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중순 여행의 마지막 방문지 오세아니아로 향했다. 태평양을 건너 북반구에서 남반구로 가야는 길은 무척이나 멀었고 멕시코시티에서 뉴질랜드로 가는 직항편도 없었다. 멕시코시티에서 미국 LA로 가서 오클랜드로 가는 비행기로 갈아타야 했는데 비행기 탑승시간만 20시간에 달했다. 장거리 비행끝에 이른 새벽 뉴질랜드의 가장 큰 도시 오클랜드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몸도 마음도 완전히 지쳐있었다.


입국장 출입문부터 여기가 뉴질랜드임을 알리려는 듯 마오리족의 문화를 표현하고 있다.


공항버스에서 내려 시내 햄버거 가게에서 햄버거를 깔깔한 입속으로 밀어넣고 예약한 호스텔에 짐을 내렸다. 예약한 곳은 뉴질랜드와 호주 전역에 있는 커다란 호스텔 체인이었는데 지금까지 머물렀던 개인이 하는 소박한 호스텔이 아니라 마치 대학교의 커다란 기숙사 같아서 쉽게 적응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멕시코에 비해 뉴질랜드의 물가가 훨씬 높다보니 가격도 만만치가 않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실망스러웠던 것은 여행자들의 분위기였다.


배낭여행자들이 많은 곳일수록 여행자들간 단정짓기 어려운 동질감과 전우애 비슷한 것이 느껴진다. 서로에게 친절하고 정보를 교환하거나 돕는데 주저함이 없다. 그런데 이 호스텔에 묵는 사람들은 대부분 젊은 백인여행자들로 처음보는 사람은 스윽 한번 보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단지 나이가 제법 든 허름한 동양인 배낭여행자를 경계하는 것일수도 있지만 엊그제까지 있던 곳과 너무나 다른 분위기가 적잖게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괜히 멕시코가 그리워졌다. 소매치기를 당하고 경찰서까지 다녀와야했던 그 멕시코가.


여행 막바지에 이르러 카메라는 이제 한계에 달했던 것 같다. 맑은 날씨에도 촛점이 맞지 않은 사진이 점점 많아졌다.


면적은 우리나라의 2.7배이면서도 인구는 10분의 1도 되지 않는 뉴질랜드는 북섬과 남섬으로 나뉘어지는데 큰 도시들은 대부분 북섬에 위치해있다. 뉴질랜드에서 가장 큰 도시인 오클랜드는 북섬의 북쪽에 있고, 수도인 웰링턴도 북섬의 남쪽에 있다. 뉴질랜드에 머무르는 동안 어떤 경로로 여행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가고싶은대로 다니기에는 여행시간이 얼마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행 스타일이나 기호로 보면 일정이 빡빡하더라도 산과 호수, 빙하로 덮인 남섬으로 내려가야 했다. 하지만 인터넷으로 찾아 본 뉴질랜드 남섬의 경치와 트레킹 코스들은 그다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안데스와 파타고니아에서 이런 류의 경치는 눈이 호강할만큼 했으니 뉴질랜드에서는 보름동안 북섬에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뉴질랜드는 워낙 요트인구가 많고 강국이기도 해서 세계 대회에서 우승한 배의 모형을 길가에 전시해놓고 있었다. 흡사 요트가 아니라 우주선이나 비행선처럼 생겼다.


여행사에서 버스를 예매하고 시내를 돌아다니다 해양박물관에 들어가게 되었다. 정확하게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뉴질랜드 근해에 사는 물고기들의 표본부터 초기 이민자들이 타고 왔던 배들의 모형, 바다에서 살아가는 뉴질랜드 사람들의 삶을 보여주는 여러가지 것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특이했던 것은 추가로 돈을 내면 요트를 타고 근처 바다를 한바퀴 돌아보고 오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언제 요트를 타고겠는가 싶어서 이 프로그램을 신청했다.


최다 초점이 맞지 않다. '장기여행에서 카메라는 튼튼하고 좋은 것으로' 라는 교훈을 얻었다.


요트 뒤로 보이는 크루즈 모양의 커다란 건물은 모두 고급 호텔이나 리조트였다.



프로그램으로 운영하는 요트는 유선형의 잘빠진 배가 아니라 오래된 목조선박이었다. 흰색 상의와 검은색 하의를 맞춰입은 사람들이 돛을 내리고 키를 조정했는데 모두가 나이가 꽤 많이 들어보였다. 과거에 무슨 일을 했던 사람들인지 모르겠지만 요트를 좋아하기 때문에 은퇴해서도 요트와 관련된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나이가 들어가는 이들의 삶이 꽤 부러웠다.



그리 높은 건물이 없음에도 바다에서 보는 오클랜드의 도심은 볼만했다. 


얼마전 서울시에 재개발되는 아파트 층수를 35층에서 훨씬 높게 올려달라는 요구가 있다는 기사를 보았다. 재개발과 이해관계에 있는 사람들은 고층 아파트를 많이 지어서 멋진 스카이라인을 만들면 관광객 유치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수많은 관광객들이 몰리는 유럽의 도시들 중에 멋진 스카이라인을 가진 도시가 있을까? 고층건물이 늘어선 뉴욕, 홍콩, 싱가폴, 상해 등등으로 여행을 가는 사람들은 단지 스카이라인을 보러 가는 것일까? 여행을 가는 가장 큰 이유는 그 도시와 국가 안에 녹아있는 문화를 보고 느끼러 가는 것이다. 우리나라 관광객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국과 일본사람들이 자기네 나라에 훨씬 더 많은 고층건물을 두고 우리나라에 보러 온다고? 게다가 단지 아파트 건물일뿐인데? 타워팰리스나 삼성동 아이파트를 보러 가는 관광객이 있던가? 말도 안되는 이야기다.


이 분은 얼핏봐도 노인에 가까워 보인다. 그래도 돛줄을 당기는 팔뚝이 젊은이 못지않다.





바다는 조용해서 들리는 소리라고는 가끔 바람에 돛이 펄럭이는 소리와 뱃전에 물살이 부딪히는 소리, 목조요트가 삐걱대는 소리뿐이었다. 거대한 엔진이 달린 멋들어진 요트가 아니라서,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는 낡은 목조요트라서 정말 다행이었다. 사람들도 이것을 느끼고 있는듯 모두 조용히 입을 닫고 있었다.



오클랜드를 상징하는 건축물인 높이 328미터의 스카이 타워가 우뚝 솟아있다.



액티비티의 천국 뉴질랜드답게 거대한 교각에서 번지점프를 하고 있다. 뉴질랜드에서는 어떤 액티비티라도 할 수 있다. 돈만 충분하다면...




수십년동안 요트를 몰아왔을 이들은 노인들임에도 아직 늘씬한 체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이가 들어서도 젊게 사는 방법은 주름제거 크림과 보톡스가 아니라 나이를 과시하지 않는 마음과 꾸준한 운동이다. 주름은 경험과 경력의 훈장일뿐...



한시간 가량 요트 탑승을 마치고 박물관 관람을 시작했다.


뉴질랜드 이민자가 가져온 오래된 트렁크. 수납공간이 잘 나눠진게 생각보다 훌륭하다.



대회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둔 요트. 


백악기 때부터 대륙에서 떨어진 뉴질랜드는 독특한 생태계를 가지고 있어서 이를 상징하는 동식물들이 많다. 사람들이 이주한 뒤로 많은 동식물들이 멸종되었다고 하는데 뉴질랜드의 국조인 키위새도 마찬가지로 점차 감소하고 있다. 특히 뉴질랜드에는 뱀이 없고 수풀 곳곳에 커다란 양치식물들을 볼 수 있는데 뉴질랜드를 상징하는 마크중에 하나가 위 사진에서 요트 옆면에 그려진 양치식물을 형상화한 것이다. 


SF영화의 비행선을 보는 듯한 요트


지구 반바퀴를 돌아 유럽과 뉴질랜드 사이를 다녔던 배의 모형


박물관을 나와서 찾아간 곳은 수산시장이다. 시장구경은 세계 어느 곳이나 재밌지만 수산물로 유명한 뉴질랜드니 더욱 기대가 되었다. 예상대로 다양하거 커다란 수산물들이 무척이나 많았다. 다만 가격 또한 만만치 않다는 것이 아쉬울뿐...



연어, 다랑어, 돔(?) 류의 커다란 생선들이 가득하다. 워낙 큰 종류의 물고기가 많이 잡혀서 그런지 자잘한 생선들은 보기 힘들다.


바닷가재들... 우리나라에 비해서는 저렴한 편이지만 배낭여행자가 선뜻 사기에는 어려운 가격이라 입맛만 다셨다.


넌 누구냐?



남미에서도 그랬는데 커다란 생선에서 살을 발라내고 남은 머리나 뼈 부분은 아주 싸게 판다. 큰 생선을 마리 단위로 사는 사람이 많이 않으니 살만 발라서 무게 단위로 잘라 팔기 때문에 이런 부속물(?)들이 많이 남는 것이다. 그런데 부속물에도 살이 제법 붙어 있어서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요리가 가능할 정도다. 특히 매운탕류를 끓이기에는 아주 좋을 것 같다.



저녁식사를 위해 식당을 찾다가 눈이 번쩍 뜨이는 곳을 찾았다. 숙소 근처에 타이 음식점을 발견한 것이다. 당연히 태국에서 먹는 것보다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비싸지만 뉴질랜드의 다른 음식들보다 비싼 편은 아니었다. 여행을 가면 현지 음식을 먹는 편이지만 뉴질랜드처럼 역사가 짧고 다국적 문화가 섞인 곳에서는 그 곳만의 특색있는 음식이라고 할만한 것들이 많지 않다.


쏨땀. 파파야가 아니라 당근으로 만든건 아쉽지만 파파야로 만들었다면 가격이 무척 비싸질테니 이해할 수 있다.


스티키 라이스. 제대로 대나무 바구니(?)에 담겨 나왔다.


태국 음식하면 빠뜨릴 수 없는 파타이.

뉴질랜드에서 첫번째 날을 보냈다. 한여름은 아니지만 본격적으로 여름이 시작된 계절임에도 오클랜드의 기온은 서늘했다. 하지만 여기저기에서 들리는 영어와 흰 피부의 사람들, 깨끗하게 정돈된 거리가 쉽게 적응이 되지 않았다. 넉달동안 스페인어를 배경음악처럼 듣고 다니며 나와 비슷하게 까무잡잡한 사람들을 보고 다녀서 거기에 너무 익숙해져버린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나중에 알게되었다. 익숙해져버린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그곳에 남겨두고 왔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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