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리장꾸청 둘러보고 다음으로 간 곳은 꾸청의 북쪽에 있는 수허고전(Shu he gu zhen, 束河古鎮)이었다. 리장꾸청 근처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근처에서 내린다음, 표지판을 보고 조금 걸어가면 수허고전에 닿을 수 있다.


먼저 이렇게 생긴 문이 나오면 계속 쭉 걸어들어간다.


수허구전임을 나타내는 고풍스러운 문이 나타난다.



어제도 날씨가 나쁘진 않았지만 오늘은 하늘이 화창하게 개었다. 리장에 도착한 후 처음으로 구름이 걷힌 위룽쉐산 봉우리를 볼 수 있었다. 내일은 위룽쉐산에 갈 예정인데 계속 날씨가 맑기를 바랬다.



리장은 아직도 한족보다 소수민족들이 더 많이 살고 있는 곳이라고 한다. 여러 소수민족들 중에서도 나시족이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들 나시족의 언어로 수허구전을 '사오우'라고 하며 '높은 봉우리 아래에 위치한 촌락'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수허고전이 역사적으로 가치있는 이유는, 이곳이 윈난에서부터 티벳 라싸까지 이어진 차마고도의 여러 마을 중에 아직도 완벽하게 보존된 거의 유일한 곳이기 때문이다. (두산백과 참조) 그리고, 1997년 리장꾸청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나시족 전사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칼을 만지면 행운이 있다는 속설이라도 있는지 칼만 반질반질했다.


윈난북부지방에 살았던 소수민족들은 거친 자연에 터전을 잡고 살아오면서 다른 민족들과의 전쟁 또한 수시로 벌어졌기에 성향이 매우 호전적이었다고 한다. 순수하고 착하지만 자신의 굴욕은 참지 않기 때문에 지금도 종종 사건사고가 발생한다. 뒤에 샹그릴라의 숙소 주인에게 들은 바로는 굴욕을 참는 것보다 감옥에 가더라도 그것을 갚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을 한다고 했다. 실제로 리장을 벗어나 샹그릴라나 더친 같이 작은 도시로 들어가면 허리에 작은 칼을 차고 다니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었다.



수허구전에도 소원을 비는 나무판들이 수없이 매달려 있었다.


수허구전 입구에서 천천히 걸어들어가면 리장꾸청과 마찬가지로 기념품을 파는 가게들이 펼쳐져 있다. 그리고, 곳곳에 건물들이 세워지고 있어서 이곳도 곧 리장꾸청처럼 변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을 벗어나 외곽에서부터 수허구전을 한바퀴 돌기로 했다.


오전부터 열공하는 중국 어린이



이곳에도 곳곳에 웨딩촬영을 하는 커플들이 있었다. 붉은 색을 좋아하는 중국인 특성상 신부의 드레스도 대부분 붉다.


할머니와 아침장을 보고 돌아가는 아이는 뭐가 그리 신나는지 할머니 주위를 춤추며 빙빙 돌았다.


레스토랑과 까페들이 늘어선 거리. 수허구전도 절반쯤은 '리장化' 되었다.


많은 까페나 식당 중에서 눈길을 끌었던 곳. 다른 곳보다 오래되어 보이는 집과 담쟁이 덩굴이 인상적이었다.




웨딩촬영하던 커플은 장소를 옮기는 중에도 떨어질 줄 모른다.


완벽하게 관광지로 바뀐 리장과 달리 수허구전은 아직도 사람 사는 냄새가 많이 남아있다.



하루 장사를 준비하는 엄마 옆에서 공부하는 아이 모습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3,40년 전에 우리 모습이, 내 모습이 저랬을거다.


수허구전내를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지우딩롱탄(九鼎龙潭, 구정용담)이라고 부르는 연못에 도착했다. 수허구전에서 가장 중요한 곳인 듯, 연못 뒤편으로 오래된 돌다리와 룽취안시(龙泉寺, 용천사)가 있다. 맑고 잔잔한 수면에 연못을 둘러싸고 있는 나무와 하늘이 거울처럼 비치고, 팔뚝만한 물고기들이 헤엄치고 있었다.




이 연못 주변으로는 많은 젊은이들이 캔버스를 세워놓고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미대생인지, 지망생인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 수십명은 될 것 같았는데 재밌게도 대부분은 수묵으로 그림을 그렸다.





수허구전의 한적한 길을 걷다가 맘에 드는 커피숍을 보고 들어가서 주인을 불렀지만 나오는 사람은 없고 청소하는 소리와 라디오 음악소리만 들려왔다. 사람들이 많지않은 시간이라 아쉽게도 영업을 시작하지 않은 듯 했다. 커피숍 담에 매달린, 고목으로 만든 자연친화적인(?) 화분이 눈길을 끌었다. 그리고, 예전 여행 중에 야자열매 껍데기를 화분으로 썼던 라오스 루앙프라방의 예쁜 집들이 생각났다.


행복한 얼굴의 남자가 예닐곱살된 아들을 태우고 밀며 가던 손수레를 시멘트 턱에서 들어 옮겨주고 '쎄쎄'하는 인사를 받았다.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지나가는데 조금 떨어져오던 그의 아내가 이방인에게 수줍게 웃으며 감사를 표했다. 중국 사람은 조금 시끄럽고 자기 중심적이라는 생각이 일반적이었지만, 현지에서 본 어떤 중국사람들은 친절하고, 잘 웃고, 감사를 표할 줄 아는 사람들도 많았다.



늪지같은 곳을 빙 둘러 지나가는데 한쪽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서 보니 몇몇 남자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동네에 사는 나이 지긋한 분들의 사랑방 같은 곳인지 우거진 나무그늘에 여러개의 소파와 의자를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 새소리가 많이 들려 찾아보니 나무에 새장을 걸어놓은 곳이 여기저기 보였다. 새소리를 들으며 나무그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게 수허구전에 사는 이들이 노년을 보내는 방식인가보다.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 처마 위에 인형처럼 생긴 무언가를 얹어놓은 곳이 많이 보였다. 악귀를 막는 도깨비 같은 것인가?


짐을 싣고 차마고도를 다니던 말들이 지금은 관광객을 태우고 투어를 다니고 있다.


수허구전에는 차마고도에 대한 작은 박물관도 있다고 했는데 바이두앱에서 검색도 잘 안되고, 구전 입구에서 봤던 허술한 관광지도로는 찾기도 쉽지 않아서 포기했다. 수허구전은 적어도 리장보다는 훨씬 옛모습이 남아있는 곳이었다. 이미 꾸청에 숙박을 정해놓고 왔기에 바꿀 수 없었지만 리장에 여행을 오면 수허구전에서 묵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후에는 꾸청으로 돌아가는 길에 있는 흑룡담 공원에 들렀다 가기로 했다.

오랫동안 고대해왔던 리장이었기에 그려왔던 모습과 달랐다고 한순간 떨쳐버릴 수는 없었다. 비록 사람이 살지않는 커다란 쇼핑몰처럼 변해버렸지만 옛모습의 한 단면이라도 볼 수 있을까 싶어서 날이 밝자마자 아직 정적에 잠긴 숙소를 살그머니 빠져나왔다.


하늘은 밝아졌지만 아직 골목 깊숙한 곳까지는 햇빛이 닫기 전 어두운 골목길로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걸어가고 있었다. 이들은 리장꾸청에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장사를 준비하기 위해 출근하는 점원들로 보였다.


몇 년전까지만해도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의 인사와 흥얼거리는 노랫소리가 들렸을 골목길은 이제 어젯밤 늦게까지 영업을 하고 문을 닫은 상가들로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차나 수레가 다닐 수 없을만큼 좁은 골목길로 인부가 무거운 짐을 져서 나르고 있다. 리장꾸청의 골목길은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수로들 사이로 난 골목들을 연상하게 했다. 방향을 대충 정하고 골목골목을 누비다보면 어느새 넓은 광장이 나오거나 아니면 길이 막혀 있었다. 뭔가를 반드시 봐야겠다는 목표나 급한 일정이 아니라면 이런 골목을 아무 생각없이 걸어보는 것이 이런 곳에서 느껴볼 수 있는 재미 중 하나다.


얼룩덜룩한 무늬의 고양이도 방금 하루를 시작했는지 밤새 차가워진 몸을 햇볕에 녹이고 있다. 약 2400미터의 고지대인 리장은 10월임에도 밤낮의 기온차이가 제법 심했다. 낮에는 고지대 특유의 자외선을 듬뿍 담은 강렬한 햇살이 내리쬐이지만 밤에는 전기장판없이는 잠을 이루기 어려울 정도로 기온이 내려갔다.


리장꾸청의 스팡지에(四方街)다. 밤에는 시끄러운 음악소리와 수많은 사람들, 호객하는 점원들로 넘치던 곳이 아침에는 고색창연한 건물이 젊잖은 모습을 드러낸다. 이런 곳에 나이트클럽이라니 기가찬다.


조용하고 고즈넉한 느낌의 골목길이 아니다. 집들마다 닫혀있는 문이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라는 의미다. 모두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상가일뿐이다. 아침을 먹기 위해 여행책자에서 강력하게 추천했던 국수집을 찾았다. 분명히 지도에 나와있는 길을 여러 번 왕복하고, 그러다못해 주위 다른 길까지 샅샅이 뒤졌지만 '리장 제일'이라던 그 국수집을 찾지 못했다. 근처에 문을 연 가게라고는 하나도 없었기에 국수집이 없어지지 않았다면 찾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현지인들을 대상으로 했던 간판도 없던 국수집은 주머니 가벼운 배낭 여행자들에게까지 소문이 났고, 고향으로 돌아간 배낭 여행자들이 퍼뜨린 리장의 아름다움은 이곳을 유명한 여행지로 만들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유명한 여행지가 되면서 올라버린 부동산 임대료는 이 곳을 유명하게 만든 여행지로서의 매력을 빼앗아가버렸다. 여행책자마다, 이곳을 다녀간 배낭여행자마다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간판도 없는 국수집은 이제 리장꾸청에 없다.(물론 다른 곳으로 옮겼거나, 내가 찾아간 이 날은 사정으로 문을 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내 마음은 맛보지 못한 국수에 울분이 쌓였는지 없어져버린 것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맑은 물이 흐르는 수로, 그 사이로 핀 알록달록한 꽃들과 오래되어 보이는 가옥들은 분명 아름다워 보인다. 사람들은 쉴새없이 자신의 모습을 사진기에 담고, 드레스까지 차려입은 여자들은 마치 화보라도 찍는 듯 자세를 고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보기에는 아름다운 풍경이지만 매력적이진 않았다. 정말로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한 밀랍인형을 보는 듯했다.



날이 완전히 밝고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찾지못한 국수집의 대타를 찾아야 시간이 되었다. 골목을 돌아 발길가는대로 걷다보니 현지 사람들이 식사를 하고 있는 작은 국수집을 찾았다. 대충 적당한 가격의 국수를 아무거나 시켜서 받아들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청경채와 쇠고기가 올라간 국수는 생각보다 맛있었다. 자극적이지 않고 슴슴한 맛이 윈난에 온 이후로 처음 먹어보는 맛이었다.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나니 기분이 나아졌다.




이층으로는 아무도 오지 않아서 혼자 앉아 국수를 먹었다.


젊은 남녀가 하던 이 국수집을 돌아들어가면 현지인들이 이용하는 식당이 몇 군데 더 있었다.


리장꾸청 정문


왜 소원을 쓰고, 자물쇠를 달고, 매달아 놓는지 이해는 안되지만 장사는 참 잘될 것 같아서 부럽다.


꾸청으로 들어가는 정문에는 리장꾸청이 세계문화유산임을 알리는 상징물이 한쪽 벽면에 커다랗게 세워져 있다. 리장꾸청이 세계문화유산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면 돈을 버는 것보다 보존하고 유지하는데 신경을 써 주었으면 좋겠다.



리장꾸청으로 들어오는 이 물길을 따라 올라가면 흑룡담 공원으로 통한다. 이 날 오후에 흑룡담 공원에 갔다가 물길을 따라 걸어내려오니 꾸청 정문으로 통했다. 꾸청 안에서 볼 때는 옥룡설산에서 내려온다는 이 물이 참 깨끗해보였는데 흑룡담 공원에서 보니 지저분한 물이었다. 


새벽 리장의 정취는 고즈넉하고 아름다워서 좋아할 사람도 분명히 많을 것이다. 하지만 나처럼 마음이 삐뚤어진데다 이미 잃어버린 옛모습에 마음이 삐친 사람들은 문을 열기 전 적막한 놀이동산 같은 느낌을 받을지도 모른다. 헛헛한 마음을 안고 삐친 마음을 달래볼 욕심으로 수허구전(
束河古鎮, 속하고진)으로 가는 시내버스에 올랐다.



드디어 이번 여행의 주요 목적지 중 하나인 리장으로 가는 날이 되었다. 늘상 그렇듯이 따리를 떠나는 날이 되자 머물렀던 며칠 중에 가장 좋은 날씨가 되었고, 창산은 구름을 얹지않은 꼭대기를 비로소 보여주었다. 리장으로 가는 버스를 점심시간이 지나서 탈 예정이라 꾸청 내에 있는 백족의 전통음식 파는 곳을 찾아갔다.


白家砂锅이라는 이 음식점은 여행자들에게 꽤나 알려진 곳인지 인터넷에서 쉽게 정보를 찾을 수 있었지만 정작 위치를 상세히 알려준 곳은 없어서 찾기가 힘들었다. 洋人街에서 동쪽(얼하이 호수쪽)으로 조금만 가다보면 오른편에 있었다. 이곳에서 파는 백족의 전통음식은 砂锅饭(shāguōfàn 돌솥 밥)과 砂锅米线 (shāguōmǐxiàn 돌솥 쌀국수)이다.



뚝배기 같은 그릇에 밥이나 국수를 내어주는 것도 재밌지만 무엇보다 특이한 것은 이들이 기본찬으로 김치와 아주 유사한 것들을 준다는 점이다. 소금이나 고춧가루에 버무려 발효시켰다는 점에서도 김치와 거의 비슷하다. 이렇게 세상에는 음식문화가 비슷한 경우가 꽤나 많고, 음식이란건 누구나 만들어서 먹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만든 김치만 김치이고, 일본인이 만든 '기무치'는 김치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우습다. 이탈리아 사람이 한국에서 만든 파스타는 파스타가 아니라고 하면 우습지 않을까?


다진고기와 고춧가루, 야채등이 뜨거운 뚝배기 밥위에 올려진 砂锅饭(shāguōfàn)

 

오늘도 거리에는 많은 간이식당들이 늘어서 있다.

 


며칠동안 같이 놀았던 '따리', 오늘도 야무지게 물고 있다.

 

쿤밍에서 따리로 올때 탓던 버스보다 상태가 훨씬 양호했다. 다만, 맨 뒷좌석이라는게...

나중에 더친에서 샹그릴라로 돌아올 때도 그랬지만 어째서 버스를 타면 절반은 맨 뒷좌석에 걸리는지 이해가 안된다.

 

구글맵에서는 따리에서 리장까지 200km쯤 되고, 자동차로 3시간 걸린다고 나오지만 버스로 4시간 가까운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리장에서 묵을 숙소는 리장꾸청 안에 있는 '심우각'이라는 곳이다. 비수기여서 쉽게 숙소를 잡을 수 있을 줄 알고 리장으로 가기 전날에야 연락을 했더니 한국인이 운영하거나 한국어가 가능한 숙소는 이미 만실이라고 했다.


꾸청 밖에 있는 시외버스터미널에서 꾸청 가까운 곳까지 시내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쿤밍과 따리에서는 2위안이었던 버스비가 리장으로 오니 1원으로 바뀌었다. (중국에서는 바이두앱을 이용하면 정말 편하게 여행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네이버나 다음앱과 제공하는 기능이 거의 비슷해서 지도뿐만 아니라, 목적지까지 갈 수 있는 시내버스와 노선도 제공한다.)


리장 시외버스터미널


시내버스 정류장에 서 있으니 멀리 옥룡설산이 보였다.


리장꾸청으로 들어가는 길은 여러 곳인데, 따리꾸청처럼 성벽이 높게 둘러쳐있어서 성문을 통해 드나드는 것은 아니다. 다만, 리장꾸청에 들어가려면 문화재보호비 명목으로 입장권을 사야한다. 보름동안 유효한 이 입장권은 자그마치 80위안이나 한다. 꾸청내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나 내야하는 비용이고, 숙소가 꾸청내에 있으면 들락날락 할때 마다 입장권을 확인하므로 반드시 가지고 다녀야 한다. 중국정부가 여행자들로부터 걷어들이는 입장료들이 너무 과하다보니 여행지로서의 매력이 상당히 반감되었다. (게다가 이 입장료들은 해마다 오르고 있다.)


리장꾸청 남서쪽으로 들어가는 입구


한국외대에서 중국어 강사를 하셨다는 조선족 아주머니와 나시족 아저씨가 운영하는 심우각

꾸청 외곽에 있어서 숙박료가 싸진 않지만 시설이 깨끗하고 주인내외가 친절했다.

젊은 배낭여행자보다는 나이대가 있는 분들이 주고객인 것 같다. 


서둘러 짐을 풀고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리장꾸청 구경에 나섰다. 태국 까오산, 라오스 방비엥처럼 배낭여행자들의 천국으로 꼽히는 곳, 옥룡설산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이 흐르는 수로와 옛 가옥들이 골목골목 어우러진 아름다운 곳, 오랫동안 그려왔던 그 리장에 왔으니 잠시라도 둘러보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래된 돌길과 낡은 목조가옥은 생각했던 그대로지만 어째 식당과 숙소가 전부였다.





좀 더 당겨서 찍을 수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이런 생각 때문에 자꾸 카메라에 돈을 들이게 되나보다.


맑은 물이 흐르는 오래된 수로... 하지만 주위는 모두 레스토랑

 

골목골목을 돌아 리장꾸청 중심가로 나오니 이건... 모두 기념품점, 상가뿐이다.

리장꾸청 전체가 거대한 쇼핑몰일뿐 내가 상상했던 리장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적잖게 당황스럽고 실망스러웠다. 상점들만 있는 거리가 보기싫어 윗부분만 찍었다.


오래전에 들었던 리장은 사람들의 노랫소리와 소탈한 웃음소리가 들리고, 친절하고 소박한 사람들이 사는, 물가마저 저렴한 그런 곳이었는데 너무나 유명해진 나머지 살던 사람들은 이미 이곳에서 살 수 없게 되어버렸다. 엄청나게 올라버린 임대료와 많은 자본을 가지고 더 많은 이익을 내기 위한 수단만 이곳에 남게 되었다.


꾸청내 건물의 임대료가 상상하기 어려울만큼 많이 오른데에는 중국내 타지방에서 들어온 거대자본들이 꾸청내에서 커다란 레스토랑이나 술집을 운영하기 시작하면서였다고 한다. 리장꾸청 내 번화가인 스팡지에(四方街)에는 밤이면 커다란 클럽들에서 울려나오는 음악들로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나이트클럽이 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리장꾸청 안에 있어야 하는지, 어째서 그런 유흥시설들이 꾸청 안에서 허가를 받을 수 있는지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리고 리장꾸청을 보호하지도 못한 중국정부가 왜 여행자들에게는 문화재 보호명목의 비싼 입장료는 왜 받고 있는지 화가 났다. 이래저래 며칠동안 화만 내고 있었다.


실망감으로 어찌나 입맛이 씁쓸한지 길거리에서 산 커다란 만두에서도 쓴맛이 느껴졌다.

따리에서 머물 수 있는 기간이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 이 하룻동안 얼하이 호수와 주변의 소수민족 마을을 돌아볼지, 창산 트레킹을 할지 고민하다가 어젯밤 트레킹을 하기로 결정했다. 여행 초반에 날씨가 좋지 않았기에 걱정되었지만 다행히 아침부터 쨍하게 파란하늘을 보여주었다.


따리에서 창산 트레킹을 하는 길은 크게 3가지 길이 있는 것 같았다. 첫번째는 북쪽의 중허시(中和寺, 중화사)까지 가서 트레킹하는 방법, 두번째는 중간 천룡팔부 세트장을 통해 트레킹 코스까지 가는 방법(이 길을 통해서는 케이블카로 3966미터 전망대까지 갈 수도 있는데 가는 사람이 많지 않은지 인터넷에서 여행기를 찾을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는 남쪽의 간통시(感通寺, 감통사)쪽으로 오르는 방법이다. 숙소가 북쪽 코스와 가까이 있어서 중화사까지 올라가서 트레킹을 한 다음에 감통사쪽으로 내려오기로 결정했다.



창산에서도 어김없이 중국 정부의 입장료 정책이 나를 짜증나게 했다. 숙소에서 나와 등산로 쪽으로 가니 입구(케이블카 매표소 한참 전에 따로 돈을 받고 있다.)에서 무조건 40위안을 받았다. 무슨 산에 가는데 7000원이 넘는 돈을 받는단 말인가? 


트레킹 코스로 가는 길은 모두 로프웨이가 있어서 편하게 갈 수 있지만 걸어서 오르기로 했기 때문에 로프웨이 매표소를 지나 등산로를 찾았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등산로 같은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다시 로프웨이 매표소로 가서 물어보니 매표소로 들어오기 전 입구에 작은 길이 있으니 올라가라고 했다. 겨우 길을 더듬어 올라가고 있으려니 저 앞에서 커다란 개들이 짖어대기 시작했다. 짜증이 머리끝까지 솟구쳤다. 등산로 표지판도 제대로 없고, 길가에는 큰 개들이 풀려 있으니 로프웨이를 타게 하려는 속셈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때 차라리 방향을 돌려서 얼하이 호수로 갔어야했는데 40위안이나 내고 들어온 입장료가 아까워서 그냥 로프웨이를 타고 올라가기로 했다. 탑승료가 얼마였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100위안은 가뿐히 넘었던 것 같다.



창산 트레킹 코스 안내도. 엉성하지만 미리 이걸 본다면 도움이 될 것 같다.



등산로를 찾아 헤매는 사이에 단체 관광객들이 몰려버렸다. 로프웨이는 속도가 매우 느렸고, 로프웨이 간격이 멀어서 타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다.



로프웨이를 타고 가면서 보니 산등성이에 무덤이 아주 많았다. 우리하고는 문묘 방식이 좀 달랐다.



로프웨이에서 보니 등산로를 찾을 수가 없었다. 분명 바이두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는데 제대로 된 등산로는 보이지 않고, 로프웨이를 관리하는 사람들이나 이용함직한 길만 보였다. 만약 로프웨이를 타지 않고 창산 트레킹 코스까지 가려면 중간에 있는 천룡팔부 세트장쪽으로 가는게 좋을 것 같다. 그쪽으로 갔다는 블로거는 여럿 보았는데 이쪽은 본적이 없다.


우여곡절 끝에 로프웨이를 타고 중화사에 도착했다. 그리고 도착해서야 중화사가 부처님을 모시는 불당이 아니라 도교사원이라는 것을 알았다.











중화사에서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따리 시내와 얼하이 호수를 구경하고 트레킹을 시작했다. 아래는 하늘이 맑았는데 산중턱에 오르니 구름이 제법 끼어있어서 안타까웠다.



트레킹 코스는 듣던대로 아주 평탄했다. 잘 다져진 흙길이었으면 더 좋았을텐데 블록이 깔린 길이라 아쉬웠다. 여기까지 오는데 이런저런 일들이 있어 짜증도 났지만 이제 경치를 구경하며 트레킹만 하면 된다고 생각할 즈음, 창산은 다시 한번 뒤통수를 심하게 후려쳤다.


걷기 시작한지 얼마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길이 막혀 있었고, 저 앞에서는 인부들이 길을 덮은 흙과 돌을 치우고 있었다. 며칠전에 내린 비로 작은 산사태가 나서 보수중인 것 같았다. 황당해하며 길을 치우는 인부들을 보고 있는데 나처럼 트레킹을 하러 온 서양 여행자 몇 명도 당황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중국에 온 뒤로 계속 느끼는 것이지만, 중국은 경제발전에 비해 아직은 서비스 문화나 여행자에 대한 배려가 너무나 부족했다. 트레킹 코스가 보수중이라 할 수 없는 상태라면 로프웨이나 창산 입장권 매표소에서 미리 알려줬어야 했다. 입장료는 입장료대로 다 받고 결국 이용하느냐 못하느냐는 개인의 문제라는 것이다. 여행을 하면서 날씨나 여러가지 상황 때문에 목적지를 앞에 두고 돌아서야 했던적은 많지만 이렇게 무책임하게 관광지를 운영하는 나라는 처음이었다. 중국보다 경제적으로 훨씬 뒤쳐진 동남아 국가들이나 남미의 국가들도 이렇게 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작은 예시일뿐이지만 다른 것들을 봐도 국가의 시스템이 기본적으로 사람이 위주가 아니라는 느낌이다. 중국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진 않았지만 어째 여행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실망만 하게 되는 것 같았다.





이럴 줄 알았다면 중화사가 아니라 감통사나 천룡팔부 세트장쪽으로 올라왔을 것이다. 그랬다면 적어도 절반 정도는 볼 수 있었을텐데 비싼 입장료와 로프웨이 비용을 들여 바로 내려가야하니 풀 곳도 없는 화가 나서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다른 길이 있는지 바이두맵을 보니 중화사의 반대방향으로 길이 있었다. 그쪽으로 가면 한참 돌긴 하겠지만 어제 갔던 삼탑 근처 마을로 내려갈 수 있는 것 같았다. 길만 있다면 굳이 가려고 했던 곳이 아니라도 좋다는 생각으로 마음 편하게 먹고 계획하지 않은 트레킹을 시작했다.



원래 계획했던 중화사에서 감통사 방향이 아니라 반대방향었지만 길이 제법 훌륭하게 나 있었고, 산이 워낙 크니 깊은 골짜기와 수려한 산세도 볼 수 있어서 기분이 나아졌다. 아쉬움은 창산 꼭대기에 항상 구름이 걸려 있어서 산봉우리를 보여주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하긴 스위스 마테호른에서도 사흘짼가 나흘째에 겨우 봉우리를 볼 수 있었는데 하루만에 볼 수 있기를 바라는 것도 욕심이었다.






울창한 수풀이 내뿜는 기운을 받으며 잘 닦여진 길을 기분 좋게 걸었다. 깊은 골짜기를 구비구비 돌아 걷다보니 어느새 포장된 길은 끝나고 흙길이 나왔다. 원래 흙길을 더 좋아하는데다 상태도 나빠보이지 않아서 계속 가기로 했다. 결론적으로는 여기까지만 걷고 다시 돌아가는게 나을뻔 했지만...



절벽 바위를 파서 만든 이 길이 언제 생겼을까 궁금해졌다. 따리가 티벳과 미얀마를 잇는 교통의 요지였다더니 차마고도처럼 옛날 무역하던 사람들이 오가는 길이었을까? 적어도 트레킹을 위한 길은 아닐 것이다. 아직 중국 사람들에게 트레킹이나 캠핑은 여가를 보내는 방법으로 자리잡은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몇 년 뒤에 중국 사람들이 트레킹을 시작한다면 세계의 이름난 트레킹 코스는 이들로 메워질 것이다.


이 넓은 산에서 서양 여행자 둘, 중국 젊은이들 셋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었다.




여기까지가 흙길이어도 걷기에 좋았던 길이었다.


길이 갑자기 거친 돌길로 바뀌었다. 길은 넓어졌지만 대신에 그늘이 하나도 없이 햇빛을 그대로 받으며 걸어야했다. 게다가 양쪽으로 자란 수풀로 경치도 더 이상 볼 것이 없어졌다. 지도에서 보니 아직 길은 반이상 남아있었다.



나이가 많아보였던 흰 머리의 아르헨티나 아저씨는 혼자서 이 먼 곳을 여행하고 있다.



물은 떨어지고 햇볕에 얼굴도 뜨끈해질 무렵, 멀리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도착한 마을은 정확히 어제 삼탑을 보러 가느라 지나갔던 그 마을이었다. 숙소에 도착해 스마트폰으로 걸은 거리를 보니 25킬로미터가 넘어있었다. 중화사에서 감통사까지는 평탄하고 거리도 얼마되지 않는다고 알고 있었는데 뜻하지 않은 일로 배가 넘는 거리를 걸었다.



늦은 점심으로 프렌차이즈 식당에서 먹은 음식. 때깔은 좋았지만 맛은 없었다.


맛집을 찾아다닐 기력도, 의욕도 없었다. 푸드코드에서 만두와 양꼬치와 이것저것을 사서 들고 숙소에서 저녁을 해결했다.


당시에는 여행자를 고려하지 못한 창산 관리직원들에 대한 분노와 준비도 없이 거친 돌길을 걷느라 힘들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지만, 시간은 고생은 잊게 만들고 좋았던 생각만 남게 만든다. 호도협 트레킹을 하기전에 준비운동도 되었고, 걸으면서 본 창산의 풍경도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맛있는 음식을 찾아다니기도 귀찮아서 어제 갔던 푸드코트에 다시 가니 날마다 양꼬치를 사러 오는 한국인을 이제 알아보고 웃어주는 지경에 이르렀다. 잃는게 있으면 얻는 것도 있는 법인가보다.

아침 잠이 없는 체질이라 그런지 낯선 여행지의 아침 풍경을 구경하는 것을 좋아한다. 어느 곳이건 아침에는 새롭게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로 밤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밤에는 여행지로서 여행자를 위한 단장된 모습을 보여주지만 아침에는 그곳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원래 모습을 볼 수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따리에서도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을까싶어 일찌감치 숙소를 나섰다.


일어나자마자 날씨부터 확인했다. 잔뜩 흐린 날씨가 여행자의 마음을 불안하게 했다.


창산문을 통해 들어간 꾸청에는 벌써 아침 장사준비를 하는 상인들이 꽤 많이 나와있었다. 꾸청 안에는 꽤 큰 시장이 있는데 그 곳을 중심으로 주위에 노점과 가게들이 많아서 낮에는 매우 붐빈다. 아침이라 그나마 사진 찍으며 걸을 만 했다.



길거리에서 돼지 해체작업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대도시에서 자란 사람들은 혐오스럽다고 할 수도 있지만 동네 정육점에 돼지들이 통째로 걸려있던 모습이나 시골에서 잔치를 위해 돼지를 잡는 모습을 보며 자란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이상할 것 없는 광경이다.





정육점에는 훈제용으로 걸어놓은 고기들을 볼 수 있었는데, 스페인이나 이탈리아처럼 돼지 뒷다리를 통째로 훈제하는 모습도 종종 볼 수 있었다. 수천 킬로 떨어진 곳이지만 먹고 사는 방법은 다들 비슷하다. 남미에 있는 말이나 몽고에 있는 말이나 말은 말이다. 털이 길고, 덩치가 크다고 해서 아닐 수는 없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앞에서도 썼지만 따리는 한국 여행자들에게 인기있는 곳은 아니었다. 며칠간 따리에 머무르면서 한국 사람을 본 적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꾸청 내 표지판은 중국어, 영어, 한국어, 일본어 순으로 반드시 한글로도 쓰여져 있었는데 이 한글 표지판 대부분이 엉터리라 배꼽잡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따리에도 한글을 잘 아는 유학생, 교포들이 있을텐데 어째서 이런 엉터리 표지판이 계속 쓰는지 모르겠다.


다른 것들도 우습지만 '시 두 번째 사람의 병원'이라니... '시립 제2인민병원'이겠지?


꾸청 내에는 교회마저도 전통가옥 모습을 하고 있다.


아침 장을 보러 나오신 할머니 두 분의 담소가 정답게 들렸다.


꾸청 북문은 다른 문들보다 작고 낡아있었다. 아마도 북쪽은 관광객이 찾지 않는 곳이라 그런듯...


따리꾸청 영화관. 건물밖에 영화포스터조차 없어서 간판이 아니었다면 영화관인지 몰랐을 거다.


아침나절을 꾸청내에서 산책하며 보내고 다시 창산문으로 나오니 문 양쪽에서 아침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한쪽은 전통적인 중국인들의 신체단련법인 태극권을 하는 사람들이었고, 다른쪽은 에어로빅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태극권쪽은 나이 드신 분들 위주, 에어로빅은 비교적 젊은 사람들 위주였다. 수십년이 지나면 공원에서 태극권을 단련하는 중국사람들을 보기가 힘들어질 수도 있겠다 싶었다.




출근 전 아침식사를 하는 사람들


저녁이 되면 길가에 음식을 파는 천막들이 쭉 펼쳐졌다. 이 간이식당들은 다음 날 아침까지 장사를 한 다음에 오전 중에 모두 사라졌다가 저녁이 되면 다시 나왔다. 잠은 어디서 자는건가 궁금했는데 천막 한쪽에 침상과 담요가 놓여있는게 한쪽에서 쪽잠을 자는 것 같았다. 주변에 멀쩡한 식당들이 많은데도 이 간이식당들에는 생각외로 손님이 많아서 놀랬다. 저렴한 식사를 찾는 사람들이 고객층인 것 같았다.


돌아와서 숙소에서 제공하는 아침식사를 먹고 강아지(이름이 '따리'였다.)와 놀다가 따리의 유명한 관광지 중 하나인 충셍시산타(崇圣寺三塔, 숭성사삼탑)을 보러 나섰다.


사람을 무지 좋아하고 애교가 많았던 '따리'. 내 손가락을 야무지게, 하지만 아프지않게 물고 있다.




삼탑을 보러 가는 길에는 꽃이 예쁘게 피어있었다. 해발 2000미터가 넘는 곳이지만 위도가 낮은 곳이라 늦가을임에도 꽃이 피어있었다.(쿤밍이나 따리에는 1년 내내 꽃이 핀다고 한다.)


고급 석재로 건축자재나 실내 인테리어에 많이 쓰이는 대리석의 '대리'는 이곳 지명에서 유래된 말이다. 이 지역에서는 옛날부터 무늬가 있는 아름다운 돌이 많이 채굴되었다고 한다. 그런 돌에 이곳의 지명을 붙여서 대리석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삼탑으로 가는 길에는 아직도 원석의 대리석을 채굴해 가공하는 석재상들이 많이 있었다. 여기저기서 돌을 깎는 소리가 들리고, 길가에는 돌가루가 흩날렸다. 석재상 안에는 아름답게 가공되어 마치 수묵화를 보는 듯한 커다란 대리석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여행 전 도서관에서 빌린 책자에는 삼탑을 볼 수 있는 숭성사 입장료가 매우 비싸니 근처 공원 입장료를 사면 조금 멀더라도 삼탑의 전경을 감상할 수 있다고 되어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마을을 돌아다니고, 지도를 봐도 그 공원이라는 곳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공원이라고 예상되는 곳에 있는 작은 매표소에 물어봤더니 숭성사와 삼탑을 모두 볼 수 있는 입장료가 200위안(아마도 그정도 였던 것 같다.)이라는 말만 들을 수 있었다.


황당했지만 생각해보니 관광객들이 공원만 들어가서 보고 정작 비싼 숭성사 입장료는 사질 않아서 공원과 숭성사를 합해버린게 아닌가 싶었다. 중국의 과도한 입장료 수수정책에 정나미가 떨어졌다. 여행책에서조차 반드시 볼 필요는 없다고 하는 숭성사와 삼탑을 4만원에 가까운 비용을 들여 보고싶지는 않았다. 가능한 가까운 곳에서 사진이나 찍자는 생각으로 근처 마을 골목을 돌아다녔다.


봐도 가치를 잘 모르는 삼탑보다 동네 골목을 돌아다니는 것이 훨씬 재미있다.



마을 공터에 아침에만 잠깐 서는 장이 열렸나보다.



마을 공터에 있던 우물. 삼우정이라고 부르며 위에서부터 먹는 물, 씻는 물, 빨래하는 물 순서대로 썼다고 한다.




대리석 원산지답게 마을 입구에 거대한 대리석을 세워놓았다.


중국 각지에서 온 관광객들로 주차장은 이미 만원이었다.

어느새 날은 맑게 개었지만 4000미터가 넘는 창산에는 항상 구름이 끼어있다.


이 지역에는 아직도 이런 거대한 불탑이 여러 곳에 남아있다. 그 중에서도 숭성사의 불탑이 가장 유명하고 높은데, 가장 큰 불탑은 높이가 거의 70미터에 육박하고 좌우의 작은 불탑들도 42미터가 넘는다고 한다. 하지만 내 눈은 이 불탑의 가치를 알아볼만한 수준이 안되어서 그냥 크다, 높다는 생각만 들었다. 여러번 복구했다더니 불탑은 오래된 느낌도 들지 않았고 숭성사도 창건된지는 오래되었지만 건물들은 대부분 새로 지은 것이라고 했다.

숙소 내부. 지은지 얼마 안되는 건물이지만 구조는 옛날 그대로라 제법 중국 전통객잔 분위기가 났다.


숙소에 잠시 들렀다가 어제 다못한 꾸청 구경에 나섰다. 오전내내 어디선가 폭죽터지는 소리가 커다랗게 들렸는데 꾸청쪽으로 걸어가다보니 폭죽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렸다. 중국 사람들은 명절이나 기념일, 개업 등등에 귀신을 쫓고 복을 비는 의미로 폭죽을 많이 터뜨린다던데 무슨 일로 폭죽을 터뜨리나 궁금해서 소리가 나는 쪽으로 가봤다.



소리의 정체는 오늘 개업한 가게에서 터뜨리는 폭죽이었다. 얼마나 터뜨렸는지 가게 앞에는 폭죽 껍질이 수없이 쌓였고, 근처에는 매캐한 냄새와 자욱한 연기가 가득했다. 시끄럽고 불편할만 하지만 중국 사람들에게 이것은 당연한 일이라서 주위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아침 꾸청 산책부터 삼탑까지 제법 걸었던터라 오후 일정 전에 배도 채우고 다리도 쉴겸해서 따리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독일 아줌마가 주인인 베이커리에 가서 케익과 커피를 시켰다. 먼저 가격이 한국과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아서 놀랐고, 맛이 없어서 두번째 놀랐다. 내가 경험한 최고의 케익인 칠레 푸에르토 바라스의 할머니네는 커녕 우리나라 파리바게뜨보다 더 못했다. 누가 따리 최고의 베이커리라고 했는지, 혹시 그 뒤에 맛이 바뀌었는지, 메뉴를 잘못 선택한 건지 모르겠지만 정말 형편없었다.



케익보다는 인테리어에 신경을 많이 썼는지 쉬었다 가기에는 좋았다.


어차피 쉬려고 온 곳이니 새로 산 사진기를 시험하며 시간을 보냈다.


맛없는 케익으로는 배가 차질 않아서 결국 다른 곳에서 만두 한판을 먹어야했다.


어제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차례대로 사진을 찍던 개울을 따라 올라가면 홍롱징(紅龍井, 홍룡정)이 나온다. 예전의 오래된 우물을 최근에 보수했는지 용이 새겨진 개성없는 정자가 우물을 덮고 있었다. 우물 모양을 해놓은 곳에는 배추모양의 조각상이 있었고 이것을 관광 온 아주머니들이 열심히 어루만지고 있었다. 아마도 이 우물과 배추에 연관된 전설이라도 있나보다 싶었다. 가서 보려고 할 즈음에 수십명의 단체관광 온 아주머니들이 나타나서 우물을 점령해버렸다. 뚫고 들어갈 자신이 없어서 우물 내부를 보는 것은 포기해버렸다.



버드나무가 드리워진 이 길을 쭉 올라가면 '홍룡정'이 나온다.


어째서 누각이 빌딩이 되어버리고, '인민로'는 '인민으로'가 되었나?


이것도 만만치않네. 인터넷 번역기의 결과를 그대로 쓴 것인지도...


다음으로 간 곳은 꾸청내 번화가 옆에 있는 다이저우보우관(大理州博物館)이었다. 이 곳은 남조 대리국의 유물을 주로 전시하는 근방에서 가장 큰 규모의 박물관이라고 한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박물관의 규모는 생각보다 작았고, 전시품도 크게 볼만한 것은 없었다.


박물관에 들어가기 전에 여기 앉아서 쉬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여기서 쉰 것을 후회했다.







박물관 전시물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세밀하게 만들어진 토기인형들이었다. 말을 끌고 있는 사람이나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의 모습으로 만들어진 토기들의 만듦이 무척 섬세해서 그 시대의 복식이나 악기, 마구 등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었다.




이쯤 와서였나, 손에 모자가 들려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산지 4년이 넘었고 이제는 꽤 낡은 등산모자였지만, 세계 각지에서 나와 추억을 같이 했던 무척 정든 것이었다. 박물관 건물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앉았던 벤치에 놔둔 것이 기억나서 부랴부랴 가봤지만 없었다. 아직 트레킹은 시작도 하지 않았고, 모자가 필요한 시간은 이제부터인데 한순간 부주의로 수 년간 정든 것이 사라져버렸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어쩔 수 없는 것은 빨리 포기하는게 낫다. 가져간 누군가가 아껴서 오랫동안 사용해 주었으면 하고 바랬다.


박물관을 나와 따리꾸청 성벽 위로 올라갔다. 성벽에 올라가는 계단을 찾지 못해 헤맸는데 여자공안에게 물어보니 남문에서 양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계단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11년전 처음 선전으로 출장 갔을 때, 길을 물었던 공안은 무척 무뚝뚝하고 위압적이었는데 그 동안 조금 변화가 있었던 것인지 따리의 공안은 꽤 친절했다.



남문에서 본 꾸청 번화가. 반대쪽에 오화루가 보인다.


남문에서 본 창산의 거대한 줄기


작지만 한 나라의 수도여서 그런지 작은 규모 치고는 성벽이 꽤 두꺼운 것 같다. 그런데 쓰레기는 좀 버리지 말자고.


꾸청 내의 집들은 모두 회색의 기와와 흰색의 벽을 하고 있다.




요즘 중국에서 결혼하는 젊은 커플들의 관심사는 야외 웨딩촬영인가보다. 우리나라도 십수년 전에는 야외 웨딩촬영이 필수코스였던 적이 있었는데 중국은 지금 한창인 듯하다. 따리꾸청 성벽위에서 웨딩촬영하는 커플이 몇 커플이 있었고, 뒤에 여러 곳에서 웨딩촬영하는 많은 커플들을 볼 수 있었다. 특히 리장의 옥룡설산에서 눈비가 오는 와중에도 얇은 드레스만 입고 굿굿하게 촬영을 하던 커플들은 정말 대단했다.


멀리 얼하이 호수가 보인다.


혹시나해서 구글 번역기에 넣어봤더니 '당신의 머리를 마음'이라고 나온다. 역시나 번역기를 사용한 것이었다.



남문에서 오화루로 자리를 옮겼다. 오화루는 꾸청에서 가장 높은 건물로 이곳에서는 창산과 꾸청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오화루에 오르는 계단은 오화루에 있는 상가 안쪽에 있어서 찾기가 쉽지 않았다.




인터넷에서 제공되는 백과사전에는 창산이 사시사철 눈으로 덮여있다고 나오지만 창산에 만년설은 없다. 알프스는 해발 4000미터가 안되더라도 만년설을 볼 수 있고, 남미 파타고니아에서는 해발 1,200미터에서도 빙하를 볼 수 있지만 이곳은 위도가 낮은 곳이라 4100미터가 넘는 창산에도 만년설을 볼 수는 없다. 세계에서 가장 위도가 낮은 지역에 있는 만년설이 리장의 옥룡설산이라는데 이 산은 5600미터에 가까운 높이다. 만년설은 없지만 오화루에서 보이는 창산의 산세는 무척 크고 웅장해서 볼만했다.




멀리 보이는 남문. 사실 멀지 않은데 사진이 광각이라 그렇다.



저녁식사는 다시 양꼬치와 볶음밥, 가지구이로 해결했다. 특히 양꼬치가 우리나라에 비해 가격도 싸고 무척 맛있었다. 양고기 특유의 냄새가 적을뿐더러 냉동고기가 아닌 생고기일테니 당연히 더 맛있을 수 밖에 없다. 숙박비와 교통비가 저렴하고, 음식도 고가에서부터 길거리 음식까지 다양해서 입장료만 과하지 않다면 중국은 꽤 매력적인 여행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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