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도 어김없이 맑고 새파란 하늘에 강렬한 햇살이 쏟아졌다. 초봄이라 숨막히는 더위와 햇살의 따가움은 덜했지만 강렬함은 그리스나 스페인보다 더했다. 오후에는 아타카마 사막에 있는 달의 계곡 투어에 나섰다.



마을 도심에 있는 여행사 입구에서 출발 시간을 기다리며.


여행사의 승합차는 잠시 공원 입구에 멈춰 수속을 밟고나서 어느 건조하고 황량한 계곡 입구에 멈췄다. 해가 많이 기울기 시작하는 오후에다 봄이었지만 워낙 햇살이 강렬해서 절벽 그늘에 자리를 잡고 가이드에게 설명을 들었다. 이 사막이 만들어지게 된 지질학적인 설명을 한참 했던 것 같다. 당시에는 반쯤은 대충 알아듣고, 나머지 반은 짐작과 상상으로 메우면서 이해했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나지 않는 부분이야 인터넷을 찾아보면 되지만 지금 사막이 만들어진 이유는 그다지 궁금하지 않다. 설명을 듣고나서, 한줄로 서서 좁은 계곡안으로 들어갔다.



활달하고 건강해 보였던 여자 가이드



계곡 사이를 트레킹하는데 폭이 무척 좁기 때문에 앞에서 사진을 찍으면 뒤에서는 느긋하게 기다려야했다. 분명 자신도 사진을 찍고 싶어질테니 앞사람이 더디다고 불평할 수는 없다.


계곡은 흙과 바위와 소금이 만들어낸 기둥과 절벽들이 기묘한 모양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세계에서 달의 계곡으로 불리는 곳은 여러 곳이다. 지구상에서 쉽게 볼 수 없는 황량하고 기묘한 곳은 대부분 달과 연관된 단어를 갖다붙이는 것 같다. 볼리비아 라파즈 근교에도 달의 계곡이라 불리는 곳이 있다.





어떤 곳은 혼자서도 몸을 잔뜩 구부려야 통과할 수 있을만큼 좁다.





동굴 같은 계곡을 통과해 위로 올라서면 달이라기 보다는 SF영화의 외계행성처럼 보이는 풍경이 나타난다. 조지 루카스 감독이 터키 카파도키아에서 스타워즈를 찍었다는데 분위기로는 이곳이 더 지구가 아닌 곳처럼 느껴졌다.





짧은 계곡 트레킹을 마치면 다시 버스를 타고 아타카마 사막을 더욱 깊숙히 들어간다. 그곳은 어떤 식물도 자라지 않는, 모래와 덜 풍화된 바위밖에 없는 황량한 곳이었다.




병풍처럼 둘러쳐진 거대한 바위와 그 앞에 V자를 그린 거인의 손가락같은 바위


이 바위들은 왼쪽부터 공룡, 다음은 기억이 잘 나지 않고, 세번째는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가장 오른쪽이 기도하는 소녀의 형상을 닮았다고 한다. 어찌보면 조금 비슷하기도 하고 약간 억지스럽기도 하다. 사실 각지에 있는 무언가와 비슷하다고 이름붙여진 바위들이 조금 과장스러운 점이 있다.


투어의 마지막은 지금까지 있었던 달의 계곡을 벗어나 위에서 계곡을 아래에서 내려다 볼 수 전망대에서 석양을 바라보는 코스였다. 계곡에서 전망대까지 도착하는데 시간이 꽤 걸렸기 때문에 해가 꽤 기울어서 계곡이 점차 붉게 물들고 있었다. 위에서 보니 이 황량한 계곡을 왜 달의 계곡이라고 이름 붙였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정말 달의 표면처럼 거칠고 황량했다.


사진으로는 그다지 높아보이지 않지만 계곡에 있을 때는 엄청 커보였던 바위와 산들이 전망대에서는 작은 언덕처럼 보일만큼 전망대는 꽤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절벽으로 툭 튀어나온 바위는 항상 여행자들이 사진찍는 인기장소이다.


저물어가는 석양을 받아 바위가 황금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금새 해는 지평선 너머로 사라졌다. 그리고, 해가 사라진 지평선의 반대편 산자락은 어제처럼 진한 붉은 색으로 물들었다. 다시 봐도 희안한 광경이라고 감탄하고 있다가 더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었다.





해가 저문쪽 지평선 부근은 이제 어두컴컴한 어둠이 내려앉았는데 반대편 지평선은 붉게 물들었다가 차츰 색깔이 변해갔다. 어떤 색인지 표현해보려해도 글솜씨가 부족한 나로서는 정확하게 설명할 수가 없다. 아래 사진들을 보면 그때의 경이로움이 다시 느껴진다. 사진으로도 느껴지는 경이를 난생 처음 직접 봤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지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좀 더 훌륭한 사진 솜씨로, 좀 더 나은 카메라 성능으로 남겨두지 못한게 아쉬울뿐이다. 다시 여행을 간다면 사진찍는 기술을 더 익히고, 그 솜씨의 부족함을 조금이라도 채워줄 수 있는 카메라를 가지고 가고 싶다.



아타카마에서의 마지막 밤은 곧 칠레에서의 마지막 밤이었다. 두 달 가까운 시간동안 아르헨티나와 칠레의 국경을 어러 번 넘으며 여행을 했다. 그리고, 내일 볼리비아로 넘어가면 이번 여행동안은 다시 아르헨티나나 칠레로 돌아오지는 못할 것이었다.


밥을 짓고 아껴둔 카레와 깻잎 통조림을 따서 만찬을 만들었다. 멘도사에서 사서 열흘동안 깨질까 조심조심 가지고 다녔던 와인도 꺼냈다. 늦은 저녁식사를 거하게 만들어먹고 숙소 마당에서 보니 온 하늘에 별이 가득차 있었다. 어디가 은하수고, 어느 별이 밝게 빛나는지 모를 정도로 그냥 하늘 전체에 별들이 가득했다. 


움켜쥐고 있던 손을 펴야만 다른 것을 잡을 수 있듯이, 떠나야만 알 수 있는 것과 볼 수 있는 것들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았다.


아타카마 사막을 끼고 있는 이 마을에 여행자들이 몰리는 이유는 여럿이다. 첫째는 칠레쪽에서 우유니 2박 3일 투어가 시작되는 출발점이기 때문이며, 두번째는 아타카마 사막을 중심으로 여러가지 투어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도 이곳에서 소금호수 투어와 사막투어(달의 계곡 투어)를 하기로 했다.(별을 보는 천문대 투어도 무척 하고 싶었는데 여행사를 찾지못하다가 우유니 투어를 하기 전날에야 우연히 발견하는 바람에 결국 하지 못했다.)


일반인들에게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아타카마 사막은 울트라마라톤이나 트라이애슬론을 하는 철인들에게는 꽤나 알려진 곳이다. 고비사막 마라톤, 사하라사막 마라톤과 함께 아타카마사막 마라톤은 세계 3대 사막 마라톤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 아타카마 사막은 세계에서 가장 건조한 곳이라는데 비가 온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고 한다.(위키에서는 이곳이 2000만년 동안 건조 상태를 유지해 왔다고 하며, 건조한 기후로 유명한 캘리포니아의 데스밸리보다 50배나 더 건조하다고 한다. 건조한 정도를 몇 배라고 측정할 수 있는 기준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해발 고도가 높고 건조하다는 이유로 별을 관측하는데는 최적의 장소라서 세계적인 규모의 망원경을 갖춘 천문대가 있다.


사실 아타카마는 볼리비아의 국토였지만 19세기 페루와 볼리비아 연합군과 칠레 사이에 벌어진 전쟁에서 칠레가 승리함으로써 칠레의 국토가 되었다. 그리고, 볼리비아는 태평양에 접한 해안선을 잃고 내륙국이 되어버렸다. 칠레는 은근 주변국들과 여러번 전쟁을 하였으며, 그로인해 획득한 국토가 꽤 되는 것 같다.






워낙 건조한 곳이라 그런지 아침부터 구름 한점 볼 수 없는 파란 하늘이 펼쳐졌다. 왠지 햇살도 자외선을 듬뿍 담고 있을 것 같았다. 투어를 신청할 겸, 마을 중심가로 가서 간단히 아침을 먹었다. 역시나 비싸고 양도 적었다. 귀찮더라도 이 곳에서는 무조건 숙소에서 만들어 먹는게 남는 것 같다. 그런데, 음식 을 만들 재료도 다른 곳보다 비싸고 귀하다는게 문제다.


쳇, 이 얇은 팬케익 두장으로 끼니가 될리가...



마을 중심가에는 여행사, 기념품점, 레스토랑이 몰려있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숙소를 중심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잡았는데 사람이 없는 덕분에 조용해서 좋았다. 숙소는 화장실과 부엌이 별도의 건물에 있어서 불편했던 점을 제외하면 좋은 곳이었다. 특히나 주인 아저씨가 정원을 열심히 관리하는지 이 건조한 곳에서도 나무를 제법 심어두었고, 꽃도 피어있었다. 소금호수 투어가 시작되는 오후까지 정원 벤치에서 느긋하게 시간을 보냈다.




자세히 보면 조금 조잡하지만 멀리서 보면 알록달록 예쁘다.


소금호수 투어는 오후 느지막히 시작했다. 여행사 승합차를 타고 도착해서 처음 한 것은 소금호수에서 수영하기였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소금호수는 이스라엘의 사해다. 사해는 워낙 크기도 하고, 성경책에도 등장하는 곳이라 모르는 사람이 드물지만 세계 각지에는 사해처럼 염분이 높아서 몸이 뜨는 호수가 여럿 있다. 수영을 하지는 않았지만 이집트 바하리아 사막투어를 할 때도 소금호수를 갔었고, 이 곳 아타카마에도 소금호수가 있었다.


어렸을 때 사해에 둥실떠서 신문을 펼쳐든 남자의 사진을 보고 신기해했었는데 30년이 지나서 그런 경험을 해보게 되었다.



굳이 수영을 하지 않더라도 멀리 아타카마를 둘러싸고 있는 안데스의 눈쌓인 봉우리들과 사막 한가운데 펼쳐진 파란 호수들이 만들어내는 광경도 멋있었다.


일반적인 호수처럼 서서히 깊어지는게 아니라 싱크홀처럼 갑자기 푹 꺼져있기 때문에 처음에는 과연 뜰까, 안뜨면 짠물만 들이켜는게 아닐까 하는 걱정도 있었다. 하지만, 가이드는 염분이 너무 높기 때문에 눈에 소금물이 들어가면 위험하니 머리를 담그지마라, 가라앉으려고 해도 그럴 수 없을테니 안심하라고 설명했다.


설명을 듣고 사람들은 호숫가에서 겉옷을 훌훌 벗고 슬금슬금 호수 안으로 들어갔다. 우선 배영을 하듯이 하늘을 보고 호숫물에 드러누웠다. 과연 물이 몸을 밀어올리듯 가뿐하게 몸이 떴다. 머리를 들고, 양팔을 들어 흔들어도 가라앉을 기미가 없었다. 호수에 들어온 사람들 모두 신기하고 재밌는지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물에 떠서 자기 발을 손으로 잡아도 가라앉지 않았다. 물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고, 양손에 브이자를 그리고 사진을 찍었다. 


어린아이가 되어 한참을 즐겁게 놀다가 물밖으로 나오니 차갑고 건조한 바람이 몸에 묻은 물기를 금방 말려버렸다. 급히 수건으로 몸을 닦아도 마른 물이 소금으로 온 몸에 남아서 하얗게 뒤덮었다.



다음으로 간 곳은 싱크홀처럼 생긴 작은 호수였다. 이곳은 몸이 뜰 정도의 소금호수는 아니기 때문에 머리를 담궈도 된다며, 다이빙을 하고 싶은 사람은 뛰어내리란다. 몇몇의 젊은 여행자들이 신나게 다이빙을 하는걸 보면서 나도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깊은 물에 익숙하지 않은데 혹시 민폐라도 끼칠까 싶어 차마 뛰어들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커다란 소금 호숫가에서 여행사에서 준비한 간단한 간식거리를 먹으며 일몰을 보는 것으로 투어가 끝난다. 





열정적으로 설명하는 전형적인 남미남자 스타일의 가이드


가이드가 여행자들에게 열심히 설명하는 동안 운전사는 차 옆에 페루의 전통술 피스코 사워와 견과류, 과자 등을 차려 놓았다. 제대로 만든 피스코 사워인지 모르겠고, 안주거리도 대단치않지만 이곳의 독특한 풍경을 보며 야외에서 기분을 내기에는 충분했다.





해가 산으로 넘어가며 만들어내는 노을을 보고 있다가 문득 반대편 산들을 보니 온통 붉은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항상 지는 해를 보며 노을만 아름답다고 생각했었는데 오히려 신기한 광경은 그 반대편에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산들이 밝은 붉은 색에서 조금씩 진해지다가 까맣게 되는 모습이 꽤 인상적이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가이드는 각국에서 온 여행자들에게 그 나라의 노래를 한마디씩 시켰다. 그러다가 칠레 차례가 되자 칠레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 자기네 애국가를 신나게 불렀다. 다들 웃고 떠들고 즐거운 분위기가 되었다.



돌아오는 중에 해가 완전히 지고 사방이 어두워졌다. 재밌는 것은 해가지면 하늘보다 땅이 먼저 새카매진다는 것이다. 지평선으로 넘어간 해가 하늘로는 아직 빛을 보낼 수 있지만 땅에는 그 빛이 도달할 수 없으니 그런가보다. 당연한 사실인데 항상 전기가 들어오는 밝은 곳에 살 때는 알 수 없었다. 이렇게 아타카마에서 두번째 날이 저물었다.



아르헨티나 살타에서 칠레의 산 페드로 데 아타카마(줄여서 아타카마)로 가는 버스를 탔다. 아타카마는 워낙 작은 곳이라 이 곳이 최종 도착지는 아니고, 세계 최대의 구리광산이 있는 카라마로 가는 버스가 아타카마에서 잠시 정차하는 것이다.


버스는 다시 안데스를 오르기 시작했다. 칠레와 아르헨티나를 지그재그로 여행하며 여러번 안데스를 넘은터라 이제는 몇 번짼지도 잘 모르겠다. 서서히 고도가 높아지면서 멘도사에서부터 계속 봐왔던 익숙한 안데스의 황량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어렸을 때 봤던 서부영화에서 본 풍경과 흡사했다. 저 멀리서 말을 탄 보안관이 나올 것 같다.


황량하지만 아직은 수목한계선을 넘지는 않은듯 와중에 가끔 나무가 보인다.


어찌보면 터키 파타고니아의 지형과 흡사한 면도 있었다. 대지의 약한 부분부터 서서히 침식되어 거대한 골짜기가 만들어지고 있다.


버스는 거대한 골짜기를 조금씩, 끊임없이 올랐다. 구불구불한 도로를 돌고돌다보니 어느새 주위에 나무가 없어지고 덤불이나 선인장외에는 자랄 수 없는 높이까지 올라왔다.


갑자기 버스 옆으로 과나코인지, 비쿠냐인지 모를 한무리의 야생 동물들이 보였다. 이런 황량한 곳에서도 동물들이 살아간다는게 새삼 신비롭게 느껴졌다.


사진의 동물이 무엇인지 찾아보려고 위키에서 비슷한 동물을 찾아서 사진과 비교해봤다. 사진으로는 비쿠냐일 가능성이 매우 높아보인다. 낙타과 동물은 낙타속에 속하는 단봉낙타와 쌍봉낙타, 라마(야마)속에 속하는 라마와 과나코, 비쿠냐속의 비쿠냐와 알파카가 있다고 한다. 낙타과에 속하는 3속 6종의 동물중에서 남미에만 2속 4종의 동물이 살고 있다는게 흥미로웠다.


비쿠냐속에 속하는 알파카는 잘 알려져있듯이 털이 고급 코트를 만드는 재료로 쓰인다. 하지만 비쿠냐의 털이 더 훌륭해서 잉카제국때부터 귀족들의 옷감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무분별한 포획이 이뤄졌고 개체수가 엄청나게 줄었다가 멸종위기종으로 지정되면서 다시 수가 늘고 있다고 한다. 이 동물은 해발 3500~5500미터에서 서식한다니 혹독한 바람과 추위를 이기려면 털이 곱고 훌륭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오래된 똑딱이 카메라로 달리는 버스안에서 지나치는 동물을 찍기는 불가능했다.


안데스 산맥의 동쪽에서 서쪽으로 넘어가니 저멀리 하얀 평원이 보였다. 여기서 볼리비아의 우유니 사막이 보일리는 없는데 어떻게 된 것일까 궁금했었다. 사실 바다가 융기되어 형성된 소금사막은 우유니가 가장 크고 유명한 것일뿐, 이 지역에는 그렇게 만들어진 소금사막이 여러 곳이었다.




작은 소금사막 가로질러 달렸다. 군데군데 소금을 채취하는 것으로 보이는 곳들이 있었는데 바닷물로 소금을 만드는 염전만 보다가 땅위에서 채취한 소금더미를 보니 색다른 느낌이었다.


이 황량한 사막을 가로질러 기다리는 사람에게 소식을 전해줄 통신줄이 가느다란 전봇대에 매달려있다. 전깃줄일까 생각도 했지만 아마 전화선일 가능성이 더 높을 것 같다.



몇 번 안데스를 넘을 때마다 해발 4000미터가 넘는 곳을 지나왔지만 그 때는 잠시여서 그런지 고산증세를 느끼지 못했는데 여기서는 몇 시간째 버스를 타고 지나다보니 머리가 약간 무거워졌다. 승객들중에서 민감한 사람들은 어지럼증, 두통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보통 해발 3000미터 이상인 곳에서부터 발생하는 고산병은 사람에 따라서 더 낮거나 높은 지역에서 생기기도 한다. 경증의 고산병은 두통이나 불면 등을 동반하지만, 중증의 고산병은 뇌나 폐의 부종을 일으켜서 사망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여행전 블로그나 책자를 통해 매우 고통스럽고 힘들었다는 고산병 경험담을 보면서 적잖게 걱정이 되었다. 게다가 고산병은 건강상태, 나이와 상관이 없기 때문에 미리 대비할 수도 없다.


높은 지대의 저산소 상태로 인해 발생하기 때문에 증세를 약화시키는 방법은 있지만 낫기 위해서는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수 밖에 없다. 아니면 천천히 상승하면서 몸을 적응시켜야 하는데 고산지역에 적응을 하면 몸속의 헤모글로빈 수치가 올라간다고 한다. 실제 고산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보통의 사람들보다 산소를 운반하는 기능을 하는 헤모글로빈 수치가 매우 높다고 한다. 나는 원래 사람들의 평균치보다 헤모글로빈 수치가 높았는지 모르겠지만 머리가 약간 무겁게 느껴진 것 빼고는 별다른 증세가 없었다. 앞으로 고산지대에서 해야 할 여행코스가 많은데 증세가 약한게 적잖게 안심이 되었다.



하루종일 버스를 타고 가다보면 창밖의 풍경도 시들해지고 더 이상 잠도 오지 않으면 버스 승객들에게 관심을 갖게 된다. 이 날 버스에서 본 가족은 여행중에 본 가장 인상 깊은 사람들 중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그들로 인해서 여행에 대한 내 생각이 조금 더 넓어졌다는 느낌이다.


처음 이 가족들에게 눈길이 가게 된 것은 버스가 출발한지 몇 시간 지났을 때, 30대 여자가 좌석 위 선반에 올려놓은 가방을 뒤져 먹을 것을 꺼내는 모습을 보면서부터였다. 먹을 것을 내려 앉아있는 10살 내외의 두 남녀 아이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때는 아이들 둘을 데리고 이 멀고 험한 곳을 여행하는게 대단하다는 단순한 생각만 했었다. 그런데, 나중에 키가 엄청 컸던 아빠의 배위에서 놀고 있는 이제 두어살 되어 보이는 작은 아이를 보게 되었다. 어라, 아이가 둘이 아니라 셋이었구나, 게다가 저렇게 어린 아이를 데리고도 배낭여행을 하는게 놀라웠다.


아이는 장거리 버스 내내 칭얼대거나 울지않고 갑갑함을 잘 참아내고 있었다. 아무리 부모라하더라도 혼자 여행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남미에서 아이 셋을 돌보면서 여행을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부지런함과 인내력의 힘이긴 하지만 아이들이 각자의 몫을 충실히 해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게다가 막내아이의 나이로 볼 때, 집밖에 내보내는 것도 전전긍긍할 부모들이 많을텐데 이들은 세 아이와 함께 세상밖으로 나온 것이다.


그 뒤에 놀랄 일이 또 한번 일어났다. 커다란 아빠의 덩치에 가려 보이지 않던 옆 좌석에는 10대 초반으로 보이는 첫째 아이가 앉아있었고, 이 아이는 여행중에 팔이 부러졌는지 깁스까지 하고 있었다. 세상에 이 부부는 두어살부터 10대 초반까지 아이 넷을 데리고 여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아이 하나가 팔이 부러져 깁스를 하는 사고가 있었는데도 포기하지 않고 여행을 계속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미친 짓이라고, 무모하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이들이 돌아갈 곳 없는 떠돌이나 노숙인이 아님에도 여행을 계속하고 있는 것은 아직 돌아갈만큼 힘들지 않기 때문이며, 여행을 하면서 얻는 부분이 돌아갔을 때 얻는 것보다 더 크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의 아이는 여행을 통해 참을성있고, 배려할 줄 아는 사람으로 자랄 것이며, 이 때 배운 것들은 살아가는 동안 만나게 될 어려움에서 이 아이들을 지탱하는 힘이 되어줄 것이다.


다음날 아타카마의 관광안내소에서 엄마와 막내아이를 다시 만났다. 엄마는 안내소 직원과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었고, 아이는 엄마 발치에 철퍼덕 주저앉아서 혼자 열심히 놀고 있었다. 아이는 뽀로로가 나오는 스마트폰도, 값비싼 장난감도, 유기농 먹거리도 없지만 혼자서 놀 수 있는 상상력과 왠만한 세균은 이겨낼 수 있는 면역력, 엄마의 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인내력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 이 가족은 나에게 적지않은 충격과 놀라움을 주었다.






여기서도 비쿠냐 무리를 만났다.






버스는 안데스의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을 지났다. 희고 검은 호수들, 침식이 되어 단단한 바위만    우뚝 솟은 외계 행성같은 들판, 손에 잡힐듯 떠있는 구름들을 지나고 다시 버스는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타카마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많이 기울어있었다. 아타카마도 해발 2400미터가 넘는 고지대지만 고산증세는 거의 느껴지지 않았던 것은 다행이었다. 인구 2000명 남짓한, 도시가 아니라 마을 수준인 아타카마는 사막 한가운데 위치해있어 황량했고, 바람이 불면 모래 먼지가 휘몰아쳤다. 



숙소 예약을 미쳐 못한 탓에 부랴부랴 숙소를 잡고 마을 중심가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늦은 저녁식사를 했다. 물자가 부족한 탓인지, 마을이 여행자로부터 나오는 수익으로 유지되기 때문인지 식사 가격은 비쌌고, 맛은 없었다. 해가 지니 가로등도 없는 마을이 어둠에 잠겨서 스마트폰의 플래시에 의지해 숙소로 돌아가는 길을 밝혀야했다.


아타카마의 첫인상은 황량하고 거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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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 코르도바에서 출발한 버스는 이튿날 아침에 살타에 도착했다. 아무리 좌석이 180도 가까이 펼쳐지는 가장 좋은 등급의 버스라 하더라도 야간버스를 타고나면 한동안은 멍하니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20대의 팔팔한 나이였으면 이렇지 않을텐데 생각하지만 곧 남들이 쉽게 갖지 못하는 기회를 갖게 된 것에 감사하게 된다.


살타는 인구 50만명 정도되는 아르헨티나에서 여덟번째로 큰 도시다. 아르헨티나 북부도시라서 위도상으로는 열대지방에 속하기 때문에 꽤 더우리라 생각했지만 안데스 산맥 동쪽 산자락 해발 1100미터가 넘는 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코르도바나 멘도사보다 오히려 덥지 않았다. 코르도바에서 출발한 버스는 살타에 거의 가까워질 무렵부터 갑자기 산길을 오르기 시작하는데 고갯길을 다 오르면 갑자기 너른 분지에 커다란 도시가 나타났다.


위키에서 찾아본 살타는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스페인다운 도시로 유명하다고 한다. 그러고보니 살타에 있었던 성당이나 독특한 건축물들, 묵었던 숙소의 구조가 스페인에서 보던 그것과 매우 유사한 점이 많았다.

묵었던 숙소의 입구는 사진처럼 타일들이 붙여져 있었고, 스페인 세비야나 그라나다에서 봤던 집들처럼 건물이 사방을 둘러싸고 그 가운데 작은 뜰이 있는 구조였다. 내부 장식이나 인테리어는 다르지만 세비야에서 플라멩코를 봤던 그 저택과 구조가 비슷했다.


오전에 호스텔에서 잠깐이나마 편안하게 수면을 취해 정신을 차리고서는 살타에서 유명한, 도시의 전망이 훤히 내려다보인다는 언덕에 오르기 위해 길을 나섰다. 

유럽의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케이드도 있다.


남미의 사막, 야마, 원주민 여인의 모습을 그린 벽화

아마추어가 그린 것이지만 그래피티가 아닌 이런 벽화가 여행자 입장에서는 왠지 더 반갑다.


산 프란시스코 성당



7월 9일 광장(Plaza 9 de Julio)을 중심으로 유럽풍의 커다란 건물들이 늘어선 지역에서 외곽으로 조금만 벗어나면 일반 사람들이 살고있는 낮은 단층집들이 주를 이룬다.




언덕에 올라가는 케이블카를 타기 위해 지도를 보며 꽤 걸었다. 걷는 동안 보니 살타에는 공원이 많았고 휴일인지 사람들도 많이 나와있었다. 

케이블카 승강장에 설치된 유리로된 오벨리스크. 무엇을 기념하는 것인지는...


조금은 낡은 듯한 작은 케이블카에 오르면 점차 높아지면서 살타의 전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16세기 후반 스페인 정복자에 의해 전략적으로 건설된 도시라서 그런지 도로는 쭉 뻗어있고, 도시 구역은 잘 정비되어 있다. 의도적으로 만든 도시가 아니라 사람들이 살다보니 필요에 의해 커진 도시에서는 보기 힘든 모습이다.



언덕은 그다지 높지는 않았지만 살타라는 도시가 고산지역의 분지에 형성된 까닭에 도시 전체를 훤히 조망할 수 있었다. 높은 건물도 거의 없어서 도시 반대편에 있는 산맥까지 보인다.


이 언덕은 여행자들뿐만 아니라 현지인들에게도 인기있는 장소인 것 같았다. 케이블카 승강장에도 사람들로 꽤 붐볐는데 언덕 위에는 걷거나 차를 타고 온 사람들까지 합해져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이제 막 시작된 봄을 즐기기 위해 가족, 연인, 친구들끼리 이곳을 찾고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언덕위에 헬스장에나 설치되어야 어울릴 듯한 운동기구가 있어서 힘깨나 쓰는듯한 남자들이 돌아가며 운동기구에 달라붙는 모습도 있었고,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에어로빅을 가르쳐주는 사람도 있었다.




언덕을 내려와서 다시 7월 9일 광장으로 돌아왔다. 광장에는 이 도시에서 가장 큰 살타 대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도시의 번화한 광장에 도시에서 가장 큰 성당이 있고, 광장 주변으로 레스토랑이나 박물관, 미술관이 자리잡은 모습은 유럽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도시구조이다.

7월 9일 광장에 있는 분홍빛의 살타 대성당(Catedral Basilica de Salta)

남미의 지방도시에 있는 성당치고 꽤 크고 화려하다.







살타에서의 첫째날을 기분좋게 보내고 있었지만 자꾸만 몸에 생기는 울긋불긋한 반점이 걱정스러웠다. 개수도 점점 늘어나고 있는데다 가려움까지 심해졌다. 이게 소위 말하는 베드벅(빈대)이라면 혹시 배낭이나 다른 옷가지에 옮아 있을 경우, 골치가 아파진다. 이 베드벅이라는 녀석은 피를 빨 대상이 없어도 끈질긴 생명력으로 버티고 있다가 언젠가 그 옷을 꺼내 입거나 살에 닿으면 다시 흡혈활동을 재개하게 때문이다. 이 베드벅은 저렴한 숙소를 이용하는 배낭여행자들에게는 어쩔 수 없이 취약한 부분이다. 베드벅에 물리면 모든 짐을 꺼내 햇볕에 말리고 옷가지는 세탁해야 한다고 들었었고, 여행중에 만난 여행자 몇 명은 베드벅 때문에 고생했던 사례를 치를 떨며 이야기했었다.


(모기에 물리는 것도 어떤 사람은 보통보다 심하게 불풀어 오르거나 더 가렵듯이 빈대도 마찬가지다. 베드벅에 물려서 병원에서 치료 받고 약도 먹었지만 한달 넘게 고생했다는 사람도 있었다. 게다가 모기는 한번 물고나면 끝이지만 이 베드벅은 엄청난 식욕과 성욕으로 수없이 피를 빨고 새끼들을 번식한다.  절대 만만히 봐서는 안될 녀석이다.)


숙소 주인에게 반점을 보여주었더니 자기가 보기에는 베드벅이 맞는 것 같다면서 의사를 불러주겠다고 했다. 갑자기 의사를 불러준다니, 왕진비가 엄청 나오는건 아닌가 걱정이 됐지만 어쨌든 진료는 받아야하니 기다려보기로 했다.


두어시간이 지나서 왕진 온 의사는 물린 자국과 증상을 꼼꼼하게 살피고, 이전에 어느 도시에서 왔는지, 어디서 묵었는지, 어떤 교통수단을 이용했는지 상세히 물었다. 예상했던대로 검진결과는 베드벅이라면서 처방전을 주었다. 그리고, 아무런 비용청구 없이 그냥 돌아갔다.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숙소 주인에게 물어보니 아르헨티나에서는 간단한 의료진료는 무료라고 했다. 그것은 여행자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무료진료이기 때문에 의료 수준은 조금 미흡해서 좋은 병원에서 진료를 받기 위해서는 예약하고 오래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우리나라보다 소득수준이 낮은 아르헨티나가 (왕년에는 세계 5위 안에 드는 강국이었다 하더라도) 무료 의료라니... 노동자와 서민을 위한 복지정책(물론, 그로인한 폐해도 적진 않았지만)을 폈던 후안 페론과 에바 페론의 영향일까? 


잠깐 인터넷을 찾아보니 아르헨티나의 의료와 교육은 전액 무료라고 한다. 다만, 응급조치가 필요한게 아니라면 의사의 진료를 받기 위해 몇 시간쯤은 기다려야 하고, CT나 MRI 같은 고가의 장비를 이용한 검사는 몇 개월 전에 예약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의사의 진료는 환자의 증상을 듣고 대충 처방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매우 꼼꼼하게 이루어진다고 한다.


군사정권과 그 뒤를 이은 정부의 무능, 부패로 현재까지도 아르헨티나는 경제적으로 매우 힘든 상황이지만 국민의 의료와 교육을 국가가 책임지고 있다. 확실히 구분해 생각해야 할 것은 기득권층의 욕심으로 국민의 삶이 피폐해진 것이지 국민에 대한 무상 의료와 교육 때문에 아르헨티나의 경제가 파탄지경에 이르게 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기득권층의 욕심과 위정자의 무패가 나라를 망치는 것이지 복지 때문에 망가지는 국가는 없다.


약국에서 의사가 처방해준 약을 사고, 근처에서 현지 사람들이 많이 들어찬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샐러드와 스테이크, 치즈를 올린 두꺼운 면이 세트로 나오는 메뉴였는데 보기보다 맛이 매우 훌륭했다. 정확하게 기억할 수는 없지만 가격도 꽤 저렴했었다. 



아르헨티나의 소고기야 훌륭하다는걸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치즈만 올린 두터운 국수(우리나라 칼국수 면발이다)마저 맛있을 수 있다는건 몰랐다.


저녁에는 오랜만에 한국 음식이 먹고 싶어서 대신으로 근처에 봐둔 중국 식당으로 갔다. 중국 음식점은 남미라하더라도 왠만한 도시라면 적어도 몇 군데는 있었다. 중국사람들이 세계 각지에 살고 있지 않은 곳이 없어서 그렇겠지만... 그리고, 중국음식의 현지화도 잘 진행되어서 현지 사람들도 많이 이용하고 있었다.


메뉴판을 보고 대충 시킨 음식은 다행히 탕수육과 꽤 비슷했다. 탕수육의 단맛은 많이 빠지고 대신 짠맛이 좀 더해진 음식이었다. 보험드는셈 시킨 만두도 좀 타긴했지만 썩 괜찮았다. 



코르도바에서 가져 온 베드벅으로 살타에서는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자신의 숙소에 베드벅을 옮겼을지도 모르는 여행자에게 친절했던 숙소주인과 아르헨티나의 무상의료제도 덕분에 베드벅과의 첫번째 만남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다행인 것은 벌레에게 잘 물리는 체질이긴 하지만, 물리면 심하게 덧나지 않고 금방 가라앉는다는 것이다. 내가 여행에 적합한 체질이란게 슬슬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제, 우유니 투어의 전초기지인 산 페드로 데 아타까마로 간다.

멘도사에서 목적지인 칠레의 산 페르도 데 아타카마까지 가려면 중간에 아르헨티나의 북부도시 살타까지 가야했다. 그런데, 멘도사에서 살타까지도 한번에 가기에는 만만한 거리가 아니었다. 방금 찾아본 구글맵에는 1200km, 16시간이 조금 넘는 거리로 나오지만 버스 매표소에서 알아본 바로는 24시간이 훨씬 넘는 거리였다.(중간에 다른 도시에 정착하기 때문인지, 가는 길이 다르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야간 장거리 버스를 타는게 지겨워져서 멘도사와 살타 사이에 있는 코르도바를 거쳐서 가기로 했다.


당시에는 단 하루만 머물고 갈 생각이었기 때문에 코르도바가 어떤 도시인지 전혀 조사하지 않았는데, 위키에서는 이 도시가 130만명이 넘는 아르헨티나에서 두번째로 큰 도시이며(국토가 넓은 국가에서 인구 100만명이 넘는 도시는 썩 드물다.) 경치가 좋은 교육도시라고 설명하고 있었고, 재미있게도 코르도바라는 이름이 붙게 된 이유가 스페인 식민지시대 여기에 도시를 건설한 스페인 사람의 아내가 스페인 코르도바 출신이기 때문이라고 추측했다.(스페인의 식민지였던 남미 여러 국가들의 도시명이 스페인의 도시와 같은 경우가 상당히 많다. 비슷한 언어권에서 도시 이름이 같은 경우가 흔한 것은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만 봐도 알 수 있다.)



단 하루를 머물렀을 뿐이지만, 코르도바에서 예약한 호스텔은 내 기호와 상당히 동떨어진 곳이었다. 늘상 마찬가지로 예약사이트에서 별점이 높은 숙소를 골라 예약하지만 가끔 숙소선정에 실패하는 이유는 별점을 주는 사람들의 나이나 성향에 따라 좋은 숙소의 기준이 많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배낭여행자 치고는 나이가 든 편이기 때문인지 나는 조용하고 가능한 깨끗한 숙소를 선호하는데, 젊은 배낭여행자들은 서로 어울리기 쉽고, 시끌벅적한 분위기의 호스텔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이 호스텔은 후자에 속하는 곳으로 머무는 사람들도 주로 서양의 젊은 여행자들이었고 벽에는 유명한 힙합 뮤지션들이 그래피티로 그려져 있었다.


게다가 이 호스텔의 장기 투숙객인, 여행하다가 경비 마련을 위해 호스텔의 일을 돕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힙합 머리를 한 흑인과 같은 방으로 배정 받았는데, 장기 투숙객이 머무는 방의 특성상 굉장히 지저분했다.(호스텔이나 게스트하우스에서는 매일 청소를 하지 않는다. 투숙하던 사람이 떠나야 그 사람이 머물던 자리를 치우는게 일반적이다.) 하룻밤 자고갈 뿐이니 뭐 어떠랴 싶었기 때문에 그냥 머물렀다. 그리고, 그게 실수였다.


하룻동안 코르도바에서 머물며 했던 일은 축구를 보는 것이었다. 식당을 겸하는 거실에는 꽤 커다란 TV가 설치되어 있었고, 마침 그날은 엘 클라시코(스페인 축구리그를 대표하는 두 팀인 FC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의 축구경기)가 열리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하루종일 연달아 세 경기를 보고 오후가 한참 지나서야 시내구경이라도 해볼 요량으로 호스텔을 나섰다.










동네 마실가는 마음으로 나온 코르도바 시내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컸다. 호스텔에서 알려 준 방향으로 걸어가서 광장을 중심으로 성당과 쇼핑상가를 구경하고 근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했다. 버스를 갈아탈 목적으로 머문 곳이라 별다른 기억도 남아있지 않다. 단지, 남아있는 특별한 기억이라고는 하룻밤 머문 그 방에서 여행중 8개월만에 처음 빈대에 물렸다는 것이다. 단 하룻밤만에...


이날 저녁에 다음 목적지 살타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그리고, 슬금슬금 가려워오기 시작했다.


낡긴했지만 가장 좋은 등급의 버스를 탔더니 거의 180도로 누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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