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도사 게스트하우스 입구에는 투어를 소개하는 브로셔들이 벽면에 빼곡하게 붙어 있었다. 그만큼 이곳에 여러가지 볼거리들이 많다는 이야기다. 그중에서 어제 와이너리 투어에 이어서 멘도사 주변 몇 군데를 하룻동안 돌아보는 투어를 예약했다. 정확한 투어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투어가 대부분 안데스 산맥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내맘대로 안데스 투어라고 이름붙였다.


이른 새벽, 여행사 승합차에 올랐다. 한참을 달려 막 해가 뜬 직후,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길가에 차를 세웠다. 이미 파타고니아에서 여러 아름다운 호수와 산들을 봤기 때문에 특별히 아름답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새벽부터 승합차에 구겨져있던 몸을 펴고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시니 그제서야 잠이 깨고 정신이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호숫가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승합차는 꽤 긴 시간을 달렸다. 스마트폰으로 지도를 보니 며칠 전 산티아고에서 멘도사로 왔던 길을 되짚어 올라가는 것 같았다. 당시에는 구불구불한 길을 달리는 버스안에서 지쳐서 잠들었기 때문에 보지못하고 지나쳤던 주위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멀리 눈덮인 안데스의 높은 산이 보인다.


그다지 높아보이지 않지만 대부분이 5,6천 미터가 넘는 산들이다.



가다보니 창밖으로 독특한 지형이 눈에 띄었다. 많지는 않지만 물이 흐르는 것으로봐서는 하천임이 분명한데 강폭에 비해 수량이 무척 적었다. 그리고, 넓은 강폭의 양쪽은 깎아지른 절벽이었다. 사진에서는 절벽이 그다지 높아보이지 않지만 실제로 꽤 높아서 수십미터는 될 것 같았다. 특정한 일부분만 이런게 아니라 이날 봤던 대부분의 하천이 이런 모양을 하고 있었다. 도대체 어떤 지질학적인 혹은 환경적인 영향으로 이런 모양의 하천이 생겼는지 궁금했다.





한참을 달린 승합차는 포장이 잘된 도로에서 벗어나 비포장도로 산길을 조금 달려서 아무것도 없이 황량해 보이는 곳에 멈췄다. 처음에는 여기서 뭘 보라는지 몰라 어리둥절했지만 가이드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니 돌로 만든 무너질듯 낡은 다리가 하나 보였다.



옛날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해방군들이 안데스를 넘을 때 이용했던 다리라고 하는 것 같았다. 글을 쓰면서 자세한 내용을 찾아보려고 잠깐 구글과 위키에서 자료를 찾아봤지만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개인적인 궁금증 때문에 좀 더 시간을 들여 찾아보고 내용을 업데이트해야 할 것 같다.


그 옛날 빈약한 장비와 무기를 가지고 이 거대하고 험한 안데스 산맥을 넘었을 해방군들을 생각하니 그들의 고생스러웠을 여정이 만주에서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운 우리 독립군들의 모습과 겹쳐지며 왠지 엄숙한 기분이 들었다.


위 사진의 동판에 쓰였다시피 역사적인 다리(Historico Puente)라고 기념하면서도 주변에는 다리를 보호하기 위한 어떤 시설물도 눈에 띄지 않았다. 아무도 지나지 않을 것 같은 황량한 곳에 낡은 다리만 덩그러니 있어서 모르는 사람은 보고도 그냥 지나칠 수 밖에 없을 것 같았다. 아르헨티나 정부가 관리할만한 여력이 안되어서인지, 역사적인 기념물이라 하더라도 세월이 지남에 따라 낡아가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다시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은 잉카의 다리(Puente del inca)였다. 이 곳은 계곡에 거대한 자연석이 다리처럼 가로놓여진 곳이었다. 그 아래에 옛날 안데스 산맥을 넘는 사람들이 묵었던,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 건물이 있다. 다리가 누런색을 띄게 된 것은 유황성분 때문인데, 잉카인들도 이용했다는 뜨거운 물이 나오는 온천이 있다.




멘도사에서는 구름 한점 없던 하늘이 안데스 산맥 높이 올라오자 구름으로 가득했고 찬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이 곳을 찾는 여행자에게 팔 목적으로 근처에서 나는 흙으로 빚은 간단한 토기나 장식물을 팔고 있었는데 인기 애니메이션 심슨 가족에 나오는 캐릭터 모양의 토기와 최후의 만찬을 모티프로 예수와 12제자가 식탁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장식물도 있었다. 예수와 12제자가 모두 인디오라는 것이 재미있었다.


다시 승합차를 타고 한참을 달려 남미 최고봉이자 남반구 최고봉인 아콩카과 기슭에 도착했다. 6900미터가 넘는 고산이기 때문에 등반을 하려면 허가를 받고, 가이드를 고용하고, 준비를 철저히 해야하지만 투어는 아콩카과 봉우리가 잘 보이는 기슭까지만 완만한 경사를 오르면 된다. 그렇지만 이 기슭이 이미 고산병이 시작되는 해발 3000미터를 훨씬 넘는 곳이라 완만한 경사지만 오르다보면 이상하게 몸이 무겁고 머리가 멍한 증상을 겪에 된다.









이날 심한 구름과 바람으로 아콩카과의 봉우리를 확실하게 확인할 수는 없었다. 그냥 저 봉우리인가보다 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급격한 날씨와 기후변화만으로도 높은 산이라는 느낌을 받기에는 충분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형형색색의 바위산들을 구경하느라 지루한 줄 몰랐다. 푸르고, 검고, 붉은 바위들이 거대한 산을 이루며, 그 위로 구름이 만들어낸 그림자가 다양한 색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한때, 칠레와 아르헨티나가 안데스 산맥을 뚫고 철도를 놓으려 했다고 한다. 칠레는 대서양으로, 아르헨티나는 태평양으로 물자를 수송하기 위해서는 남미대륙을 밑으로 빙돌아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거대한 안데스 산맥을 뚫고 철도를 연결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기술도, 자금도 부족했기 때문에 중단되었고, 지금은 당시 건설하던 흔적만 간혹 볼 수 있다.






멘도사에서는 사흘동안 머무르며 두가지 투어를 했을뿐이지만, 이 투어들이 무척 만족스러웠다. 특히, 와인을 좋아하는 여행자라면 개인적으로 유명 와이너리를 찾아다니며 취향에 맞는 와인을 골라보는 것도 즐거울 것 같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멘도사는 대부분의 아르헨티나 와인이 생산되는 지역으로 곳곳에 와이너리가 산재해 있다. 와인이 많이 생산되는 지역이라는 것은 그만큼 일조량이 많고, 날씨가 온화하다는 의미이다. 한달정도 차이가 나긴 하지만 위도 차이가 크지 않은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비해서 이곳은 낮에는 반팔이 필요할 정도로 날씨가 정말 따뜻했다.


아르헨티나 와인의 특징은 말벡이라는 포도품종으로 대표된다. 유럽에서는 이 품종의 포도만을 가지고 와인을 만드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하며, 여러 포도품종을 섞어서 블렌딩을 한 와인을 제조할 때만 쓰인다고 한다. 그런데, 이 품종이 아르헨티나의 기후와 토양에서는 기막힌 와인을 만들어 내게 된 것이다.


아르헨티나 와인에도 까르베네 소비뇽, 쉬라즈 등등의 와인도 생산되지만 상당부분은 말벡이다. 이 말벡 와인은 무겁고, 거친 특성을 가진다. 부드럽고 가벼운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절대 선호할 수 없겠지만 묵직한 느낌의 와인을 좋아한다면 아마도 반하고 말것이다.


이런 멘도사이니 여행자를 대상으로 다양한 와이너리 투어가 성행하고 있었다. 내가 묵은 게스트하우스에서도 현지 여행사들과 연계해주는 투어 상품을 팔고 있었다. 도착한 첫날 저녁에 투어를 예약하고 이튿날 오후에 바로 참여하게 되었다.



먼저, 환전을 위해 멘도사 중심가로 나왔다. 아르헨티나 정부가 달러 대 아르헨티나 페소의 환율을 1대 4.5로 고정해 놓고 있지만, 워낙 좋지않은 아르헨티나의 경제상황 탓으로 그보다 훨씬 높은 비율로 환전을 해주는 암달러상들이 도시마다 성행하고 있었다. 아르헨티나를 여행하면서 국제현금카드를 사용하는 것은 여행자 입장에선 무척 손해를 보게 되는 것이라 단기 여행자들은 미리 달러를 가지고 입국하고, 장기 여행자들은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배를 타고 우루과이의 콜로니아로 가서 달러가 출금되는 ATM에서 달러를 인출해서 가지고 다니다가 필요할 때마다 환전을 한다.



멘도사 시내에 있는 작은 공원은 이미 수목이 초록으로 물들어있었다.


오후에는 게스트하우스로 픽업 온 여행사 승합차를 타고 와이너리 투어에 도착했다. 투어는 세 개의 와이너리를 방문하며, 첫째와 둘째 그리고 둘째와 셋째 와이너리를 이동할 때는 자전거를 타고 이동했다. 와이너리에서는 그 곳의 소믈리에에게 그곳에서 생산되는 와인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시설을 견학한 후, 준비한 몇 가지 와인을 시음하는 순서로 진행되었다. 


첫번째 와이너리에 도착했다. 이 곳은 80년이 조금 넘은, 가족들이 운영하는 작은 규모의 와이너리였다.


먼저 포도밭에서 소믈리에가 이 와이너리의 역사와 와인의 특징에 대해 설명해준다.

당시에는 아직 포도가 열릴 철이 아니라서 포도맛을 볼 수 없었던게 아쉬웠다.




포도밭 주변에는 예전에 사용했음직한 농기구나 시설들이 곳곳에 남아있다.



이 커다란 창고가 전부 와인을 발효하는 통이며, 벽에는 오래된 커다란 수도꼭지 같은 것이 달려있다.



드디어 와인을 시음하는 시간이 되었다. 세 가지 정도의 와인을 시음할 수 있으며, 더 달라고 하면 인심좋게 넉넉한 양을 더 주었다. 와인을 잘 모르지만 그 중 하나가 내 입맛에 꽤 맞았기에 살까말까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사지 않았다. 그리고, 나중에 오랫동안 후회했다.



두번째 와이너리에 도착했다. 이 곳은 첫번째 와이너리보다 훨씬 크고, 시설도 현대와 되어 있었다. 그래선지 와이너리라기 보다는 그냥 공장 견학같은 느낌이 강했고, 와인도 앞서보다 훨씬 비싸고 내 입맛에도 맞지 않았다. 모든 것이 그렇지만 와인은 가격보다 자신에게 좋은 것이 제일 훌륭한 것이다.

견학시간이 될 때까지 땡볕에 기다리게 했던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시설은 무척 깨끗하고 현대적이었지만 와이너리라면 왠지 좀 고풍스럽고 낡은 곳이 더 끌린다.

물론 이런것도 일종의 선입견일테지만.


무엇보다 두번째 와이너리가 좋지 않았던 것은 시음하는 와인이 지나치게 부족했다는 것이다. 여러 병을 가지고 와서 실컷 자랑을 하더니 시음은 고작 와인 한병으로 마무리했다. 첫번째 와이너리와 비교되어서인지 투어했던 사람들 모두 뭔가 아쉬운 분위기였다.



와인이 많다고 저걸 다 시음할 수 있는게 아니다. 그냥 자랑하려고 들고나온 것이다.


세번째 와이너리도 꽤 오래된듯한 곳이라 마음에 들었다. 먼저 여러가지 와인 중에서 맛보고 싶은 품종의 와인을 선택해서 시음하고 그 뒤에 더 달라고 하면 준비된 한에서는 넉넉하게 준다. 조금씩이긴 하지만 세군데서 와인을 마시다보니 이제 약간 취기가 올랐다.






개인적으로는 첫번째 와이너리에서 마셨던 와인이 가장 좋았지만 망설이다 사지 못했기 때문에 세번째 와이너리에서 가장 맘에 들었던 것으로 한 병을 샀다. 사실 아르헨티나 와인은 품질에 비해 가격이 무척 저렴한 편이므로 좋다 싶으면 망설일 필요없이 무조건 사는게 남는 것이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대형 마트의 와인 매장에는 100페소(한화 2만원) 정도되는 와인은 고급 와인으로 취급해서 유리 진열대 안에 보관하며 열쇠를 채워 놓는다. 이런 와인이 우리나라에 수입되면 매장에서 10만원이 넘는 가격표가 붙고, 레스토랑에서는 거기에 다시 몇 배의 가격표가 붙는다. 아르헨티나를 여행한다면 날마다 와인을 마셔라. 좋아하지 않더라도 마시다보면 좋아질 것이고, 여행 경비를 뽑는 방법이 될 것이다.



와이너리 투어는 꽤 만족스러웠다. 와인을 좋아하지 않는 여행자라도 한번쯤 와이너리를 구경하고 시음하는 경험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비싸기만 하고 숙취가 심한 술로만 여겼었는데 지구 반대편에 와서야 와인이 이렇게나 좋은 술인지 알 수 있게 되다니... 매번 2차, 3차에서야 와인을 마셨으니 전에 마신 술과 뒤섞여 숙취가 심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을 와인이 그런 술이라고 판단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게다가 와인은 비싼 술이 아니다. 우리의 소주보다 저렴한 가격부터 수천만원을 호가하는 가격의 와인까지 종류가 많을뿐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와인의 가격이 비싼 것은 지나치게 많은 이익을 더한 유통업체들의 문제다. 최근에는 우리나라에서 와인을 즐기는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유통업체들의 경쟁이 더해져 가격이 내려가긴 했지만 아직도 거품이 많은 것 같다.


와인을 마셨더니 갑자기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매일 밤 먹던 스테이크가 그리워졌다. 투어를 마치고 마트에서 소고기를 사다가 게스트하우스 부엌에서 스테이크를 구웠다. 동양 여행자가 스테이크를 굽고 있으니 저녁을 만들던 서양 여행자들이 호기심에 차서 구경하고 몇몇은 엄지를 세워 보였다.


오늘 산 와인은 아까워서 못마시고 게스트하우스에서 저녁에 나눠주는 와인을 곁들여 스테이크를 먹었다. (이날 샀던 와인은 깨질까 배낭에 고이 넣어서 가지고 다니다 2주 후에 칠레 북부 아타까마에서 저녁 만찬으로 마셨다.)


와이너리 투어를 했지만 와인을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는 여전히 모른다. 사실 그걸 알아야 할 필요도 없다. 자기한테 좋은 것이 가장 훌륭한 것이라는거, 좋은 느낌이 왔을 때는 놓치지 않고 잡아야 한다는 것을 그날 다시 배웠다.

산티아고에서 4박 5일을 지내는 동안(밤에 도착해서 나흘 뒤 낮에 떠났으므로 머무른 날은 3일 정도) 많은 여행자들이 찾는다는 칠레의 해안도시 발파라이소에 다녀올까 생각하다가 관뒀었다. 당시에는 자주 머무는 곳을 옮기고 배낭을 꾸렸다 푸는데 진저리가 났었던 것 같다. 


파타고니아 여행을 마친 지금 다음 여행의 큰 목적지는 우유니였다. 칠레에서 볼리비아쪽으로 우유니 투어가 시작되는 산 페드로 데 아타까마까지 어떤 경로로 갈 것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칠레에서 계속 북쪽으로 이동하면 되겠지만 그 사이에는 그다지 끌리는 곳이 없었다. 문득 지도를 보다가 아르헨티나 포도주 대부분이 생산되는 멘도사가 칠레의 산티아고와 멀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멘도사에는 와이너리 투어와 남미 최고봉인 아콩카과 투어 등등 몇 가지가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방향은 정해졌으니 안데스를 넘어 다시 칠레에서 아르헨티나로 가야했다.


산티아고 버스정류장에서 인상적이었던 빨간 옷의 할머니


산티아고에서 멘도사까지는 그리 멀지 않다. 구글맵에서는 자동차로 5시간이 조금 넘는 것으로 나온다. 도로 상태도 무척 양호한 편이다. 그런데, 문제는 세계에서 히말라야 다음으로 큰 안데스 산맥을 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해발 고도 500미터가 조금 넘는 산티아고에서 출발해서 단 몇 시간만에 안데스의 4000미터가 넘는 고개(?)를 넘어야한다.


산티아고에서 출발한지 얼마되지 않아 잠이 들었다가 깼더니, 주위는 이미 수목한계선보다 높아져서 황량하고 거친 산봉우리뿐이었다. 스마트폰 지도앱으로 현재 고도를 보니 3000미터가 훨씬 넘어있었다.


버스는 조심스레 커브길을 돌고돌아 끊임없이 위로 올라갔다. 지나온 길을 내려다보니 구부러진 도로가 마치 실타레를 풀어놓은 것 같았다. 라오스의 왕위앙에서 루앙프라방으로 가던 길은 좁은 도로폭과 차선을 무시하고 달리는 운전사 때문에 위험하고 험한 길이었지 이 정도로 심한 경사길은 아니었다. 아직 덜 올라왔는지 이후로도 계속해서 오르막이 계속되었다.


칠레와 아르헨티나를 잇는 국경도로라서 그런지 커다란 화물차도 자주 보였다.



이제 도로 주변은 해발 5,6000미터대의 눈덮인 산봉우리밖에 보이지 않았다.




드디어, 국경 검문소에 도착했다. 이 거대하고 거친 산맥의 고갯길 가장 높은 곳에 양 국가의 검문소가 있었다. 버스에서 내리니 역시 봄치고는 차가운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었다. 출입국 심사를 마친 후, 검문소 옆에 달린 간이 건물에서 요기를 했다. 이 곳의 유명한 메뉴는 핫도그와 남미식의 커다란 샌드위치인데 여행자들 사이에 꽤 알려져있는 듯했다. 사실 음식이 특별히 맛있다기보다 국경을 넘는 동안 요기를 할 수 있는 곳이 여기밖에 없는데다 이 황량한 국경에서 먹는 음식이니 맛있을 수 밖에 없다.




이제부터는 길고 긴 내리막이다.




멘도사의 버스터미널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방금져서 어둑해지기 시작하는 시간이었다. 먼 옛날 야마에 짐을 싣고 걸어서 넘었던 사람들은 며칠이나 걸려야 안데스의 고갯길을 넘을 수 있었을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스페인 사람들이 가지고 오기 전까지 남미에는 말이라는 동물이 없었다.) 해발 4000미터가 훨씬 넘는 고개를 몇 시간만에 넘어서 산맥 반대편에 도착할 수 있다는게 새삼 놀랍게 느껴진다. 경험하지 않았을 때는 단순히 받아들여지는 정보가 경험을 통한 감각과 감정이 뒤섞여 뇌리에 깊게 들어와 박힌다.


(남미대륙의 끝자락인 파타고니아의 안데스 산맥은 2,3000미터대의 산들이 주를 이루지만, 위로 갈수록 높아져서 이 곳은 주요 산들이 5,6000미터대 높이다. 남미 최고봉이자 아시아 대륙을 제외하고 가장 높은 산인 아콩카과(6962m)도 이 곳 아르헨티나 멘도사 주에 자리하고 있다.)


전통적인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로 바뀌고 산업화가 진행되면 기존 전통사회에서 가치있는 것으로 여겨지던 것들과 산업사회에서 가치있는 것들이 충돌하게 되고 사회구성원들은 가치관의 혼란을 겪게 된다. 대부분의 나라들이 그런 과정을 거치게 되지만 특히 빠르게 산업화가 진행된 국가들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분위기 같은 것이 있다. 우리나라는 세계 역사상 손꼽히게 빠른 속도로 산업화와 경제발전을 이룬 나라이기 때문인지 앞에서 이야기한 그런 나라를 방문하게 되면 그 분위기에 묘한 동질감이 느껴진다.


이런 느낌은 여행한 20여개 나라들 중에서 특히 베트남과 칠레에서 많이 들었는데, 베트남이 6,70년대의 우리나라와 비슷하다면 칠레는 90, 2000년대의 우리나라와 느낌이 유사하다. 우리는 지나칠 정도의 빠른 산업화가 경제적인 풍요로움을 주지만 정신적으로 가치있는 많은 것들이 사라지고, 동시에 사회적인 문제점들도 낳는다는 사실을 경험해 보았다. 그렇기에 나는 이들 국가에서 느껴지는 분위기에서 우리와 같은 동질감을 느끼지만 조금은 안타까운 생각도 든다.



앞선 글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칠레에서는 정말 다양한 해산물들이 잡히고 또 이를 이용한 요리들이 있다. 그 중에서도 유명한 것은 해산물 스프다. 우리나라 뚝배기와 비슷한 그릇에 해산물을 잔뜩 넣어서 매콤하게 끓여내는 이 음식은 맛이 해물탕과 아주 비슷하다. 조개류, 생선류, 오징어, 게살 등을 워낙 많이 넣어서 끓이기 때문에 스프와 빵만 먹어도 한끼 식사로 거뜬하다.


(이름은 잊어버렸지만)칠레 시내에는 이 음식을 파는 가게들이 몰려있는 곳이 있는데 워낙 유명한 곳이라 현지에서 물어보더라도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뜨끈하고 얼큰한 국물이 해물탕과 정말 비슷하다.




해물탕과 비슷한 칠레의 해산물 스프말고도 남미에는 우리나라와 비슷한 음식이 몇 가지 더 있다. 아르헨티나의 엠빠나다는 군만두와 약간 비슷하고, 페루에는 물회와 비슷한 새콤한 세비체, 양념치킨과 거의 똑같은 치킨요리도 있다. 이런 음식들을 맛보며 이들의 식문화를 경험하는 것은 빼놓을 수 없는 여행의 묘미다.


며칠간 흐리고 쌀쌀했던 산티아고의 하늘이 떠나기 전날에는 화창하게 개었다. 이날은 볼리비아 입국비자를 받기 위해 산티아고에 있는 볼리비아 대사관을 찾아갔다. 볼리비아 대사관은 산티아고에서 현대적인 건물들이 들어선 오피스 지구과 멀지않은 곳에 있었는데, 현대적인 빌딩의 한켠을 차지하고 있을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소박하게도 길거리의 주택건물을 대사관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주택의 응접실과 같은 곳에 잠시 대기했다가 들어간 방에는 볼리비아 대사로 보이는 아저씨가 앉아있었다. 아저씨가 내미는 몇가지 서류를 작성하고 황열병 예방접종 증명서를 보여주면 여권에 비자발급 도장을 직접 찍어준다. 게다가 친절하게도 마르지않은 도장이 반대편 페이지에 묻지 않도록 두루마리 휴지 한칸을 여권에 끼워서 건네주었다.


산티아고의 볼리비아 대사관은 내가 가 본 가장 소박하고 친절한 대사관이었다. 행색이 남루한 외국인 여행자에게도 이정도로 친절하다면 자국민에게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간혹 우리나라 외교부가 자국민에게 '갑질'하는 행태가 뉴스로 나온다. 외교부와 외교관의 첫번째 임무는 해외에 체류하는 국민들을 돕고 이들의 안전에 힘쓰는 것일텐데 말이다. 비뚤어진 엘리트 의식에 젖은 일부 우리나라 외교관들은 이 볼리비아 대사관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건기인지 시내 중심을 흐르는 대부분의 하천에 누런 흙탕물만 조금 흐르고 있었다.



높은 건물들이 늘어선 산티아고의 상업지구에서도 가장 잘 보이는 건물은 코스타네라 센터이다. 남미에서 가장 높고, 남반구에서는 두번째로 높다는 이 건물은 62층 건물인데 높이는 63빌딩보다 높은 300미터에 달한다고 한다. 위키에는 2010년 완공예정이라고 되어 있지만 어쩐일인지 방문했던 2012년에도 건설중이었다.



코스타네라 센터 근처에서 커다란 쇼핑몰에 잠시 들렀다. 여행지에서 쇼핑몰이나 백화점은 잘 들르지 않는 편이지만 라오스에서 샀던 스마트폰 케이스가 더 이상 버티기 힘들 정도로 깨져버려서 하나 구매해야 했기 때문이다.(스마트폰이 없으면 여행이 훨씬 힘들어지기 때문에 무엇보다 소중하다.)


쇼핑몰은 깨끗하고 넓었으며 다양한 브랜드들이 입점해있었다. 산티아고의 지하철도 아르헨티나나 브라질보다 깨끗하고 편리한 편이고, 장거리를 운행하는 버스들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FTA가 체결된 칠레의 해산물과 와인은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수입하고 있다. 우리나라와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산티아고는 우리 생각보다 훨씬 현대적인 도시였고, 칠레는 경제적으로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나라였다.


산티아고에는 대형 박물관, 미술관 혹은 전시장들도 여러 곳이 있다. 당시에는 도시의 명소들을 하나하나 찾아다니는 여행스타일이 지겨워져서 발길 닿는대로 내키는대로 다녔기 때문에 그런 곳들을 별로 가지 않았다. 한군데 갔던 곳이 Centro Cultural Palacio del la Moneda 였는데, 전시물보다 지하지만 자연광이 잘 들도록 지어진 건축물이 더 인상적이었다.


 Palacio del la Moneda


Centro Cultural Palacio del la Moneda 입구



산티아고는 주변이 산들로 둘러쌓인 분지형 지형이다. 그래서 도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언덕이나 산들이 많은데 도심 한가운데에도 나지막한 언덕이 하나 있다. 당시에는 이름조차 모르고 올랐는데 찾아보니 산타루시아 언덕이라고 하나보다. 이 언덕은 어느 정도 높이까지는 대로변에 설치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갈 수 있다.




언덕 꼭대기로 오르는 길은 좁은데다 많은 관광객들이 지나다니는데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잠을 잔다.



워낙 야트막한 언덕이기 때문에 도시 전체를 위에서 내려다 본다는 느낌은 별로 들지 않는다. 하지만 도심 가까이에 있고, 언덕에 오르는 길이 산책로 같아서 부담없이 가볼 수 있다. 도시를 조망하기 좋은 곳은 산 크리스토발이라고 한다.






언덕을 내려와 저녁을 먹기 위해 한국교민들이 운영하는 식당이나 잡화점이 많은 거리까지 걸었다. 여행하는 동안 한국음식이 그리울 때나 비상식량이 필요할 때 먹을 라면과 통조림, 카레가루를 사고 한국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음식은 분명 한국 음식이지만 재료가 한국산이 아니라서 그런지 아니면 현지인들의 입맛에 맞게 약간 변형되었는지 맛이 미묘하게 차이가 났다. 썩 맛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인스턴트 음식을 제외하고는 부에노스 아이레스 이후로 처음 먹는 한국음식이라 정신없이 먹었다.


산티아고는 부에노스 아이레스나 히우 지 자네이루 같은 다른 남미의 대도시에 비해 훨씬 치안이 안정되어 있고, 깨끗한 곳이다. 도심이라면 늦은 저녁에도 큰 걱정없이 길을 걸을 수 있고, 여러가지 편의시설도 잘되어 있다. 그런데 이 훌륭한 도시는 나에게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아마도 너무 보편적으로 현대화된 모습 때문에 여행자에게는 특색을 잃어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고작 며칠 머물렀던 내가 이런 판단을 내리는 것은 너무 섯부르긴하다.

산티아고는 우리에게는 낯선 도시이지만 칠레의 수도이자 인구 500만명이 훨씬 넘는 거대도시이다. 500년전 스페인의 정복자 발디비아에 의해 도시로 건설되기 시작했으며 아직도 스페인풍의 건물이나 성당이 많이 남아있지만 오래되고 낡기만한 도시는 아니다. 상업지구에는 남미에서 경제 대국으로 성장하고 있는 칠레의 위상을 보여주는 현대화된 높은 빌딩들이 즐비하다.


칠레도 다른 남미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오랜 독립전쟁을 치뤄야했으며, 독립 후에도 주변 국가들과 여러 번 전쟁을 했다. 대표적인 것이 페루, 볼리비아와 전쟁에서 승리하여 볼리비아를 내륙으로 몰아내고 현재 칠레 북부의 (거대한 구리광산이 포함된) 넓은 땅을 차지한 것이다.


그 뒤, 칠레가 현대국가로 자리잡은 과정은 우리와 매우 흡사하다. 선거에 의해 대통령이 된 살바도르 아옌데가 해외 대기업에 넘어간 국부유출을 막고 이를 국민들에게 분배하며 지지를 얻었으나, 미국의 방해와 기득권층 반발, 친미 군인들에 의한 쿠데타로 마지막까지 대항했지만 결국 자살로 삶을 마감하게 된다.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쿠데타에 성공한 피노체트는 비록 친미정책으로 인해 높은 경제성장을 이루었지만 정권유지를 위한 인권탄압과 가혹한 정치를 폈다. 군부독재정권에 의해 3000명 이상이 죽고, 10만명 이상이 가혹행위를 당했다고 한다. 이후 오랜 민주화운동에 의해 1989년 총선거를 하게 되고 피노체트 군부독재정권이 물러났으며, 현재는 남미에서는 가장 정치적으로 안정된 국가로 자리하게 되었다.(위키백과 참조)


경제발전이 우선되어야 하는가, 민주주의가 먼저인가 하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도 지금껏 논의되고 있는 문제이다. 개인적으로 민주주의 국가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개인의 인권이 우선적으로 지켜져야하며, 민주주의 이념보다 우선한 성과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대단한 성과를 낸 인물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위법과 탈법, 비인권적인 수단으로 이뤄낸 성과라면 우리는 그를 위인이라 부르지 않는다.


아르마스 광장에 있는 스페인 정복자 발디비아의 동상

500년 전의 일이라고는 하지만 정복자의 동상이 수도의 중심광장에 서 있는게 잘 이해되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들이 이땅에 살았던 원주민이라는 생각보다 유럽인 혹은 그 후손이라 생각하는 듯하다.


아르마스 광장의 국립역사박물관


스페인 식민지 시대의 건축물, 메트로폴리탄 성당



산티아고의 중심지 아르마스 광장을 돌아다니며 구경하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이 있었다. 제복을 입은 많은 수의 군인과 경찰들까지 나와 있었는데 분위기가 시위나 소요는 아닌 것 같았다. 혹시나 좋은 구경거리라도 있을까해서 그쪽으로 가까이갔다. 멀리서 사람들이 뭔가를 메고 다가오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방금 메트로폴리탄 성당 안에서 본 성녀 카르멘의 상이었다.


스페인에서도 비슷한 광경을 봤었는데 그 도시의 수호성인의 날에는 이렇게 성인의 상을 지고 도심을 한바퀴 도는 행사를 하는 것 같았다. 그 뒤에도 페루나 멕시코 등 중남미 여러 곳에서 비슷한 행사를 볼 수 있었다. 태국 치앙마이에서 쏭끄란 축제 때 모든 사원에 있는 불상을 메고 퍼레이드 하는 것과 유사했다. 완전히 다른 종교지만 비슷한 점이 많은 것은 그것을 믿는 사람의 마음이 비슷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비슷한 마음의 사람들끼리, 비슷한 교리가 더 많은데도 다른 교리만을 가지고 전쟁을 벌이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산티아고에서도 백화점이 많은 상업지구에 기마경찰이 나오는 것은 흔한 일은 아닌 듯하다. 현지인들도 모여서 사진을 찍거나 말을 스다듬고 있다. 정작 경찰은 그러거나말거나 스마트폰 화면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 재미있다.


성녀의 상이 거리를 행진하고 있을 즈음에 다른 한편에서는 주로 젊은이들로 구성된 인파가 피켓이나 현수막을 들고 거리를 지나고 있었다. 스페인어 까막눈이라 행사인지, 시위인지도 알 수 없고, 물어 볼 생각도 못했지만 지나가는 사람들 표정이 밝은게 시위는 아닌 것 같다.



산티아고에서 묵은 숙소는 고층건물의 오피스텔이었기 때문에 도심을 먼곳까지 조망할 수 있었다. 밤에 창밖으로 보이는 산티아고의 불빛은 세계 여느 대도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내가 생각했던, 그리고 파타고니아를 여행하며 봐왔던 칠레와 대도시의 칠레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하기야, 이때 나의 느낌은 우리나라 시골 모습을 먼저 보고 서울에 온 외국인 여행자의 느낌과 똑같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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