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녘에 잠깐 잠에서 깼다. 어제보다는 덜했지만 역시나 깊이 잠들기에는 잠자리의 온기가 부족했다. 기왕 잠에서 깬 김에 그렇게 별이 많이 보인다는 토레스 델 파이네의 밤하늘을 보기 위해 스마트폰 불빛에 의지해 산장 밖으로 나왔다. 산장 테라스에는 나처럼 추위에 잠에서 깼는지 몇몇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불빛이라고는 세상 어딜 봐도 찾을 수 없는 까만 밤하늘에 별이 가득했다. 하늘 어느 부분에 별이 많다거나 어디가 유독 빛난다는게 아니라 그냥 하늘 전체에 별이 가득 박혀 있었다. 십년 전, 강원도에서 받은 예비군 야간훈련 중에 훈련이 지겨워져서 엎드려 대기하라는 지시를 무시하고 풀밭에 드러누웠다. 그때 문득 보게된 밤하늘에는 별이 가득했다. 그런데, 그때보다 훨씬 많은 별들을 여기서 보게 되었다. 서울에서는 맑은 날이라도 하나 찾기 힘들었던 별들이 실상은 매일 우리 머리 위에서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절로 감탄이 나왔다. 먼저 보고 있던 사람들이 돌아보며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었다. 잠시 후, 나보다 뒤에 나온 사람들이 다시 나지막하게 뱉는 감탄사를 듣고 나도 돌아보며 웃었다. 어차피 내 똑딱이 카메라로는 아무것도 찍히지 않겠지만 시도조차 해 볼 생각을 못하고 마냥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 한동안 고개를 쳐들고 있었더니 안그래도 무거운 머리를 평생 받쳐 온 목이 고통을 호소했다. 에라, 그냥 드러누워버렸다.


여행을 하며 몇몇 곳에서 별들이 가득한 밤하늘을 볼 수 있었는데, 특히나 기억에 남는 두 곳이 아타카마 사막으로 잘 알려진 '산 페드로 데 아타카마'와 이곳 토레스 델 파이네였다.(아타카마는 세계에서 가장 건조한 곳이라 별들을 관찰하기 적합한 환경이기 때문에 NASA를 비롯한 천문연구기관들이 이곳에 세계에서 가장 큰 천문대를 짓고 있었다.) 언젠가 다시 이런 곳에 가게 된다면 반드시 밤하늘을 찍을 수 있는 수동 기능이 있는 카메라를 가지고 가서 부족한 실력이나마 사진으로 기억을 남기고 싶다.


별빛으로 가득한 밤하늘은 좋았지만 추위로 떨리는 몸까지 데워줄 수는 없었다. 다시 침낭 안으로 들어가 방금 본 밤하늘을 생각하다 잠이 들었다.



밤하늘에 별들이 가득했다면 당시에는 분명 맑았을 하늘이 몇 시간 자는 동안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햇살이 두터운 구름을 뚫고 산장 뒤편 절벽을 금색으로 물들였지만 금새 힘을 잃었다. 아침을 짓는 사이에 빗방울까지 떨어지기 시작했고, 바람이 점점 심해졌다. 오늘은 W 코스의 가운뎃 부분을 갔다가 다시 왼쪽 아랫부분으로 내려와야 했기 때문에 다른 날보다 걸어야 할 거리도 길었다. 오늘 트레킹이 만만치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잠시 무지개를 보고 좋아했지만 뒤이어 따라오는 비바람에 얼굴이 어두워졌다.


산장을 출발한지 얼마 안되어 호숫가에 내려오니 바람에 호숫물이 밀려 파도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어마어마한 바람이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숙소 주인장이 토레스 델 파이네의 바람 이야기를 하며, 바람 때문에 선글라스가 벗겨지면 아래로 떨어지는게 아니라 위로 날아간다고 할때 솔직히 말하면 믿지 않았다. 그런데 직접 경험해보니 선글라스는 커녕 내가 날아가지 않는게 다행이라 생각될 정도였다.


강한 바람이 계속 불지만 가끔 특히나 센 바람이 밀어닥칠 때가 있었다. 이때는 서 있는게 불가능해서 몇 번이나 넘어지고 쓰러져야했다. 트레킹을 위해 빌린 등산용 폴을 땅에 대고 버텨봐야 소용이 없었다. 이렇게 한동안 맞바람을 헤치며 나가다보니 한가지 깨닫게 되었다. 센 바람이 불어닥칠 때는 예측 가능하게 된 것이다.


윗 사진을 보면 호수 멀리에서 하얗게 물보라가 생기는걸 볼 수 있는데, 호수 반대편에서 강한 바람이 불면 호수 표면이 온통 하얀 물보라로 변하면서 이쪽으로 다가온다. 이때는 걷는 것을 멈추고 냉큼 그자리에 웅크리고 주저앉아야했다. 한바탕 바람이 불어 닥치고나면 몇 초 후에 호수 표면에서 공중으로 올려진 물방울들이 소나기처럼 떨어져내렸다.


강한 바람을 맞으며 한발한발 걷다가 더 센 바람이 올 기세면 자리에 웅크리고 앉기를 수십차례나 했다. 안그래도 걸어야 할 거리가 많은데 이렇게 가다보니 좀처럼 거리가 줄지 않았다. W코스에서 가운데 윗쪽으로 갈라지는 곳에 도착했을 때는 벌써 점심시간이 되어있었고, 몇 시간을 바람과 비와 싸우며 걷다보니 속옷까지 완전히 젖어버렸다. 


바람만 겨우 피하도록 되어있는 대피소에서 버너에 물을 올려 라면을 끓이며 이번 토레스 델 파이네는 나에게 허락되지 않는 곳이라는 생각을 했다. 오늘 가야할 곳이 토레스 델 파이네에서 가장 훌륭한 경치를 볼 수 있는이지만 이런 날씨에는 제대로 볼 수도 없을 것이고 흠뻑 젖은 옷에 기온마저 떨어지면 큰 문제가 생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점심식사 후, 오늘 숙소가 있는 곳으로 바로 가기로 결정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오후가 되니 바람이 제법 잦아들었다. 그래도 오늘 포기한 트레킹이 아쉽기는 했지만 안전을 담보할 수 없는 트레킹은 절대 해서는 안되기 때문에 결정을 후회하진 않았다. 




토레스 델 파이네 W코스으 서쪽 부분을 걷다보면 갑자기 까맣게 타버린 숲을 만나게 된다. 몇 년 전, 이 곳에서 이스라엘 트레커가 규정을 무시하고 숲에서 야영을 하다가 산불을 냈다고 한다. 척박한 자연속에서 오랫동안 만들어진 자연이 인간의 이기심과 욕심(고작 캠핑장 사용료를 아끼려고 그랬다니...) 때문에 순식간에 파괴된 것이다. 죽어버린 나무들 사이로 이제야 파란 순이 돋고 있었다. 자연은 느리지만 부지런히 복구를 하고 있는 것이다. 다녀온지 2년 반이 넘는 시간이 흘렀으니 지금은 훨씬 나아졌으리라 기대해본다.



드디어 뻬오에 호수 앞에 있는 산장에 도착했다. 이 곳의 시설은 앞서 묵었던 두 산장보다 좋았다. 화목난롯 가에는 소파가 있어서 여행자들이 그날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거나 책을 읽거나 하면서 휴식을 취할 수 있어서 더욱 좋았다. 영국에서 신혼여행으로 파타고니아에 왔다는 젊은 신혼부부는 처음엔 캠핑을 했다가 적잖게 고생을 했다고 한다. 특히 캠핑에 익숙하지 않아보이는 여자는 상당히 힘들어 보였다. 그래도 남편에게 투덜대거나 불평을 늘어놓지 않고 사근사근 대하는 모습이 무척 보기 좋았다. 





산장 앞에 있는 뻬오에 호숫가로 나갔다. 오전보다 바람이 많이 잦아졌고 더 이상 흰 물결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바람이 약한 것은 아니었다. 산장 앞에 있는 꽤 커다란 칠레 국기가 한번도 처지지 않고 쉴새없이 펄럭였다. 바람 때문에 끊임없이 펄럭이다보니 국기 끝이 헤어져서 꽤 짧아져있었다.


호수 앞에는 선착장이 있는데 며칠 뒤면 배가 다니기 시작할터였다. 이 배를 타고 들어와서 트레킹을 시작하거나 트레킹을 마치고 나가면 훨씬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데 며칠 차이로 십 수km를 걸어서 차를 타러 가야했다. 




하늘은 맑아졌고 푸른 호수와 산들이 아름다웠다. 불과 반나절 전에 그런 혹독한 바람이 불었다는게 직접 겪지 않았으면 생각도 할 수 없었을 것 같았다. 그날 불었던 바람의 최고 풍속은 25km/h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산장마다 며칠간의 날씨와 풍속에 대해 트레커들이 볼 수 있도록 칠판에 써놓고 있었다.) 비록 이 날의 목적했던 코스로 트레킹하지는 못했지만 토레스 델 파이네의 거센 바람만큼은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힘들었지만 꽤 재밌는 경험이었다. 어차피 모든 일을 생각대로, 맘 먹은대로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다시 생각해봐도 이곳의 바람은 정말 대단했다.


편안히 여행한 곳에서는 남긴 사진이 제법 많은데 육체적으로 힘들었던 날은 남긴 사진이 얼마되지 않는다. 더구나 힘든 트레킹 중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아침에는 의욕에 넘쳐 몇 장의 사진을 남기고 시작하지만 점점 카메라를 꺼내는 횟수가 줄어들다가 나중에는 왠만해서는 꺼내는 일이 없어진다. 사진을 정리하다 유독 남긴 사진이 없는 날은 '이 날은 무척이나 힘들었나보다'하고 회상해보면 틀림이 없다. 4박 5일간 토레스 델 파이네에서 찍은 사진 수가 꽤 많은 사진을 찍었던 어떤 날보다 작다는 것은 그만큼 힘들었다는 증거인 것 같다.


이틀째 날도 하늘은 제법 맑았지만 바람이 꽤 세차게 불었다. 워낙 연중 바람이 심한 곳이라 이 날이 바람이 심한 날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바람이 심한 호숫가 언덕을 지날 때는 몸이 휘청거릴 정도였다. 특히, 배낭을 매고 걸을때 옆에서 바람이 불면 바람을 맞는 면적이 넓어져서 생각보다 훨씬 버티기 힘들었다. 그래도, 이 날이 돌아오던 마지막 날을 제외하고는 날씨도 가장 좋았고, 코스도 무난한 편이었다.






바람이 꽤 불어서 호수 표면에 물보라가 일고, 때로는 소용돌이가 생겼다.

바람이 꽤 심하게 분다고 생각했었다. 다음날 제대로 된 바람을 맞기 전까지는...








둘째날은 호수를 따라 하루종일 걸었다. 약간의 오르내리막이 있긴 했지만 무난한 편이었고 힘들다고 생각될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거친 산과 바로 밑으로 펼쳐진 아름다운 호수를 보면서 걷기 때문에 지루하지 않았다.


걷다가 점심 때가 되어 준비한 샌드위치를 먹었다. 푸에르토 나탈레스에서 식재료를 넉넉하게 준비하지 못한 탓에 빵에 소세지만 끼운 차가운 샌드위치가 전부였지만, 멋진 경치가 펼쳐져 있으니 어느 고급 레스토랑도 부럽지 않은 식사가 되었다.


점심을 먹고 몇 시간을 더 걸어 호숫가에 위치해 있어 전망이 무척 좋았던 두번째 산장에 도착했다. 이 곳에서도 산장에서 음식을 사 먹을 수 있지만 가격이 무척 비싸기 때문에 저녁과 다음날 아침을 만들어 먹었다. 


음식을 조리할 수 있는 곳은 산장 뒤편에 조립식 벽으로 바람만 간신히 막아 놓은 것이 전부였다. 돌을 줏어다 버너를 고정시키고 물을 끓여 카레를 만들었다. 대충 세워놓은 벽은 바람을 제대로 막아주지 못해서 버너의 불꽃이 흔들리지 않게 몸으로 바람을 막아야했다. 물은 깨끗하지만 엄청 차가워서 재료를 다듬고, 식사 후에 설겆이를 하려면 손을 몇 번이나 불어서 녹여야 했다. 


이런 트레킹이나 캠핑은 여러가지로 불편하고 번거롭지만 그 이상의 가치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전혀 불만이 생기지 않는다. 오히려 훌륭한 시설을 갖춘 콘도나 호텔이 있다면 이 곳의 가치는 훨씬 떨어져버릴 것이다. 오롯하게 자연을 접하려는 방문자를 위한 최소한의 시설만을 유지하고, 자연에 손대는 일은 가능한 배제한 것이 이런 곳의 매력이다. 우리의 캠핑 문화도 편리함은 덜어내고 자연을 좀 더 가까이 접하는 방법으로, 육체적인 편안함보다 마음의 안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으로 바뀌었으면 좋겠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추운 자연을 접하여 밤새 뜬눈으로 지새는 것은 사양이다. 어제 묵은 산장보다는 덜 추워서 다행이었다.

동이 트자마자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으로 데려다 줄 여행사의 승합차에 올랐다. 이번 시즌 산장을 오픈한 첫날이라 그런지 승합차에도 사람이 많지 않았다.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은 사진에서 보던 토레스 델 파이네의 거칠고 뾰족한 산이 아니라 평지 한가운데에 있는 국립공원 관리소였다. 여기서 신분 증명과 입장기록을 하고 입장료를 내야 한다. 국립공원 관리소라면 당연히 산밑이나 가까운 어딘가에 있을 줄 알았는데 실제 트레킹이 시작되는 곳은 여기서도 한참을 더 가야했다.


바람은 꽤 불었으나 다행히 날씨는 흐리지 않았다. 이 정도면 꽤 좋은 날씨라고 해도 될 것 같아 이번 트레킹도 운이 따라주나보다 생각했다. 국립공원 관리소에서 한참을 달리다보니 에메랄드 빛 호수와 그 너머 조각칼로 거칠게 파놓은 듯한 토레스 델 파이네의 봉우리들이 보였다.








산쪽에는 아쉽게도 구름이 제법 많아서 산봉우리를 또렷하게 보여주지는 않았다. 


승합차에서 내려 트레커들이 묵을 수 있는 산장까지 걸어들어갔다. 걸으면서 보이는 토레스 델 파이네의 봉우리는 며칠 전에 갔었던 피츠로이나 세로또레와 다른 느낌이었다. 피츠로이나 세로또레는 우뚝 솟은 봉우리가 장엄하다, 아름답다는 느낌이었는데 이 곳은 기괴하다는 느낌이 먼저 들었다.


산장 옆에는 캠핑장도 있어서 텐트를 치는 사람들도 몇몇 보였지만 겨울이 막 지난 파타고니아에서 캠핑을 하려는 열혈 캠핑족들은 많지 않았다. 산장은 도시에서라면 꽤 좋은 호텔에 묵을 수 있을 정도로 숙박비가 비쌌다. 자연이 만들어놓은  절경을 보기위해 세계 각지에서 여행자들이 몰려드니 싸게 운영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돈 없으면 저 추운 들판에서 캠핑해보던가... 라는 느낌이었다.


산장에 짐을 내리고 부랴부랴 당일 계획한 트레킹을 시작했다. 산장은 W 모양의 트레킹 코스에서 오른쪽 아래 꼭지점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오른쪽 윗부분까지 당일치기로 갔다가 내려와야 했다. 원래 W코스 여러곳에 산장이나 캠핑장이 있는데 내가 갔던 시기는 막 봄 시즌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아직 오픈하지 않은 곳들이 많아서 경로를 정하는데 제약사항이 너무 많았다.





나름 부지런히 산을 올랐지만 코스의 절반이 조금 더 되는, 아직 오픈하지 않은 산장이 있는 곳에 도착하니 시간이 애매해졌다. 무리해서 치달리면 못할 것도 없을 것 같았지만 아직 이른 봄이라 해가 빨리 진다는 점, 당일치기 트레킹이 아니라 오늘을 제외하더라도 3박 4일을 더 걸어야 한다는 점이 발목을 잡았다. 본격적으로 시즌이 시작되어 산장이 모두 오픈되는 시기를 맞추지 않고 일정을 세운 탓이었다.


중간에 돌아왔지만 생각보다 그다지 아쉽지 않았다. 어디까지 갔다는 것보다 자연속에서 트레킹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의미있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목적이나 목표보다는 과정의 중요함을 자연속에서 깨달아갔던 것 같다. 사회에서는 과정보다는 결과, 목표달성이 중요했었다. 사회가, 국가가 불굴의 정신으로 노력하면 안될 것이 없다고 강요하지만 거짓말이다.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도 있고 불가항력의 요소로 어쩔 수 없이 실패하는 경우도 있다. 다만 그것을 통해 배우고 점점 더 나아지면 되는 것이다. 다음에 올 때는 더욱 면밀히 계획하고 체력적으로도 충실히 준비하면 된다.


다시 산장으로 복귀해서 저녁식사를 했다. 4박 5일간 계획한 식사 메뉴에서 첫날은 산장에서 식사를 사먹는 것이었기 때문에 비싸더라도 먹을 수 밖에 없었다. 계획대로 하지 않는다면 나중에는 굶어야 할 수도 있다. 저녁을 먹고 나오니 하늘이 더욱 흐려져있었다. 슬슬 날씨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첫날 가장 힘들었던 것은 목표했던 곳에 도달하지 못한 것도, 바쁘게 산길을 오르내린 육체적 피로도 아니라 밤 동안의 추위였다. 토레스 델 파이네의 산장은 난방이 거의 되지 않는다. 우리의 화목난로 같은게 복도에 놓여있는데 장작을 자주 넣지 않기 때문에 밤이 깊어지자 금새 불이 꺼졌다. 그리고 새벽에 추위가 덮쳐왔다. 낮에 트레킹하던 복장 그대로, 봄가을용 오리털 침낭에 들어가서 산장에서 제공하는 얇은 솜이불을 덮었지만 이것들로는 밖에서 들어오는 추위를 막기는 역부족이었다. 자다가 추워서 잠을 깬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렇게 날이 밝도록 몇 시간을 추위에 오돌오돌 떨다가 이틀째 날을 맞았다.(겨울 언저리에 파타고니아를 여행한다면 겨울용 침낭은 필수다)

저녁 늦게 엘 찰텐에서 푸에르토 나탈레스로 돌아왔지만 지난번에 왔던 숙소에서는 오늘은 자리가 없고 내일이 되어야 생긴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booking.com에서 급히 숙소를 검색해 근처에 있는 다른 숙소에 짐을 풀었다. 그런데, 자려고 누웠는데 침대 옆에서 납작하고 다리가 여럿 달린 죽은 듯한 벌레를 발견해버렸다. 배낭여행자들의 공공의 적, 베드벅(빈대)인 것 같아서 주인을 불러 이야기하니 미안하다며 방을 바꿔주었다.


고작 조그만 벌레 가지고 호들갑이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 빈대의 무서움은 물려 본 사람만 알 수 있다. 지저분한 숙소에서 묵은 여행자에게 달라붙어서 세계 각국을 옮겨 다니는 이 벌레는 사람의 피를 빠는데 물리면 무척 가렵다.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병원 신세를 지고서도 한달을 고생했다는 사람도 있고, 알러지 반응을 보이는 사람도 있다. 오죽하면 빈대 잡느라 초가삼간 태운다는 속담도 있겠는가. 이 벌레는 사람이 없어 양분 섭취를 못하더라도 납작해진 상태에서 몇 달을 버틴 후, 다시 사람 몸에 붙게되면 온 몸이 빨개질 정도로 피를 빨아서 빵빵하게 부푼다. 


그때까지 7,8개월을 여행하면서 베드벅을 만나지 않은건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결국 나중에 아르헨티나 코르도바와 호주 시드니에서 2번 물려 고생하게 된다.


방을 바꾸긴 했지만 한 번 버린 숙소의 이미지는 회복되지 않았다. 그 뒷날 다시 예전 숙소로 방을 옮기고 찝찝한 기분을 만회하려 맛있는 음식을 찾아다녔다.




홍합과 치즈가 잔뜩 올려진 피자는 그저 그랬지만 엄청나게 컸던 샌드위치는 훌륭했다. 두터운 고기패티와 풍부한 치즈도 좋았지만 으깨서 넣은 아보카도가 특히 좋았다. 아보카도는 그냥 먹으면 별 맛도 없고 기름기만 많아서 과일로서 의미가 없는데 다른 음식과 어울릴 경우에는 궁합이 상당히 좋았다. 이것을 으깨서 샌드위치 사이에 넣으니 샌드위치가 훨씬 부드러워지고 촉촉해졌다. 이후로 트레킹을 위해 점심식사를 만들어야 할 때에는 자주 샌드위치에 아보카도를 잘라서 끼우거나 으깨서 빵에 발랐다.

우리나라에서는 엄청나게 비싸서 마흔 가까운 나이에 먹어보지도 못했던 아보카도가 남미나 호주에서는 가장 싼 과일에 속했다.


식사를 마치고 길거리로 나오니 뭔가 축제가 벌어진 듯, 사람들이 꽤 많았다. 소방서 앞에서는 어려보이는 소방관이 키가 작은 조랑말에 아이들을 태워주고 있었다. 이때까지도 내일 닥칠 어려움은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구경다니며 하루를 보냈다. 




다음날은 토레스 델 파이네 트레킹에 필요한 준비를 해야했다. 그 다음날이면 드디어 동절기를 끝내고 토레스 델 파이네의 산장이 오픈되기 때문이다. 여행사에서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으로 가는 교통편을 예약하고, 등산용 지팡이와 바람막이도 대여했다. 그리고, 4박 5일간의 트레킹에 앞서 몸보신을 해두려고 이 근방에서 꽤 알려진 레스토랑을 찾아갔다. 대낮부터 맥주와 해물요리를 시키고 기분 좋게 앉았다.


(토레스 델 파이네 트레킹은 대개 3박 4일 일정으로 W코스를 따라 걷게 되는데 당시에는 배가 10월 초가 되어야 운항을 시작했기 때문에 코스를 마친 날 돌아오는게 불가능해서 부득이하게 1박을 더 해야했다.)

칠레의 맥주는 생각보다 다양하고 맛도 좋은 편이다.


생선 이름은 잊어버렸지만... 물고기와 감자를 튀긴 것. 그럭저럭.


칠레에서 먹어 본 최고의 요리. 게살과 생선 크림소스 요리


이 레스토랑에서 칠레에서 맛 본 최고의 요리를 먹었다. 그 뒤에 세비체나 해물스프같은 칠레에서 유명하다는 해산물 요리를 먹었지만 나에겐 이 곳에서 먹은 게살과 생선이 섞인 크림소스 요리가 최고였다. 특히나 두툼한 게살이 무지막지하게 들어가 있었는데도 가격은 만원이 될까말까했다. 칠레는 남미에서 일인당 국민소득이 가장 높은 나라이고 OECD 가입국이기도해서 물가가 생각보다 저렴하진 않다.(물론 브라질, 아르헨티나보다는 물가가 훨씬 싸다) 그런데도 이렇게 게살이 듬뿍 올려진 훌륭한 요리가 만원이라니... 트레킹을 하기 전에 기분이 급격히 좋아졌다. (게살을 이렇게나 많이 넣고도 저렴할 수 있는 이유는 나중에 푸에르토 몬트에 돌아가서 알 수 있었다)


문제는 기분이 최고조였을 때 의외의 곳에서 발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4박 5일간의 트레킹을 하려면 그동안 먹을 음식물을 모두 준비해서 가지고 다녀야하기 때문에 기분 좋은 식사를 마치고 식료품을 사러 나섰다.(물이야 워낙 좋은 계곡물이 있으니 가지고 다니지 않아도 되는게 다행이다) 그런데, 어제까지 분명히 식료품을 팔던 가게들의 문이 전부 닫혀 있었다. 이게 왠일인가 싶어 물어보니 칠레의 독립기념일이라 어제부터 이틀간 국경일이라고 했다. 어제 길거리에 사람이 많아지고 축제분위기였던 이유를 이제야 할 수 있었다. 그건 그거고 나에겐 트레킹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중대한 기로의 순간이었다.


이제 체면이고 염치고 가릴 때가 아니었다. 지나가는 현지인들 중에서 친절해 보이는 사람마다 붙잡고 식료품을 살 수 있는 곳이 있는지 물어보기 시작했다. 말이 통하지 않으면 손짓발짓으로 열심히 마임을 했다. 몇 명이나 물어봤을까 순박해 보이는 아주머니가 자신을 따라오라고 했다. 무작정 따라갔더니 한참을 걸어 현지인들이 사는 동네까지 이르렀다. 조금은 불안하고 의심하는 마음이 생기기도 했지만 여기까지 와서 빈손으로 돌아가면 내일 트레킹은 정말 포기해야 했기에 마음을 억눌렀다.


조그만 가게 앞에 와서 아주머니는 수줍게 음식을 입에 떠넣는 시늉을 하고는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갔다. 말이 안통하니 가게 위치를 설명할 수가 없어서 나를 여기까지 데려다 주고는 다시 되돌아 가는 것이었다. 아주머니에게 몇 번이나 진심을 담아 '그라시아스'를 말했지만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마음이 벅차오른다. 그리고 매번 '기념사진이라도 한장 남겨두었더라면', '뭔가라도 작은 보답을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과 미안함이 뒤섞인다.


가게는 조그마했고 진열된 식료품도 변변치 않았지만 그런 생각조차 사치일뿐이었다. 빵, 소세지, 감자, 치즈 등등 어떻게든 먹을 수 있는 것들은 사야했다. 그리고, 여행 중 한국 식료품 가게에서 사서 아껴두었던 라면과 분말카레를 총출동해서 4박 5일간의 식단을 완성할 수 있었다.


트레킹 준비가 완료되었다.

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나 서둘러 밖으로 나가 하늘이 맑은지부터 확인했다. 어제 날씨가 좋았더라도 다음날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다는 것을 바릴로체에서 실감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하늘은 구름 한 점없이 맑았고, 막 해가 떠오르며 눈쌓인 산을 금빛으로 물들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떠오르는 햇살을 받아 눈쌓인 봉우리가 금빛으로 빛나는 광경을 보기 위해 봉우리가 잘 보이는 곳을 찾아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슬리퍼만 신고 나온 맨발이 시린데다 빨리 걸을 수가 없어서 겨우 봉우리가 보일락말락 하는 곳에서 사진을 찍었다.


어제 사둔 먹거리로 간단히 아침을 먹고, 트레킹 중에 먹을 샌드위치를 만들어서 트레킹을 시작했다. 트레킹을 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제법 큰 언덕을 넘었을 때, 반대편으로 펼쳐진 경치에 절로 발걸음이 멈춰졌다.


그 옛날 빙하가 깎아놓았을 골짜기 사이로 구불구불 휘어진 작은 강이 흐르고 그 앞으로는 눈쌓인 봉우리들이 펼쳐져 있었다.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이 콧속을 지나 가슴속까지 시원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거대하거나 웅장한 아름다움은 아니지만 보고 있으면 마음이 맑아지는 듯했다. 한동안 바위에 걸터앉아 바람을 맞으며 바라보던 이 시간이 1년간의 여행 중에서 손꼽을 수 있을만큼 인상적인 순간이었다.


기후가 혹독한 곳이라 나무들도 크게 자라지 못하고 풀들은 대부분 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려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봄이라 꽃이 피는 식물이 있었다. 아직 완전히 피진 않았지만 강렬한 붉은 색의 꽃봉우리들이 이 곳과는 어울리지 않게 화려했다.



걷다가 문득 하늘을 보니 커다란 맹금류가 기류를 타고 우아하게 날고 있었다. 정확하게 어떤 새인지는 알 수 없지만 파타고니아의 하늘을 유유자적하는 커다란 콘도르였을거라고 믿고 있다. 걸음을 멈추고 콘도르가 나는 방향을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바라보는 내내 조금 더 가까이 와 주었으면 하고 바랬지만 피츠로이가 우뚝 솟아있는 언덕 뒤편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엘 찰텐에서 제법 멀어졌을 즈음, 발 밑에 신기한 것이 보였다. 어떻게 보면 팽이버섯 같기도 해서 손으로 잡아봤더니 얼음이었다. 팽이버섯처럼 생긴 수많은 기둥들이 땅에서 솟아있었다. 트레킹을 하는 동안 곳곳에 이런 작은 얼음기둥들이 있었다. 나중에 찾아봤더니, 일교차 때문에 흙속에 있던 물이 밤새 얼면서 부피가 팽창해 이런 작은 얼음기둥을 만든다고 했다.



얼마나 걸었는지 모르겠지만 피츠로이와 주변 봉우리들을 훤히 바라볼 수 있는 중간 전망대에 도착했다. 해발 3400m가 넘는 높이에 암벽 부분만 1000m에 달하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피츠로이를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보는 행운을 얻었다.





전망대에서 다시 피츠로이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골짜기를 어럿 지나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어떤 산을 돌아 지날 때는 골짜기 건너편으로 산봉우리에서 내려온 빙하가 보였다. 눈사태가 나서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처럼 보이지만 바위와 단단하게 붙은 거대한 얼음 덩어리라는게 믿어지지 않는다. 저런 빙하는 수십년 전만해도 훨씬 아래까지 내려와 있었을텐데 지구 온난화로 점점 짧아져서 산봉우리쪽으로 올라가고 있다고 한다. 지금부터 수십년 후에는 이런 빙하를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길에서 만난 레인저가 어디까지 가는지 물었다. 피츠로이의 바로 밑, 트레킹 코스의 끝까지 간다고 했더니 그곳에는 아직 눈이 많이 쌓여 있어서 위험하니 주의하라고 일러주었다. 그러고나서 몇 시간 뒤에 마지막 오르막이 시작되는 지점에 도착했다. 여기서 키작은 나무숲을 지나서 흰 눈이 쌓인 가파른 길을 올라가야 했다.


여기서 바라보니 조그맣게 밀고, 끌고 올라가는 사람들과 오르다가 포기하고 주춤주춤 내려오는 사람들이 보였다. 오르막에는 내 생각보다 훨씬 많은 눈이 쌓여있었던 것이다. 오후에는 다시 엘 칼라파테로 가는 버스를 타야하기 때문에 여기서 체력을 짜내어 시도해볼 것인가, 다음을 기약하고 후퇴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했다.


산에 익숙하지 않은데다 당일치기 트레킹이라 장비도 허술하고 눈에 젖었을 경우에 갈아입을 옷도 없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니 이미 결론은 정해져 있었다. 다만, 한번 시도해 보고 포기한다면 미련이 없겠지만, 그냥 물러나면 미련이 남을 것 같다는게 고민의 이유일뿐이었다.


미련을 남겨두기로 했다. 미련이 남으면 더욱 갈망하게 될테고 그러면 언젠가 다시 이곳에 오게 될 것이다. 오래 전 세계 여행을 꿈꿔왔기 때문에 내가 여기까지 온 것처럼... 한번 와 봤으니 다시 오는 것은 오히려 쉬울터이다.

저 앞에 있는 눈쌓인 산등성이를 올라야 한다.

마지막 오르막을 앞두고 미련을 남기고 돌아왔다.



엘 찰텐으로 돌아갈 때는 조금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호숫가로 난 길로 돌아서갔다. 호수는 수온이 너무 낮아 물고기도 살 수 없지만 정말 맑고 깨끗했다. 어제 세로 또레를 트레킹 할 때, 생수를 사서 들고 갔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사람들은 빈 통만 가지고 가서는 개울이나 호수를 만날 때마다 통에 물을 채우고 그대로 들이켰다.





푸에르토 나탈레스로 가는 버스를 탔다. 날은 금새 어두워지고 주위는 온통 암흑으로 가득찼다.


1박 2일의 짧은 시간동안 세로 또레와 피츠로이를 트레킹하면서 이 봉우리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깨끗하고 청명하게 보존되고 있는 이곳의 자연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날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트레킹을 하지만 이들의 발자국을 제외하고는 사람의 흔적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자연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레인저들이나 관리하는 사람들의 힘만으로 이 넓은 곳을 이렇게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곳을 찾는 사람들이 불편을 감수하면서 노력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 것이다. 아직은 부족한 우리의 등산문화도 언젠가는 이런 모습으로 되어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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