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 아침, 트레킹을 하면서 먹을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여행내내 해온 일이라 이젠 제법 익숙해진데다 약간의 노하우도 생겼다. 노하우중에서 내가 생각해도 꽤 훌륭하다 싶은 것이 샌드위치 빵에다 아보카도를 바르는 것이었다. 아보카도는 갑옷같은 껍질속으로 물렁한 과육과 가운데 커다랗고 딱딱한 씨가 있어서 깎기가 무척 어려웠다. 처음에는 서투르게 깎은 과육을 얇게 잘라 샌드위치에 넣었는데 한번은 너무 익어 자르기 어렵기에 어쩔 수 없이 그냥 숟가락으로 떠서 빵에 발랐다. 그런데 이게 꽤나 훌륭했다. 따로 야채를 넣지 않아도 아보카도의 식감이 무척 부드러워 빵의 뻑뻑함을 많이 상쇄해주고 치즈와 햄의 느끼함도 잡아줬다. 아보카도 자체는 별다른 맛도 없고 조금은 느끼하달 수도 있는데 샌드위치에 넣으니 완전히 달라진다. 게다가 잘라서 넣은 것보다 빵에 바르니 이질감이 없어서 더 좋았다.(나만 그런지도 모르지만...) 


살아가면서 약간의 수정과 생각의 전환이 일과 인생을 완전히 다르게 만드는 경험을 종종 하게된다. 그런 전환이 무조건 인생을 올바르게 이끄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시도가 일보후퇴 이보전진을 만들게 되는 것 같다. 샌드위치를 싸고 출발하기 전에 하늘을 보니 아쉽게도 구름이 제법 있어서 걱정스러웠다.


타우포에서 묵었던 호스텔. 뉴질랜드에서 묵었던 숙소중에 가격대비 훌륭한 편이었다.




크리스마스 트리로 쓰면 굉장할 것 같다. 연말이었는데도 장식이 안된걸 보니 그러진 않나보다.

 


숙소에서 나와 트레일을 찾아서 천천히 걸었다. 그러다 마오리족의 전통적인 조각이 장식된 문이 보였다. 뉴질랜드의 원주민인 마오리족은 10세기경 폴리네시아 동부에서 카누를 타고 뉴질랜드로 이주했다고 하는데 특히나 목공예 솜씨가 뛰어나서 (내가 보기에는)희안하고 독특한 문양의 공예품이 많다고 한다.(위키백과 참조) 


뉴질랜드와 호주는 가까이에 있으며(오클랜드와 시드니가 비행기로 세시간이니 가깝다고 볼 수는 없지만) 유럽의 백인들이 이주하면서 현대적인 국가가 되었다는 공통점도 있지만 그 속의 역사는 무척이나 다르다. 호주에서는 에보리진이나 타즈매이니아 원주민이 유럽인들의 학살과 그들이 옮긴 질병으로 수없이 죽어갔으며 그들이 국민으로서 권리를 행사할 수 있게 된 것이 얼마되지 않았지만 뉴질랜드에서는 비교적 빠른 시기에 유럽인과 마오리족 간에 협정을 맺어 공존해 왔다. 그래서인지 개인적으로는 호주보다 뉴질랜드에 훨씬 호감이 간다. 게다가 뉴질랜드의 지명은 영어권 이름뿐만 아니라 마오리족 언어에 기반한 이름들이 상당히 많다. 이런 이름들은 낯설지만 어감이 무척 재미나서 영어권 국가 여기저기에 있는 비슷한 이름을 가진 도시들보다 훨씬 기억에 남는다.


그러고보니 와이토모의 동굴투어를 했던 여행사의 주인 할아버지가 기억난다. 이 할아버지는 무척 말이 많고 유머스러운 사람이었는데 호주사람들에 대해 뉴질랜드에 와서 돈자랑한다느니, 예의가 없다느니, 유럽에서 건너온 질이 안좋은 사람들이 건설한 나라라느니 하며 비꼬는 이야기들을 많이 했다. 뉴질랜드나 호주나, 조상들이 유럽에서 온 사람들이고 비슷한 이주역사를 가진 사람들이라 생각했었기에 처음에는 약간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조금 깊이 들여다보면 역사도 다르고, 수백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그 땅에 정착한 사람들의 생각도 많이 달라진 것 같다.


어떻게 보면 마야의 조각상과 비슷하게 보인다.




트레일을 찾아 걷다보니 어느새 날이 맑아졌다. 오히려 내리쬐는 햇볕이 따가울 정도였는데 트레일을 찾기가 쉽지 않아서 여기저기를 헤매고 다녔다. 딱히 표지판이 있거나 길에 표시가 된게 아니라서 우선은 타우포호수에서 후카폭포로 흐르는 강을 찾아야했다.



우여곡절 끝에 맑은 물빛의 와이카토 강을 발견하고 풀밭을 헤치며 가로질러서 다가갔다. 강가에 다가가니 아이들이 개와 함께 신나게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건강한 아이들이 뿜어내는 발랄함이 보기 좋아서 한동안 아이들이 노는걸 구경하며 서 있었다.




낯선 이방인의 등장에 한 아이는 경계를, 한 아이는 친밀함을 보인다. 모두 아이들의 꾸미지 않은 표정이다. 


어이 친구, 이제 그만 집에 가자구


와이카토 강의 물은 정말 맑아서 깊이에 따라 다양한 물빛을 보여주었다.


절벽 위에 보이는 번지점프대가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를 촬영한 유명한 타우포 번지점프대다.






절벽 아래에서 번지점프대로 올라가려고 했지만 좀처럼 가는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기껏 찾아낸 절벽 아래로 난 길은 낙석으로 위험해선지 쇠창살로 갈 수 없게 막혀 잇었다. 한동안 절벽 밑을 뒤진끝에 위로 올라가는 좁은 숲길을 찾을 수 있었다. 위에서 보니 짙은 수풀 사이로 흐르는 와이카토 강이 에메랄드처럼 보였다.





충분히 튼튼하게 지어졌겠지만 공중에 붕 떠있는 점프대가 조금은 아찔하다.



번지점프대에서 내려다 본 와이카토강의 물빛은 수심에 따라, 강바닥의 색에 따라 갖가지 푸른 빛을 보여주었다.


아직 이른 시간인지 점프대에는 관리하는 사람이 없는데도 점프대 끝에는 밧줄만 한두개 쳐 있을뿐이었다.




번지점프를 하는 가격은 무척 비쌌다. 정확하진 않지만 20만원이 훨씬 넘었던 기억이다. 거기다 본인이 뛰어내리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남겨주거나 하는 서비스들이 붙어서 결국은 30만원이 넘었다. 당시 환율이 아주 좋지 않은 상태였지만 비싸도 너무 비쌌다. 게다가 높은 곳을 싫어하기 때문에 나에게는 번지점프대에서 서서 주변을 구경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타우포 번지점프대에서 본 와이카토 강은 무척 아름웠다. 후카폭포로 가는 트레킹을 이제 막 시작했음에도 여기저기 발길을 잡는 풍경이 많아서 자연히 속도가 느려질 수 밖에 없었다. 어차피 긴 거리가 아니기에 천천히 가도 시간이 충분하니 마음이 더 느긋해졌던 것도 있다. (산길을 트레킹 할 때는 시간을 정해놓고 조금 늦어지는 것 같으면 자꾸 서두르게 된다. 사진을 보니 다시 카메라 상태가 아쉬워졌다. 일부러 찍으려고 해도 찍기 어려운 사진들이 엉망으로 찍혔다.)


글을 마무리하려다 갑자기 생각난게 뉴질랜드 버스의 안전벨트다. 뉴질랜드에서 탄 버스들이 안락하다거나 시설이 좋은 건 아니다. 우리나라의 일반 시외버스와 다를 바 없다. 가장 눈에 띄는 다른 점은 안전벨트가 승용차처럼 어깨와 허리 양쪽을 연결하는 3점식이라는 것이다. 분명히 세계 여러나라들 중에 뉴질랜드만 이렇지는 않겠지만 거쳐 간 나라들에서 탔던 버스들 중에는 뉴질랜드 버스가 유일했다. 2점식과 3점식은 사고시 안전벨트의 효과가 무척 다르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안전벨트의 개념이 없었던 동남아와 3점식 안전벨트를 갖춘 뉴질랜드 사이 어딘가에 있을텐데 자꾸만 전자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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