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부터였나보다, 오래된 싸구려 똑딱이 카메라의 초점이 왔다갔다 했던 것이. 유독 초점이 맞지 않은 사진이 많다는 것은 한참 후에 알게 되었지만 그것이 언제부터였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었다. 원래 사진 실력이 좋지 못한데다가 조금 흔들리거나 흐릿한 사진도 사진의 품질보다는 거기에 담긴 시간과 추억이 소중하다 생각했기에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블로그에 글을 쓰면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진을 하나하나 자세하게 보다보니 이때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다.


일상을 기록하는 스냅사진용 똑딱이 카메라를 50도에 육박하는 열사의 사막에서부터 빙하와 만년설이 즐비한 남미대륙의 남쪽까지 보호 케이스조차 없이 끌고 다녔으니 탈이 날만도 했다. 이미 찍은 사진은 어쩔 수 없지만 다음 여행에는 좀 더 탄탄하고 성능좋은 녀석을 데리고 가야겠다.


......


라스스(La Paz). 도시이름이 평화(Paz)라니 꽤 멋있다고 생각했고, 어떤 연유로 이런 이름이 지어졌는지 궁금했었다. 하지만, 알고나니 조금 시시해져버렸는데 스페인 정복자들이 인디오들의 도시를 점령하면서 'Nuestra Señora de La Paz' 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Nuestra Señora'는 성모 마리아라는 뜻이라니 '평화의 성모'라는 의미쯤 되나보다.


라파스는 인구 90만명 내외로 수크레보다는 큰 도시라 훨씬 번잡하기도 했다. 숙소에서 조금 걸어가면 우리나라로 치면 명동정도 되는 곳이어서 밀집된 상가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그곳에서 큰 길을 건너가면 여행자 거리가 나온다. 그 거리에는 배낭여행자를 위한 저렴한 숙소들과 기념품을 파는 가게나 행상들로 가득했다.

쇼핑지역과 여행자거리를 잇는 육교





도심 이곳저곳을 다니다가 점심시간이 가까워오자 라파스에 있다는 한국식당을 찾아가보기로 했다. 칠레 산티아고 이후로 제대로 된 한국음식을 먹은 적이 없으니 한국음식들 사진만 봐도 입에 침이 고일 지경이었다.


한국식당은 라파스에서 신도심쪽에 위치해 있다. 숙소가 있었던 구도심이 명동이나 종로 같은 곳이라면 한국식당이 있는 쪽은 오피스 건물들이 있는 테헤란로 같은 곳이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말이다.


식당은 어렵지않게 찾을 수 있었다. 노란색 바탕의 간판에 쓰여진 이름부터가 'Korea Town 한국식당' 이었기 때문이다. 들어가서 사진이 같이 붙은 메뉴판을 받아들자 무엇을 시켜야 할지 고민스러워졌다. 원래 이런 일로 고민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언제 다시 먹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음식들 앞에서는 한없이 약해져버렸다. 잠시 고민끝에 고른 음식은 자장면이었다.



지금까지 여행하며 갔던 대부분의 한국식당에는 현지인들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라파스의 한국식당에는 현지인들도 꽤 찾고 있었던 점이 특이했다. 우리가 스파게티를 먹는 것과 뭐가 다른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우리나라 음식은 아직 세계화되지 않은데다 가격 또한 현지 음식에 비해 너무 비쌌기 때문에 보통은 현지인들을 대상으로 영업하는 식당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니 이곳이 오피스 지역이라 주머니 사정이 비교적 괜찮은 직장인들이 많은 편일 거라는, 라파스의 한국식당 음식 가격이 비교적 저렴하다는, 이곳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에 다니는 현지사람들이 한국 음식을 맛볼 수 있었을거라는 이런저런 이유가 떠올랐다.


다시 구도심으로 돌아와 라파스의 대표적인 성당(Iglesia de San Francisco)에 갔다.(얼마전 여행프로에 나오는 걸 보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1500년대 중반에 짓기 시작했으나 우여곡절 끝에 200년이나 지나서야 봉헌된 이 성당은 카톨릭 성당치고 화려한 외부장식이나 건축학적인 아름다움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가난한 나라에, 가난한 사람들에 의해 지어진 이 성당이 볼리비아 사람들의 신앙심조차 가난하지는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성당 내부도 비교적 작고 단출했다.


산 프란시스코 성당 왼쪽 옆길로 걸어 올라가면 여행자들을 대상으로 여러가지 기념품이나 장신구를 파는 가게들과 행상들이 줄지어 있다. 특히나 많았던 것은 인디오들이 입는 알록달록한 원색의 옷이나 천들이었다. 알파카나 양모로 짠 것이라는데 품질은 좋은지 모르겠지만 가격이 저렴해서 추위를 많이 타는 여행자라면 하나쯤 사서 둘러쓰고 다니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세계 각국의 국기를 배지로 만들어 파는 곳에서 남미 국가들의 배지를 샀었다. 그런데, 배낭에 한번도 달아보지도 못한 채 여행중에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잉카에서 숭배한 콘도르, 푸마 같은 동물이나 잉카문양을 주제로 만든 세공품들이 많았다.


남미의 음악은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의 삼바와 탱고뿐만 아니라 볼리비아와 페루의 안데스 인디오들의 음악도 유명하다. 특히, 사이먼&가펑클이 불러서 유명해진 'El Condor Pasa'는 사실 자유에 대한 갈망과 아픈 역사에 대한 정서가 담긴 남미 인디오들에게 전해져 내려오는 노래라고 한다. 남미 전통 악기들로는 'El Condor Pasa'의 구슬픈 음색을 담은 남미 인디오의 피리 'Quena', 스페인의 기타를 변형해 작게 만든 'Charango', 팬플룻처럼 생긴 'Siku', 하프를 개량한 'Arpa' 같은 다양한 악기들이 있다. (네이버 캐스트 참조) 


라파스의 이 여행자 거리에도 전통악기들을 팔거나 연주를 가르쳐주는 가게들이 꽤나 많이 있었다. 언젠가 볼리비아에 눌러앉아 이런 악기들을 배워 볼 기회가 있기를 바란다.




다음으로 간 곳은 이름으로는 무시무시한 마녀시장(Mercado de Las Burujas)이다. 마녀시장이라고는 하지만 이곳은 인디오들의 전통신앙과 의료와 관련된 물품들을 파는 곳이다. 현대적인 의료시설이 미비하기 때문에 아직도 그 혜택을 받기 힘든 가난한 인디오들은 몸이 아플때 전통적인 방법으로 주술사에게 치료를 의뢰한다. 


주로 여러가지 동식물들을 말린 것들을 파는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야마의 태아를 말린 것이다. 이 야마의 태아를 집에 걸어두거나 묻어두면 악귀를 막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아래 사진에 주렁주렁 매달린 것들이 그것이다. 이들의 방법이 과학적이냐 아니냐를 논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단지 이들의 전통 문화일뿐이니 말이다. 아직도 우리나라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점을 보고 굿을 하는데 그것을 외국인들의 시각에서 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걷는데는 이제 이골이 낫음에도 고도가 높은 라파스에서 하루종일 걸었더니 제법 피곤했다. 오후 늦게 도심 광장(Plaza Mayor) 근처에 앉았다가 주변으로 눈을 돌리니 이제 막 두어살이나 되었을 아이가 혼자 놀고 있었다. 아이와 조금 떨어져서는 아이의 엄마인 듯 싶은 젊은 인디오 아주머니가 손으로 만든 자질구레한 것들을 팔고 있었다.


우리가 어렸을 때도 그랬었다. 컴컴해지는 집에서 일나간 부모님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거나, 같이 나갔을 때는 부모님의 일이 끝날 때까지 혼자서 노는 일이 종종 있었다. 이젠 이 아이만큼 어렸을 때 기억은 사라졌지만 이 아이에게서 내 어린시절의 단편을 보는 듯해서 마음이 아릿해졌다. 아이가 어렸을 때의 고생이나 금전적인 부족함만을 기억하지 말고, 부모님의 희생과 사랑을 기억하며 커가길 바랬다.



어둑해지는 Plaza Mayor


볼리비아 버스는 칠레나 아르헨티나 버스만큼 크고, 넓지 않아서 탄 시간이 12시간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온 몸이 뻐근하고 힘들었다. 하지만 라파스에 도착할 때쯤 겨우 아침 햇살에 눈을 떴을 때, 창밖을 보자 남은 잠이 한순간 달아났다. 버스 창 밖으로 다양한 크기의 누런 블록이 커다란 골짜기를 덮고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커다란 달동네 바로 그것이었다.



버스터미널에서 내려서 예약해둔 숙소를 찾아가기 위해 배낭을 매고 걸었다. 왠걸, 9개월째 매고 있는 이 배낭이 너무나 무겁게 느껴졌다. 배낭의 무게가 더 무거워졌을리도 없는데 조금만 걸으면 심장이 뛰는 속도가 빨라지고 입은 절로 벌어져 공기를 빨아들였다.


그랬다. 여기는 해발 3600미터가 넘는, 세계에서 가장 고도가 높은 수도 라파스(La Paz)였다. 우유니 투어를 하면서 5000미터가 넘는 곳에도 갔었지만 그때는 차로 이동했고 맨몸으로 다녔으니 고도가 높은 곳에서의 산소부족을 그다지 실감하지 못했다. 그런데, 여기서 20킬로가 훨씬 넘는 배낭을 메고 걷자니 비로소 고산지역의 산소부족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었다.


헉헉거리며 겨우 숙소를 찾아서는 제공하는 아침을 입속에 밀어넣고 그대로 침대에 뻗었다. 한잠을 자고 일어나서 저녁에 있는 라파스의 유명한 촐리타 레슬링 투어를 예약했다.


오후 늦게 여행사에서 준비한 버스를 타고 촐리타 레슬링 경기장으로 향했다. 경기장은 라파스의 분지 꼭대기에 위치해 있어서 숙소가 있는 도심에서 좁은 길을 돌고 돌아 한참을 올라가야 한다. 


말로는 '한참 올라가야 한다'라고 썼지만 라파스가 위치한 분지가 워낙 거대하기 때문에 그리 쉽게 올라갈 수 있는 높이는 아니다. 해발 3600미터인 분지 바닥부분과 꼭대기의 고도차가 700미터나 되기 때문이다. 한라산을 등반할 때 출발지점이 대개 1100고지이고, 한라산 정상이 해발 1950m이니 850m를 오르는 셈이다. 라파스의 도심에서 외곽으로 가려면 한라산 등반하는 높이에서 조금 못미치는 높이를 올라야 하는 것이다.



촐리타 레슬링 경기장으로 오르는 길, 버스에서 본 라파스 전경


경기장으로 가던 버스가 갑자기 멈췄다. 어리둥절해 하는데 여기가 라파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니 사진을 찍으란다. 내려서 보니 버스가 출발한 도심이 까마득하게 멀리 보였다. 사실 어디가 도심인지 알 수 없지만 고만고만한 건물들 중에서 딱 한군데 높은 빌딩들이 모여 있는 곳이 있어서 거기가 도심이란걸 짐작할 수 있을뿐이다.


이 거대한 분지의 바닥부분은 이 도시에서 가장 부유한 계층이 사는 곳이고 위로 갈 수록 저소득층이 사는 곳이라고 한다. 인프라가 잘 되어 있는 도시들은 부유층이 윗쪽에 살고(홍콩이나 샌프란시스코처럼), 인프라가 안되어 있는 도시들은 저소득층이 윗쪽에 사는 것 같다. 촐리타 레슬링 경기장은 라파스의 분지 꼭대기에 있는걸 보니 이 촐리타 레슬링은 라파스 서민들에게 인기있는 즐길거리인가보다.


낮게 내려앉은 거대한 구름에서 때마침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높은 곳에서 비가 내리는걸 바라보니 마치 하늘과 지표면 사이에 거대한 물기둥이 생긴 것 같았다. 물기둥은 제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도시 곳곳을 옮겨다니고 있었는데 몇 시간 뒤 촐리타 레슬링이 끝나고 밤이 늦어졌을 때는 물기둥이 그곳을 지나고 있었다.



비슷하게 생긴 직육면체의 집들이 마치 수많은 레고블록을 뿌려놓은 것처럼 보인다.



라파스너머 만년설이 덮인 안데스의 봉우리가 보인다.



하늘과 땅을 잇는 거대한 물기둥


세계 어느 곳보다 거대한 달동네다. 어렸을 때 살았던 부산의 그 달동네는 정말 아담했구나.




도착한 촐리타 레슬링 경기장은 아담했다. 크기는 학교 체육관만 했는데 생김새는 어렸을 때 농촌에서 봤던 창고 같았다. 이 조그만 체육관 가운데 레슬링이 펼쳐질 링이 설치되어 있고, 그 링을 둘러싸고 관객석이 있었다. 초라한 경기장이지만 라파스의 서민들과 함께 즐길 수 있는 이 무대가 라스베이거스 특설링보다 더 마음에 와 닿았다. 지금은 마흔이 넘은 나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오래전 우리나라에 프로레슬링이 인기가 있어서 간혹 지방도시에서도 시합을 하곤 했었다고 한다. 그때 시합을 했던 경기장은 어쩌면 이런 곳이 아니었을까.



먼저 사회자가 나와서 뭐라고 이야기하더니 첫번째 시합을 할 선수들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어설프지만 나름 열심히 꾸민 듯, 스파이더맨 복장을 한 선수가 링을 한바퀴 돌며 관객의 흥을 돋우고, 이어서 전형적인 악역을 담당할 선수도 입장했다.


촐리타 레슬링은 인디오 전통복장을 한 여인들의 레슬링이다. 그래서, 남자들끼리의 경기는 오프닝 시합이고 본격적인 메인 경기들은 여인들끼리의 태그매치나 혼성매치다. 이것도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이곳만의 특징이다.






경기장에 모인 볼리비아 사람들은 경기가 진행되면서 함성과 탄식을 뱉으며 경기에 집중했다. 그 중에서 특히 인상 깊었던 볼리비아 할머니가 아래 사진에 있다. 얼핏 봤을 때 이날 경기장에 모인 사람들 중에서 가장 연세가 꽤 있으신 듯한 할머니는 누구보다 경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악역인 레슬러가 상대방에게 반칙을 하면 손을 들고 큰 소리로 한참을 뭐라고 하셨다. 경기내내 악역 레슬러에 대해 끊임없이 소리치는 모습이 마치 자신의 손자를 괴롭히는 몹쓸 녀석을 꾸짖는 것 같았다. 결국 할머니가 응원하는 레슬러가 악역을 물리치고 승리하자 열심히 박수를 보내셨다. 이 볼리비아 할머니를 보고 있으니 드라마에 심취하여 악역을 맡은 배우를 그 인물과 동일시하여 혀를 차는 우리네 할머니, 어머니가 생각났다.



한 경기가 끝나고 잠시 휴식시간일 때, 뭔가를 달라는 듯한 표정으로 여자아이가 다가왔다. 처음에는 무슨 의미인지 몰라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었는데 여행자들이 가진 간식이나 잔돈들을 달라는 것 같았다. 눈이 맑고 곱상하게 생긴 아이였는데 여행자들이 많은 이 경기장에서 안좋은 버릇이 생겨버린 것이다. 작은 것이라도 기념품을 팔거나 교환의 의미라면 기꺼이 할 수 있지만 동정으로 뭔가를 대가없이 주는 것은 옳은 행동이 아니란 생각일뿐더러 아이에게도 좋지 않으리란 생각이었다. 그래서, 끝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방실방실 웃어만 주었지만 마음은 썩 좋지 못했다.





남성들의 레슬링 두 경기가 끝나고 나서 드디어 촐리타 레슬링이 시작되었다. 인디오 전통복장을 화려하게 차려입은 여인들이 나타나 링주위를 돌며 같이 사진을 찍어주기도 하는 등 더욱 흥을 돋우었다. 그날 경기장에 온 여행자들 중에는 일본에서 온 젊은 단체 여행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어디서 구했는지 다들 레슬링 복면까지 쓰고 나타나 링위에 오르기도 하고, 레슬러들과 사진을 찍고 소리를 지르며 신나게 즐겼다. 예전 좀 더 젊었을 때의 나라면 예의없는 천방지축에 눈쌀을 찌푸렸을지도 모를텐데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활기차고 좋아보였다. 나이가 들어서 마음이 물렁해진 탓이었는지, 빈대같이 좁은 속이 조금은 넓어져서였는지, 아니면 그들의 젊음이 부러웠던건지 잘 모르겠다.




챔피언의 여유만만한 모습












첫경기 남녀간 대결을 시작으로 남녀 혼성팀 대결, 여성간 대결까지 촐리타 레슬링이 이어졌다. 대결은 대부분 코믹하게 진행되었지만 간간이 프로레슬링 기술이 펼쳐지면 모두 손벽을 치며 좋아했다. 미국의 프로레슬링에 힘과 기술을 비할바가 아니지만 다들 즐길 수 있는 마을 잔치같은 분위기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마지막으로는 링주위에 가스관에 불을 붙여놓고 남자 선수들의 경기가 진행되었다. 자동으로 불꽃이 솟아오르고 불꽃이 튀는 것을 생각하면 안된다. 가스가 나오는 구멍 하나하나에 사람이 불을 붙이는데 불꽃은 채 30센티미터가 될까말까하다. 그럼에도 불이 자꾸 꺼지고 좀처럼 유지되지 않아서 진행요원이 꽤나 애를 먹고 있었다. 경기장에 가스냄새가 가득차서 조금 걱정이 되기도 할 정도였다. 이런 허술한 장치에도 사람들은 충분히 레슬링 경기를 즐기고 있었다.


즐기는데 훌륭한 기술을 가진 레슬러나 화려한 장치가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즐기고자 하는 마음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나의 수단은 될 수 있을지언정 많은 연봉을 지급하는 직장, 값비싼 자동차와 주택이 인생을 즐겁게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즐거운 인생도 마음이 먼저가 아닐까.


경기가 모두 끝나고 나오니 사방이 어두워져 있었다. 다시 여행사 버스를 타고 도심으로 내려와 숙소로 걸어가다보니 눈앞에 거대한 크리스마스 트리가 펼쳐져 있었다. 낮에는 세계에서 제일 커다란 달동네, 빈민가로 보였던 곳이 밤이 되자 집집마다 밝힌 전구로 인해 가장 커다란 크리스마스가 되었던 것이다.


레고블록 같은 집들로 가득한 이 거대한 달동네에는 빈곤한 사람들의 고된 삶만 있는게 아니었다. 우유니, 수크레, 라파스까지 오면서 도시마다 다른 분위기, 다양한 모습에 볼리비아가 더욱 좋아지기 시작했다.


언젠가 다시 가서 제대로 된 크리스마스 트리를 찍어보고 싶다.

파업으로 수크레에 발이 묶였지만 마음이 급하진 않았다. 굳이 수크레를 떠나고 싶은 마음이 컸던 것도 아니었고, 정해져있는 일정이, 돌아가야 할 날짜가 임박한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먼저 묵었던 훌륭한 호텔에서 저렴한 게스트하우스로 옮겼지만 전날의 친절한 독일커플 덕분에 마음 편히 묵을 수 있는 좋은 게스트하우스에서 머물 수 있었다.


오전에는 버스터미널에 가서 버스가 언제쯤 다시 다닐지 알아보고 나서(여전히 파업중), 길거리 음식을 사먹기도 하고, 시장구경도 하며 수크레 시내 이곳저곳 발길 닿는대로 다녔다. 


볼리비아는 남미에서 길거리 음식이 가장 많은 곳이라 더 맘에 들었다. 유럽이나 다른 남미국가에서는 찾을 수 없는 길거리 음식이 유독 볼리비아에서 많은 이유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상당수가 빈곤층인 볼리비아 사람들이 적은 돈으로 간단히 끼니를 해결 할 수 있는 수단으로 생긴 것이 아닐까 싶다.


점심으로 먹었던 고기튀김과 감자와 밥

간이 싱거워서 입맛에 잘 맛지는 않았다는 것은 배부른 소리, 다 먹는다.


나름 잘 꾸며진 레스토랑은 붐비진 않았지만 꾸준히 현지인들이 들어와서 식사를 하고 갔다.




남미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차종은 폭스바겐의 구형 비틀이다. 구형 비틀이 마지막으로 생산된 곳이 멕시코라 했던가... 여튼, 아직도 굴러다니는게 신기한 낡은 비틀부터 깨끗하게 잘 관리된 멀쩡한 비틀까지 각종 색깔의 수많은 비틀들이 남미의 도로를 누비고 있다. 자꾸보다보니 구형 비틀의 디자인이 아직도 현대의 자동차에 전혀 뒤지지 않는 느낌이었다. 오히려 신형은 단순화한 디자인 때문에 금방 질리는 느낌인데 구형은 볼 수록 매력있었다.


걷다보니 Plaza 25 de Mayo 광장 한켠에 Casa de la Libertad가 자리하고 있었다. 남미 인디오들의 독립운동 역사도 모른채 처음에는 가벼운 생각으로 들어게 되었다.


이곳은 18세기 스페인으로 독립하기 위해 시도하다 실패하거나 처형되었던 아마루, 카타리, 아파사의 아픈 역사를 담고 있는 곳이었다. 이들은 잉카의 후손으로서 식민통치에 저항한 남미의 독립운동가들로 그들의 독립운동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그후 백수십년이 지나, 시몬 볼리바르나 수크레에 의해 남미의 여러나라가 차례로 독립되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볼리바르나 수크레는 백인으로 이들의 선조는 유럽에서 건너 온 사람들이다.


인디오로서 독립을 시도한 이들에 대한 실제적인 유물은 찾아볼 수 없고, 스페인어로 쓰여진 문서나 그림에 겨우 이들의 행적이 남아있다. 전시된 설명을 하나하나 읽어보기에는 너무 양이 많아서 대충 살펴보고 짐작하는 수밖에 없었지만 남미의 독립이 2,3백년 전부터 시작된 오랜 역사이며, 어느 순간 때가 되었기에 쟁취할 수 있었던게 아니라 수많은 인디오들이 흘린 피 위에서야 얻게 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투팍 아마루 2세 (출처, 위키백과)


쿠스코 광장에서 집행된 투팍 아마루 2세의 거열(오마분시)형 (출처, 위키백과)


투팍 카타리의 초상 (출처, 위키백과)



실제 당시의 유물이나 사실적인 조형물은 없지만 나처럼 남미의 역사를 잘 모르는 여행자라면 꼭 한번 둘러볼만 한 곳이었다. 과거 세계 강대국에 의해 벌어졌던 수탈과 핍박의 역사가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더욱 고도화된 방법으로 행해지고 있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내가 누리는 것들이 그런 방법으로 얻어지는 것은 없는지 생각하고 살아가야 할 것 같다.


다음으로 간 곳은 근처 시장이었다. 이 시장은 도심과 가까워서 그런지 실내에 위치해 있고, 가게마다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볼리비아의 시장이라고 옛날 시골 오일장을 생각했던 내가 부끄러웠다. 세상은 항상 내 예상보다 빠르게 발전하고 있었다.



몇몇 과일들을 제외하고 이름모를 열대과일들이 풍성하게 차려져 있었다. 

좀 더 머물 계획이었다면 이런저런 과일들을 사다가 맛보고 싶었다.


남미의 시장에서는 육류를 가판에 넣어놓거나 걸어놓고 판다. 우리네 정육점에 있는 냉장고는 찾아보기 어려운데도 위생에 문제가 없는게 신기했다. 아마도 그날 팔리는 만큼만 가져다 놓는 것이려니 생각했었는데, 며칠전 여행프로그램 '걸어서 세계속으로'에서 브라질 북부편에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거기 나온 정육점 주인의 대답은 '오후 2시면 다 팔려요'였다. 역시나 팔 수 있는 만큼 파는게 정답이었다. 더 많은 이윤을 남기려 하지 않는 것, 과한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것이 서로가 행복해지는 지름길인가보다.


독일 커플의 소개로 오게 된 게스트하우스의 침실

보통 게스트하우스에 있는 이층침대가 늘어선 구조가 아니라 넓고 쾌적했다. 

매트리스가 좀 심하게 꺼져있는걸 제외하고는...


다음날에도 버스 터미널에 가서 버스가 다니는지 확인해야 했다. 딱히 날짜를 정해놓고 파업을 하는건 아니니 매일 가서 확인할 수 밖에 없었다.

터미널에서 버스가 다니는지 확인하고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오던 언덕에서...


게스트하우스는 도심이 아니라 볼리비아 사람들이 사는 주거지에 있는 3층 건물이었다. 비록 이 지역의 치안이 그다지 좋지 못한탓에 상점은 주인과 손님이 쇠창살을 사이에 두고 물건과 돈을 주고받는 구조이며, 밤늦은 시간에는 나가기가 좀 꺼림직하긴 했지만 숙소자체는 친절한 젊은 주인부부가 깔끔하게 운영하고 있었다.



숙소 이름은 Quechua Inn. Quechua는 잉카 제국을 세운 안데스 산맥에 사는 인디오를 일컫는 말이다. 여러모로 기억에 남는 게스트하우스였다.


숙소에 들어가자 인디오 아주머니(라고 해도 나보다 훨씬 젊지만)가 청소를 하고 있었고, 티브이 앞 소파에는 어린 딸이 세상모르게 잠들어 있었다. 아주머니는 딸을 재우느라 소파를 차지해버린게 미안하면서도 자는 딸을 깨울 수도 없어 약간 난감한 표정이었다. 전혀 난감해 할 일이 아닌데 오히려 너무 일찍 들어온 내가 미안해져버렸다. 잠든 아이를 바라보니 자는 예쁜 모습과 소파 아래 놓여진 낡은 아이의 신발이 눈에 들어왔다. 엄마가 자신을 이렇게 열심히 키운걸 꼭 기억하고 감사하길 바랬다. 그리고, 우리네 어머니들에 대한 감사와 아이를 키우며 직장에 나가는 모든 어머니들을 응원하는 마음이 생겨났다. 


여행을 다니다보니 마음이 감정적으로 변하나보다. 예전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들에 대해 눈길을 주게 되고, 마음에 여유가 있어서인지 여러가지 감정들을 느끼게 된다. 이것 또한 여행이 주는 장점인 것 같다.



남은 시간은 해외 축구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어떤 경기였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빅게임이었던 것 같다. 우리나라 S사의 커다란 LCD TV 앞에 앉아서 신나게 축구 경기를 보고 어둑해질즈음 주인부부에게 감사인사를 하고 터미널로 나섰다. (숙소마다 체크아웃 시간이 다르다. 호텔이 아니라 게스트하우스라도 체크아웃을 빡빡하게 운영하는 곳이 있고, 어떤 게스트하우스는 여행자의 편의를 봐줘서 추가 요금을 받지 않고도 저녁까지 머물거나 침대를 이용할 수 있게 해주기도 한다.)


터미널에는 며칠 동안 볼 수 없었던 버스들이 플랫폼마다 들어와 있었고, 사람들도 북적거렸다. 특히 전통 인디오 복장을 한 몇몇 여인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들은 등에 커다란 봇짐을 메고, 짙은 검은색 머리는 길게 땋았으며, 머리에는 모자로서의 기능은 거의 하지 못하는 것 같은 모자를 머리에 얹고 있다. 자꾸보니 이들의 이런 복장이 어느새 익숙해지고 있었다.





드디어 수크레를 떠나 라파스로 가는 버스가 출발했다. 원래 이틀을 머무를 생각이었지만 파업으로 이틀을 더 머무르게 된 수크레는 나에게 이틀이 아깝지 않을만큼 충분히 매력적인 곳이었다. 그리고, 생각지 못하게 머무른 그 시간이 체력적으로 고된 여행에서 일종의 휴식이었다.


회사를 다니는 지금도 가끔 수도원이 있던 언덕에서 맥주 한 잔을 앞에 놓고 조용한 가운데 내려다보던 수크레의 모습을 생각하곤 한다.

다음날 저녁에는 라파스로 가는 야간 버스를 타야했기 때문에 수크레의 명소 몇 군데를 느긋하게 둘러보기로 했다.


스페인 점령기부터 La Plata, Charcas, Chuquisaca 등으로 불리던 이 도시는 결국, 시몬 볼리바르와 함께 남미의 여러 국가를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시키고 30살이 되기 전에 국가 최고 지도층에 올랐으나 권력이나 정치욕이 없었던, 그래서 35살에 암살당하고만 위대한 독립운동가 안토니오 호세 데 수크레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이곳뿐만 아니라 베네수엘라나 콜롬비아 등 남미 곳곳에 수크레의 이름을 행정구역으로 하는 주와 시가 있다.)


스페인에 의해 점령되고 개발된 도시여서인지 수크레의 도로는 좁지만 곧게 이어져있으며, 도시 전체가 바둑판 모양으로 반듯하게 정리되어 있다. 게다가 도심 대부분의 집들은 흰벽에 갈색의 기와가 얹어져 있어 스페인의 작은 도시를 연상시켰다.(이 흰색의 벽을 유지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시정부에서 흰페인트를 제공하고 있다는 글을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난다.)




길거리나 건축물은 스페인의 도시를 연상시키지만 그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인디오이거나 인디오와 백인의 혼혈이다.

COPA DE NIEVE라 쓰여진 수레에서 뭔가를 팔고 있는 인디오 여인. 수레에 있는 기계가 우리의 빙수기계와 거의 흡사했다. Cup of Ice(Snow)라니 얼음을 갈아서 색소를 얹어 파는 것 같았다.


길에서 가방을 맨 십대 소녀들이 지나갔다. 교복인지 모두들 흰색 원피스 같은 것을 입고 있어서 몰래 사진을 찍다가 뒤돌아 본 소녀에게 딱 걸렸다.


어느덧 점심때가 되어 꽤 분위기 있어보이는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물가가 싸다는 것은 여행자에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른다. 물가가 비싼 곳에서 매번 미리 조사하고, 가능한 비용인지 판단해야 하는 스트레스가 이곳에서는 없다. 먹어보고 싶으면 먹고, 보고 싶으면 볼 수 있다. 다만 그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더 가지려 욕심을 부린다면 결국 혼자서는 질 수 없는 짐에 눌려 어디로든 갈 수 없게 되어버린다. 여행을 하면 할수록 인생의 농밀한 축소판이라는 생각이 확고해졌다.






수크레 대성당 옆을 전통복장을 한 인디오 여인이 지나가고 있다.


점심식사를 하고 Museo Colonial Charcas를 찾아갔더니 점심시간이라 문을 열지 않았다. 수백년의 식민지배를 받으며 스페인의 시에스타 풍습까지 받아들였는지 남미 곳곳에서 점심시간이 매우 긴 경우가 많았다.

문 앞에 먼저 온 여행자가 박물관 문이 다시 열리길 기다리며 보도에 앉아있었다.


박물관을 둘러보고 나서 수크레 시내 전경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언덕을 향해 걸었다. 그리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지만 워낙 구역이 잘 정리되어 있어서 지도만 보고도 찾는게 어렵지 않았다. 가다가 흥미로운게 있으면 멈춰서 구경하고 사진 찍으며 천천히 오르다보니 어느새 도착해 있었다.

어느 길 벽에 있었던 타일에 그린 수크레 지도. 가운데 녹색의 방사상으로 길이 난 곳이 Plaza 25 de Mayo다. 화려하거나 잘 만든 지도는 아니지만 손으로 그린 듯 소박한 모양새가 마음에 들었다.


언덕에는 수도원(La Recoleta)가 있는데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아케이드처럼 생긴 곳으로 가면 시내전경을 훤히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시내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아케이드 밑으로는 음료나 맥주를 마실 수 있는 카페가 있다. 거기서 볼리비아 맥주 Pacena를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La Recoleta


올랐던 길과 다른 방향으로 내려오다보니 이곳을 찾는 여행자들을 대상으로 기념품을 파는 가판들이 늘어서 있었다. 기념품의 대부분은 남미 인디오들의 전통적인 색상과 무늬로 된 가방과 옷감들이었는데 그 아래 계단에 인디오 소년이 앉아서 실로 뭔가를 만들고 있었다.


이런 모습을 보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동남아에서부터 봐오던 모습이지만 절대 적응하긴 어렵다. 내가 잘나서, 더 노력했기 때문에 지구 반대편까지 올 기회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단지 좋은 곳에서, 좋은 환경에 태어난 덕분이기 때문에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이다. 이 소년에게 언젠가 이루어질 수 있는 꿈이 있기를,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해가 기울어지는 언덕길을 천천히 걸어서 내려오며 생각하니 점점 수크레가 마음에 들었다. 스페인어 강습을 한다는 벽에 붙은 쪽지를 보니 여기서 머물며 스페인어를 배워볼까 하는 뜬금없는 생각까지 들었다. 오늘밤 떠나야 하는게 조금 아쉬워졌다.


사흘간 좋은 가격에 훌륭한 저녁식사를 책임지고, 축구경기까지 보여주었던 레스토랑, Napolitana


호텔에 맡겨둔 짐을 찾아서 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도착한 버스 터미널은 뭔가 분위기가 뒤숭숭했다. 사람들은 많았는데 정작 떠나는 버스는 거의 없었다. 표를 예약한 버스회사에 물어보니 파업중이라 버스가 다닐 수가 없단다. 버스회사가 파업을 한 것은 아닌 것 같은데, 누군가가 파업을 해서 도로를 점거해버린 것 같았다. 여행은 예상치 못한 기쁨을 주기도 하지만 불시에 당황스럽고 곤란한 상황을 만들기도 한다.


터미널에서 어떻게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서양 커플이 말을 걸어왔다. 오늘 버스가 오진 않을 것 같으니 자기들이 찾은 호스텔로 가는게 어떠냐면서 택시비를 나눠서 내자고 제안했다. 아직 어디서 묵을지 찾지도 못했는데 숙소도 찾고 택시비까지 절약할 수 있다면 거절 할 수가 없다. 아니, 이런 기회는 절대 거절해서는 안된다. (제안을 받았다고 아무에게나 응해서는 안되지만 이 커플들은 정말 버스를 타지못한 배낭여행자였기 때문에 의심없이 따라간 것이다.)


이 착한 커플은 독일 여행자들이었다. 이들이 택시비 몇 푼(해봐야 1,2천원이었을거다) 아끼려고 이런 제안을 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보아하니 자기들처럼 버스를 타지못한 여행자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그런 제안을 했던 것이다. 이튿날 이른 새벽, 이들이 호스텔에서 나갈 때도 자는 나를 깨우지 않기 위해 배낭과 짐을 주섬주섬 들고 복도에 나가서 짐을 꾸렸다. 전날 저녁부터 이튿날 새벽까지 몇 마디 나누지 않은 인연이지만 이런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마음이 무척 기쁘고, 여행은 즐거워진다.


버스도 없이 어두컴컴했던 수크레의 버스터미널


떠나기가 조금 아쉬웠던 수크레에서 강제로 더 묵게 되었다. 생각지 못한 파업은 계획을 어긋나게 만들고, 잠시 당황스러움과 곤란함을 주었지만 덕분에 친절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좋았던 수크레에 조금 더 머물 수 있게 만들었다. 나쁘기만 한 일은 없고, 좋기만 한 일도 없다는걸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인구 900만 명에 1인당 국민소득이 세계 120위권으로 3000불이 채 되지 않는 볼리비아는 남미 최빈국중 하나다. 16세기 초부터 시작된 스페인의 오랜 지배와 억압 속에서도 끊임없이 독립을 꿈꾸었으며, 그 끝에 19세기 초 300년만에 독립을 하게 되었으나, 칠레와의 전쟁에서 져서 태평양 연안을 빼앗기는 바람에 내륙국으로 전락한 비운의 국가이다.(하지만 아직도 볼리비아 해군은 국토회복을 꿈꾸며 티티카카 호수에서 군사훈련을 하고 있다.)


볼리비아는 행정상의 수도(라파스)와 사법상의 수도(수크레)로 나뉘어있는데 해발 3600미터가 넘는 곳에 있는 라파스는 세계 모든 국가들의 수도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수도이며, 수크레도 2800미터가 넘는 곳에 위치해 있다.


1500년대 수크레 근교의 포토시에서 엄청난 규모의 은광이 발견되었고, 은의 발굴을 위해 동원된 인디오들은 고된 노동과 가혹행위에 시달리며 죽어갔으나 이 은들은 전량 스페인으로 보내져서 당시 스페인이 세계 최강의 지위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수크레는 스페인이 이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건설한 도시로, 그 당시에 지어진 오래된 건축물들과 하얀색으로 칠해진 도심은 1991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은광의 막대한 은은 한번도 볼리비아 국민들을 위해 쓰여지지 못하고 이미 오래전 고갈되었다. 몇달 전 스페인 성당에서 봤던 은으로 만든 성물이나 제기들의 대부분이 이곳에서 인디오들의 목숨과 바꾼 은이었다고 생각하니 그 값어치가 하찮게 느껴졌다.


수크레에서 묵었던 숙소는 수크레 대성당이 있는 Plaza 25 de Mayo (5월 25일 광장)근처에 있는 꽤 깨끗하고 훌륭한 호텔이었다. 우유니 투어에서 묻은 먼지와 때를 벗길 수 있는 욕실이 필요했으며, 이틀만이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 받지않고 쉬고 싶었기 때문에 거금을 들여서 별 네개짜리 호텔을 찾았다. 그럼에도 볼리비아는 물가가 무척 쌌기 때문에 이런 훌륭한 호텔도 유럽의 호스텔 가격과 별 차이가 나지 않았다.


오래간만에 따뜻한 물로 오랫동안 샤워를 하고, 먼지 가득한 옷들을 근처 세탁소에 맡기고 밖으로 나왔다. 우유니에서는 쌀쌀하고 거칠었던 바람이 고도가 2000미터나 낮은 수크레에서는 따뜻하고 온화하게 바뀌어 있었다. Plaza 25 de Mayo 광장에서부터 수크레 구경을 시작했다.



볼리비아 국민의 대다수가 인디오임에도 이들의 언어는 대부분 스페인어이며, 종교는 카톨릭이다. 아직도 극소수의 백인들이 대부분의 부와 권력을 독점하고 있지만 지금 볼리비아의 대통령 에보 모랄레스는 볼리비아 최초의 인디오 출신 국가원수이며 원주민과 빈민들을 위한 정치로 인기를 얻고 있다. 그의 정책이 효과를 거두고, 차기 대통령까지 기조가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Plaza 25 de Mayo 광장의 한쪽

정면의 목조 발코니가 있는 건물이 이틀 뒤에 갔던 Casa De La Libertad(자유의 집)이다.




Corte Suprema de Justicia (볼리비아 대법원)


Parque Bolivar (볼리바르 공원)


수크레 시내를 천천히 걸으며 내려오다보니 골목 곳곳이 변호사 사무실이었다. 조금 더 내려오다보니 하얀 건물의 볼리비아 대법원이 나왔다. 서울에서 대법원이 있는 서초역 부근에 변호사 사무실이 많은 것과 같은 이유인 것이다. 대법원 건너 맞은 편에는 볼리바르 공원이 있었다. 폭이 좁고 길쭉한 모양의 이 공원은 여러가지 볼거리가 많다거나 규모가 크진 않았지만 오히려 소박해서 편안히 산책하기에 좋은 곳이었다.


남미를 여행하다보면 주요 도시에는 볼리바르나 산 마르틴이라는 이름을 가진 광장, 공원이 반드시 있다. 시몬 볼리바르와 호세 데 산 마르틴은 남미 독립의 영웅, 해방자, 아버지로 불리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볼리비아는 시몬 볼리바르의 이름으로 국명을 정했으며, 볼리바르의 절친이며 독립운동의 동지였던 안토니오 호세 데 수크레의 이름을 따서 입법 수도의 이름을 지었다. 


이름을 붙인다고 해서 이들에 대한 존경이 절로 우러나는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후대들이 역사를 기억하게 하는 교육은 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나라는 볼리비아보다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국력이 강성함에도 불구하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친 분들에 대한 대우나 존경은 이들보다 못하는 것 같아서 부끄러웠다.



Parque Bolivar 공원에서 산 군것질 거리




시장에서 다양한 열대 과일들을 구경하고, 상점을 기웃거리면서 다시 원래 왔던 곳으로 돌아왔다. 수크레에서는 이틀만 머무를 생각이었기 때문에 라파스로 가는 야간 버스표를 사기 위해 터미널로 가는 시내버스에 올랐다.


버스가 비록 봉고차나 미니버스라 하더라도 남미에서 시내버스가 있다는 것은 도시가 꽤 크고 정비가 잘된 도시라는 의미다. 낯선 도시에서 처음 시내버스를 탈 때는 왠지 조금 긴장이 되는데 낯선 동양인의 승차가 현지인들의 주목을 끌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 버스가 과연 목적지로 가는 버스인지, 내릴 곳을 지나치지는 않을지 항상 신경을 쓰고 있어야 하기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몇 번 버스를 타고 나면 어느새 창밖 풍경을 보거나 나를 보고 있는 현지인들과 눈을 맞출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이즈음 되면 낯선 도시가 점점 친근해지고 좋아지기 시작한다.






내일 라파스로 떠나는 버스표를 사고 돌아오니 날씨가 무척 더웠고, 투어의 피로가 다 풀리지 않아선지  피곤해졌다. 호텔에서 그날 조금 저렴하게 제공하는 Menu del Dia와 맥주를 시켜 먹고 한숨 자다가 저녁이 되어 선선할 때쯤에 나왔다.






저녁식사 시간이 될 때까지 Plaza 25 de Mayo에서 시간을 보냈다. 광장을 천천히 한쪽씩 구경하고나서, 벤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지겨워지면 담배를 한대 폈다. 여행을 다니며 매일매시간 쪼개서 도시를 샅샅이 훑고 다닐 수는 없다. 이렇게 무의미한듯 보내는 시간이 나중에는 오히려 기억에 남았다.


저녁은 어제 가격대비 음식이 훌륭하다고 느꼈던 그 레스토랑에 다시 가서 먹었다. 과연 오늘 시킨 음식도 만족스러웠다. 볼리비아에서 올리브를 제법 올린 샐러드와 따뜻하고 바삭한 빵으로 만든 샌드위치를 먹으며 만족하게 될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훌륭한 것은 지금까지 거쳐 온 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와는 비교할 수 없이 가격이 저렴하다는 것이다.


남미의 도시답게 붐비지만 깨끗한 도시, 그다지 걱정스럽지 않은 치안, 다양한 길거리 음식과 저렴한 물가, 친절한 볼리비아 사람들... 수크레만 그런건지 볼리비아가 그런건지 모르겠지만, 이틀만 머무르고 떠나야하는 이 도시가 단 하루만에 좋아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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