다.
드디어 모레노 빙하가 보이기 시작했다. 너무 멀어서 아직은 그다지 커 보이지 않는다.
비가 내리다 멈췄는지 무지개까지 떴다. 이 날 하루종일 비가 내리다 그치다를 반복했다.
버스는 언덕 꼭대기에서 멈췄고, 비가 추적추척 내리는터라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기념품을 파는 건물로 들어갔다. 기념품에 관심이 없으니 비를 맞으며 모레노 빙하가 있는 방향으로 걸었다. 건물 반대방향까지 걸어가서 아래를 내려다보자 저절로 나지막한 탄성이 나왔다.
거대한 빙하가 구름이 껴서 보이지 않는 지평선 너머까지 펼쳐져 있었다. 얼마나 큰지 말로는 실감할 수 없었는데 직접 보니 실로 어마어마했다.(위키에서 찾아보니 모레노 빙하의 넓이가 부에노스 아이레스 시와 비슷하다고 한다.) 여행을 다니면서 여러 곳에서 많은 것들을 봤지만 절로 감탄사가 나오게 되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이구아수 폭포에 이어 다시금 자연의 경이로움을 느끼고 겸손해지는 순간이었다.
빙하에 가까이 가기위해 뛰다시피 내려가며 사진을 찍었다. 투어 가이드가 돌아오라는 시간 때문에 바쁘게 보고는 다시 언덕을 뛰어 올라가야했다.
버스는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 보트 선착장에 도착했다. 여기서 보트를 타고 빙하에 접근하는 것이다. 접근이라고 해봐야 상당히 멀리서 보는 것이지만 전망대에서 볼 수 없는 빙하의 전체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빙하가 언제 부서져내릴지 모르기 때문에 배로 접근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폭이 5km에 달하는 빙하는 육지 전망대를 중심으로 좌우로 나뉘어져 있는데 내가 탄 보트로는 좌측에 있는 빙하로 접근했다.
옛날 빙하가 할퀴고 지나간 자욱이 거대한 바위에 그대로 남아있다.
높이가 60m에 달하는 빙하에 다가가니 그제야 크기가 가늠이 되었다. 앞에 있는 다른 배가 조그맣게 보였다. 가까이서 떨어지는 빙하라도 맞게되면 침몰이 아니라 손쉽게 두동강이 날것 같았다.
이쯤되니 보트위에서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한 자리 싸움이 치열해졌다. 도저히 해치고 나갈 수 없어서 손을 치켜올리고 대충 찍고는 좋은 사진이 나오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햇빛에 따라 푸른색이 오묘하게 바뀌었다. 언덕 위에서는 궃던 날씨가 보트 위에서는 제법 맑아져서 다행이었다.
하늘이 가장 맑았던 순간에 찍은 사진이었는데 하필 앞사람의 뒷통수가 찍혔다.
이 날의 가장 극적인 순간이 갑자기 다가왔다. 보트에서 사진을 찍고 구경하는 와중에 천둥 소리를 내며 빙하가 무너져내렸다. 보트에서 가까운 쪽이 아니라서 정신없이 사진기를 돌렸지만 무너져내린 빙하가 일으킨 물보라만 간신히 찍혔다.
빙하가 무너질때 천둥소리가 난다는, 모레노 빙하를 다녀온 여행 블로그를 보면서 설마 천둥소리까지야 했었는데 정말로 그에 못지않은 큰 소리가 났다.
짧은 보트 투어를 마치고 다시 전망대로 돌아갔다. 이번엔 전망대에서 빙하를 볼 수 있는 넉넉한 시간이 주어졌다.
전망대로 돌아가는 버스안에서 점점 날씨가 맑아지리라 기대를 가지고 있었지만...
보트에서 봤던 빙하가 무너져내린 자리. 몇 년 전에는 전망대와 빙하가 붙어 있었는데 무너져내렸다고 한다. 기념품점에서는 이때 찍힌 사진을 엽서로 팔고 있었는데 오늘 무너진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컸다. 지구 온난화 때문인지 그 이후로는 빙하가 내려와 전망대와 붙는 경우는 없었던 것 같다.
무너진 빙하의 잔재들이 가득하다.
아쉽게도 보트에서 좋았던 날씨는 오래가지 않았다. 전망대로 돌아왔을 때는 다시 흐리고 간혹 빗방울도 떨어지고 있었다. 파타고니아의 날씨는 정말로 종잡을 수가 없었다.
가만히 귀기울이고 있으면 간혹 '쩌쩍', '쩌정'하는 빙하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린다. 높은 곳에서 만년설이 쌓여 만들어진 빙하가 낮은 곳으로 천천히 밀려내려와 결국 갈라지고, 갈라짐의 한계를 넘어서면 무너져서 다시 물로 돌아가는 것이다.
한동안 빙하가 갈라지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자연이 만들어낸 경이로운 모습을 바라보다보니 어느새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돌아가는 버스 창밖으로 모레노 빙하를 바라보며 언젠가 머지않은 때에 다시 한번 마주할 수 있기를 바랬다.
돌아가는 길에 다시 하늘이 맑아졌다. 이번에는 나에게 맑은 날에 모레노 빙하를 볼 수 있는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지만 돌아가는 길에 멋진 파타고니아의 평원을 보여주었다. 평생 남을 멋진 기억을 간직하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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