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타고니아의 수많은 트레킹 코스 중에서 칠레의 '토레스 델 파이네'와 버금가는 곳이 봉우리 '피츠로이'와 '세로 토레'다. 3박 4일 이상을 산장이나 텐트에서 자면서 트레킹해야 하는 '토레스 델 파이네'에 비해 '피츠로이'이와 '세로 토레'는 엘 찰텐(El Chalten)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머물며 당일 트레킹을 할 수 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피츠로이는 BBC가 선정한 세계 5대 미봉에 꼽히는 곳이자 1000m에 달하는 거대한 바위 봉우리로 전세계의 암벽 등반가들이 도전하는 유명한 곳이다. 바로 옆에 있는 세로 토레도 높이는 피츠로이보다 조금 낮지만(그래도 3128m) 스페인어로 탑 모양의 봉우리라고 할만큼 수직으로 뾰족하게 솟은 모양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르기 힘든 봉우리로 꼽힌다.(1974년에야 공식으로 등반을 인정받았다고 한다.)
이 두 봉우리를 오르는 것은 어차피 훈련받은 전문가들의 영역이지만 나같은 아마추어들도 몸을 조금 더 부지런히 움직이면 가까이에서 자연이 만든 절경을 볼 수 있기에 이른 새벽 엘 칼라파테에서 엘 찰텐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새벽에 출발한 버스는 한참을 달려 동이 튼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 휴게소에 멈췄다. 엘 칼라파테와 엘 찰텐도 가까워보이지만 버스로 4시간 정도 가야하는 거리다. 광활한 파타고니아에서 차로 몇 시간은 먼거리가 아니다.
휴게소 앞에 흐르던 작은 강. 아마도 겨우내 산에 쌓였던 눈이 녹아 흐르는 물일 것.
달리던 버스 창 밖으로 눈쌓인 봉우리들이 신기루처럼 나타났다. 지평선 부근에 아스라히 기묘하게 솟은 봉우리들이 나타나자 버스에 탄 승객들도 사진을 찍느라 바빠지기 시작했다.
빙하가 지나가며 깎아 놓은 곳은 호수가 되었고, 남은 곳은 거친 산맥이 되었다.
아스라히 보였던 봉우리들이 점점 더 거대한 모습을 갖춰가기 시작했다.
드디어, 쭉 뻗은 도로 한가운데 세로 또레와 피츠로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카메라 성능이 좋지 않아서인가, 초점이 맞지 않아서인가 지금 보니 멀리있는 산봉우리들이 그림처럼 보인다.
산에서 내려온 빙하가 보인다. 강물처럼 내려오는 모습을 보면 왜 빙'하'인지 알 수 있다.
달리는 버스앞 창문으로 보이는 피츠로이와 세로또레
과연, 피츠로이와 세로 또레가 왜 암벽 등반가들이 목표로 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눈조차 쌓일 수 없는 가파른 경사를 이루는 거대한 바위산들의 모습이 정말 장관이었다. 왼쪽 구름으로 살짝 가려진 세 개의 봉우리 중에서 가장 높은 앞쪽의 봉우리가 세로 또레, 오른쪽의 거대한 바위산이 피츠로이다.
엘 찰텐에 들어가기 전에 버스가 멈춘 곳은 여행자들에게 간단한 교육을 하는 곳이었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여행자들은 무조건 이 곳에서 교육을 받아야 한다. 이 곳에서는 레인저들이 이 지역에 사는 동식물에 대해, 지켜야 할 사항과 주의해야 할 것들에 대해 알려준다.
엘 찰텐에 들어가기 전, 교육 받는 곳에서...
드디어, 엘 찰텐에 도착했다. 도착 당일 바로 세로 또레 트레킹을 할 계획이라 서둘러 숙소에 짐을 두고 작은 배낭에 물과 간단한 음식만 넣고 출발했다. 등산용품을 파는 곳에서 등산용 스틱을 빌렸는데 점원이 일주일만에 날씨가 맑다고, 운이 무척 좋은거라고 하니 괜히 기분도 좋아졌다.
엘 찰텐에서는 이틀동안 날씨가 무척 좋아서 산들의 모습과 주위 전경을 머무르는 내내 볼 수 있었다. 이게 얼마나 운이 좋은 것인지 잘 몰랐었는데 내가 이곳을 다녀온지 2,3주 후에 다녀온 여행자의 블로그를 보니 완전히 잿빛 날씨에 눈까지 엄청 내려 있었다.(하지만, 토레스 델 파이네에서는 날씨 때문에 온갖 고생을 다해야 했다. 파타고니아의 날씨는 두번 연속 행운을 바라기 힘들다.)
세로 또레 트레킹을 시작하는 마을 뒤편 언덕에서
엘 찰텐은 피츠로이와 세로 또레에 오는 여행자나 산악인들을 대상으로 꾸려지는 작은 도시다. 방문했던 9월 중순은 본격적인 시즌이 시작되기 전이라 여행자들도 별로 없고, 숙소나 레스토랑들도 문을 닫은 곳이 많았다. 심지어는 수퍼마켓에 식료품이 거의 없었다.
몇 시간이나 걸었을까 세로 또레가 보이는 중간 전망대에 도착했다. 뾰족하게 솟은 봉우리 사이로 마치 눈사태라도 난 것처럼 거대한 빙하가 자리잡고 있었다. 엘 찰텐에 당일치기로 오는 여행자들은 이 전망대까지만 왔다가 다시 돌아가는 것 같았다. 파타고니아에 오는 여행자라면 대자연을 보고 느끼려는 사람들일테니 일정이 촉박하더라도 엘 찰텐에 이틀 정도 머무르면서 세로 또레와 피츠로이 트레킹을 하고 돌아가는게 후회없는 여행이 될 것이다.
전망대에서 본 세로 또레는 3000m가 조금 넘는 높이지만 봉우리 아래까지 만년설에 덮여 있었다. 여행 후에 본 기후와 관련된 다큐멘터리에서 북반구는 대륙이 많아서 연중 기온에 변화가 심하지만 남반구는 대부분이 바다이기 때문에 연중 기온 변화가 심하지 않다고 했다. 그래서, 적도를 중심으로 같은 위도상이라 하더라도 남쪽이 훨씬 춥다고 한다. 북반구에서는 해발 3000미터에 가까워야 생성 가능한 빙하가 파타고니아에서는 해발 1500미터에서 생성되고 해발 200미터까지도 빙하의 모습을 유지한 채 흘러내릴 수 있는 것이다.
봉우리 아래까지 내려온 빙하가 마치 산사태가 난 듯 하다.
세로 또레 트레킹 코스에는 인공적으로 세운 표지판이 거의 없다. 사람들이 걷으면서 생긴 파인 길이나 레인저들이 죽은 나무나 주위의 돌을 가져다 만든 간단한 표식이 전부지만 길을 잃을 염려는 없었다.
드디어 세로 또레 트레킹의 종점에 도착했다. 마지막 언덕을 넘으면 갑자기 호수가 나타나고 호수 너머에는 산에서 내려온 빙하가 보였다. 겨울에는 호수가 얼어있었던 듯, 주변으로는 아직 채 녹지못한 두터운 얼음들이 남아있었다. 아마추어가 가이드의 도움없이 올 수 있는 곳은 여기까지다. 아직은 찬 바람에 볼이 빨개졌지만 걷느라 몸은 후끈 달아올라 땀이 났다.
비록 세로 또레 봉우리에는 끝없이 구름이 생겨나서 완전한 모습을 보여주진 않았지만, 이 정도 모습을 보는 것도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산을 좋아하지 않았고 등산 경험도 별로 없지만 이렇게 거대한 산을 마주하고 서보니 바다를 볼 때하고는 다른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등반을 한 것도 아니고, 힘들게 오른 것도 아니지만 산에 가까이 온 것 만으로도 이렇게 좋을 수 있다는걸 처음 느꼈다.
돌아올 때는 해가 질 것 같아서 걸음을 빨리해야 했다. 산에 대한 경험은 적지만 산에서는 해가 빨리 진다는 것은 알고 있으니 자칫 위험한 일을 맞는 것보다는 아쉽더라도 서두르는 편이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었다. 아직은 꽤 해가 높이 있다고 생각하고 출발했지만 엘 찰텐에 도착했을 때는 거의 어두워있었다. 겨울을 완전히 벗어나지 않았는지 해가 무척 빨리 저물었다.
엘 찰텐에 무사히 도착했지만 저녁식사를 해야하기 때문에 일정은 끝나지 않았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수퍼마켓을 찾을 수 없었다. 하다못해 문을 연 레스토랑도 보이지 않았다. 현지인에게 물어물어 찾아간 수퍼마켓에는 식료품이 거의 없었다. 요리는 고사하고 허기를 채울 수 있는 몇 가지만을 사서 돌아와야했다. 내일은 피츠로이 트레킹을 해야하는 마당에 끼니를 거를 수는 없기 때문에 무엇이든 먹어둬야했다. 이른 봄에 엘 찰텐에 갈 때는 엘 칼라파테에서 식료품을 사서 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세로 또레 트레킹은 험하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왕복할 수 있다. 체력이 약해 걱정이 되는 사람은 조금 더 일찍 출발해서 천천히, 꾸준히 걸으면 어렵지 않게 다녀올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힘들게 걸어서 고작 멀리서 산을 바라보다 올 것이면 뭐하러 가냐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로 또레뿐만 아니라 피츠로이나 토레스 델 파이네에서 트레킹을 하고 나서 기억에 남은 것은 산봉우리의 모양이 아니라 그 곳을 걸으면서 발에 밟히는 얼음, 뺨에 느낀 바람과 콧속으로 들어오는 찬 공기까지 포함한 모든 것이다. 몇 달전 유럽에서 편하게 다녔던 알프스와 비교한다면, 시간을 들여서 직접 걸어야만 하는 안데스의 트레킹이 훨씬 기억에 남는다. 원래 트레킹이든, 캠핑이든 시간과 육체적인 노력을 들여 자연에 가까이 가는게 목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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