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머물렀던 기간은 딱 2주였이다. 첫인상도 좋지 않았고 날씨마저 갑자기 쌀쌀해서 그렇게 오랫동안 머무를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머무를수록 이 도시의 매력에 조금씩 빠져들었다. 남미여행 계획을 덜 세웠다는 핑계로 떠나는 날짜를 미루다보니 결국 여행하는 동안 가장 오래 머무른 도시가 되고 말았다.


그렇다고 매일매일이 시간가는줄 모르게 흥미진진했던 것은 아니었다. 양파껍질을 벗기듯 조금씩 알아갈수록 새로운 재미가 있는 도시, 시설은 좋지 않지만 자유로운 숙소, 남미여행을 한다는 사실만으로 친해진 사람들이 있어서 떠나기가 힘들었다. 다음에도 똑같이 볼 수 있는 것들은 미련을 접을 수 있지만 그럴 수 없는 것들이 더 훌훌 털고 일어서기가 어려운 법이다.


이 곳에서 일정을 하루 단위로 정리하는 것은 그다지 의미가 없기에 몇 편이 될지는 모르지만 크게 묶어서 정리하려고 한다.


아르헨티나는 스페인어권이며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했지만, 이탈리아에서 온 이민자들이 매우 많은 나라다. 그래선지 피자를 파는 곳이 매우 많다. 다양한 토핑이 올려진 미국식 피자가 아니라 치즈를 중심으로 몇가지 토핑으로 만들어진 이탈리아식이다. 육류와 유제품이 훌륭한 나라답게 치즈도 풍부하게 올려져있고 맛도 나쁘지 않지만 한국인의 입맛에 너무 짰다.


이름이 뭐더라... 낮에는 펼쳐지고 밤에는 오므라드는 꽃을 형상화했다는데...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라틴미술관(MALBA)

보려고 갔던 보테로의 작품들은 공사로 전시하지 않았는데 매표소에서는 그런 안내조차 없어서 화가 났었다. 


숙소에 문의하면 땅고를 공연하는 곳들 중에서 평이 괜찮은 곳들을 소개해준다. 내가 갔던 곳은 식사를 겸하는 극장식의 커다란 공연장이었는데 음식은 무척 훌륭했지만 땅고에 관심이 있다면 극장식 공연장보다는 작은 밀롱가 형태의 공연장을 추천하고 싶다. 극장식 공연장은 크고 시끄러워 집중도 안되는데다 아무래도 땅고라면 밀롱가가 제격이 아닐까. (밀롱가는 땅고의 기원이 된 여러 음악중에 한가지이기도 하지만, 땅고를 추는 장소를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공연장의 음식은 식전주부터 스테이크까지 모두 훌륭했지만, 스테이크는 마트에서 소고기를 사다가 숙소에서 굽더라도 훌륭했기 때문에 감탄이 나오진 않았다. 







식사가 차려지고 얼마지나면 본격적으로 땅고 공연이 시작된다. 하지만 무대까지 거리가 있고, 워낙 사람들이 많아서 집중이 되지 않았다.





다음날은 오랜만에 날씨가 좋아서 숙소에서부터 걸어서 산책을 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는 세계에서 가장 넓은 '7월 9일 거리'가 있다. 거리 중심에는 독립을 기념하는 커다란 오벨리스크가 있어서 찾기도 쉬운데 길의 폭이 무려 140m가 넘고 14차선인가 16차선인가 그랬다. (7월 9일은 아르헨티나의 독립기념일이다.)



사진으로는 그다지 넓어보이지 않지만 횡단보도에 서서 건너편을 바라보면 까마득하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머무는 동안 묵었던 숙소는 남미를 여행하는 한국인들은 누구나 알고 있는 '남미사랑'이다. 이 곳의 주인장은 '미친가족 집팔고 지도밖으로'라는 남미여행 책을 쓴 부부이며, 나도 여행을 시작하기 전에 보고 매료되었던 책이다.


몇 달째 블로그에 여행을 정리하면서 좋았건 나빴건 숙소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지는 않았다. 사람마다 기호가 다르고, 방문했던 당시의 상황이 따르기 때문에 누군가 이 블로그를 보고 그곳에 대해 선입견을 갖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처음으로 블로그에 숙소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은 여기서 2주를 보냈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이 곳의 분위기를 이야기할 수 있겠다 싶어서이다.


이 곳은 전적으로 배낭여행자들을 위한 숙소다. 유럽의 한인민박처럼 생각한다면 이곳을 찾으면 안된다. 아침은 매니저분들이 간단한 빵과 잼들을 부엌에 챙겨주지만 유럽의 민박처럼 아침저녁 한식으로 차려주지 않는다. 저녁은 여행자들끼리 그날 먹을 것들을 사서 요리해서 먹는다.(외국인들이 운영하는 대부분의 호스텔들이 이런 시스템이다.)


나같은 여행자에게는 한식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저렴한 숙소와 여행자들끼리의 분위기가 훨씬 중요하다. 오랜 여행으로 한식이 그립다면 한인들이 사는 지역에 가서 제대로된 한식을 배부르게 사먹으면 된다. 게다가 호스텔에서 한식을 끼니마다 차려준다면 가격이 몇 배나 뛸텐데 아르헨티나의 훌륭한 소고기를 두고 한식을 꼭 먹어야 할 필요도 없었다.


숙소 휴게실 베란다에서 본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골목길


내가 있던 2주간, 여행자들은 매일 저녁에 소고기와 와인 한병을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각자 사온 고기와 와인들을 맛보고 품평하는 것도 재밌다. 그리고 와인을 마시며 밤늦도록 이야기를 했다. 가끔 아껴둔 소주를 풀기도 하고, 싸매둔 김치를 꺼내놓기도 한다. 내일 떠나는 여행자가 있다면 아쉬워하고 새로 들어온 여행자를 환영하기도 한다. 가끔 주인장이 합세해 새벽까지 술을 마시기도 했다. 숙소의 시설은 내세울게 전혀 없지만 이런 분위기 때문에 나는 이 숙소가 무척 좋았다.


여행하는 동안 묵었던 숙소들 중에서 잠시 스쳐가는 여행자들끼리 친해질 수 있었던 유일한 숙소였다. 내가 묵었던 이후로 벌써 2년 반이 지났기 때문에 지금은 어떻게 바뀌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그리워진다.


가격보다는 좋은 시설을 원한다면, 여행자끼리 어울리는 것보다 혼자만의 시간을 원한다면, 아침저녁으로 한식을 원한다면 이 곳은 그다지 좋은 선택이 아니다. 사실 이것들을 모두 충족하려면 남미에서 배낭여행을 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숙소의 무쇠 플레이트에 소고기를 굽는다.

처음에는 덜 익거나 좀 태우기도 했지만 매일 하다보니 나중엔 꽤나 훌륭하게 구울 수 있었다.



구워진 소고기를 와인과 여행자들끼리 함께 나눠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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