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그 좋았던 날씨가 바릴로체의 일반적인 3월 날씨인줄 알았는데, 다음날은 언제 날씨가 좋았냐는 듯이 하늘이 구름으로 뒤덮여있었다.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눈쌓인 봉우리인지 구별이 안될만큼 온 하늘이 흐렸고 바람도 세게 불었다. 어제는 운좋게 맑은 날씨에 나우엘 우아피 호수의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었던 것이지 파타고니아의 이른 봄 날씨는 여행자에게 그리 녹녹하지 않았다.
어쨌든 어제 계획했던대로 바릴로체의 여러 전망대 중 하나인 '세로 깜빠나리오'에 가보려고 했다. 시내에서 어제 보트를 탔던 선창장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중간쯤에 내리면 깜빠나리오 언덕으로 올라가는 리프트를 탈 수 있다. 세로(Cerro)는 스페인어로 봉우리나 언덕을 뜻하는 말인데 깜빠나리오는 봉우리 정도는 아니고 언덕쯤 되는 높이이다. 그리 높지 않아서 걸어서도 충분히 올라갈만 하지만 날씨도 좋지 않고 바람도 세게 불어서 그냥 리프트를 타기로 했다. 허술한 리프트가 센 바람에 흔들리니 뜻하지 않은 스릴까지 느끼게 되었다.
바릴로체는 앞뒤로 수많은 호수에 둘러쌓여 있는데 전망대 위에서 보니 그 모습이 확실하게 눈에 들어왔다. 지구상에 빙하가 가장 많이 남은 지역이라는 파타고니아는 혹독한 바람으로 유명하다. 최대 풍속이 60m/s가 넘는 바람도 드물지 않다고 하는데(위키 참조) 열대성 저기압이 17.2m/s 이상의 바람을 동반하면 태풍이라고 이름 붙인다니 이곳의 바람이 얼마나 센지 짐작할 수 있다. 이날 불었던 바람은 파타고니아의 바람치고는 그리 세다고 할 수는 없지만, 어린시절을 바람 많은 제주도에서 보냈던 나에게도 만만치않게 느껴졌다.(그리고, 파타고니아의 바람이 얼마나 센지는 그 뒤 토레스 델 파이네 트레킹 중에 뼈져리게 느꼈다.)
바람을 맞으며 전망대에 서있었더니 온몸이 꽁꽁 얼어버렸다. 다행히 전망대에 까페가 있어서 초콜릿 부스러기가 잔뜩 올라간 따뜻한 카푸치노를 마실 수 있었다.
아르헨티나 국기가 쉴새없이 나부꼈다. 제법 큰 국기인데도 한번도 깃대로 내려오지 못하고 계속 저 상태로 펄럭였다.
어제처럼 맑은 날씨였다면 전망대에서 보는 경치가 훨씬 훌륭했을 것이다. 호수는 파랗게 빛나고 흰눈이 쌓인 봉우리와 푸른 하늘이 대비되어 무척 아름다웠겠지만 그날 나에게는 이틀 연속 좋은 날씨를 맞는 행운은 없었다. 하지만, 구름이 잔뜩끼고 쉴새없이 바람이 분 그날의 날씨가 바릴로체의 일반적인 3월 날씨라면 그것도 나쁘지 않다. 운좋게 가끔 볼 수 있는 화장한 모습도 좋지만 그대로의 민낯을 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다.
다시 부실해보이는 리프트를 타고 내려왔다.
원래는 바릴로체의 또다른 전망대도 가볼 생각이었지만 언덕위에서 꽁꽁 얼어버린 몸으로 다시 바람 앞에 설 생각이 들지 않았다.
바릴로체에는 고작 사흘 머물렀지만 이 정도로 지나칠 곳은 아니었다. 언젠가 여름에 바릴로체를 다시 찾는다면 눈덮인 산의 모습을 볼 수는 없겠지만 빛나는 햇살아래 푸른 호숫물에 몸을 담궈보고 싶다. 그리고 지겨워질만큼 살아봐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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