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 오전 푸에르토 몬트에서 푼타 아레나스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푸에르토 몬트는 칠레의 로스라고스의 주도이며 인구도 20만명이 넘는 큰 도시이기 때문에 크진 않지만 현대식의 훌륭한 공항이 있었다.
이날 탓던 비행기는 남미의 저가항공사인 SKY항공이었는데 기상이 나빠서인지 연착되었다. 남미의 항공사 중에서는 LAN항공이 가장 크고 유명하지만 거의 독점이다시피해서 가격이 무척 비쌌다. SKY항공도 유럽의 저가항공사에 비해서는 매우 비싼편이다. 남미에서는 왠만한 장거리 이동이 아니라면 버스를 타는 편이 나을 수 있다.
푸에르토 몬트에서 푼타 아레나스까지 비행시간이 세시간 정도였는데, 구글맵의 길찾기로 검색해보니 칠레에서 아르헨티나를 경우해서 다시 칠레로 들어가는 방법으로 33시간, 2600km가 나왔다. 버스로 이동한다면 실제로는 훨씬 더 긴 시간이 걸릴 것이다.
아담하고 깔끔하게 지어진 공항. 남미 색채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 비행기는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를 출발해 푸에르토 몬트에서 잠시 정착했다가
푼타 아레나스까지 간다.
푼타 아레나스는 칠레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도시이며, 아르헨티나의 우수아이아에 이어 두번째로 세계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도시이다. 어느 도시가 세계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도시냐를 두고 두 나라가 신경전을 벌였다고 하는데 칠레에서는 우수아이아가 작아서 도시라고 할 수 없다는 주장을 했지만 우수아이아의 인구가 5만명을 넘김으로써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고 한다.(푼타 아레나스는 10만명이 훨씬 넘는 제법 큰 도시다.) 실제 푼타 아레나스는 남위 53도 10분, 우수아이아는 54도 48분으로 박빙이다.
푼타 아레나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택시에서 운전사가 도로 옆으로 펼쳐진 바다를 가리키며 '마젤란 해협'이라고 알려주었다. 스페인에서 출발한 마젤란이 대서양을 건너고 남미 해안선을 따라 내려오다가 대륙의 남쪽 끝 해협에서 폭풍우를 만났는데, 한척이 침몰하고 가까스로 고비를 넘겼다는 거친 바다가 이 곳 마젤란 해협이다. 이 곳을 지나서 나온 거대하지만 잔잔한 바다를 태평양이라 이름지었다는 일화가 있다.
지금 택시로 지나고 있는 이 곳이 이번 여행의 가장 남쪽이며, 한국에서 가장 먼 곳일거라는 생각에 잠겨 정작 사진 찍는 것은 잊어버렸다.(우수아이아가 지구상에 있는 가장 남쪽의 도시이긴하지만 그런 상징성을 제외하면 그다지 매력이 없었던 점, 물가가 매우 비싸다는 점 때문에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푼타 아레나스에서 버스를 타고 푸에르토 나탈레스에 가기 전에 칠레 페소로 환전을 하고, 이 먼 곳에서 신라면을 판다는 한국 식당을 찾아 푼타 아레나스의 거리를 헤매고 다녔다. 분명히 얼마전에 누군가 올린 여행기에서 따끈한 신라면 사진을 봤는데 가게를 좀처럼 찾을 수 없었다. 흐리고, 추운 이 곳에서 한국의 얼큰한 라면맛을 보려고 했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지만 대신에 엄청나게 큰 칠레의 샌드위치(우리나라에서는 햄버거라고 불릴 모양)로 든든하게 배를 채웠다.
아침부터 비행기와 버스에 녹초가 된 몸으로 도착한 푸에르토 나탈레스는 이미 어둠에 잠겨 있었고 차가운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저장해 놓은 구글맵의 이미지를 보고 어두운 길거리를 헤매가며 겨우 찾아들어간 숙소는 훈훈한 열기로 가득했고 매니저가 친절하게 맞아주었다. 여행중에 가격대비 훌륭했던 숙소중에 몇 곳을 꼽자면 반드시 넣고 싶은 숙소가 바로 이곳이었다.
숙소에서 키우던 개가 차우차우였다. 보라색 혓바닥을 보니 틀림이 없었다. 이렇게 먼 곳에서 중국 토종견이라는 차우차우를 보니 괜히 반가웠다. 풍성하고 빽빽한 목의 갈기와 곰처럼 생긴 커다란 머리가 무척이나 귀여웠다. 가까이서 스다듬어도 가만히 있다가 영 귀찮아지면 스윽 일어나 자리를 피할만큼 온순하고 착했다.
파타고니아 여행에서 빠뜨릴 수 없는 유명한 곳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트레킹 코스인 '토레스 델 파이네'와 세계에서 가장 큰 빙하 '모레노', 그리고 유네스코가 선정한 세계 5대 미봉인 '피츠로이'가 있다.
푸에르토 나탈레스에서 바로 갈 수 있는 곳은 토레스 델 파이네이므로 숙소 매니저에게 트레킹을 문의했다. 하지만 아직 산장이 오픈되려면 일주일정도 더 기다려야 한다는 답변을 받았다. 텐트를 빌려 캠핑을 해도 되지만 동계용 침낭과 오리털 패딩도 없이 캠핑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는 수 없이 산장이 열릴 때까지 모레노 빙하와 피츠로이에 먼저 다녀오기로 했다.
빙하가 떠 있어도 어색하지 않을 푸에르토 나탈레스의 바다
푸에르토 나탈레스의 조그만 시내와 항구를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봄은 오는지 나무에는 새잎이 돋기 시작했지만 날씨는 우리나라의 겨울날씨만큼 춥고 쌀쌀했다.
시내를 걷다가 찾아들어간 레스토랑. 우연히 메뉴 델 디아가 있다는 간판을 보고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을 때 생각이 나서 들어갔다.
따끈하고 보드라운 빵도 좋았지만 추운 겨울날씨에는 뜨끈한 수프가 최고였다. 고기 육수에 각종 야채가 들어간 스프는 우리나라의 갈비탕이나 곰탕과 비슷한 맛이어서 하얀 쌀밥을 말아 적당히 익은 김치와 뚝딱 먹고싶은 생각이었다.
식전빵과 스프, 메인요리에 디저트까지 그다지 비싸지 않은 가격에 맛 본 훌륭한 식사였다. 괜히 기분이 좋아져 레스토랑 이름(EL BOTE - 보트)도 멋져보였다.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았다면 유치한 이름이라고 투덜거렸을텐데.
마지막으로 앞으로 있을 거친 트레킹을 위해 트레킹화를 샀다. 그동안 신었던 신발은 회사를 그만두고 제주도 올레길과 한라산 등반을 위해 샀던 저렴한 트레킹화였다. 고급스런 고어텍스도 아니고 가죽이라 젖으면 잘 마르지도 않는, 장기여행에는 적합하지 않은 신발이었지만 1년동안 내 발을 감싸느라 엄청나게 고생했었다.
불과 1년만에 밑창이 닳아서 맨들맨들해졌지만 그냥 버리기가 아쉬웠다. 원래 물건에 애착을 갖지 않는 성격이지만 이 헌신발에는 무척 애착이 가서 이걸 남은 여행동안 들고다닐까 생각까지 했었다. 그러지는 못하고 쓰레기통에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 기념사진으로 마무리했다.
지금은 이때 샀던 트레킹화가 똑같이 낡아있다. 회사에서 나눠준 새 트레킹화를 집에 고이 모셔두고도 칠레에서 온 이 트레킹화와 정이 들어서 아직도 산에 갈때 신고 다닌다. 물건에 애정이 생기는 것은 비싸거나 새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했던 추억이 그 물건에서 고스란히 느껴지기 때문이다. 아직도 집 출입구 한쪽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신발을 볼 때마다 여행에서의 기억이 떠오른다. 이런 물건이 하나 둘 사라져가는 것이 안타깝다.
신발을 처음 샀을 때 찍어둔 사진이 스마트폰에 남아있다.
셀카 한장도 없는 스마트폰으로 신발은 왜 찍어뒀는지... 참 별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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