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첫인상은 매우 좋지 않았다. 24시간만에 푸에르토 이구아수에서 출발한 버스에서 내려 피곤한 몸을 이끌고 탄 지하철A선은 백 년은 된듯(남반구에서 가장 오래된 지하철이며, 실제 1913년 개통되었다니 여행당시 99년째였다) 무척 낡았는데 심지어 전동차가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다. 게다가 잠시 후, 다른 칸에서 다가온 여자에게 소매치기를 당할뻔했다. 남미의 소매치기에 대해 워낙 많이 들어왔기에 조심하고 있어서 다행히 훔치기 전에 막을 수 있었는데, 소매치기 여인은 오히려 막 뭐라고 퍼붓고는 다른 칸으로 가버렸다. 어안이 벙벙했다. 아무리 남미라하더라도 이렇게 대놓고 소매치기할 줄은 생각지 못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현지인들도 백팩을 앞으로 매고 다니는 사람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여기는 남미'라는 생각에 다시 한번 정신이 바짝 들었다.


금전적으로 크게 손해를 본다거나 신체적으로 상해를 입지 않는다면 가끔은 정신이 번쩍 들만한 일을 만나는게 오히려 큰 피해를 입지 않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경험상 이런 일은 항상 정신적으로 느슨한 상태일 때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 날은 숙소에 틀어박혀 나가질 않았다. 장거리 버스로 피곤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길거리로 나가기 위해서는 약간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여행은 다음날부터 시작되었다.


유럽풍 건물들이 즐비한 플로리다 거리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남미의 파리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인구의 90%가 백인이며, 과거 내전을 피해 온 왕가의 영향으로 유럽풍 건물들이 많은 도시기 때문이다. 특히, 쇼핑 지구인 플로리다 거리를 걷다보면 표면적으로는 유럽의 도시인지, 남미의 도시인지 잘 구별이 가지 않는다. 어떤 여행자들은 이런 점 때문에 이 도시를 유럽의 여느 도시처럼 생각하고, 아름다움을 칭찬하기도 한다. 하지만, 유럽에서 수개월을 보내고 왔기 때문인지 나에게는 크게 아름답지도, 흥미롭지도 않았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5월 광장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아이스크림이 유명하다고 했다. 실제 현지에서 유명한 프렌차이즈도 있고, 다양한 아이스크림 가게들이 곳곳에서 성업중이었다. 하지만, 이탈리아에서 맛본 유명 젤라또들에 비해서 이 곳의 젤라또들은 질적으로, 가격적으로 그다지 뛰어나다고 하기는 어려웠다.


8월 말에 도착한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우리나라 늦가을 정도의 날씨였다. 30도를 넘는 브라질에서 하루를 꼬박 버스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오니 완전히 다른 기후인 것이다. 여행을 한 뒤로도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 새삼 남미대륙의 거대함이 느껴졌다.


이 날은 무척 날씨가 좋아서 늦가을 날씨였음에도 전날 소매치기로 인한 우울한 기분도 사라졌다. 하지만,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있었던 2주 중에서 날씨가 좋았던 날들은 얼마되지 않았다. 8월말의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춥고, 습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다른 하나의 명물은 일요일마다 산텔모 지역에서 열리는 벼룩시장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 옆으로 여러가지 장신구, 옷, 옛날 음반 등을 팔거나 거리의 악사들이 연주를 하고 있었다. 규모로는 세계 어느 벼룩시장 못지않게 컸지만 제품의 다양성이나 만듦새는 치앙마이의 주말시장에 비해서는 떨어졌다. 아무래도 섬세하고 아기자기한 제품을 만드는 솜씨는 동양인들이 훨씬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비교적 그렇다는 것이지 산텔모의 벼룩시장은 여행자가 시간을 내서 구경할만한 충분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나는 여기서 저렴한 털실로 만든 모자와 장갑을 샀다. 그동안 주로 더운 지방을 여행했기 때문에 방한용품이 거의 없었을뿐더러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생각보다 훨씬 추웠다. 게다가 앞으로 갈 예정인 파타고니아는 여기와는 비교하기 힘들만큼 추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봤던 수많은 거리의 악사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솜씨라고 생각하는 기타연주자

기타 케이스 안에는 꽤나 많은 동전과 지페들이 있었다.



산텔모 지역도 치안이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라고 한다. 벼룩시장이 선 골목은 그다지 문제될 것이 없지만 사이의 작은 골목으로 들어간다면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고 했다. 게스트하우스에 머문다면 그곳의 주인이나 매니저로부터 여러 번 주의를 듣게 될 것이다.


산텔모 벼룩시장을 둘러보다 사람들로 붐비는 레스토랑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 주위 사람들이 먹는 것을 살펴보고 대충 음식을 시켰다. 맛은 나쁘지 않았으나 가격이 제법 비쌌다. 브라질만큼은 아니지만 아르헨티나도 물가가 낮지는 않았다. 게다가 유럽 문화라 그런지 저렴하게 먹을 수 있는 길거리 음식이 거의 없었다.(기껏해야 땅콩이나 아몬드에 카라멜을 묻혀서 파는 심심풀이 음식밖에)


만두와 비슷한 음식인 엠빠나다를 튀긴듯한 음식


빵에 고기와 야채를 채운...


가지속에 고기와 치즈를 채운...


음식사진들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모든 음식에 고기가 들어가 있다. 아르헨티나는 대서양으로 긴 해안선을 가진 나라지만 해산물로 만든 음식은 거의 없고 오로지 고기, 그 중에서도 쇠고기 중심의 음식들이 많다. 그럴 수 밖에 없는게 아르헨티나는 4천만이 넘는 인구보다도 소의 수가 더 많다고 알려진 나라이며, 1인당 식육소비량이 세계 1위인 나라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목장이 많에 그런가 위키백과에 찾아보니 세계 8위인 국토면적의 40%가 목장이나 방목지라고 한다.


아르헨티나의 소고기는 어느 나라보다도 뛰어났다. 여행을 하면서 동남아와 유럽, 오세아니아의 여러 나라에서 소고기로 만든 음식을 먹거나 직접 소고기를 사서 구워 먹었지만 아르헨티나의 소고기에 필적할만한 곳은 없었다. 심지어 인구보다 소를 많이 기르기 때문에 가격 또한 무척 싸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머물었던 기간동안 매일 저녁은 소고기 스테이크를 만들어 먹었는데 와인 한병과 배부르게 먹을 만큼의 소고기를 사도 한화로 만원이 채 되지 않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소고기가 물릴지경이었다. 



산텔모의 벼룩시장을 보고 숙소쪽으로 오다보니 큰 길을 막아놓고 뭔가 축제 같은 것을 하고 있었다. 축제의 대부분은 먹거리를 파는 것이었는데 여기서 파는 음식도 대부분 소고기로 만든 것들이었다.



아르헨티나 인구의 대부분은 백인계이며, 이들은 이탈리아와 스페인뿐만 아니라 유럽 각지에서 온 이민자 혹은 그들의 자손들이다. 그렇기에 이들은 자신들이 유럽인이라는 생각이 강하며, 가끔 인종차별적인 우월감을 가진 사람들도 있다. 대부분이 혼혈이거나 흑인들이라 아프리카와 남미 원주민, 유럽의 문화가 혼합된 독특한 색깔을 지닌 브라질과는 마치 다른 대륙에 속한 나라처럼 달랐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꽤나 무뚝뚝해서 브라질 사람들 같은 친절함도 없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을 다 묻어버리는 아르헨티나만의 특별한 문화가 탱고다. 운좋게도 내가 방문한 이 시기는 일년에 한번 있는 탱고 페스티벌이 열리는 기간이었다. 저녁에는 탱고 페스티벌이 열리는 우리나라의 코엑스 같은 전시장을 찾아갔다. 글이 너무 길어져서 다음편으로 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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