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찌민에서 출발한 버스는 이제 막 해가 뜬 이른 아침, 해변가 도로에 잠시 정차해서 사람들을 내려주고는 다시 출발해버렸다. 밤새 다리도 펴지 못하고 좁은 침대에서 불편하게 뒤척이던 나는 잠도 채 깨지 못한채 배낭과 함께 해변가에 버려졌다.


잠시 해변가 벤치에 앉아서 잘 굽혀지지도 펴지지도 않는 다리와 허리를 두드리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번 여행의 첫번째 도착한 바다에 아침해가 눈부시게 빛난다. 여행을 하면서 산도 좋아하게 되었지만 어린 시절을 바닷가에서 보내서인지 나는 바다를 무척 좋아한다.




그리 곱지는 않았지만 모래사장이 길게 펼쳐져 있고 해변가로는 야자수가 쭉 자라고 있다. 현지인들이 해변가를 따라 조깅이나 산책을 하는 모습도 종종 보인다. 호찌민과는 완전히 다른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하지만 나는 이런 여유로움을 느끼기에는 아직 숙소도 정하지 못했고, 밤새 비워진 뱃속에는 뭔가를 채워야 했다. 나짱의 숙소는 생각보다  비쌌다.(상대적인 것이라 생각보다 비쌌다는 것이지 절대적으로 비싼 가격은 아니다.) 대충 적당한 가격의 호스텔에 짐을 풀고 아침에 문을 연 식당을 찾아 적당히 허기를 채운 후, 해변으로 나갔다.



하늘은 맑고 해변은 한가하고 야자수가 모래사장에 드리운 그늘 밑은 시원해서 좋았으나 파도가 꽤 심하고 수심이 깊었다. 수영하기에는 적당한 해변은 아니었다.


나짱이 베트남에서 유명한 해변도시이고 휴양지이긴 하지만 얼마전까지만 해도 한가로웠을 이 도시에도 서구의 거대 자본이 밀려오나보다. 이름만 들어도 아는 호텔 체인들이 북쪽 해변에 거대한 성들을 쌓아올리고 있었다. 절약이 미덕인 배낭여행자여서 그런지 이런 획일화된 호텔과 리조트들이 그리 반갑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세계 곳곳에 지어진 것들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지어야한다면 좀 더 자연친화적이고 현재의 모습을 망가뜨리지 않는 방법이 있을텐데...




나짱의 해변에 누워있으면 예의 그 베트남식 삿갓을 쓴 여인네들이 양쪽에 커다란 바구니가 달린 봉을 어깨에 메고 해산물을 팔러 다닌다. 하루종일 그 긴 해변의 모래사장을 왕복하며... 편안히 누워있는게 미안할 정도로 끊임없이 지나가고 지날때마다 살지를 물어본다.




불편한 잠자리 때문이었을까? 몰려오는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숙소에서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나니 벌써 저녁시간이 되었다. 고생한 몸도 약간의 호사가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비싸보이지만 그럴듯하게 생긴 레스토랑을 골라 들어갔다. 그러나 들어서는 순간, '아차! 잘못왔구나' 싶었다. 식사하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서양 관광객(여행자가 아니라 관광객)이었다. 전형적으로 관광객을 등쳐먹는 그런 식당이었던 것이다.


얼굴에 철판 좀 깔고 나왔어야 했는데 그래도 적당히 든 나이 때문에 차마 체면을 모두 벗어버리지 못하고 적당히 먹자는 생각으로 해물 요리를 시켰더니 나온 것들이 위 사진 두 장이다. 조그만 게 하나와 생선 한 마리, 새우와 가리비, 조개 조금이 전부였다. 잔뜩 화가 났지만 들어온 내가 잘못이지 뭐라 하겠는가. 억울한 마음을 안고 내일은 현지 식당에 가서 해산물 요리를 배부르게 먹으리라 다짐하며 잠들었다.


다음날은 일출을 보려고 아침 일찍 일어났다. 나짱이 베트남 동쪽 해변을 접하고 있으니 바다에서 솟아오르는 일출을 볼 수 있을거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날 아침은 수평선에 구름이 껴서 해는 바다에서 솟아오르지 못하고 구름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붉게 솟아오르는 아침 해를 둘러싼 구름덕분에 오히려 더 분위기 있는 아침 노을을 볼 수 있었다.






영국에서 왔다는 스무살을 갓 넘긴 커플. 스무살에 둘이서 지구 반대편으로 배낭여행을 떠날 용기가 부러웠다. 내가 스무살이었던 시절에 이런 생각을 해보지 못했던게 아쉬웠고, 이들이 앞으로 세상에서 배우고 경험할 것들이 많음이 부러웠다. 


지금은 우리나라 젊은이들도 방학이면 배낭여행을 떠나고 있지만 여행지가 유럽이나 미주로 한정되어 있고 여행 기간도 짧은 것 같다. 유럽에서도 제한된 기간과 금액내에서 더 많은 나라에서 유명 관광지나 박물관을 찾아다니느라 꼭 보고 느껴야 할 것들을 오히려 놓치고 있는 느낌이다. 하지만 이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식들이 배낭여행을 다닐 때는 더 나은 여행을 하기 위해 많은 충고를 해 줄 것이고, 자식들은 본인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더 다양한 자신만의 방식으로 여행을 할 것이다. 


우리나라가 여행자유화(라고 표현하니 참 어색하지만 실제 그렇게 쓰였다)가 된 것은 88년 올림픽을 막 앞두고 있었을 때였다. 그 전에는 공무나 사업적인 출장이 아니고는 여행으로 해외에 나가기가 참 어려웠다. 외무부 등의 정부기관에서 만들어야 하는 서류만도 여럿이었다고 한다. 여권만 가지고 있다면 대부분의 국가를 무비자로 여행할 수 있는 시대다. 우리가 자유롭게 여행하고 여행문화를 만들어 온지 아직 20여 년 밖에 되지 않았다.





오후내내 해변에서 뒹굴거리고 낮잠도 자고 거센 파도에 몸을 부딪히기도 하면서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고 저녁에는 어제 마음 먹었던 현지인들이 가는 해산물 식당으로 향했다. 락칸이라는 이 식당은 주로 현지인들이 가는 식당이긴 하지만 베트남을 여행하는 배낭여행자들에게는 나짱에 왔다면 가봐야하는 매우 유명한 곳이다.











조그만 숯불 화로에 먹고 싶은 재료들을 주문하여 직접 구워 먹는 음식점인데 동남아에는 우리나라처럼 식탁위에 불을 피워서 손님이 직접 구워 먹거나 데워 먹는 음식들이 꽤 있다.


특별히 좋아하는 것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이것저것 좋아하는 것들이 많을 때는 일단 종류별로 시켜놓고 먹어본다. 그리고 특히나 맛있었던 것을 더 주문하면 된다. 소고기, 장어, 새우 등을 시켜서 맥주와 배부르게 먹으면 배낭여행자에게는 약간 부담있는 가격일 수 있는데 이 재료들을 우리나라에서 먹었을 때 나올 가격을 생각하면 싸게 잘 먹었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동남아에는 나라마다, 지역마다 다양한 맥주들이 있다. 태국의 타이거, 창, 싱하 등의 맥주는 잘 알려져 있는데 베트남에도 사이공이나 333 등의 맥주가 있고, 도시마다 그 지역의 맥주가 또 있다. 우리나라에서 지역별로 다른 소주가 팔리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맥주는 대부분 라거맥주들인데 그 품질이 나쁘지 않다. 맥주를 좋아하는 여행자라면 가는 나라마다, 방문하는 도시마다 현지에 있는 맥주들을 마셔보는 것도 꽤 즐거운 일이다.





잘 먹고 부른 배를 소화시킬 겸, 식당 주변을 거닐며 구경하다보니 꽤 큰 시장이 나왔는데 저녁무렵이라 대부분 문을 닫았거나 닫기 위해 정리하고 있다. 여행 중에 시장 구경은 아주 큰 재미거리인데 무척이나 아쉬웠다.



어두워지는 나짱거리를 걸으며 구경하던 사이에 밤이 깊어졌다.


다음날은 2박 3일간 나짱 여행을 마치고 호이안으로 가는 침대버스를 타는 날인데 마침 그 동안 쌓인 여행의 피로가 몰려드는지 으슬으슬 한기가 도는게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낮동안에는 게스트하우스에서 쉬다가 저녁무렵에 버스를 타려고 나섰는데도 영 나아지지가 않았다. 이럴 때는 뜨끈한 국물이 생각나는 법이라 근처 쌀국수집을 찾았다.


버스 시간도 다가오고 인터넷을 뒤져 맛집을 찾기도 어려운 상황이라 근처에 보이는 현지인들이 많은 식당에 무턱대고 들어가서 국수를 시켰다. 우리가 흔히 먹는 얇은 쌀국수가 아니라 칼국수처럼 넓적한 국수에 덜익은 고기와 파가 잔뜩 올려져 있는 국수가 나왔다. 육수가 뜨겁기 때문에 고기는 휘휘 저으면 적당히 다 익는데 이 국수 맛이 일품이었다. 진한 육수까지 모두 들이켜고 나니 몸이 따뜻해지는게 한결 기분이 나아졌고, 무리없이 야간 버스를 타고 호이안으로 갈 수 있었다. 생김새는 그다지 볼 품 없을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그야말로 잊을 수 없는 보양식이었다.


베트남은 커피 생산국으로도 유명하다. 비록 품질로는 크게 인정받고 있지는 못하는 듯하지만, 여행을 마치고 2012년 베트남이 브라질을 제치고 세계 1위의 커피 생산국이 되었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동네마다 조그만 가게에서 커피를 팔고 있으며 예의 그 낮은 의자에 삼삼오오 앉아서 커피를 마신다. 


호찌민에는 베트남에서 유명한 커피 프렌차이즈도 있으며 원두를 로스팅해서 파는 전문점들도 많았다. 인도차이나 반도에서는 보통 커피에 연유를 타거나 설탕을 무지 넣어서 아주 달게 마신다. 처음에는 너무 달아서 적응이 안됐지만 자주 마시다보니 중독되었는지 인도차이나를 떠나고 난 후에는 이 달디단 커피가 자주 생각났다.




커피 전문점 앞 조그만 자리에서 시원하고 달달한 커피를 시켜놓고 쉬고 있는데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비가 퍼부었다. 가게 앞 자리까지 물이 튀는 상황에서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주인은 친절하게도 가게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열대지방의 스콜이라는게 다 그렇지만 퍼붓는 비를 바라보는게 조금 지루해질 때쯤 잠시 한눈을 팔고나면 어느 새 그쳐있다.

[호찌민 시의 노트르담 성당]


[호찌민 중앙우체국]



[호찌민 중앙우체국 내부 모습]



호찌민의 노트르담 성당과 중앙우체국 건물이다. 프랑스 식민시대에 지어진 건물이라 서양식이지만 큰 감흥은 없다. 제대로된 감흥은 음식에서...


[우리나라 쌀국수 식당에도 메뉴가 있지만 쫄깃한 면발과 얇지만 바삭바삭한 롤 그리고 롤 안을 채우고 있는 해산물까지... 같은 음식이지만 맛과 식감이 전혀 다르다.]


[태국의 똠양과 같은 듯 같지 않은... 해산물과 조개, 버섯, 그리고 토마토까지 들어가 있는데 시큼하면서 또 해산물의 시원한 맛도 느껴진다. 특별하진 않지만 나쁘지도 않았던...]


[새우 스프링롤...겉은 바삭하면서도 롤에 말린 새우는 적당히 익어서 퍽퍽하지 않고 탱탱하다.]


클린턴이 미국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시절 베트남 방문에서 찾았다는 베트남 국수집 'pho2000'을 찾았다. 관광객들에게도 유명한 식당이지만 내가 갔을 때는 현지인들이 대부분이었다. 여기서 먹은 쌀국수와 롤만큼은 내가 먹어 본 그 어디보다도 뛰어났다.



호찌민에서 3박 4일간 여정을 끝내고 그 날 밤에 나짱(나트랑)으로 가는 야간 버스를 탔다. 방콕의 까오산 거리가 배낭여행자 거리로 유명하듯, 호찌민에서는 데탐거리가 배낭여행자 거리로 알려져 있다. 거기에 있는 신투어리스트에서 예매할 수 있다. 베트남 일정을 미리 세워두고 한번에 예매도 가능하다.


여행 중 처음 야간 버스를 타는데다가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침대 버스라 약간의 흥분과 호기심을 가지고 버스에 올랐다. 버스 안에는 3열로 2층 침대들이 빽빽하게 설치되어 있는데 썩 깨끗하진 않지만 민감하지 않은 여행자라면 그다지 문제될 정도는 아니었다. 문제는 베트남 사람들 체형에 맞춰진 침대의 크기인데 사진에는 길게 보이지만 절대로 다리를 뻗을 수 없는 길이다. 좌우 폭도 무척 좁아서 남자들은 어깨나 팔이 침대 밖으로 나올 수 밖에 없다.


처음에는 별 문제 없었지만 12시간 동안 다리를 뻗지도 못하고 한쪽 어깨와 팔은 밖으로 삐져나온채 차를 타고 가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12시간 정도라면 차라리 우리나라의 우등 고속버스가 훨씬 편하다. 이후로 여러 나라에서 여러 차례 장거리 버스를 탓었지만 터키의 벤츠 버스와 더불어 베트남의 침대 버스는 상당히 불편한 편이었다. 특히  키와 덩치가 조금이라도 한국 평균 이상인 남자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저녁에 출발한 차는 한참을 달려 한 밤중이 다 된 시간에 도로가 휴게실에 세운다. 여기서 화장실을 다녀오고 대충 끼니를 해결해야 한다. 그리고 밤새 달려 나짱에 도착한다. 자느라 보진 못했지만 운전석 옆에 두 사람이 더 타고 있는데 이들끼리 교대해가며 밤새 운전하는 것 같았다.


구글맵에서 보니 호찌민에서 나짱까지는 445km에 승용차로 8시간이 조금 안걸리는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베트남은 도로 사정도 안좋은데다 한밤중에 큰 버스로는 속력을 낼 수 없기 때문에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거의 12시간을 달려 이튿날 아침이 되어서야 나짱에서 내릴 수 있다. 호찌민에서 하노이까지 2박 3일동안 그 침대 버스를 타고 가는 현지인들도 있다니 내키는 곳에서 내릴 수 있는 여행자가 얼마나 자유로운지 새삼 다시 느끼게 된다.

현지인들의 문화가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을 고르라면 단연 시장일 것이다. 시장에서는 현지인들의 삶의 짧은 단면과 함께 시장에서 파는 물건들로부터 그 곳의 문화, 기후, 생활 방식을 옅볼 수 있다.





호찌민의 초벤탄(벤탄 시장)에서는 베트남의 풍부한 해산물과 과일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게다가 무척이나 싸다. 동남아에서는 저렴한 물가와 더위로 부엌이 딸린 게스트하우스가 거의 없었는데 만약 부엌이 있었다면 매일 해산물 파티를 벌이지 않았을까. 같은 종이라도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것들과 조금씩 다른 모양과 크기에 보는 것만으로도 무척이나 재미있다.




초벤탄에는 화려하고 아기자기한 소품이나 실용품들도 많이 눈에 띄었다. 위 사진은 화려하게 칠해진 목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유명한 과일의 제왕 두리안을 깎는 아주머니들의 손놀림이 기막혔다. 그 두껍고 단단한 두리안 껍질을 빠르고 높은 베트남어로 대화하면서 능숙하게 깎는다. 동남아는 망고, 망고스틴, 파인애플, 두리안 등등 열대과일이 무척이나 싸고 풍부하다. 그 열대과일의 단맛에 빠지면 쉽게 헤어나올 수 없다.



우리나라도 7,80년대에는 대부분 이랬었다. 전봇대에 수없이 얽힌 전깃줄이 이들의 경제발전에 대한 갈망과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의 혼란을 보여주는 듯하다. 너무 빨리 가기 보다 착실하게 내실을 다지며 가는게 중요하다는 걸 지나기 전에는 알 수가 없다.


베트남은 우리가 인식하는 동남아 사람들(조금은 낙천적인 면)에 비해 무척이나 빠릿하고 셈이 빠르다. 호찌민에서는  관광객에게 물건 값을 속이거나 일부러 거스름돈을 잘못 돌려주는 일도 다반사다. 그럼에도 이들이 밉지 않은 것은,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 모습이 이들에게서 보이기 때문은 아닐까...





여행 당시 호찌민의 젋은이들에게 '핫'한 레스토랑이라는 프렌차이즈 레스토랑에 갔다. 깨끗한 식당내부와 식기류에 좋은 모양의 음식들이 나왔지만 적어도 내 입맛에는 맛까지 좋다고 할 수는 없었다. 우리나라에서도 가장 뜨는 음식점이 맛까지 좋은 경우가 별로 없듯 베트남도 마찬가지 아닌가 싶다.



이 날 먹은 가장 맛있는 음식은 위 사진의 맞은 편 길거리에서 팔 던 베트남식 샌드위치인 반 미(Bahn mi)였다. 반 미는 과거 프랑스 지배의 영향인지 모르겠으나 베트남인들이 아침식사로 즐기는 샌드위치인데 가격이 싸지만 내용물이 무척 다양하고 크기도 무척이나 크다. 아침에 조그만 수레에 많은 아주머니들이 거리에서 반 미를 파는데 아침시간이 지나면 모두 사라지기 때문에 시간을 맞춰야 한다.


하지만 이 날은 저녁이 다 된 시간에 반 미를 팔고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숯불에 넙적한 고기완자를 구워서 빵과 채소 사이에 넣어서 팔고 있었다. 지나다 고기 냄새를 못이기고 가격이 싸니까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사먹었는데 이건... 베트남에서 먹었던 최고의 반 미였다. 그 후로 비슷한 방식으로 만드는 반 미를 먹고 싶었지만 보질 못했다. 


사진이 남아있지 않은게 너무 아쉽다. 처음엔 다음날 또 와도 된다고 생각했고, 다음날에는 다른 곳에도 비슷한게 많을 거라고 생각했다. 살다보면 지나고 나면 돌아올 수 없는게 참 많다.




호찌민에서 가장 유명한 초 벤탄(벤탄 시장)의 정문이다.



길거리 낮은 의자와 식탁에서 먹는 조금은 지저분한 그릇의 쌀국수가 때로는 번지르르한 식당의 음식보다 맛있을 때도 있다. 가격 또한 몇 백원 수준이니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










물가 싼 베트남이 아니면 이런 호사를 언제 누려 보겠나 싶어 찾아간 레스토랑. 여행 중에 먹었던 가장 고급 요리였던 것 같은데 스위스에서 먹었던 빅맥 세트밖에 안되는 가격이다. 이 날의 음식 중에 가장 좋았던 것은 주위 다른 사람들이 모두 한 잔씩 올려 놓고 있는 음료를 보고 '저거 주세요'하고 시켰던 베트남의 디저트 음료였다. 사진 찍을 생각을 못하고 마셔버린게 아쉬운데 고소하고 달콤한 맛이 그만이었다.


베트남은 저렴한 물가와 다양한 먹거리로 하루하루 나를 감동시켰다. 이후 나짱(나트랑)에서도 호이안과 후에에서도 매번 여행자를 감동시키는 그런 음식과 먹거리들이 즐비했던 베트남. 다시 베트남을 간다면 그 여행은 아마도 식도락 여행일게 분명하다.

인구 700만 명이 넘는 호찌민은 베트남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우리가 흔히 알고있는 '사이공'이라는 이름의 도시가 호찌민이다. 공산화된 후, 베트남의 국부로 존경받는 호찌민의 이름을 따서 도시 이름을 바꿨다고 한다.


호찌민에서 두 번째 날은 통일궁이라는 이름의 인민위원회 청사에서부터 시작했다. 이 곳은 베트남 전쟁 당시에는 미국의 작전본부가 있던 곳이라고 한다. 호찌민이 사용하던 집무실이라던지 접견실 등이 남아 있어서 외국 관광객뿐만 아니라 베트남 사람들의 발길도 끊이지 않는다.


호찌민은 공산주의자였고, 내가 초등 교육을 받던 7,80년대에는 공산주의는 세상에서 사라져야하는 이데올로기로 교육하던 시대였기 때문에 호찌민은 수많은 민주주의자들을 탄압하고 베트남을 공산화한 악인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 사람은 공산주의자 이전에 민족주의자로써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이루어냈으며, 제네바 협정으로 둘로 갈라진 베트남의 진정한 독립을 위해 초강대국인 미국과의 전쟁을 불사한 베트남 독립의 영웅이다.


호찌민은 결국 독립을 보지 못하고 죽었지만 권력을 이용하여 어떤 부귀영화도 누리지 않았다고 하며, 검소하고 소박한 성품이었다고 한다. 통일궁에도 호찌민의 집무실과 그가 사용하던 집기들이 그의 소박한 단면을 보여준다.






한 국가 수장의 집무실이라기에 무척 소박하다. 헝겊이 터져나간 등받이 쿠션부분과 팔걸이가 눈에 띄었다. 이념과 사상을 넘어 베트남 사람들에게 존경 받는 이유를 알 수 있을 듯하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전쟁 박물관이다. 박물관 뜰에는 베트남 전쟁시 미군이 사용했던 비행기나 탱크 등이 전시되어 있고, 내부에는 베트남 전쟁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눈길을 끌었던 것은 종군기자들이 찍은 당시 사진들이었다. 전쟁 박물관은 지금까지 내가 베트남 전쟁을 미국의 시각으로, 미국을 도와 참전한 대한민국 국민의 시각으로 봐왔다면, 분열된 국가의 국민으로, 대다수 베트남 국민들의 시각으로 이 전쟁에 대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제대로 찍은 사진들이 없어서 아쉽다.






하루종일 무더위와 싸우며, 무거운 주제의 전시물들을 보며 지친 몸과 마음을 충전하기에 맛있는 음식보다 나은건 없다. 더구나 싸고 맛있는 베트남 음식은 여기저기 너무도 많다. 베트남에서 꼭 먹어봐야 할 음식이며, 가격도 꽤 비싼 축에 속하는 민물게 요리를 먹으러 가기로 했다.(정확한 가게명도 음식이름도 기억나지 않지만)




지도를 보고 한참을 걸어서 찾아간 식당. 이 부근에는 같은 메뉴의 식당들이 여럿 몰려 있다.



게살 볶음밥. 게맛살만 많고 게살은 장난처럼 섞여 있는 여느 게살 볶음밥과는 차원이 다르다. 밥알이 폴폴 날리며 불맛이 살아있는게 제대로된 볶음밥이다.



유명한 민물게 튀김이다. 껍질채 튀겼음에도 탈피중인 시기라 껍질이 무척 부드럽다. 말그대로 살살 녹는다.



먹음직하게 보이지만 이날 먹은 요리 중에는 집게발 요리가 가장 평범했다.




동남아시아는 길거리 음식이 매우 다양하고 맛도 뛰어나서 비싼 레스토랑이나 제대로된 식당을 찾아다닐 필요가 없다. 그리고 대부분의 현지인들은 길거리 식당이나 작은 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한다. 처음에는 꺼려지더라도 어느 새 매일 현지인들과 섞여있는 본인의 모습을 발견할 지도 모른다.


베트남은 위 사진처럼 낮은 테이블과 의자를 두고 길가나 조그만 공터에서 영업하는 곳들이 많다. 태국이나 캄보디아와는 또 다른 모습이다.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어둑해져가는 거리에 귀가를 서두르는 수많은 오토바이 행렬이 거리를 뒤덮고 있었다.

베트남은 불과 수십년 전에 있었던 인류사에 남을 참혹했던 전쟁의 아픔을 이겨낸 강인함을 가진, 다양한 모습과 문화가 공존하 활기차고 재미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보면 우리나라와 비슷한 점이 꽤 많다.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베트남 호찌민으로 가는 날 아침, 숙소 앞에는 결혼식이 벌어졌다. 숙소가 현지인들이 사는 아파트 앞에 위치하고 있어서 짧게나마 캄보디아 사람들의 결혼식을 구경할 수 있었다. 이 사람들은 캄보디아에서 경제적으로 넉넉한 편이었던지 아침 일찍부터 많은 하객들이 방문했으며, 요리사들은 계속해서 많은 음식들을 만들고 나르고 있었다. 





아침에 픽업하기로 한 버스회사는 감감 무소식이었고, 조바심이 나서 결국 택시를 잡아 타고 버스회사로 향했다. 하지만 버스를 타는 곳은 표를 발매한 버스회사와 다른 곳에 있었고 버스는 출발하는 시간이 다 되어 있었다. 이럴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은 버스회사에서 사과하고 승객이 도착할 때까지 버스 출발을 잠시 멈추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여기는 우리하고는 다른 사람들이 사는 캄보디아였다.


다시 택시를 타고 부랴부랴 버스 타는 곳에 가서 떠나려는 버스를 잡아타고 올랐다. 표에 쓰인 자리를 찾고보니 캄보디아 커플인지, 베트남 커플인지 떡하니 앉아있다. 여기는 내 자리니 비켜달라고 하니 아무 자리나 가서 앉으란다. 물론 말은 통하지 않았고 한 달간 조금 능숙해진 바디랭귀지를 통한 대화였다. 버스 회사에서 통하지 않던 상식이 버스안에서 통할리 만무하다. 인상을 한번 써주고는 바로 포기하고 아무 자리나 가서 앉았다.


버스타고 가는 내내 화가 나고 속이 상했다. 내 상식이 통하지 않는 이 나라에 실망하고, 버스를 뒤집어 엎더라도 그 커플과 싸우지 않는 나에게도 화가 났다. 한참을 그 상태로 가다가 천천히 마음이 가라앉으면서는 다른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도 얼마전까지만 해도 시외버스를 타면 대충 남는 자리에 앉는게 당연했다. 저 커플이 보기에는 고작 버스 좌석 가지고 이미 앉아있는 사람을 이리저리 옮기라는 내가 이해가 안될지도 모른다. 나만 가면 되는데 왜 세 사람이 불편하게 자리를 옮겨야 하나 싶을지도 모른다. 불친절했던 버스회사 직원은 버스 정류장을 미리 잘 알아놓고 올 것이지 왜 여기서 자기에게 따지는지 이해가 안되었을 수도 있다.


우리는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지식을 상식이라고 부른다. 보편적이라는 것은 모든 사람이 아니라 내 주위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이 사람들의 상식은 이들의 주위 사람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지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상식과 이 사람들이 알고 있는 상식은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을 버스 안에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겨우 깨닫는다. 그래도 앞에 앉은 커플에게 화가 완전히 풀리진 않았지만 적당히 마음이 누그러진다.


나는 이렇게 여행을 통해 학교에서 가르쳤지만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했던 또 하나를 배웠다.

[버스를 탄채 페리에 올라 메콩강(이었을까?)을 건넌다]


[미웠던 베트남(혹은 캄보디아) 커플]



우리는 지역적으로 가까이 있어서인지 캄보디아, 필리핀, 베트남 등등의 동남아 국가들의 이름에 친숙하다. 반면, 볼리비아, 온두라스, 베네수엘라 등의 남미 국가나 앙골라, 우간다 등의 아프리카 국가는 머나먼 나라로 생각한다. 우리는 동남아 국가에 가서 주로 리조트에서 쉬다오는 여행이나 여행사를 통한 투어를 하기 때문에 친숙하면서도 정작 그 나라에 대해서 정확히 알지 못한다. 나도 여행을 떠나기 전에 마찬가지로 생각했고, 동남아 여행이 좀 더 쉽지 않을까 싶어서 첫 여행지로 선택했다.


캄보디아나 라오스는 세계 최빈국 중에 하나다.(물론 경제적인 면으로) 처음에 봉고차 위에 짐들과 같이 타고 있는 사람들, 멈춰선 버스 밖에서 물건을 팔려는 상인들, 제대로 포장되지 않은 길 등등. 생각보다 더 빈곤한 삶을 살고 있었다. 나는 가까운 나라조차도 이렇게 모르고 있었다. 직접 보지 않으면 경험하지 않으면 모르는 것들이 참 많구나 싶었다.



버스는 점심때쯤 갑자기 도로 옆에 차를 세우고 사람들은 낡은 집 안으로 들어간다. 볼 일을 보고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서다. 약간 지저분해 보이지만 여러가지 것들이 들어간 국수와 야채를 싼 롤이 생각보다 입맛에 맞다. 피쉬소스인지 쿰쿰한 냄새가 나는 소스도 이제 없으면 아쉽게 느껴지는게 점차 동남아 여행에 익숙해지는구나 싶었다. 동남아 여행을 마치고는 이 동남아 음식들이 1년 내내 그리워질 줄은 이때는 잘 몰랐다.


[베트남쪽 국경 검문소]


태국에서 캄보디아로 넘어올때 캄보디아 검문소는 무척이나 낡고 초라했다. 이쪽은 상대적으로 검문소들이 국경까지 오면서 봤던 어떤 건물들보다도 무척이나 크고 깨끗하다. 프놈펜과 호치민이 거리상으로 가깝기도 하고, 캄보디아가 현재의 체재로 공산화되는데 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의 영향이 컸다더니 양국가간 왕래도 활발한 모양이다.



호치민에 도착하자마자 익숙한 풍경이 펼쳐진다. 때마침 퇴근 시간에 도착한 호치민은 수많은 오토바이들이 도로를 점령하고 있었다. 2005년 베이징에 갔을 때 자동차보다 많았던 오토바이들이 2010년에는 자동차들로 바뀌어 있던 것처럼 베트남을 상징하던 자전거(씨클로)가 오토바이로 바뀌었고, 또 몇 년 후에는 자동차들로 바뀔 것이다. 



호치민은 프놈펜과는 다른 활기차고 번잡한 분위기다. 도시의 규모도 훨씬 크고 자본주의도 먼저 도입해 도시 전체가 시끌벅적한 분위기다. 무엇이 낫다, 그르다 할 것은 아니고 다만 많이 달랐다.



베트남에 왔으니 베트남 쌀국수를 먹어봐야한지. 베트남 국수와 태국 국수는 육수도 좀 다르지만 면발이 무척 달랐다. 태국 국수가 좀 더 끈기가 있고 쫄깃한 면발이라면 베트남 국수는 뚝뚝 끊어지는 면발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태국 국수의 면발이 좋았지만 뜨끈한 국물을 들이키니 하루종일 버스에 시달린 피로가 좀 풀리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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