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완에서의 짧은 일정을 마치고 카이로로 향했다. 선택한 교통편은 숙박비도 아낄겸 야간 열차를 타는 것이었는데 1등석 칸은 깨끗한 공간에 마련된 침대차라고 했지만 동남아에서 다양한 교통편을 경험해 봤으니 2등석 칸도 충분히 만족스러우리라 생각했다. 게다가 1등석 칸은 시간은 절약될지언정 숙박비를 아낄 수 없을만큼 가격이 비싼 것도 이유였다.


하지만, 고난은 항상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오는 법이다. 시간을 넉넉하게 남겨두고 기차역으로 갔더니 표를 사려는 줄이 꽤 길고 시끌벅적했다. 줄을 기다려 표를 달라고 했더니 없다면서 비키란다. 분명 어떤 사람들은 사는 걸 봤는데 왜 그러냐고 해도 없다고 하고 그만이었다. 


이게 뭔 일이란 말인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기차역에 서 있는데 누군가 왜 그러냐고 말을 걸었다. 그러면서 자기는 '찰리'(였던 것 같다. 기억이...)라고 했다. 머릿속에 번쩍 떠오른 그 이름... '이집트 4대 천원' 중 한 사람이었다. 사정을 이야기하고 표를 구할 수 없겠느냐 했더니 문제 없다고 기다리라면서 자기가 매표소로 갔다.


잠시 뒤에 돌아와서는 숫자가 쓰인 두꺼운 골판지를 잘라서 만든 종이조각을 두 개 내밀었다. 이게 표를 대신할 거라면서... 조금 의심스럽긴 했지만 제대로 된 표는 없다면서 이걸 보여주면 확실하다는데 썩은 동앗줄일지언정 아스완을 벗어나려면 믿을 수 밖에 없었다. 돈은 딱 표 값만 받았고 팁을 주려고 해도 한사코 거절했다. 그러면서 저녁은 먹었냐며 식당까지 안내해줬다. 끝끝내 팁을 거절하고는 나는 한국인들의 친구니까 인터넷에 자기 이야기만 좋게 써달라고 했다. 


눈앞의 돈 몇 푼보다는 미래에 대한 투자로 보는게 믿을만 하겠구나 생각되었다. 당장 나에게 사기를 치고 몇 푼 얻더라도 인터넷에 좋지 않은 이야기가 올라가면 한국인 여행자들이 찾지 않을테니 그런 모험을 하진 않겠구나 싶었다. 이 덩치와 키가 큰 이집션이 왠지 맘에 들었다.


한번도 내 스스로 찾지 않았음에도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고 나타나는 '4대 천왕' 중 2명에게 도움을 받았다. 신기할 다름이다.


이 날 탓던 기차는 아니지만 이집트의 기차는 대부분 이렇다. 거친 사막을 달려서인지 낡고 조금 지저분하다.


룩소르에서 만났던 여자 여행자 둘은 험한 경험도 했던 모양이다. 여자들을 만만하게 보는 이집트인들 특성상 성적인 농담을 자주 당했었는데 기차역에서 심한 소리를 들었었다고 했다. 한 사람은 울음을 터뜨렸고 한 사람은 고래고래 소리치며 따졌다고 한다. 그러자 경찰이 오고 주위에 사람들이 몰려오고... 결국 경찰서까지 가는 일을 겪었다고 했다.


이집트는 여자들끼리만 여행하기에는 조금 거친 동네다. 물론 남자들이라고 안심할 수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다. 혼자 이집트에 도착한 여성 여행자라면 이집트를 같이 여행할 믿음직한 남자 동행을 찾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 될 것 같다. 이들의 특성상(종교적인 특성일지도 모르겠다.) 남자와 같이 있는 여자에게는 함부로 하지 않는다.


저녁부터 밤새, 그리고 오전내내 달린 기차가 드디어 카이로에 도착했다. 비행기에서 공중으로 본 카이로는 누런 모래빛의 삭막해 보이는 곳이었는데 의외로 기차역은 고풍스러운 건축물에 현대식 인테리어가 조화된 새련된 곳이었다.



하지만 기차역을 나오니 '아, 여기 이집트였지' 하는 생각이 바로 들었다. 번잡하고 시끄럽고... 택시를 잡아타고 예약한 숙소 근처까지 도착했다. 숙소는 번화한 타흐릴 광장 근처였는데 이 근처를 아무리 돌아도 구글맵에 표시된 숙소를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현지인들에게 물어보기도 수차례였고, 그 때마다 친절하게 도와주려 했지만 다들 찾지 못했다. 한참을 그러다 운좋게도 물어본 현지인이 카이로에 근무하는 공무원이었고 이 곳 지리에 훤한 덕분에 겨우 찾을 수 있었다. 알고보니 찾느라 힘들었던 이유는 지도에 표시된 곳과 주소가 서로 달랐던 때문이었다.


카이로에는 한국 기업들도 많이 진출해 있고 교민들도 꽤 살고 있다. 그러면 당연히 따라 있는 것이 한국 식당이다. 중동 음식에 지쳐서 한국 식당을 찾았다. 숙소에서 꽤 멀긴 했지만 지하철을 타고 걷고 걸어서 한국 식당에 도착했다.



얼마만에 먹는 제대로된 한국음식인가... 이날 잊지 못할 간만의 진수성찬을 맛보고 세상을 다 가진 듯 평온한 기분으로 잠이 들었다.


이튿날은 카이로에 왔으니 가봐야 할 곳, 카이로 박물관을 찾았다. 아쉽게도 박물관 내에서는 사진 촬영이 되지 않았다. 이해가 되는게 수천년전의 유물이라 부주의한 사용으로 플래시 세례라도 받는다면 보존하는데 문제가 많을 것 같다. 훌륭한 여행자는 아니지만 제대로된 여행자가 되고자 한다면 그 곳의 규칙을 존중할 줄 알아야한다. 여행자들이 자신의 만족을 위해 행동하고 규칙을 어긴다면 언젠가 그것으로 크게 낭패를 볼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을 항상 생각했으면 좋겠다.



오호, 이 정도의 유물은 실내 전시관의 구석도 차지할 수 없단 말인가?


카이로 박물관의 유물은 너무도 많아서 대충 보더라도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더구나 박물관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하루 종일도 부족할 것 같다. 잘 보존된 미이라들은 박물관 내에서 따로 입장료를 내고 봐야하는데 나는 굳이 미이라를 보고 싶진 않아서 그냥 지나쳤다. 이 곳에 투탕카멘 왕의 마스크와 유물들도 있다.


이집트 사람들은 친절했다. 길을 물어도 성의껏 가르쳐주고 자신을 소개하고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섰다. 일부 몇 명은 자기가 가이드해 주겠다거나 자기 집에 놀러 오라는 사람도 있었다. 


TV여행 프로에서 우연히 현지에서 만난 사람들의 집을 방문하고 대접받고 그들의 문화를 경험할 기회를 얻는 형식으로 방영한다. 하지만 TV프로는 현지의 가이드와 코디네이션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혼자 여행하는 여행자들은 이런 경우를 항상 주의해야 한다. 물론 선의를 배푸는 사람들이 더 많겠지만 혹시 있을 위험에 대처할 방법이 없다면 좋게 거절하는게 상책이다. 위험에 대처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육체적인 능력을 믿는 것은 전혀 좋은 방법이 아니다. 여행자에게는 안전이 최우선이어야 한다.


내가 살면서 가장 더웠던 때가 94년 여름이었다. 그때 이상기온으로 전국이 40도에 육박했고 9시 뉴스는 날마다 더위 소식을 전하는 뉴스로 시작했다. 아직도 생각나게 대구의 아스팔트에 날계란을 깨서 흰자가 서서히 굳어가는걸 보여주며 더위 소식을 전하는 뉴스였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한여름이라도 40도를 넘어가는 일은 거의 없다. 그래서 나도 40도가 넘는다는게 얼마나 더운 것인지 인지해본 적이 없었다.


룩소르에서 42도를 경험한게 처음이었다.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이는 것이 아니라 해는 보이지도 않고 하늘이 흐릿한데 온 세상이 후라이팬처럼 뜨거웠다. 그러나 그것도 약과였던게 아스완은 이집트에서도 남부에 속하는지라 섭시 45도까지 기온이 올라갔다. 룩소르에서 아스완으로 가는 기차에서 내려 숙소를 찾아가기 위해 봉고차 같은 버스를 탔다. 당연히 에어콘은 없고 열린 창문으로 바람이 불었는데 마치 헤어드라이기를 최고로 세게 틀어놓고 얼굴을 바로 앞에 대고 있는 기분이었다. 더위에 숨이 막힌다는게 이런 것이구나, 지금까지 더워서 숨이 막힌다고 생각했던 것은 절대 그럴리 없었겠구나 싶었다. 그리고 여기서 살아가는 사람들, 인간의 적응력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아스완에서 예약한 숙소는 열악했다. 룩소르에서 저가 호텔에서 머물렀다면 여기는 여인숙 수준이다. 물이 잘 안나오고 침구가 더럽고, 전등이 어둡고... 이런 모든 것은 다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더위에 골골거리며 돌아가는 에어콘으로는 도저히 내부가 시원해지지 않았다. 시원해지는건 바라지 않지만 제발 잠들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아스완에 온 목적은 단 하나다. 그 유명한 아부심벨 신전을 보기 위해서. 하지만 아스완과 아부심벨 신전 사이의 거리는 구글맵에서 대충 봐도 룩소르와 아스완 사이의 거리보다 멀어보였다. 아부심벨 신전은 이집트와 수단 국경 바로 위 아스완 댐으로 생긴 저수지 바로 옆에 있다. 이렇게 멀기 때문에 아부심벨 투어도 일찍부터 시작한다.


새벽 세 시부터 각 숙소를 돌며 여행자들을 픽업한 여행사 차량들은 아부심벨로 출발하기 전에 아스완의 한 주차장에 다 모였다. 여기서 경찰의 검문을 받은 후, 경찰차를 따라 출발했다. 하필 봉고차의 가장 뒷좌석을 배정 받아서 좁은 자리에 몸을 구겨 넣고 부족한 잠을 보충했다. 해가 뜨면서 봉고차 내부가 더워졌다. 아무리 에어콘을 틀어도 뒷자리까지 시원해지지 않았다. 비좁은 자리에서 더위에 땀 흘려가며 부족한 잠으로 꾸벅꾸벅 졸며 이렇게 대여섯시간을 가야했다. 왜 나는 투어를 하거나 버스를 타면 항상 봉고차의 가장 뒷자리만 앉게 되는지 미스테리하다. 라오스에서도 터키에서도 이집트에서도 툭하면 맨뒷자리였다.


이런 불편함을 참고 참은 끝에 오전 9시쯤 아부심벨에 도착했다. 9시임에도 아부심벨의 온도는 40도를 넘어가고 있었다.


매표소에서 표를 사고 걸어가다보면 작은 산이 나온다. 산을 빙 돌아가보면 그 산 자체가 신전이다.


람세스 2세 자신을 위한 대신전 옆에 왕비 네페르타리를 위한 소신전이 나란히 있다.


신전 바로 앞에는 아스완 댐으로 생긴 거대한, 바다처럼 보이는 호스가 펼쳐져있다.




높이 32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람세스 2세 자신의 상.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네 개나 입구에 세워놓았다.



네페르타리를 위한 소신전 입구. 정작 여왕의 상은 2개이고 4개는 자신의 상이다.


기원전 13세기, 지금으로부터 3천년도 전에 이런 거대한 신전을 만들만큼 이집트의 국력이 왕성했고, 람세스 2세의 권력은 막강했다고 한다.



이 신전은 1960년대 아스완 댐을 건설할 때 물에 잠길 운명이었는데 유네스코와 고고학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이 곳으로 옮겨 올 수 있었다. 매표소에는 그 당시의 모습을 찍은 자료화면을 보여주는데 신전과 석상들을 하나하나 톱으로 잘라 분해하고 레일을 만들어 돌을 옮겨와서 다시 쌓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작은 산 두개를 옮겨 온 것이다. 이런 세계 문화유산을 지키려는 노력이 없었다면 아스완 댐 저수지 밑으로 잠겨버렸을 것이다.


아부심벨 신전 뒤로 아스완 댐과 이시스 여신에게 받쳐진 피레 신전을 갔다. 개인적으로 좋았던 곳은 피레 신전이었다. 이 신전은 섬에 있어서 배를 타고 가야하는데 신전 입장료와는 별개로 배 삯을 따로 내고 가야한다. 이집션들과의 흥정은 항상 피곤하다. 이 점만 빼고 물 위에 떠 있는 듯 보이는 고즈넉한 이 신전이 참 좋았다.







저 입구 안쪽에 이집트인 두 명이 기다리고 있다가 다가와 사진을 찍고 친한척 하다가 가이드를 받으라거나 입장료를 달라는 둥 여행자의 돈을 뜯으려 한다. 이집트 여행에서 가장 힘든 점은 더위가 아니라 이집트인이다.




신전 안에 도마뱀이 산다. 밖은 덥고 건조한데 신전 안은 그늘지고 습해서 살기 좋은가보다.

어둠속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종이라 눈도 퇴화된 듯하고 몸 빛도 희게 변했나보다.



투어를 마치고 오면 무척이나 피곤하다. 여행사를 통한 투어이긴 하지만 이들이 해주는 것은 차로 목적지까지 데려다 주는 것 뿐이다. 설명해주는 것은 어림도 없고 투어에 식사나 입장료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피레 신전에 가기 위해 배 삯도 직접 협상해야 한다. 그래서 다른 투어보다 훨씬 피곤하다. 바로 위 사진은 어디였는지 생각도 나지 않는데 마지막 들른 곳이었다. 차로 내려주긴 하지만 봉고차에 있었던 사람들 모두 사진만 몇 장 찍고 다시 차에 탔다. 모두들 피곤해서 숙소로 돌아가고 싶은 표정이었다.



아스완을 흐르는 나일강 반대편은 모래 사막이었다. 몸도 피곤하고 슬슬 어두워졌지만 숙소가 너무 더웠기 때문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아스완 강변에 있는 맥도날드에서 저녁을 먹고 해지는 모습을 보고 근처 시장을 구경하고 완전히 캄캄해져서야 숙소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아깝게도 시장에서 찍은 사진이 없는데 시장 구경이 제법 재밌었다. 여기서 모래 바람과 햇빛을 피할 천을 샀다. 이 천들은 이집트에서, 그 뒤 유럽을 여행하면서도 두고두고 요긴하게 잘 썼다. 어디선가 쓸 데가 없어지고 짐이 되면서 버리게 되었지만 그 모양과 색깔은 뚜렷하게 기억난다.

뭔가를 한꺼번에 너무 많이 받아들이는 것은 대부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 음식도, 지식도 용량을 초과하면 탈이 나거나 앞에 들어간 것이 밀려 나올 수 밖에 없다. 나에겐 룩소르에서 투어를 한 이 날이 그런 날이었다. 하룻동안 고대 이집트에 대한 너무 많은 지식을 받아들이려다보니 용량초과 상태가 되어버렸다. 투어를 하기 전에 공부를 하고 가거나 원래 고대 이집트 문명에 관심있었던 사람이 아니고는 대부분 나처럼 되지 않을까 싶다.


불행하게도 사진만 보고는 여기가 어디였는지, 이 곳이 유적으로서 중요한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뜨거웠던 열기만 아직도 온 몸이 기억하고 있어서 사진만 봐도 열기가 후끈 느껴진다.



이 곳은 왕들의 계곡으로 들어가는 입구로 기억난다. 매표소에서 멀기 때문에 이런 시설을 이용해야만 했다. 왕들의 계곡은 말 그대로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들의 무덤들이 있는 곳으로 도굴을 막기 위해 산을 무덤으로 이용했다고 하는데 그다지 효과는 없었는지 대부분 도굴되었다. 그나마 도굴이 되지 않은채 발굴된 무덤이 투탕카멘 왕의 무덤으로 카이로 박물관에 보관중인 그 유명한 투탕카멘의 마스크도 여기서 발견된 유물이라고 한다.


사진을 찍지 말라고 한 걸까, 너무 더워서 사진 찍을 정신도 없었던 걸까? 왕의 계곡에서 찍은 사진이 없다.


다음으로 간 곳은 하트셉수트 여왕이 지은 신전이다. 이 신전은 매우 유명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진으로 한번쯤 봤을 곳으로 나도 사진으로 보고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다.

신전으로 가는 입구에 기념품이나 햇빛을 피할 모자나 천들을 파는 가게들이 있었다.


멀리 하트셉수트 여왕의 신전이 보인다. 사진에서 보던대로 절벽을 깎아서 만든 거대한 건축물이다. 기대가 되기 시작했다.


하트셉수트 여왕의 신전을 앞에서 보면 절벽 바로 앞에 있어서 신전 내부를 절벽 안쪽에 마련해 놓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를 품게 된다. 하지만 절벽 앞에 지은 것뿐으로 앞에서는 넓고 크게 보이지만 세로로 무척 짧아서 규모가 생각보다 작았다.


기원전 1500년경에 고대 이집트를 지배한 하트셉수트 여왕은 다른 여왕들에 비해 재위 기간도 길고 국가도 안정적으로 다스렸다고 한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여왕이 국가를 다스린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은데 고대 이집트는 여왕이 다스린 경우가 비교적 많았던 것 같다.


가이드했던 잘생긴 이집트 청년. 우리나라 대학에서 몇 년간 공부해서 한국말을 꽤 잘했다. 하지만 이집트의 민주화와 정치적 개혁에 대해서는 별 기대를 안하는 듯 했다. 쓴 웃음을 지으며 이집트는 멀었다고 잘 안될거라 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잘 될거다, 우리나라도 그랬다' 라고 틀에 박힌 위로를 해줬으나 속으로는 이십대 초반에다 외국에서 공부했다는 너부터 포기하니 잘 될리 있냐고 버럭 해주고 싶었다.




이집트 신전의 돌기둥이나 벽의 상형문자 혹은 그림들을 보면 일부 채색이 남아 있는 것들이 보인다. 남아있는 색들도 꽤 다양하다. 지금은 누렇게만 보이는 이 신전들이 당시에는 얼마나 화려하게 치장되었을지...


멤논의 거상. 이 거상들은 신전 입구를 지키는 거상인데 나일강의 범람으로 신전은 파괴되고 이 거상들만 남았다고 한다. 옛날 새벽만 되면 거상에서 소리가 났는데 이를 본 그리스인들이 새벽의 여신을 그리워하는 아들 멤논의 소리라고 해서 멤논의 거상이라고 이름 붙였다고 한다.(고대 이집트의 거상에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 이름이라니...) 당연히 지금은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다음으로 찾은 곳은 고대 이집트 최대의 신전이었던 카르낙 신전이다. 입구에서 본 규모만으로도 이 신전이 얼마나 거대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아직도 신전의 대부분이 발굴되지 못하고 남아있는 상태라고 한다.

스핑크스 사이로 난 길을 화려하게 장신된 파라오의 수레가 지나다녔을 상상을 해보는 것도 재밌다.



돌기둥에 채색된 장식이나 새겨진 부조도 매우 새밀하다.



아직 복원하지 못한 신전의 일부가 돌무더기처럼 쌓여있다.




이집트의 신전이나 유적을 돌아보면서 제대로 이해하려면 고대 이집트의 왕조와 종교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물론 나는 그러지 못했기에 후회가 많이 되었다. 대략적인 내용만 파악하고 있었더라도 이날 투어에서 훨씬 더 많이 이해하고 배울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에게 유럽이 여행하기 편한 것은 많이 알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크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현재 살아가는 문화의 대부분이 유럽에서 발생한 문화에 기반을 두고 있고 어렸을 때 그리스 로마 신화부터 시작해서 역사, 종교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우기 때문에 유럽을 여행하면 이미 축적된 지식을 바탕으로 훨씬 쉽게 배우고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여행하는 곳에 대한 기본적인 역사와 종교에 대해 공부하는 것은 여행을 제대로 하기 위한 자세이다.


고대 이집트의 종교는 다신교로 수많은 신들이 등장하고 각 신들은 벽화에서 특징있게 그려진다. 카르낙 신전은 기원전 2천년 전에 아문(아몬) 신을 섬기는 신전이었고 이 신은 후에 라(레) 신과 합쳐져 '아문 라' 라는 이름으로 태양신이 되었다고 한다. 이 신은 고대 이집트 종교의 최고 신으로 그리스의 제우스, 로마의 주피터와 동일한 신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수많은 신들의 이름을 듣고, 그 신들이 그려진 벽화와 역사를 들었는데 별반 기억나는게 없다. 하지만 투어를 하던 당시에는 상당히 흥미롭고 재밌었다. 고대 이집트 문화에 관심이 있는 여행자라면 반드시 들러야 할 곳이다. 다만 더위에 약한 사람이라면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

드디어 후루가다에서 떠나는 날이 되었다. 있고자하면 계속 즐겁게 머무를 수 있겠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떠나야하니 더 헤어지기 힘들어지기 전에 떠나야했다. 강사님 중에 한 분이 하신 말씀이 아직 기억에 남는다. '오신 분들이야 가시면 일상에 적응하고 쉽게 잊겠지만 남은 우리들은 더 오래 기억나서 힘들어요'라고. 왠지 떠나기가 미안해졌다.


후루가다에서 룩소르로 가게 된 이유는 가까웠 때문이다. 후루가다에서 룩소르로, 다시 아스완까지 남쪽으로 계속 갔다가 아스완에서 카이로까지 야간 열차로 한 번에 올라가는 경로를 선택했다. 오전에 탄 버스가 오후 늦지 않게 도착했으니 그리 멀지 않았고 길도 나쁘지 않았다. 버스가 낡았지만 이 정도는 동남아에서 경험한 버스에 비하면 그리 심한 편도 아니다 싶었다.



이집트 여행은 힘들다. 더욱이 배낭 여행은 무척 힘든 편이다. 한국에서는 경험해보지 못한 더위와 너무해서 화가 날 정도로 달라붙는 삐끼들, 조금은 불안한 치안에 장소마다 시간마다 달라지는 가격... 언젠가 여행자들을 대상으로 주요 국가들 중에서 어디가 가장 여행하기 힘든지 투표를 했는데 1위가 인도, 2위가 이집트였다고 한다.


이런 여행하기 힘든 장소에서 여행자들을 돕는 구세주같은 사람들이 있다. 우리나라 배낭여행자들에게는 이집트의 4대 천왕이라고 불리는 이들인데 나는 룩소르와 아스완을 여행하면서 각 도시에서 1명씩 2명을 만났고 또 도움을 받았다.


이젠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이 사람은 후루가다에서 도착한 버스가 룩소르에 도착하자 버스가 밀리는 틈에 어느새 올라탔다. 먼저 자기 소개를 하며 내가 누구니 숙소나 국제 학생증(이집트의 유적지나 박물관 입장료가 대폭 할인된다)이 필요하면 이야기하란다. 그때 같이 버스를 탓던 한국 여행자들이 당신이 그 4대 천왕인지 못 믿겠다고 하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자기 신분증까지 보여준다.


믿어보자싶어 이 사람을 따라 나섰다. 먼저 숙소를 보여주는데 싸긴한데 너무 낡고 왠지 치안이 안좋을듯 싶은 곳에 있었다. 조금 비싸더라도 좋은 숙소를 알려달라고 했는데 그 뒤에 다른 여행자의 여행기를 읽어보니 여기에 머무르는 배낭 여행자들도 꽤 있는 듯했다. 여튼, 같이 갔던 젊은 여행자들은 국제 학생증을 위조로 만들었고 나를 포함하여 저렴한 호텔까지 소개 받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웃돈을 요구하지 않았다. 사람 좋게 웃으며 도움이 됐다면 좋다고만 했다. 나중에 든 생각으로는 위조로 국제 학생증을 만들어주거나 소개해주는 숙소에서 약간의 돈을 받는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여행자에게는 좋은 이미지로 비춰져서 입소문이 나도록 하는 것 같다. 이유야 어떻든 여행자에게는 반드시 필요할 때 나타나는 고마운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


이집트 음식은 대부분 이렇다. 구운 닭이나 양고기에 야채, 빵...


늦은 점심을 먹고 나일강에 펠루카를 타러 갔다. 펠루카는 이집트 돛단배인데 룩소르에서 근처의 섬을 투어하는 것부터 아스완까지 며칠을 가는 투어까지 다양하다. 강변으로 나가니 역시나 수많은 삐끼들이 펠루카를 권하며 귀찮게 했다. 처음에는 웃으며 싫다고 하다가, 나중에는 고개만 가로 젓다가 결국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보지도 않게 된다.


펠루카를 타러 왔다가 결국은 이집션 할아버지가 모는 엔진으로 가는 배를 타게 되었다. 삐끼들한테 시달린데다 많은 배들 중에 고르기도 귀찮아져서 뭐, 돛단배가 아니면 어떤가 가기만 하면 되지 싶었다.

이집트 돛단배, 펠루카




나일강은 크고 풍요로웠다. 세계에서 가장 긴 강이긴 하지만 이집트 남부 룩소르에서도 이렇게나 풍부한 수량을 가지고 있었다. 다음날 가이드의 말로는 룩소르에 5년째 비가 제대로 내리지 않았다는데도 강은 룩소르를 풍요롭게 만들었다. 게다가 물도 맑은 편이었다.




배를 타고 들른 곳은 농장이다. 이 풍부한 나일강의 수량으로 대추야자, 바나나, 사탕수수 같은 작물들과 가축들을 키웠다. 나일강변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황량하고 거친 사막인데 강변에서는 이런 작물들을 재배할 수 있는 것이다.


나일강은 사람들이 살 수 있는 물을 주지만 거기 사는 사람들의 삶은 그리 풍요롭진 못했다.

이들은 소작농일뿐, 이들이 키운 작물이나 가축도 이들의 것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서히 어둠이 내려앉는 나일강변

강변의 좋은 건물들은 대부분 리조트나 호텔들이다.


강변에는 꼭 아파트를 옆으로 엎어놓은 듯한 커다란 배들이 많이 있는데 이 배들은 며칠동안 카이로에서 룩소르를 거쳐 아스완까지 왕래하는 유람선들로 침실에서 강을 볼 수 있게 커다란 창이 나 있다. 배마다 가격과 서비스 차이가 많다고 들었다.



내일은 예약한 고대 이집트의 유적과 신전들을 둘러보는 투어를 할 것이다. 사진으로만 봤던 카르낙 신전이나 하트셉수트 여왕의 신전, 왕의 계곡을 둘러 볼 생각에 꽤나 흥분되는 밤이었다.

여행 중에 하고 싶은 일들을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그 일들 중에서도 최상위권에 있었던 것이 스쿠버 다이빙이었다. 바닷속의 환상적인 풍경을 방영하는 TV 프로그램을 볼 때는 이런 것은 전문가들이나 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의 여행기를 읽다보니 며칠만 배우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란 걸 알게 되었다. 그럼 어디서 스쿠버 다이빙을 배울 것인가 하는게 고민이었다. 태국에서도 배울 기회가 있었지만 이집트 후루가다를 선택하게 된 이유는 여기가 한국에서 멀기 때문이었다. 장기여행중이 아니라도 동남아는 한국에서 휴가차 갈 수 있는 곳이니 가능하면 쉽게 갈 수 없는 곳에서 해보자는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후루가다는 반드시 가봐야 할 이집트에 있으니 더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처음에는 2박 3일의 오픈워터 코스, 1박 2일의 어드밴스드 오픈워터 코스만 하고 나중에 멕시코를 여행할때 카리브해에서 다시 다이빙을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세상에 계획대로 되는 일이 몇 가지나 있겠는가. 결국 11박 12일을 여기서 머물렀다.


후루가다에는 다이빙 강습을 하는 샵들이 많지만 제대로 강습을 받고, 시험을 보기 위해서는 내 형편없는 영어실력으로 외국인이 운영하는 샵을 이용하기에는 무리였기에 후루가다에 있는 유일한 한국인 다이빙 샵인 '우리집'을 찾았다. 우리집은 숙소를 겸하고 있어서 낮에는 강습을 받고 밤에는 숙소 수영장 옆 테이블에서 강사님들과 맥주 마시고 이야기하며 지낼 수 있어서 좋았다. 결론적으로 11박 12일이나 머무르게 된 것은 생각보다 더 좋았던 다이빙도 이유지만 무척이나 친해져버린 강사님들과 시간 보내는 재미도 큰 이유가 되었다.


아침에 이집션 아저씨들이 차려주는 아침을 먹고, 자기 개인 용품을 챙겨 봉고차를 타고 다이빙 요트를 운영하는 리조트로 출발한다. 이집션 크루들이 요트에 공기통을 비롯해 각종 준비를 마치면 요트를 타고 다이빙 포인트로 출발한다. 요트 2층 그늘에서 잡담을 하거나 쉬다가 포인트에 도착하면 준비된 공기통을 메고 다이빙을 한다. 첫번째 다이빙을 마치면 준비된 점심을 먹고 쉬다가 다시 포인트를 바꿔 2차 다이빙을 한다. 그리고 오후 해가 기울 때쯤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 저녁 식사를 하고 개인적인 시간을 보내거나 사람들과 맥주를 마시며 놀다가 밤 늦게 잠든다. 이런 신선놀음 같은 다이빙을 하다보니 떠나는 날을 자꾸 미루게 되고 결국은 열흘넘게 머무르고야 떠날 수 있었다.


친하게 지냈던 강사님들은 아직도 자주 생각이 난다. 지금은 아프리카 잔지바르에서 다이빙샵을 차린, 다이빙을 마치고는 형동생으로 부르기로 했던 23세의 젊은 강사님, 부부가 이집트에서 다이빙 강사로 생활하면서 사람들과 허물없이 지냈던 강사님, 그리고 다른 모든 강사님들이 건강하고 오래오래 좋아하는 다이빙을 하며 행복하게 지내시길 바란다. 잔지바르에 다이빙샵을 차리면 가보기로 했는데 언제쯤 갈 수 있을까? 오늘 저녁에는 오랫만에 안부메일이라도 써볼까 싶다.


거기에 머무를 동안은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생각도 없이 그냥 하루하루를 즐길뿐이어서 남은 사진이 거의 없어서 무척 아쉽다.


요트가 리소트 소속이라 리소트 손님들하고 같이 다이빙을 한다.




다이빙 포인트가 섬이나 육지 주변이 아니라 홍해 바다 한가운데 형성된 산호 군락들이 포인트다.

수심에 따라, 빛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보이는 물빛이 정말 환상적이었다.


다이빙 포인트마다 후루가다에서 출발한 다이빙 요트들이 몇 대씩 모여드는데 포인트가 워낙 많아서 그리 번잡하진 않다. 2,30분 내에 있는 가까운 포인트도 있고 1시간 이상 가야하는 먼 포인트도 있다.


수면 가까이 온 돌고래 한 마리


후루가다는 돌고래를 볼 수 있다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돌고래를 볼 수 있는 곳이야 많겠지만 후루가다에서는 돌고래나 물고기들을 잡지 않기 때문에 돌고래들이 다이버에게 가까이 와서 같이 놀아주기도 한다. 특히 돌고래가 자주 나오는 포인트는 이름도 '돌핀 하우스'라니...


내가 후루가다에 갔던 5월은 홍해의 바다가 맑아지기 시작하는 시기라 시야가 좋을 때는 아니라고 했다. 6월부터가 수온도 높아져서 따뜻하고 물도 더욱 맑다고 한다. 5월의 홍해는 햇볕이 강렬했지만 다이빙을 하고 나오면 살짝 춥게 느껴졌다. 게다가 돌고래들은 새끼를 낳은지 얼마 안되는 시기라 예민해서 다이버에게 가까이 오는 경우가 드물었다. 어느 날인가 그냥 지나가는 돌고래 무리들을 아쉽게 멀리서 보고 다이빙을 마쳤는데 아직 물속에 있었던 다이버들에게 가까이 와서 한참 빙글빙글 돌면서 놀다가 갔다고 했다. 직접 보지 못해서 아쉬웠는데 그 분이 찍은 동영상을 보니 위로가 되는게 아니라 더 아쉬워졌다.


후루가다의 한국인 다이빙샵 우리집 전경

건물 전체가 우리집은 아니고 현지 숙소의 일부를 계약하여 다이버들의 숙소로 운영하고 있는 듯하다.

방 종류도 도미토리부터 가족룸까지 다양하고 도미토리는 가격이 저렴해서 큰 부담이 없었다.


다이버들이 다이빙을 마치고 배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다.


다이빙을 하느라 찍은 사진도 거의 없는데 그나마 몇 장 있는 사진을 보니 후루가다에서 보낸 시간들이 무척 그리워진다. 오늘은 하루종일 이런 상태로 지낼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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