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 700만 명이 넘는 호찌민은 베트남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우리가 흔히 알고있는 '사이공'이라는 이름의 도시가 호찌민이다. 공산화된 후, 베트남의 국부로 존경받는 호찌민의 이름을 따서 도시 이름을 바꿨다고 한다.


호찌민에서 두 번째 날은 통일궁이라는 이름의 인민위원회 청사에서부터 시작했다. 이 곳은 베트남 전쟁 당시에는 미국의 작전본부가 있던 곳이라고 한다. 호찌민이 사용하던 집무실이라던지 접견실 등이 남아 있어서 외국 관광객뿐만 아니라 베트남 사람들의 발길도 끊이지 않는다.


호찌민은 공산주의자였고, 내가 초등 교육을 받던 7,80년대에는 공산주의는 세상에서 사라져야하는 이데올로기로 교육하던 시대였기 때문에 호찌민은 수많은 민주주의자들을 탄압하고 베트남을 공산화한 악인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 사람은 공산주의자 이전에 민족주의자로써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이루어냈으며, 제네바 협정으로 둘로 갈라진 베트남의 진정한 독립을 위해 초강대국인 미국과의 전쟁을 불사한 베트남 독립의 영웅이다.


호찌민은 결국 독립을 보지 못하고 죽었지만 권력을 이용하여 어떤 부귀영화도 누리지 않았다고 하며, 검소하고 소박한 성품이었다고 한다. 통일궁에도 호찌민의 집무실과 그가 사용하던 집기들이 그의 소박한 단면을 보여준다.






한 국가 수장의 집무실이라기에 무척 소박하다. 헝겊이 터져나간 등받이 쿠션부분과 팔걸이가 눈에 띄었다. 이념과 사상을 넘어 베트남 사람들에게 존경 받는 이유를 알 수 있을 듯하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전쟁 박물관이다. 박물관 뜰에는 베트남 전쟁시 미군이 사용했던 비행기나 탱크 등이 전시되어 있고, 내부에는 베트남 전쟁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눈길을 끌었던 것은 종군기자들이 찍은 당시 사진들이었다. 전쟁 박물관은 지금까지 내가 베트남 전쟁을 미국의 시각으로, 미국을 도와 참전한 대한민국 국민의 시각으로 봐왔다면, 분열된 국가의 국민으로, 대다수 베트남 국민들의 시각으로 이 전쟁에 대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제대로 찍은 사진들이 없어서 아쉽다.






하루종일 무더위와 싸우며, 무거운 주제의 전시물들을 보며 지친 몸과 마음을 충전하기에 맛있는 음식보다 나은건 없다. 더구나 싸고 맛있는 베트남 음식은 여기저기 너무도 많다. 베트남에서 꼭 먹어봐야 할 음식이며, 가격도 꽤 비싼 축에 속하는 민물게 요리를 먹으러 가기로 했다.(정확한 가게명도 음식이름도 기억나지 않지만)




지도를 보고 한참을 걸어서 찾아간 식당. 이 부근에는 같은 메뉴의 식당들이 여럿 몰려 있다.



게살 볶음밥. 게맛살만 많고 게살은 장난처럼 섞여 있는 여느 게살 볶음밥과는 차원이 다르다. 밥알이 폴폴 날리며 불맛이 살아있는게 제대로된 볶음밥이다.



유명한 민물게 튀김이다. 껍질채 튀겼음에도 탈피중인 시기라 껍질이 무척 부드럽다. 말그대로 살살 녹는다.



먹음직하게 보이지만 이날 먹은 요리 중에는 집게발 요리가 가장 평범했다.




동남아시아는 길거리 음식이 매우 다양하고 맛도 뛰어나서 비싼 레스토랑이나 제대로된 식당을 찾아다닐 필요가 없다. 그리고 대부분의 현지인들은 길거리 식당이나 작은 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한다. 처음에는 꺼려지더라도 어느 새 매일 현지인들과 섞여있는 본인의 모습을 발견할 지도 모른다.


베트남은 위 사진처럼 낮은 테이블과 의자를 두고 길가나 조그만 공터에서 영업하는 곳들이 많다. 태국이나 캄보디아와는 또 다른 모습이다.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어둑해져가는 거리에 귀가를 서두르는 수많은 오토바이 행렬이 거리를 뒤덮고 있었다.

베트남은 불과 수십년 전에 있었던 인류사에 남을 참혹했던 전쟁의 아픔을 이겨낸 강인함을 가진, 다양한 모습과 문화가 공존하 활기차고 재미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보면 우리나라와 비슷한 점이 꽤 많다.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베트남 호찌민으로 가는 날 아침, 숙소 앞에는 결혼식이 벌어졌다. 숙소가 현지인들이 사는 아파트 앞에 위치하고 있어서 짧게나마 캄보디아 사람들의 결혼식을 구경할 수 있었다. 이 사람들은 캄보디아에서 경제적으로 넉넉한 편이었던지 아침 일찍부터 많은 하객들이 방문했으며, 요리사들은 계속해서 많은 음식들을 만들고 나르고 있었다. 





아침에 픽업하기로 한 버스회사는 감감 무소식이었고, 조바심이 나서 결국 택시를 잡아 타고 버스회사로 향했다. 하지만 버스를 타는 곳은 표를 발매한 버스회사와 다른 곳에 있었고 버스는 출발하는 시간이 다 되어 있었다. 이럴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은 버스회사에서 사과하고 승객이 도착할 때까지 버스 출발을 잠시 멈추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여기는 우리하고는 다른 사람들이 사는 캄보디아였다.


다시 택시를 타고 부랴부랴 버스 타는 곳에 가서 떠나려는 버스를 잡아타고 올랐다. 표에 쓰인 자리를 찾고보니 캄보디아 커플인지, 베트남 커플인지 떡하니 앉아있다. 여기는 내 자리니 비켜달라고 하니 아무 자리나 가서 앉으란다. 물론 말은 통하지 않았고 한 달간 조금 능숙해진 바디랭귀지를 통한 대화였다. 버스 회사에서 통하지 않던 상식이 버스안에서 통할리 만무하다. 인상을 한번 써주고는 바로 포기하고 아무 자리나 가서 앉았다.


버스타고 가는 내내 화가 나고 속이 상했다. 내 상식이 통하지 않는 이 나라에 실망하고, 버스를 뒤집어 엎더라도 그 커플과 싸우지 않는 나에게도 화가 났다. 한참을 그 상태로 가다가 천천히 마음이 가라앉으면서는 다른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도 얼마전까지만 해도 시외버스를 타면 대충 남는 자리에 앉는게 당연했다. 저 커플이 보기에는 고작 버스 좌석 가지고 이미 앉아있는 사람을 이리저리 옮기라는 내가 이해가 안될지도 모른다. 나만 가면 되는데 왜 세 사람이 불편하게 자리를 옮겨야 하나 싶을지도 모른다. 불친절했던 버스회사 직원은 버스 정류장을 미리 잘 알아놓고 올 것이지 왜 여기서 자기에게 따지는지 이해가 안되었을 수도 있다.


우리는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지식을 상식이라고 부른다. 보편적이라는 것은 모든 사람이 아니라 내 주위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이 사람들의 상식은 이들의 주위 사람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지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상식과 이 사람들이 알고 있는 상식은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을 버스 안에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겨우 깨닫는다. 그래도 앞에 앉은 커플에게 화가 완전히 풀리진 않았지만 적당히 마음이 누그러진다.


나는 이렇게 여행을 통해 학교에서 가르쳤지만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했던 또 하나를 배웠다.

[버스를 탄채 페리에 올라 메콩강(이었을까?)을 건넌다]


[미웠던 베트남(혹은 캄보디아) 커플]



우리는 지역적으로 가까이 있어서인지 캄보디아, 필리핀, 베트남 등등의 동남아 국가들의 이름에 친숙하다. 반면, 볼리비아, 온두라스, 베네수엘라 등의 남미 국가나 앙골라, 우간다 등의 아프리카 국가는 머나먼 나라로 생각한다. 우리는 동남아 국가에 가서 주로 리조트에서 쉬다오는 여행이나 여행사를 통한 투어를 하기 때문에 친숙하면서도 정작 그 나라에 대해서 정확히 알지 못한다. 나도 여행을 떠나기 전에 마찬가지로 생각했고, 동남아 여행이 좀 더 쉽지 않을까 싶어서 첫 여행지로 선택했다.


캄보디아나 라오스는 세계 최빈국 중에 하나다.(물론 경제적인 면으로) 처음에 봉고차 위에 짐들과 같이 타고 있는 사람들, 멈춰선 버스 밖에서 물건을 팔려는 상인들, 제대로 포장되지 않은 길 등등. 생각보다 더 빈곤한 삶을 살고 있었다. 나는 가까운 나라조차도 이렇게 모르고 있었다. 직접 보지 않으면 경험하지 않으면 모르는 것들이 참 많구나 싶었다.



버스는 점심때쯤 갑자기 도로 옆에 차를 세우고 사람들은 낡은 집 안으로 들어간다. 볼 일을 보고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서다. 약간 지저분해 보이지만 여러가지 것들이 들어간 국수와 야채를 싼 롤이 생각보다 입맛에 맞다. 피쉬소스인지 쿰쿰한 냄새가 나는 소스도 이제 없으면 아쉽게 느껴지는게 점차 동남아 여행에 익숙해지는구나 싶었다. 동남아 여행을 마치고는 이 동남아 음식들이 1년 내내 그리워질 줄은 이때는 잘 몰랐다.


[베트남쪽 국경 검문소]


태국에서 캄보디아로 넘어올때 캄보디아 검문소는 무척이나 낡고 초라했다. 이쪽은 상대적으로 검문소들이 국경까지 오면서 봤던 어떤 건물들보다도 무척이나 크고 깨끗하다. 프놈펜과 호치민이 거리상으로 가깝기도 하고, 캄보디아가 현재의 체재로 공산화되는데 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의 영향이 컸다더니 양국가간 왕래도 활발한 모양이다.



호치민에 도착하자마자 익숙한 풍경이 펼쳐진다. 때마침 퇴근 시간에 도착한 호치민은 수많은 오토바이들이 도로를 점령하고 있었다. 2005년 베이징에 갔을 때 자동차보다 많았던 오토바이들이 2010년에는 자동차들로 바뀌어 있던 것처럼 베트남을 상징하던 자전거(씨클로)가 오토바이로 바뀌었고, 또 몇 년 후에는 자동차들로 바뀔 것이다. 



호치민은 프놈펜과는 다른 활기차고 번잡한 분위기다. 도시의 규모도 훨씬 크고 자본주의도 먼저 도입해 도시 전체가 시끌벅적한 분위기다. 무엇이 낫다, 그르다 할 것은 아니고 다만 많이 달랐다.



베트남에 왔으니 베트남 쌀국수를 먹어봐야한지. 베트남 국수와 태국 국수는 육수도 좀 다르지만 면발이 무척 달랐다. 태국 국수가 좀 더 끈기가 있고 쫄깃한 면발이라면 베트남 국수는 뚝뚝 끊어지는 면발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태국 국수의 면발이 좋았지만 뜨끈한 국물을 들이키니 하루종일 버스에 시달린 피로가 좀 풀리는 듯했다.

프놈펜에서 처음 찾은 곳은 캄보디아 국립 박물관이었다. 박물관에는 캄보디아 전역에서 발견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당연히 힌두 문명의 유물과 불교 문명의 유물이 대부분이다.



박물관은 붉은 색으로 단장되어 있었다. 박물관 내부 유물은 사진을 못찍게 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내부에서 찍은 사진이 하나도 없다.



내부에서 찍은 사진이라고는 위의 박물관에 입장하기 전에 찍은 힌두의 신 가루다 조각상 밖에 없다. 반인반조(?)라고 해야하나? 가루다는 힌두 최고신 중의 하나인 비슈누가 타고 다니는, 인간의 몸을 한 거대한 새라고 하는데 다른 조각상이나 그림들은 위협적이고 무서운데 이 조각은 마치 피카츄에 나오는 캐릭터처럼 어린이들도 좋아할 모습을 하고 있다. 그동안 세계 곳곳에서 본 여러 미술품 가운데 가장 귀엽고 친근한 모습의 조각상이다.






프놈펜에 오는 대부분의 여행자들이 시 외곽에 있는 킬링필드에 방문하는데 나는 이상하게도 거기에 가고 싶지 않았다. 여행 초기라 여행에서 마주칠 무거움을 이겨낼 자신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TV에서 봐도 가슴 아프고 먹먹해지는 장소에 직접 가서 마주 볼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여행 한 달째... 여행이 길어지면 생활이 된다는걸 이제 겨우 알아가던 시점이었다. 짧은 여행이라면 여행지에서 느낀 아픔을 가슴에 담고 돌아가면 된다. 가족과 친구들에게 위로 받고 바쁜 일상을 살다보면 쉬이 잊혀질 수도 있다. 아직 초보였던 여행자는 그런 마음으로 여행을 해나갈 배짱이 없었다는 변명을 하고 싶다.


대신에 뚝뚝을 잡아 타고 간 곳이 프놈펜 시내에 있는 크메르 루즈가 지배하던 당시에 지식인들을 가두고 고문했던 곳이다. 사람이 사람을 얼마나 잔인하게 대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수많은 역사가 있었다. 이 곳도 그 역사중에 한 곳이다. 지금은 깔끔하게 정리되고 청소되어 관광객에게 보여지는 곳이지만 얼마나 많은 피가 흐르고 고통이 스며든 곳인지 둘러보고 상상하기도 쉽지 않았다.


[사람을 거꾸로 매달아 아래 있는 물항아리에 담구며 고문했던 기둥]


[목숨을 잃은 수많은 사람들의 사진. 청소년이나 갓 성인이 된 사람부터 노인까지 너무 많다]




한 사람 눕기도 힘든 넓이에 가두고 고문했던 장소들이 있다. 마치 지금의 화장실 칸처럼 보인다. 당시 사람들이 느꼈을 고통과 절망감을 나는 단 1%도 느끼지 못할텐데도 불구하고 마음이 한없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런 기분에도 배고픔을 느끼고 끼니를 찾는다. 이런 해산물이 잔뜩 든 쌀국수를 너무도 저렴한 가격에 먹을 수 있다는데 감탄하면서.


2박 3일의 짧은 프놈펜 방문에 스치듯 보고 지나칠뿐이라 내가 느낀 짧은 첫인상은 중요하지 않다. 다만, 이 사람들이 아픔을 극복하고 더 많은 웃음을 띈채 살아가길 바란다.

이틀간 짧은 앙코르 와트와 앙코르 톰 여행을 마치고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으로 향한다. 대개 시엠립에서 앙코르 유적지를 구경하고 동남아 최대의 호수인 똔레삽 호수 여행을 많이 하지만 현지 사람들의 고된 삶을 구경하고 다닌다는게 마음이 적지않게 무거웠기 때문에 바로 프놈펜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나중에 여행에 익숙해지고 다양한 곳을 여행하면서 어차피 여행자들이 다녀감으로써 이들의 삶에 도움이 된다면, 그리고 이들의 삶을 동정이나 연민으로 바라보지 않고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더라도 존중할 수 있다면 피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관광객용 투어 버스를 타고 스치듯이 이들의 삶을 구경하고, 이들의 음식을 비위생적이라 거부하고, 경제적으로 윤택하지 못한 이유가 이들의 게으름과 무지 때문이라 비하하는 여행자들은 없어지길 바란다.


사실 프놈펜은 베트남으로 가기 위해 들른 곳으로 무엇을 봐야겠다거나 하는 생각은 없었다. 프놈펜은 미국의 군사개입이 시작되고, 크메르 루즈의 공산화와 학살이 일어나기 전에는 '아시아의 진주', '동양의 파리'로 불리는 아름다운 곳이었다고 한다. 1975년 크메르 루즈군이 프놈펜을 함락하던 시점에 200만명이 넘었던 인구가 1979년 친 베트남파 온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함락될 때는 5000여명이었다고 한다.(위키피디아)


시엠립에서 프놈펜은 버스로 수시간을 이동해야 한다. 구글맵에서 두 도시의 거리는 396km라고 나오지만 고물버스와 열악한 도로 사정으로 아침 일찍 탄 버스는 저녁시간이 가까워질 무렵에야 프놈펜에 도착했다.


버스는 시엠립의 게스트하우스에서 예약했는데 게스트하우스에서 사진으로 보여준 버스와 내가 탄 버스는 완전히 상태가 다른 버스였다. 현지인들이 타는 버스들 중에서도 가격이 싸고 낡은 버스였는데 각종 짐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스쿠터까지 버스 위에 싣고 다녔다.


[겉모습은 무난해 보이는 버스들]




버스 내부 상태는 좀 심각하다. 찬바람이 나와야 할 송풍구는 구멍만 뚫려 예전에는 에어컨이었음을 알 수 있는 정도이고, 버스의 문이라는 문은 제대로 구실하는 것이 없어서 비포장 도로의 먼지가 버스 내부에 그대로 들어온다. 어느 정도냐면 버스 내부가 온통 뿌옇게 되어서 몇 자리 앞 사람의 뒤통수도 잘 안보인다.


몇 시간 지나고 휴게소에 잠깐 쉬면서 식사를 하거나 화장실에 다녀오게 되는데, 같은 버스를 탓던 서양 커플이 완전히 지친 얼굴로 '넌 이 버스 얼마주고 탓니?' 하고 묻는다. 내가 대답하자마자 지친 얼굴에 미소가 번지는데 이건 '다행이야. 우리보다 더 바가지를 쓴 녀석이 있어서...'라는 표정이다.


버스 요금이라고 해봐야 우리 나라 물가로 큰 돈이 아니다. 기분 나쁜건 바가지 쓴 몇 푼이 아니라 웃는 얼굴로 좋은 버스라고 몇 번이나 대답하던 게스트하우스의 그 녀석이다. 하지만 현지인들이 여행자를 속이겠다고 마음 먹는다면 여행자는 대부분 당할 수 밖에 없다. 안 속겠다고 다짐하고 몇 번을 확인하더라도 확률은 조금 줄어들지언정 어쩔 수 없는건 어쩔 수 없다. 이런 일은 일년간의 여행기간동안 잊을만하면 되풀이 되었다. 이런 일로 여행자들이 여행지의 매력을  빼앗기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큰 돈이나 안전을 위협할만한 일이나 여행에 지장을 줄 정도가 아니라면 '또 당했네. 젠장.' 정도로 넘기는게 속 편하다.


스위스에서 만 오천원의 돈으로 빅맥 세트를 먹을 때는 아깝다는 생각도 못하는데 동남아에서 그 돈으로 하루 숙박비와 세끼를 다 먹고 1,2천원 바가지 쓴다고 크게 손해보는건 아니지 않을까?


캄보디아의 색은 누런 황토색이다. 그때가 건기여서 더 그랬겠지만 메마른 논밭과 뿌연 먼지, 포장이 안된 도로, 강물까지... 열대의 녹색이 아니라 메마른 누런색이었다.





프놈펜의 숙소는 현지인들이 사는 지역안에 있었다. 근처에는 시장도 있어서 구경하기에도 좋았다. 다만, 비정상적으로 높은데다 흰색으로 칠해진 숙소의 천장은 프랑스 지배의 영향이겠지만 마치 수십년 전 크메르 루즈의 고문실 같은 음울한 분위기라 여행자의 피로를 풀어줄 따뜻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두워지면 가로등도 없고 집안의 불빛도 희미해서 거리가 온통 어둡고 적막했다. 프놈펜의 첫인상은 어두움이었고, 단지 저렴한 식사와 맥주 한잔이 위안거리였다.

이튿날 다시 뚝뚝을 타고 앙코르 톰으로 향했다. 앙코르 톰은 당시 세계 최고의 규모를 자랑하던 거대한 도시이므로 수많은 유적들 중에서 지도를 보고 미리 가고 싶은 곳을 알아두었다가 뚝뚝 기사에게 이야기를 하거나 기사가 이끄는대로 따라 가야 한다. 아는만큼 보이는 법이니 가이드 책자나 인터넷을 통해서 짧게나마 미리 공부해 둔다면 훨씬 흥미로운 투어가 될 수 있다.


앙코르 톰은 12세기 후반 자야바르만 7세에 의해 건설된 도시로 산크리스트어로 '앙코르'는 도시, '톰'은 크다라는 의미라고 한다. 이 도시는 단지 규모만 큰게 아니라 복원된 건물 하나하나가 매우 아름답다. 멀리서 웅장한 규모에 감탄하고 가까이서는 정교한 부조와 건축미에 감탄하게 된다. 너무나 방대한 규모에 둘러 볼 곳이 많기 때문에 하루에 모든 곳을 다 보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편안한 복장으로 꾸준히 수분도 섭취하고 쉬어가며 봐야할 곳이다.



이른 아침 숙소를 나서 뚝뚝을 타고 앙코르 톰에 도착하자 멀리 밀림사이로 유적이 보인다. 이른 아침임에도 찌는듯한 더위는 숙소의 에어콘이 나오는 온도에서 아직 적응하지 못한 카메라 렌즈에 뿌연 습기를 만들어 버렸다. 뿌옇게 찍힌 사진이 오히려 고대 유적의 신비로움과 당시 내 기분을 더 생생하게 느끼게 해주는 듯하다.


[복구가 진행중인 유적들]


드넓은 앙코르 톰의 유적들은 복구 중이거나 복구되지 않은 곳들이 많았다. 캄보디아의 경제 상황이 넉넉치 않기 때문에 대부분 유네스코나 서방국가들의 도움을 받아 복구하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확실하진 않지만 프랑스 같은 경우에는 복구에 많은 원조를 하면서 입장료라던지 유적으로부터 나오는 수익을 가져간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무척 섬세하고 아름다운 크메르인의 부조 솜씨를 보여주는 기둥]


[앙코르 톰 5개의 문 중에 한 곳]


[앙코르 톰의 유적중 유명한 곳 중의 하나인 바욘 사원]




[부서지거나 마모되어 희미해진 부조조차 놀랍도록 세밀하고 아름답다]



[바욘 사원의 인면상]


바욘사원은 사원 내부에 있는 수십, 수백개의 탑 사방에 새겨인 인면상이 특히 유명하다. 관세음보살의 형상이라고 하는데, 당시 사원 건축을 지시했던 크메르 왕 자야바르만 7세의 얼굴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사원의 큰 규모도 놀랍지만 수많은 인면상의 숲과 빈틈없이 새겨진 부조의 아름다움이 놀랍다.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미소띈 얼굴 모습을 새긴 것이라고 한다]


[바욘 사원의 뒤편에서 본 모습, 마치 돌산을 보는듯]






[앙코르 톰에서 또 다른 유명한 유적인 코끼리 테라스]



[앙코르 톰의 다섯 문 중에서 비교적 보존 상태가 양호했던...]


앙코르 톰으로 통하는 큰 문은 총 5개라고 하는데 그 문들은 모두 앙코르 톰을 둘러싸고 있는 넓은 해자를 건너게 되어 있고, 이 다리들은 나가와 나가를 잡고 돌리는 아수라 상이 조각되어 있다. 지금은 부서지고 낡은 이 다리와 문들이 당시에는 얼마나 아름답고 멋있었을지 상상하는건 어렵지 않았다.


[요니와 링가, 남과여, 음과양을 나타내는 힌두 문명의 상징물]


앙코르 톰을 보면서 힌두 문명에 대한 지식이 깊지 못한게 아쉬웠다. 깊지는 않았더라도 얕은 지식이나마 있었더라면 훨씬 많이 배우고 느낄 수 있었을 텐데... 여행은 항상 배움과 같이 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동남아 여행을 하면서 인도차이나 반도 전체에 불교 문명보다 힌두 문명이 훨씬 이전부터 뿌리내리고 있었고 힌두 문명이 불교 문명으로 대체되면서 혼합하고 발전했다는걸 처음 알았다.




[자연에 의해 파괴되는 유적을 보존하려고 나무를 괴사시킨듯 하다]





처음에는 지붕에 겨우 뿌리내렸을 약한 나무가 열대 자연의 도움으로 거대하게 자라서 결국 인간이 만든 구조물을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게 만든다. 마치 공룡이나 괴물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나무의 생명력이 놀랍다.




앙코르 톰의 유적들은 많은 영화들의 배경이 되었는데 특히 안젤리나 졸리가 주연한 '툼 레이더'의 장소로 유명하다. 그 영화의 배경이었던 '따 프롬'은 석양으로도 매우 유명한 곳이라 해질녘에는 많은 사람들이 석양을 보기 위해 유적에 올라 해가 지기를 기다린다. 나는 아직 다 보지못한 남은 유적을 보기 위해 석양을 포기했다. 그게 잘한 것이었는지는 어차피 알 수가 없다. 여행도, 인생도 어느 정도는 복불복일 수 밖에...


경제 상황이 좋지 않은 국가를 방문하면 관광지에서 흔히 만나게 되는 '원 달러 보이'들이 이 곳에도 많았다. '원 달러'를 외치며 좀 허술한 수공예품이나 악세서리를 파는 아이들이다. 이 아이들이 애처롭다고, 본인에게는 큰 돈이 아니라고 댓가없는 돈을 쥐어주는 것은 결코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행동이 아니다. 그런 상황에 익숙해지면 아이들은 나중에 물건을 주고 댓가를 받는게 아니라 구걸하는데 익숙해져버리기 때문이다. 실제 여행객, 관광객들은 많은 지역의 사람들을 안좋은 방법으로 물들여 버렸다. 이 아이들을 돕고 싶다면 아이들이 파는 물건을 사는게 좋다. 마음이 조금 아프다면 약간의 바가지는 기꺼이 써주면 된다.



석양은 사람의 마음을 슬프고 우울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대도시의 석양도 그랬지만 밀림의 석양은 그 정도가 더 심하다. 천년전 화려하게 꽃피운 문명과 어두웠던 근대사를 넘어 현재를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비되어 여기서는 더욱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캄보디아의 미래를 걱정하는 '뚝뚝 운전사'와 여행자에게 콜라를 팔면서도 자기의 미래를 우리나라의 청소년들보다 더 똑부러지게 설명하는 '데이빗'에게서 다른 모습의 캄보디아를 기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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