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찌민에서 출발한 버스는 이제 막 해가 뜬 이른 아침, 해변가 도로에 잠시 정차해서 사람들을 내려주고는 다시 출발해버렸다. 밤새 다리도 펴지 못하고 좁은 침대에서 불편하게 뒤척이던 나는 잠도 채 깨지 못한채 배낭과 함께 해변가에 버려졌다.
잠시 해변가 벤치에 앉아서 잘 굽혀지지도 펴지지도 않는 다리와 허리를 두드리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번 여행의 첫번째 도착한 바다에 아침해가 눈부시게 빛난다. 여행을 하면서 산도 좋아하게 되었지만 어린 시절을 바닷가에서 보내서인지 나는 바다를 무척 좋아한다.
그리 곱지는 않았지만 모래사장이 길게 펼쳐져 있고 해변가로는 야자수가 쭉 자라고 있다. 현지인들이 해변가를 따라 조깅이나 산책을 하는 모습도 종종 보인다. 호찌민과는 완전히 다른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하지만 나는 이런 여유로움을 느끼기에는 아직 숙소도 정하지 못했고, 밤새 비워진 뱃속에는 뭔가를 채워야 했다. 나짱의 숙소는 생각보다 비쌌다.(상대적인 것이라 생각보다 비쌌다는 것이지 절대적으로 비싼 가격은 아니다.) 대충 적당한 가격의 호스텔에 짐을 풀고 아침에 문을 연 식당을 찾아 적당히 허기를 채운 후, 해변으로 나갔다.
하늘은 맑고 해변은 한가하고 야자수가 모래사장에 드리운 그늘 밑은 시원해서 좋았으나 파도가 꽤 심하고 수심이 깊었다. 수영하기에는 적당한 해변은 아니었다.
나짱이 베트남에서 유명한 해변도시이고 휴양지이긴 하지만 얼마전까지만 해도 한가로웠을 이 도시에도 서구의 거대 자본이 밀려오나보다. 이름만 들어도 아는 호텔 체인들이 북쪽 해변에 거대한 성들을 쌓아올리고 있었다. 절약이 미덕인 배낭여행자여서 그런지 이런 획일화된 호텔과 리조트들이 그리 반갑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세계 곳곳에 지어진 것들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지어야한다면 좀 더 자연친화적이고 현재의 모습을 망가뜨리지 않는 방법이 있을텐데...
나짱의 해변에 누워있으면 예의 그 베트남식 삿갓을 쓴 여인네들이 양쪽에 커다란 바구니가 달린 봉을 어깨에 메고 해산물을 팔러 다닌다. 하루종일 그 긴 해변의 모래사장을 왕복하며... 편안히 누워있는게 미안할 정도로 끊임없이 지나가고 지날때마다 살지를 물어본다.
불편한 잠자리 때문이었을까? 몰려오는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숙소에서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나니 벌써 저녁시간이 되었다. 고생한 몸도 약간의 호사가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비싸보이지만 그럴듯하게 생긴 레스토랑을 골라 들어갔다. 그러나 들어서는 순간, '아차! 잘못왔구나' 싶었다. 식사하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서양 관광객(여행자가 아니라 관광객)이었다. 전형적으로 관광객을 등쳐먹는 그런 식당이었던 것이다.
얼굴에 철판 좀 깔고 나왔어야 했는데 그래도 적당히 든 나이 때문에 차마 체면을 모두 벗어버리지 못하고 적당히 먹자는 생각으로 해물 요리를 시켰더니 나온 것들이 위 사진 두 장이다. 조그만 게 하나와 생선 한 마리, 새우와 가리비, 조개 조금이 전부였다. 잔뜩 화가 났지만 들어온 내가 잘못이지 뭐라 하겠는가. 억울한 마음을 안고 내일은 현지 식당에 가서 해산물 요리를 배부르게 먹으리라 다짐하며 잠들었다.
다음날은 일출을 보려고 아침 일찍 일어났다. 나짱이 베트남 동쪽 해변을 접하고 있으니 바다에서 솟아오르는 일출을 볼 수 있을거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날 아침은 수평선에 구름이 껴서 해는 바다에서 솟아오르지 못하고 구름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붉게 솟아오르는 아침 해를 둘러싼 구름덕분에 오히려 더 분위기 있는 아침 노을을 볼 수 있었다.
영국에서 왔다는 스무살을 갓 넘긴 커플. 스무살에 둘이서 지구 반대편으로 배낭여행을 떠날 용기가 부러웠다. 내가 스무살이었던 시절에 이런 생각을 해보지 못했던게 아쉬웠고, 이들이 앞으로 세상에서 배우고 경험할 것들이 많음이 부러웠다.
지금은 우리나라 젊은이들도 방학이면 배낭여행을 떠나고 있지만 여행지가 유럽이나 미주로 한정되어 있고 여행 기간도 짧은 것 같다. 유럽에서도 제한된 기간과 금액내에서 더 많은 나라에서 유명 관광지나 박물관을 찾아다니느라 꼭 보고 느껴야 할 것들을 오히려 놓치고 있는 느낌이다. 하지만 이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식들이 배낭여행을 다닐 때는 더 나은 여행을 하기 위해 많은 충고를 해 줄 것이고, 자식들은 본인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더 다양한 자신만의 방식으로 여행을 할 것이다.
우리나라가 여행자유화(라고 표현하니 참 어색하지만 실제 그렇게 쓰였다)가 된 것은 88년 올림픽을 막 앞두고 있었을 때였다. 그 전에는 공무나 사업적인 출장이 아니고는 여행으로 해외에 나가기가 참 어려웠다. 외무부 등의 정부기관에서 만들어야 하는 서류만도 여럿이었다고 한다. 여권만 가지고 있다면 대부분의 국가를 무비자로 여행할 수 있는 시대다. 우리가 자유롭게 여행하고 여행문화를 만들어 온지 아직 20여 년 밖에 되지 않았다.
오후내내 해변에서 뒹굴거리고 낮잠도 자고 거센 파도에 몸을 부딪히기도 하면서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고 저녁에는 어제 마음 먹었던 현지인들이 가는 해산물 식당으로 향했다. 락칸이라는 이 식당은 주로 현지인들이 가는 식당이긴 하지만 베트남을 여행하는 배낭여행자들에게는 나짱에 왔다면 가봐야하는 매우 유명한 곳이다.
조그만 숯불 화로에 먹고 싶은 재료들을 주문하여 직접 구워 먹는 음식점인데 동남아에는 우리나라처럼 식탁위에 불을 피워서 손님이 직접 구워 먹거나 데워 먹는 음식들이 꽤 있다.
특별히 좋아하는 것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이것저것 좋아하는 것들이 많을 때는 일단 종류별로 시켜놓고 먹어본다. 그리고 특히나 맛있었던 것을 더 주문하면 된다. 소고기, 장어, 새우 등을 시켜서 맥주와 배부르게 먹으면 배낭여행자에게는 약간 부담있는 가격일 수 있는데 이 재료들을 우리나라에서 먹었을 때 나올 가격을 생각하면 싸게 잘 먹었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동남아에는 나라마다, 지역마다 다양한 맥주들이 있다. 태국의 타이거, 창, 싱하 등의 맥주는 잘 알려져 있는데 베트남에도 사이공이나 333 등의 맥주가 있고, 도시마다 그 지역의 맥주가 또 있다. 우리나라에서 지역별로 다른 소주가 팔리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맥주는 대부분 라거맥주들인데 그 품질이 나쁘지 않다. 맥주를 좋아하는 여행자라면 가는 나라마다, 방문하는 도시마다 현지에 있는 맥주들을 마셔보는 것도 꽤 즐거운 일이다.
잘 먹고 부른 배를 소화시킬 겸, 식당 주변을 거닐며 구경하다보니 꽤 큰 시장이 나왔는데 저녁무렵이라 대부분 문을 닫았거나 닫기 위해 정리하고 있다. 여행 중에 시장 구경은 아주 큰 재미거리인데 무척이나 아쉬웠다.
어두워지는 나짱거리를 걸으며 구경하던 사이에 밤이 깊어졌다.
다음날은 2박 3일간 나짱 여행을 마치고 호이안으로 가는 침대버스를 타는 날인데 마침 그 동안 쌓인 여행의 피로가 몰려드는지 으슬으슬 한기가 도는게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낮동안에는 게스트하우스에서 쉬다가 저녁무렵에 버스를 타려고 나섰는데도 영 나아지지가 않았다. 이럴 때는 뜨끈한 국물이 생각나는 법이라 근처 쌀국수집을 찾았다.
버스 시간도 다가오고 인터넷을 뒤져 맛집을 찾기도 어려운 상황이라 근처에 보이는 현지인들이 많은 식당에 무턱대고 들어가서 국수를 시켰다. 우리가 흔히 먹는 얇은 쌀국수가 아니라 칼국수처럼 넓적한 국수에 덜익은 고기와 파가 잔뜩 올려져 있는 국수가 나왔다. 육수가 뜨겁기 때문에 고기는 휘휘 저으면 적당히 다 익는데 이 국수 맛이 일품이었다. 진한 육수까지 모두 들이켜고 나니 몸이 따뜻해지는게 한결 기분이 나아졌고, 무리없이 야간 버스를 타고 호이안으로 갈 수 있었다. 생김새는 그다지 볼 품 없을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그야말로 잊을 수 없는 보양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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