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에 대학을 다녔던 사람들이 맨처음 땅고(탱고)를 접한 것은 대부분 영화 '여인의 향기'를 통해서였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 알파치노와 젊은 여인이 추던 우아하면서도 관능적인 춤과 흥겨우면서도 애수에 찬 음악이 땅고라는 것은 알지 못했으면서도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있다. 액션영화를 좋아했던 사람은 아놀드 슈왈제네거의 '트루 라이즈'에서 영화 마지막에 아내와 추던 춤으로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Tango라는 영문자의 발음에 따라 대부분 탱고라고 부르지만 스페인어로는 '땅고'라고 들리기 때문에 여기서는 땅고라고 적기로 했다.


땅고는 음악이다. 그리고 이 음악에 맞춰 추는 춤과 노래를 통틀어 땅고라고 한다. 땅고는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건너온 흑인들의 여러 춤과 노래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이 음악들이 변형되어 땅고가 된 것으로 알려져있다. 1800년대 말에 최초의 땅고 음악이 나오기 시작했고, 1900년대 초에 독일에서 반도네온이 전해지면서 피아노, 바이올린, 베이스, 반도네온이 땅고 음악을 연주하는 중심 악기가 되었다고 한다.


땅고가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지게 된 것은 카를로스 가르델이라는 음악가에 의해서였으며, 그는 '탱고의 황제'로 불리고 있다. 앞에서 말한 영화 '여인의 향기'에 나온 'Por una cabeza'도 그가 작곡한 곡이라고 한다.


1년에 한번있는 땅고 축제가 열리는 기간에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방문하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남녀노소 모두 땅고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 시기에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오는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축제가 열리는 전시장에서는 큰 무대에서 땅고 경연대회가 열리고 있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집중해서 땅고를 보고 한 곡이 끝나면 열광적으로 박수를 쳤다. 



나이가 매우 많아 보이는 반도네온 연주자는 아주 유명한 사람인지 곡을 연주하는 내내 무대를 보여주는 커다란 스크린에서 이 할아버지 연주자만 비춰줬다.


늘씬한 남녀 무용수가 영화에서 보던 땅고를 추고 있다. 땅고는 매우 관능적이고 열정적인 춤인데 때론 안타까운 사랑을 표현하는 듯 애절한 느낌도 든다. 하지만 스탭이나 발놀림이 매우 현란하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이 배우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하지만, 이날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전문적인 무용수들의 춤이 아니라 무대 입구에 마련된 관람객들을 위한 공간이었다. 여기에서 많은 사람들이 연주되는 땅고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는데, 이들이 추는 땅고는 무대에서 추는 현란한 발놀림과 화려한 몸동작과는 거리가 있었다. 물론 땅고의 스텝을 밟고 있겠지만 훨씬 쉬워 보였다.


땅고는 전문적인 무용수만 추는 춤이 아니었다. 좋아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배워서 즐길 수 있는,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생활이자 문화였다. 서로 모르는 사람들끼리도 눈빛을 교환하고 마음이 맞으면 다가가 땅고를 추기 시작했다. 반백의 할아버지부터 젊은 20대 여인까지 땅고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땅고를 같이 출 상대를 찾을 수 있다.


춤을 문란하게 생각하는 우리의 점잖은 문화가 아쉽고, 춤을 문란하게 이용하고 있는 이들이 안타까웠다. 사실 나는 춤에 별로 관심이 없었고 그다지 추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이들의 문화만큼은 너무나 부러웠다.



전시장을 나오니 어느 새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다시 한번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가게 된다면 잘 할 수 있을지, 즐길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한번쯤 땅고를 배워보고 싶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첫인상은 매우 좋지 않았다. 24시간만에 푸에르토 이구아수에서 출발한 버스에서 내려 피곤한 몸을 이끌고 탄 지하철A선은 백 년은 된듯(남반구에서 가장 오래된 지하철이며, 실제 1913년 개통되었다니 여행당시 99년째였다) 무척 낡았는데 심지어 전동차가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다. 게다가 잠시 후, 다른 칸에서 다가온 여자에게 소매치기를 당할뻔했다. 남미의 소매치기에 대해 워낙 많이 들어왔기에 조심하고 있어서 다행히 훔치기 전에 막을 수 있었는데, 소매치기 여인은 오히려 막 뭐라고 퍼붓고는 다른 칸으로 가버렸다. 어안이 벙벙했다. 아무리 남미라하더라도 이렇게 대놓고 소매치기할 줄은 생각지 못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현지인들도 백팩을 앞으로 매고 다니는 사람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여기는 남미'라는 생각에 다시 한번 정신이 바짝 들었다.


금전적으로 크게 손해를 본다거나 신체적으로 상해를 입지 않는다면 가끔은 정신이 번쩍 들만한 일을 만나는게 오히려 큰 피해를 입지 않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경험상 이런 일은 항상 정신적으로 느슨한 상태일 때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 날은 숙소에 틀어박혀 나가질 않았다. 장거리 버스로 피곤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길거리로 나가기 위해서는 약간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여행은 다음날부터 시작되었다.


유럽풍 건물들이 즐비한 플로리다 거리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남미의 파리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인구의 90%가 백인이며, 과거 내전을 피해 온 왕가의 영향으로 유럽풍 건물들이 많은 도시기 때문이다. 특히, 쇼핑 지구인 플로리다 거리를 걷다보면 표면적으로는 유럽의 도시인지, 남미의 도시인지 잘 구별이 가지 않는다. 어떤 여행자들은 이런 점 때문에 이 도시를 유럽의 여느 도시처럼 생각하고, 아름다움을 칭찬하기도 한다. 하지만, 유럽에서 수개월을 보내고 왔기 때문인지 나에게는 크게 아름답지도, 흥미롭지도 않았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5월 광장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아이스크림이 유명하다고 했다. 실제 현지에서 유명한 프렌차이즈도 있고, 다양한 아이스크림 가게들이 곳곳에서 성업중이었다. 하지만, 이탈리아에서 맛본 유명 젤라또들에 비해서 이 곳의 젤라또들은 질적으로, 가격적으로 그다지 뛰어나다고 하기는 어려웠다.


8월 말에 도착한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우리나라 늦가을 정도의 날씨였다. 30도를 넘는 브라질에서 하루를 꼬박 버스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오니 완전히 다른 기후인 것이다. 여행을 한 뒤로도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 새삼 남미대륙의 거대함이 느껴졌다.


이 날은 무척 날씨가 좋아서 늦가을 날씨였음에도 전날 소매치기로 인한 우울한 기분도 사라졌다. 하지만,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있었던 2주 중에서 날씨가 좋았던 날들은 얼마되지 않았다. 8월말의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춥고, 습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다른 하나의 명물은 일요일마다 산텔모 지역에서 열리는 벼룩시장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 옆으로 여러가지 장신구, 옷, 옛날 음반 등을 팔거나 거리의 악사들이 연주를 하고 있었다. 규모로는 세계 어느 벼룩시장 못지않게 컸지만 제품의 다양성이나 만듦새는 치앙마이의 주말시장에 비해서는 떨어졌다. 아무래도 섬세하고 아기자기한 제품을 만드는 솜씨는 동양인들이 훨씬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비교적 그렇다는 것이지 산텔모의 벼룩시장은 여행자가 시간을 내서 구경할만한 충분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나는 여기서 저렴한 털실로 만든 모자와 장갑을 샀다. 그동안 주로 더운 지방을 여행했기 때문에 방한용품이 거의 없었을뿐더러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생각보다 훨씬 추웠다. 게다가 앞으로 갈 예정인 파타고니아는 여기와는 비교하기 힘들만큼 추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봤던 수많은 거리의 악사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솜씨라고 생각하는 기타연주자

기타 케이스 안에는 꽤나 많은 동전과 지페들이 있었다.



산텔모 지역도 치안이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라고 한다. 벼룩시장이 선 골목은 그다지 문제될 것이 없지만 사이의 작은 골목으로 들어간다면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고 했다. 게스트하우스에 머문다면 그곳의 주인이나 매니저로부터 여러 번 주의를 듣게 될 것이다.


산텔모 벼룩시장을 둘러보다 사람들로 붐비는 레스토랑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 주위 사람들이 먹는 것을 살펴보고 대충 음식을 시켰다. 맛은 나쁘지 않았으나 가격이 제법 비쌌다. 브라질만큼은 아니지만 아르헨티나도 물가가 낮지는 않았다. 게다가 유럽 문화라 그런지 저렴하게 먹을 수 있는 길거리 음식이 거의 없었다.(기껏해야 땅콩이나 아몬드에 카라멜을 묻혀서 파는 심심풀이 음식밖에)


만두와 비슷한 음식인 엠빠나다를 튀긴듯한 음식


빵에 고기와 야채를 채운...


가지속에 고기와 치즈를 채운...


음식사진들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모든 음식에 고기가 들어가 있다. 아르헨티나는 대서양으로 긴 해안선을 가진 나라지만 해산물로 만든 음식은 거의 없고 오로지 고기, 그 중에서도 쇠고기 중심의 음식들이 많다. 그럴 수 밖에 없는게 아르헨티나는 4천만이 넘는 인구보다도 소의 수가 더 많다고 알려진 나라이며, 1인당 식육소비량이 세계 1위인 나라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목장이 많에 그런가 위키백과에 찾아보니 세계 8위인 국토면적의 40%가 목장이나 방목지라고 한다.


아르헨티나의 소고기는 어느 나라보다도 뛰어났다. 여행을 하면서 동남아와 유럽, 오세아니아의 여러 나라에서 소고기로 만든 음식을 먹거나 직접 소고기를 사서 구워 먹었지만 아르헨티나의 소고기에 필적할만한 곳은 없었다. 심지어 인구보다 소를 많이 기르기 때문에 가격 또한 무척 싸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머물었던 기간동안 매일 저녁은 소고기 스테이크를 만들어 먹었는데 와인 한병과 배부르게 먹을 만큼의 소고기를 사도 한화로 만원이 채 되지 않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소고기가 물릴지경이었다. 



산텔모의 벼룩시장을 보고 숙소쪽으로 오다보니 큰 길을 막아놓고 뭔가 축제 같은 것을 하고 있었다. 축제의 대부분은 먹거리를 파는 것이었는데 여기서 파는 음식도 대부분 소고기로 만든 것들이었다.



아르헨티나 인구의 대부분은 백인계이며, 이들은 이탈리아와 스페인뿐만 아니라 유럽 각지에서 온 이민자 혹은 그들의 자손들이다. 그렇기에 이들은 자신들이 유럽인이라는 생각이 강하며, 가끔 인종차별적인 우월감을 가진 사람들도 있다. 대부분이 혼혈이거나 흑인들이라 아프리카와 남미 원주민, 유럽의 문화가 혼합된 독특한 색깔을 지닌 브라질과는 마치 다른 대륙에 속한 나라처럼 달랐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꽤나 무뚝뚝해서 브라질 사람들 같은 친절함도 없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을 다 묻어버리는 아르헨티나만의 특별한 문화가 탱고다. 운좋게도 내가 방문한 이 시기는 일년에 한번 있는 탱고 페스티벌이 열리는 기간이었다. 저녁에는 탱고 페스티벌이 열리는 우리나라의 코엑스 같은 전시장을 찾아갔다. 글이 너무 길어져서 다음편으로 넘긴다.

다음날은 아르헨티나쪽 이구아수 폭포를 보기 위해 아르헨티나쪽 도시 푸에르토 이구아수로 국경을 넘었다. 푸에르토 이구아수 버스터미널에서 저녁에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출발하는 버스를 예약하고 짐을 맡긴 후, 부리나케 이구아수 폭포를 보기 위해 나섰다. 여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여행은 항상 예상을 벗어난다. 하긴 그게 여행의 묘미이기도 하다.


이른 아침부터 브라질에서 아르헨티나로 국경을 넘는 버스를 기다렸지만 좀처럼 오지 않았다. 정류장 앞에 있는 가게에 물었지만 도무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지나가는 남자는 버스 회사가 파업중이니 기다려봐야 오지않을거란다. 그런데 또다른 사람은 좀 더 기다리면 올거라고 한다. 이게 말로만 듣던 남미 사람의 친절한 오지랖인가. 여튼, 한참을 기다려 버스를 탓지만 적지않게 시간을 허비했다.


다음으로 국경을 넘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버스에서 내려 국경검문소에서 브라질 출국과 아르헨티나 입국을 마친 후, 버스를 기다렸다가 탓어야 했는데 버스가 보이지 않자 급한 마음에 무작정 아르헨티나쪽으로 배낭을 매고 걸어버렸다. 곧 나올 줄 알았던 버스는 아무리 걸어도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걷고 있는데 왠일인지 앞에서 버스가 나타났다. 버스는 나중에 사람들을 태우고 출발했다가 동양인 여행자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날 태우기 위해 갔던 길을 돌아왔던 것이다. 버스에 올라타자 여행자고 현지인이고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적지않게 부끄럽고 당황스러웠지만 이들은 나때문에 늦어진 시간은 아랑곳없이 웃고 소리질렀다. 약간 놀림이 섞인 환호였지만 비난하거나 투덜대는 사람은 없었다. 점점 남미 사람들이 재밌어졌다.


버스에서 이들의 낙천적이고 친절함을 알 수 있는 또다른 일이 생겼다. 짐을 잔뜩 산 아주머니가 버스를 타려고 하자, 버스운전사가 내려서 부지런히 짐을 옮기고 승객들은 버스안에서 짐을 받아주었다. 이들에게 이정도 도움은 아직 당연한 일일뿐이다. 요즘 우리는 짐이 많은 승객 때문에 시간이 늦어지거나 버스가 혼잡해지면 인상을 찌푸릴텐데, 옛날 우리네 모습도 저렇지 않았을까. 이 사람들 상당히 매력적이다.


하여튼, 여러가지 일로 시간이 늦어져 아르헨티나쪽 이구아수 폭포 공원입구에 도착했을 때는 점심이 지난 시간이었다.




공원입구에서 버스를 타야하지만 산책로를 걸으며 폭포를 구경할 수 있었던 브라질쪽과 달리 아르헨티나쪽은 작은 기차를 타야했다. 공원이 크고 폭포를 볼 수 있는 주요 지점이 떨어져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지체되어 우선, 공원 가장 안쪽에 있으면서 아르헨티나쪽 이구아수 폭포에서 가장 유명한 '악마의 목구멍'부터 가기로 했다.


기차밖으로 수많은 노란 종이들이 흩날리고 있었서 유심히 봤더니 모두가 노랑 나비였다. 


악마의 목구멍으로 들어가는 산책로 입구


'악마의 목구멍'은 이구아수 폭포에서 가장 큰 폭포를 일컫는 곳인데, 세상의 물을 다 빨아들이는 듯해서 악마의 목구멍이라 이름붙여진 것 같다. 폭포 바로 위까지 물 위에 놓인 구조물을 따라 걸어야 한다. 


유네스코 자연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으며,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이 곳이 잘 보존되고 있다는건지 사람을 겁내지 않는 여러가지 동물들을 수시로 볼 수 있다.


커다란 나방? 나비?


내 팔보다 길어보이는 메기. 

분수같은 인공구조물이 아닌 강물에 동전을 던지는 일은 삼가했으면 좋겠다.


거북이들의 일광욕


멀리서 강아지만한 동물이 아장아장 걸어오고 있다.


이구아수의 상징적인 동물, 코아티


공원안에서는 일상소음처럼 물소리를 듣게 되지만 어느 한순간 갑자기 오디오 볼륨을 세게 올린 듯 거대한 물소리가 공기중에 가득찼다. 먼 곳에서 흰 물보라가 올라오는 거대한 구멍이 눈에 들어왔다.


천천히 흐르던 강물이 갑자기 거대한 구멍속으로 빨려들어가는 듯하다.

과연, 이곳에 살았던 원주민들이 악마의 목구멍이라 부를만한 광경이다.




폭포 아랫쪽은 하얀 물보라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 악마의 목구멍을 보고 있으면 묘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그래서인지 이곳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고 한다. 



폭폭 아래에서 올라오는 물보라는 바람에 따라 수시로 방향이 바뀌기 때문에 흠뻑 젖을 각오를 해야한다.



놀랍고, 웅장하고 거대한 자연의 경이에 몸이 떨릴지경이었다. 짧은 글실력으로 이런 느낌을 제대로 표현하기는 정말 어려운 일이다.


악마의 목구멍에서 나와서 다른쪽 폭포를 보기 위해 열차를 기다리는 중, 다시 노랑 나비떼를 만났다. 이건 떨어진 나뭇잎과 섞여서 나뭇잎인지 나비인지 구분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휴게소에서 만난 코아티 무리. 안타깝게도 관광객들이 나눠주는 먹이에 길들여진 듯하다.


걸으며 전체적인 폭포의 전망을 둘러볼 수 있었던 브라질쪽과 달리 아르헨티나쪽은 폭포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포인트가 많다. 제트 보트를 타고 악마의 목구멍 가까이 다가가는 여행상품도 있다.



아르헨티나쪽 이구아수 폭포에서 악마의 목구멍 다음으로 인기있는 포인트가 위 사진에 있는 폭포 바로 밑 전망대다. 전망대가 있는 곳은 작은 섬이라 배를 타고 가야한다. 원래 이어져있었는데 떨어지는 물줄기에 의해 섬이 되었을 것 같다. 하지만, 내가 도착했을 때는 오후 3시가 넘어서 배를 운행하지  않았다. 불과 몇 분 차이로 멀리서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공원 여기저기에 코아티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닌다.


원래 이구아수 폭포는 파라과이쪽이 대부분 차지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와의 전쟁으로 대부분을 빼앗겨 지금은 파라과이쪽에서는 아예 접근할 수가 없다고 한다. 남미를 여행하며 이들의 역사를 조금씩 배우다보니 침략자인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고서도 나라들끼리 여러차례 전쟁과 영토분쟁을 거듭해오고 있었다. 미국연방처럼 거대한 남미연방을 꿈꿨던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자, 시몬 볼리바르의 꿈은 가진자들의 이익과 이기심으로 결국 꿈으로만 남았다.



푸에르토 이구아수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레스토랑에서 먹은 거대한 샌드위치. 여행을 하며 먹은 훌륭한 샌드위치들은 대부분 남미에서 먹은 것들이었다. 큰 빵안에 갖가지 것들이 충실하게 들어차 있다.



푸에르토 이구아수에서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까지도 대충 24시간 정도 버스를 타야했다. 남미에서는 거리가 좀 된다 싶으면 기본 24시간이었다. 


아르헨티나의 버스는 브라질의 버스보다 깨끗하고 쾌적했다. 좌석도 우리나라 우등보다 크고 식사도 버스 운행중에 제공되었다. 심지어 위스키까지. 물론 이 버스보다 훨씬 높은 등급의 좌석이 180도로 펼쳐지는 비행기 1등석같은 버스도 있고, 좌석마다 개별 LCD 모니터가 달린 버스도 있지만 가격도 비행기처럼 치솟기 때문에 만만치가 않았다.


드디어, 탱고의 고장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간다.

히우에서 거대 그리스도 상과 이빠네마 해변을 보고 다음날 이구아수 폭포로 출발했다. 호스텔 매니저에게 터미널로 가는 대중교통편과 터미널 위치를 물었다. 매니저는 남미에 처음이라는 동양인이 걱정되었는지 터미널 주위는 위험한 곳이니 주의해야 한다고 여러번 알려주었다.


터미널로 가는 시내버스를 탈 때도 운전기사에게 터미널로 가니 정류장에서 알려달라고 부탁을 해 두었다. 위험한 지역이라고는 해도 대낮에 도심 한복판에서 왜 이리 호들갑이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남미의 대도시는 길 건너편, 블록 하나 차이로도 치안상태가 극과 극이기 때문이다. 자칫 길을 잘못 건너거나 다른 블록으로 가는 것만으로도 신변에 위협을 느낄만한 일이 발생할 수도 있다.(남미의 대도시에서는 늘상 주의해야 하는 일이다.)


친절한 브라질 운전사는 터미널 근처에서 내려주었고, 터미널 방향을 손짓하며 알 수도 없는 말을 열심히 했다. 고개를 끄덕여 고마움을 표시하고 버스 뒷문으로 내렸다. 버스 앞쪽으로 걸어가며 보니 버스는 출발하지도 않고, 운전사는 앞문을 열어놓은채 아직도 나를 보며 열심히 터미널 방향을 손짓하고 있었다. 게다가 운전사가 버스를 세운 곳은 정류장도 아니고, 터미널 방향으로 건너는 길의 횡단보도 앞이었다.


제법 많은 나라와 도시를 다녔지만 이렇게 친절한 사람들을 자주 만났던 도시는 처음이었다. 큰 호의는 아니지만 아무 대가없이 열성적으로 여행자를 챙겨주는 이 사람들이 내 마음에 새겨졌다. 신이 도시를 축복한 것은 아름다운 풍광을 준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사람들을 살게 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떠나는 마당에 이 도시에 오래 머무르지 못한 것이 더욱 아쉬워졌다.


포스 두 이구아수는 이구아수 폭포의 브라질쪽에 있는 작은 도시이다. 이구아수 폭포는 세계에서 가장 큰 폭포답게 브라질,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3개국이 국경을 맞대고 있는데, 폭포는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쪽에서 볼 수 있으며 브라질쪽은 포스 두 이구아수, 아르헨티나쪽은 푸에르토 이구아수라는 도시가 가까이에 있다.


구글맵에서 찾아보니 히우 지 자네이루에서 포스 두 이구아수까지는 1500킬로미터, 자동차로 16시간이 넘게 걸린다고 한다. 하지만 버스로는 대충 24시간 정도 걸린다고 보면 된다. 가면서 휴게소에서 식사하고, 운전자를 교대해야 하며, 밤길을 달려야 하기 때문에 만 하루가 꼬박 걸렸다. 브라질을 제외하고 남미에서 탓던 다른 버스들은 휴게소에 세우고 식사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비행기 기내식처럼 차장이 식사를 나눠준다. 브라질 버스도 회사나 좌석 등급에 따라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탔던 이 버스는 휴게소에 내려 식사를 했다. 개인적으로는 시간이 좀 더 걸리더라도 담배도 한대 피고, 굳은 몸도 풀 수 있게 휴게소에 쉬는 편이 훨씬 좋았다.


동남아 야간버스도 12시간이었는데 남미에서 처음으로 24시간 버스를 탔다. 이 때 탓던 버스는 우리나라 우등고속버스 정도되는 좌석 넓이였지만 생각보다는 힘들지 않았다. 생각보다는 그렇다는 것이지 허리가 아프고 엉덩이에 쥐가 날 것 같은 괴로움은 당연히 따라온다.


한낮에 도착한 포스 두 이구아수는 열대지방이라 겨울임에도 30도가 넘고 있었다. 히우 지 자네이루는 우리나라의 초가을 날씨였는데 하루를 꼬박 차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왔더니 한여름 날씨인 것이다. 예약해 둔 숙소에 짐을 풀고 바로 브라질쪽 폭포를 보기 위해 나섰다.


포스 두 이구아수 시내에서 이구아수 국립공원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한참을 달려 공원 입구에 도착했다. 여기서 표를 사고, 공원 내부를 다니는 버스를 이용해 폭포 가까이 가야한다.


이구아수 공원 안을 다니는 버스에는 이곳의 명물인 동물들의 그림이 그려져있다.



공원 안에도 묵을 수 있는 숙소가 있는데 별 다섯개짜리 특급 호텔이라 가격이 무지 비싸다. 배낭여행을 하려면 숙소에 대한 욕심은 버리는게 좋다. 가성비를 따지지 않는다면 중간에 여행을 그만두고 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버스에서 내리니 멀리 폭포가 보이기 시작했다.


밀림 사이를 흐르던 물줄기가 수십 수백개의 폭포가 되어 그대로 떨어지고 있었다. 당시는 건기라 이렇게 여러개의 폭포로 보이지만 우기에 비가 많이 오면 모두가 합해져 하나의 폭포로 떨어진다고 한다.



어딘가에서 타잔이 폭포소리를 뚫고 소리를 지르고 있을 것 같은 경치다.

어렸을 때 봤던 타잔 드라마에서 타잔이 폭포 위에 서서 소리를 내는 장면은 

실제로 이구아수에서 찍었다고 한다.



폭포 안쪽으로 걸어가다보면 형형색색의 많은 나비를 볼 수 있다. 이 다양한 나비들은 사람을 무서웧지 않아서 가까이 다가가도 도망가지 않는다. 자주 사람들의 머리나 옷에 내려앉아있다.



브라질쪽 이구아수와 아르헨티나쪽 이구아수는 서로 특징이 다르다. 브라질쪽에선 이구아수의 전체적인 모습과 전망을 볼 수 있고, 아르헨티나쪽에선 거대한 폭포의 물줄기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 서로 다른 특징을 갖기 때문에 여행자에 따라 호불호가 나뉘기도 하고, 어차피 같은 이구아수라 생각하고 한쪽만 가는 여행자도 있다. 하지만 둘다 굉장한 풍광과 잊기 힘든 강렬한 인상을 주기 때문에 시간이 된다면 반드시 둘다 가보는게 좋을 것 같다.



온 세상이 거대한 물소리로 가득하다.


안쪽으로 다가갈수록 떨어진 물줄기가 만들어내는 물보라가 폭포보다 더 높게 치솟고 있어서 정작 폭포는 희미하게만 보였다.


저 앞이 브라질쪽 이구아수의 클라이막스다.




사방이 물줄기가 떨어지며 만들어내는 천둥같은 소리로 가득했다. 그리고, 폭포가 만들어내는 물보라 때문에 우비를 입지 않으면 금새 흠뻑 젖어버렸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부인이 이구아수 폭포를 직접 보고, '불쌍한 나이아가라'라고 했단다. 나이아가라에 가본 적이 없으니 비교할 수는 없지만 세계 3대 폭포 중에서 나이아가라와 빅토리아 폭포를 합치더라도 이구아수 폭포의 수량이나 더 크다고 한다. 이구아수 폭포를 보고 있으려니 자연의 경이로움과 거대함에 스스로 겸손해지는 마음이 들었다.









자연의 경이로움을 멍한 정신으로 바라보고 있으려니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여행중에 가보고 싶은 곳으로 손에 꼽았던 이구아수 폭포를 오늘 드디어 보았다. 폭포에서 한참 멀리 떨어져서야 겨우 물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지만 머릿속에서는 밤새 천둥같은 물소리가 계속 들리는 것 같았다.


'인간이 험하고 거대한 자연을 찾는 이유는 그것을 정복하거나 눈요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겸손해지기 위해서가 아닐까.' 남미를 여행했던 몇 달 동안 자연에 다가갈 때마다 매번 이런 생각이 들었다.

브라질의 버스는 내부구조가 무척 독특하다. 버스에 올라타면 우리나라 지하철 개찰구와 비슷하게 생긴 회전대가 있다. 기둥에 붙은 체크기에 카드를 대고 밀어서 입장하거나 카드가 없는 여행자들은  버스 안에 높은 자리에 앉아있는 차장에게 버스비를 지불하고 타야한다. 짐이 없을 때는 별 상관없지만 큰 배낭을 메고 있을 때는 배낭을 이 회전대 위로 들어올려야 하기 때문에 통과하기가 무척이나 힘들다.


여행 후에 1960~70년대 히우의 빈민가를 배경으로 갱들의 이야기를 그린 '시티 오브 갓'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그 영화에서 선량했으나 연인이 갱들에게 당하자 복수하기 위해 자신이 갱이 되어버린 인물이 버스안에서 돈을 받는 차장이었다. 신이 축복한 듯한 아름다운 풍광과 기후를 가진 도시지만 신이 버린 듯 암울하고 미래가 없는 빈민가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보고 나니 여행 당시의 히우가 생각나 마음이 우울해졌었다.


버스 내부에 있는 회전대. 버스비를 받는 차장도 찍고 싶었지만 '감히' 그러지 못했다.


유럽에서 남미 사이의 시차와 장거리 비행으로 인한 피로, 어제의 긴장감 등으로 아침이 한참 지나서야 숙소를 나올 수 있었다. 목적지는 당연히 코르코바두 산 정상의 거대 그리스도 상이다.


코르코바두산 정상으로 가는 트램을 타는 정류장


내가 히우에 도착했을 때는 8월말, 겨울의 끝이라 비수기였음에도 그리스도상을 보기위해 꽤 많은 관광객들이 트램을 기다리고 있었다.




산정상으로 가는 트램에서 마을이 보였다. 트램을 타지않고 걸어서 갈 수도 있다는데 이 지역은 우범지역이라 매우 위험하다고 하니 트램 이용료가 비싸다 생각되더라도 절대 걸어서 가려고 하면 안된다. 여행에서 최우선은 안전이다.


트램이 산정상으로 가는 중에 브라질 악단이 나와서 통로에서 공연을 한다. 신나는 브라질풍의 음악을 연주하고 노래를 부른다. 당연하게도 공연은 트램 이용료에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끝나고 공연료를 걷는다. 공연 중에 관광객을 불러내 춤을 추거나 노래를 시키기도 하는데 신이 나서 호응하게 되면 꼼짝없이 공연료를 지불해야 한다. 얼마되지 않는 돈인데 어떤가싶기도 하지만, 길거리 공연과 달리 내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방적인 공연으로 관람료를 요구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끝내 무시했다.


트램에서 내려 계단을 올라가면 그리스도상 뒤쪽으로 도착하게 된다. 시원하게 펼쳐진 대서양과 멀리 히우의 유명한 해변들이 보인다. 해변쪽으로는 높은 건물과 좋아보이는 리조트 풍의 건물도 있지만 산쪽으로는 빈민가로 보이는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히우 지 자네이루의 랜드마크인 이 그리스도상은 이 곳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 뉴스, 잡지 등등 수많은 매체를 통해 자주 알려졌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나도 히우에 간다면 꼭 보리라 여행전부터 계획했던 곳이었으나, 실제로 보니 별다른 감흥이 생기지 않았다.


높이가 40m인 이 그리스도상은 1930년대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물론 700m 높이의 산 정상에 이처럼 커다란 상을 만들기가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사실 당시에도 대단히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 거대한 그리스도상이 산정상에서 인간들을 내려다보며 사랑과 축복을 내리는 듯 두 팔을 벌리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음에도 아래에서는 극도의 빈부격차와 살인과 폭력, 온갖 욕망으로 들끓는 도시가 되어버린게 아이러니했다.




이 곳의 진정한 가치는 여기서 내려다보는 히우의 멋진 풍경이었다. 복잡한 해안선과 섬들이 펼쳐진 바다, 갑자기 우뚝 솟은 바위산들이 독특한 아름다움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세계 3대 미항이라는 나폴리, 시드니, 히우 지 자네이루뿐만 아니라 베네치아, 홍콩, 하코다테 등등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항구들을 모두 비교해보더라도 나에게는 여기서 본 히우의 풍경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멀리 '빵 지 아수까르'가 내려다 보인다.




그리스도상을 내려 온 다음에 찾은 곳은 이빠네마 해변이었다. 히우에는 '코파카바나'와 '이빠네마'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해변이 둘 있다. 그 중에 이빠네마를 찾은 이유는 '이빠네마의 여인'이라는 유명한 보사노바 곡 때문이다. 제목은 모르더라도 들어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들어 본 기억이 있을 정도로 유명한 곡이다.


일정을 늦게 시작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리스도상을 보는데 시간이 많이 걸린데다 이빠네마 해변이 생각보다 멀었기 때문에 해변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지고 있었다. 겨울의 끝자락이어서인지 해가 기울자 날씨가 꽤 차가워졌서, 해변에는 늘씬한 남미의 비키니 미녀는 커녕 사람도 별로 없었다. 하지만 선남선녀들로 들끓는 해변보다 해가 지는 한적한 해변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사실, 해변만으로 평가하자면 히우의 해변들은 그다지 좋지 않다. 파도도 세고, 모래도 곱고 부드럽지 않다. 유명한 휴양지의 해변과 비교하면 실망할지도 모른다. 이 곳의 해변들은 휴양이 아니라 놀고, 먹고, 즐기는 그런 해변으로 유명한 것이다. 이 해변이 내 마음에 든 것도 '이빠네마의 여인'이라는 음악과 계절탓으로 한적했던 해변, 해질녘의 고즈넉함 때문일 것이다.




히우에서 저녁 7시 넘어 돌아다니는 것은 위험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탓으로 금새 어두워진 거리에 마음이 급해졌다. 숙소로 돌아오다 비교적 안전하고 번화해 보이는 거리에서 저렴해 보이는 식당을 찾아 들어갔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싸지는 않지만 양은 엄청났다. 양도 많고 음식도 어울리지 않는 것같은 여러가지 음식들이 혼합되어 있었다. 맛있게 먹는데 부족함은 없지만 아직 적응이 되지는 않았다.

양념된 면에 프라이드 치킨, 감자 튀김, 야채이 올라가 있는 음식을 먹었는데, 저렴한 식당에서 파는 대부분의 음식이 커다란 접시에 면이나 찐 쌀을 담고, 그 위에 반찬이 되는 여러가지 음식들이 올려져 있다.


아마 남미에서의 첫 여행지가 이곳이 아니었다면 여기서 훨씬 오래 머물렀을 것이다. 그때는 분명 매력적으로 느끼면서도 위험에 대비해 날이 바짝 선 신경 때문에 오래 머무르질 못했다. 겨우 2박 3일 있었을 뿐이고, 그마저도 제대로 돌아다닌 것은 하루뿐이었다. 그 아쉬움 때문인지 아니면 위험한 것이 가지는 매력 때문인지 나는 다시 이곳에 가고 싶다.


아름다운 풍광과 좋은 기후, 친절한 사람들의 도시이면서도 세계에서 손꼽히는 위험한 도시, 신이 축복한 도시이면서 또한 신이 버린 도시... '시티 오브 갓'이라는 영화를 본 뒤로 이 도시를 생각하면 마음이 애튿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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