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소 '남미사랑'에서 2주를 뭉기적대며 남미 여행경로를 고민했다. 어떤 날은 운이 좋으면 해변에서 고래를 볼 수 있다는 푸에르토 마드린으로 갈까 했다가, 생각을 바꿔 비행기를 타고 지구에서 가장 남쪽에 위치한 도시 우수아이아로 갈까 하기도 했다. 그러다 숙소 주인장이 추천해준 '산 카를로스 데 바릴로체'로 가기로 결정했다.(이렇게 꼬여버린 것은 파타고니아의 유명한 트레킹 코스인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이 겨울동안 폐쇄되어서 9월말이 되어야 오픈하기 때문이다.)
바릴로체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약 1700km 떨어진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유명한 휴양도시다. 여름에는 낚시와 수영, 겨울에는 스키를 탈 수 있고, 산악 트레킹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바릴로체는 남미의 스위스라고 불리며,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나우엘 우아피 호수와 접해 있는 조그만 도시이다.
약 400년 전 그리스도교를 전파하기 위해 남미에 온 성직자들에 의해 외부에 알려졌고, 지금으로부터 약 100여년 전 유럽의 이민자들이 이곳에 터를 잡으면서 본격적으로 도시로 발전했다고 한다. 유럽 이민자들의 영향인지 바릴로체의 가옥들은 유럽의 목조건물과 닮아있고, 이곳의 특산품도 수제 초콜릿이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저녁에 출발한 버스는 24시간도 더 지나서 그 다음날 오전에 바릴로체에 도착했다. 바릴로체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비해 훨씬 남쪽이라 조금 더 추웠지만 봄이 오는지 나무마다 연분홍 꽃이 가득했다.
이튿날 나우엘 우아피 호수 투어에 나섰다. 호수 주변을 자전거를 빌려 다니는 방법도 있지만, 이른 봄이라 자전거로 다니기에는 추운데다 체력적으로도 부담이 될 것 같아서 투어 보트를 타기로 했다. 바릴로체 시내에서 보트를 타는 선착장까지는 꽤 거리가 있어서 버스를 타고 노선의 거의 마지막까지 가야한다.
선착장에서 보트를 예매하고, 출발하기까지 남는 시간에 주위를 걸었다. 선착장 주변마저도 고개를 돌리는 곳마다 달력사진이 펼쳐져 있었다.
남미의 스위스라 불리지만 그 이상이 아닐까 싶었다. 호수를 둘러싼 설산들, 맑다 못해 스스로 파란빛을 내는듯한 호숫물... 내가 본 스위스의 어떤 호수보다 깨끗하고 아름다웠다. 오늘의 투어가 기대되기 시작했다.
일부러 인공적인 것을 배제한 듯한 선착장. 기본적인 편의시설조차 없지만 이런 깨끗한 자연을 보존하기 위함이라면 충분히 감수할만 하다.
투어는 단순하다. 섬 두개에 들러서 짧은 트레킹을 하고 돌아오는 것이다. 이날의 투어에 대해 구구절절히 기록을 남기는게 불필요하게 느껴진다. 사진을 올려두고 가끔 마음이 불편하고 복잡해질때 보기만 한다해도 충분하지 않을까.
특이한 나무가 자란다는 첫번째 섬에 닿았다. 이 나무는 굉장히 단단하고 무거워서 물에 가라앉는다고 한다. 나무를 두드려보니 마치 돌을 두드리는 듯 했다. 얼마남지 않아 보호되고 있다는 이 나무가 이룬 숲을 산책하는 것으로 이 섬에서의 투어를 마쳤다.
겉보기에는 보통의 나무와 다를 것이 없어보이지만 단단하기가 돌과 같다.
첫번째보다 좀 더 크고, 섬안에 뭔가를 재배하는 농장이 있는 두번째 섬에 닿았다. 풍경에 빠져 가이드의 설명은 신경을 쓰지 않아서 자세한 내용을 잘 모르겠다.
사진에서, 컴퓨터 모니터에서 보던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있다.
좀 더 어렸을 때, 화려하고 번화한 유명 도시를 동경했던 때도 있었다. 그리던 도시에 갔을 때는 무척 좋았지만 조금 지나고나면 남아있는 감동도 감흥도 없었다. 나는 도시의 화려함이나 유행을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여행을 하다보면 그동안 내가 잘못 알고 있었던 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어떤 사람과 쉽게 친해지고 어떤 사람과 거리를 두게 되는지, 어떤 것에 유독 신경을 쓰고, 어떤 것에 무던한지 낱낱이 알게 된다. 좋아하는 사람의 꾸밈없는 모습을 보려면 여행을 가야한다는 말도, 스스로를 알고 싶으면 여행을 가야한다는 말도 모두 옳다.
선착장 근처에 있는, 바릴로체에서 유일한 별 다섯개짜리 숙소, 야오야오 호텔
이른 봄의 해는 금새 기울었다. 해가 저물어갈 무렵, 출발했던 선착장으로 돌아왔다. 큰 기대없이 '토레스 델 파이네'에 가기 전에 며칠 시간이나 보내려고 왔던 바릴로체는 앞으로 남은 파타고니아 여행을 무척 기대하게 만들었다. 바릴로체는 파타고니아의 다른 어떤 곳 못지않게 청정하고 깨끗한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잘 알려진 '토레스...'나 '엘 찰튼'이 마초적인 남성같이 거친 파타고니아의 자연을 느낄 수 있는 곳이라면, 바릴로체에서는 그보다는 훨씬 매너있고 부드러운 남성같은 파타고니아를 만날 수 있다.
'세계여행(2012년) > 남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칠레에서의 해물탕 - 푸에르토 몬트 (0) | 2015.03.29 |
---|---|
파타고니아의 변덕 - 바릴로체 (0) | 2015.03.28 |
아름다운 서점, 엘 아테네오 - 부에노스 아이레스 (0) | 2015.03.23 |
까미니또, 라 보카 - 부에노스 아이레스(4) (0) | 2015.03.23 |
조금씩 빠져들다 - 부에노스 아이레스(3) (0) | 2015.03.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