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타고니아의 수많은 트레킹 코스 중에서 칠레의 '토레스 델 파이네'와 버금가는 곳이 봉우리 '피츠로이'와 '세로 토레'다. 3박 4일 이상을 산장이나 텐트에서 자면서 트레킹해야 하는 '토레스 델 파이네'에 비해 '피츠로이'이와 '세로 토레'는 엘 찰텐(El Chalten)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머물며 당일 트레킹을 할 수 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피츠로이는 BBC가 선정한 세계 5대 미봉에 꼽히는 곳이자 1000m에 달하는 거대한 바위 봉우리로 전세계의 암벽 등반가들이 도전하는 유명한 곳이다. 바로 옆에 있는 세로 토레도 높이는 피츠로이보다 조금 낮지만(그래도 3128m) 스페인어로 탑 모양의 봉우리라고 할만큼 수직으로 뾰족하게 솟은 모양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르기 힘든 봉우리로 꼽힌다.(1974년에야 공식으로 등반을 인정받았다고 한다.)


이 두 봉우리를 오르는 것은 어차피 훈련받은 전문가들의 영역이지만 나같은 아마추어들도 몸을 조금 더 부지런히 움직이면 가까이에서 자연이 만든 절경을 볼 수 있기에 이른 새벽 엘 칼라파테에서 엘 찰텐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새벽에 출발한 버스는 한참을 달려 동이 튼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 휴게소에 멈췄다. 엘 칼라파테와 엘 찰텐도 가까워보이지만 버스로 4시간 정도 가야하는 거리다. 광활한 파타고니아에서 차로 몇 시간은 먼거리가 아니다.


휴게소 앞에 흐르던 작은 강. 아마도 겨우내 산에 쌓였던 눈이 녹아 흐르는 물일 것.


달리던 버스 창 밖으로 눈쌓인 봉우리들이 신기루처럼 나타났다. 지평선 부근에 아스라히 기묘하게 솟은 봉우리들이 나타나자 버스에 탄 승객들도 사진을 찍느라 바빠지기 시작했다.


빙하가 지나가며 깎아 놓은 곳은 호수가 되었고, 남은 곳은 거친 산맥이 되었다.


아스라히 보였던 봉우리들이 점점 더 거대한 모습을 갖춰가기 시작했다.


드디어, 쭉 뻗은 도로 한가운데 세로 또레와 피츠로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카메라 성능이 좋지 않아서인가, 초점이 맞지 않아서인가 지금 보니 멀리있는 산봉우리들이 그림처럼 보인다.


산에서 내려온 빙하가 보인다. 강물처럼 내려오는 모습을 보면 왜 빙'하'인지 알 수 있다.


달리는 버스앞 창문으로 보이는 피츠로이와 세로또레


과연, 피츠로이와 세로 또레가 왜 암벽 등반가들이 목표로 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눈조차 쌓일 수 없는 가파른 경사를 이루는 거대한 바위산들의 모습이 정말 장관이었다. 왼쪽 구름으로 살짝 가려진 세 개의 봉우리 중에서 가장 높은 앞쪽의 봉우리가 세로 또레, 오른쪽의 거대한 바위산이 피츠로이다.


엘 찰텐에 들어가기 전에 버스가 멈춘 곳은 여행자들에게 간단한 교육을 하는 곳이었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여행자들은 무조건 이 곳에서 교육을 받아야 한다. 이 곳에서는 레인저들이 이 지역에 사는 동식물에 대해, 지켜야 할 사항과 주의해야 할 것들에 대해 알려준다.

엘 찰텐에 들어가기 전, 교육 받는 곳에서...


드디어, 엘 찰텐에 도착했다. 도착 당일 바로 세로 또레 트레킹을 할 계획이라 서둘러 숙소에 짐을 두고 작은 배낭에 물과 간단한 음식만 넣고 출발했다. 등산용품을 파는 곳에서 등산용 스틱을 빌렸는데 점원이 일주일만에 날씨가 맑다고, 운이 무척 좋은거라고 하니 괜히 기분도 좋아졌다.


엘 찰텐에서는 이틀동안 날씨가 무척 좋아서 산들의 모습과 주위 전경을 머무르는 내내 볼 수 있었다. 이게 얼마나 운이 좋은 것인지 잘 몰랐었는데 내가 이곳을 다녀온지 2,3주 후에 다녀온 여행자의 블로그를 보니 완전히 잿빛 날씨에 눈까지 엄청 내려 있었다.(하지만, 토레스 델 파이네에서는 날씨 때문에 온갖 고생을 다해야 했다. 파타고니아의 날씨는 두번 연속 행운을 바라기 힘들다.)

세로 또레 트레킹을 시작하는 마을 뒤편 언덕에서



엘 찰텐은 피츠로이와 세로 또레에 오는 여행자나 산악인들을 대상으로 꾸려지는 작은 도시다. 방문했던 9월 중순은 본격적인 시즌이 시작되기 전이라 여행자들도 별로 없고, 숙소나 레스토랑들도 문을 닫은 곳이 많았다. 심지어는 수퍼마켓에 식료품이 거의 없었다.



몇 시간이나 걸었을까 세로 또레가 보이는 중간 전망대에 도착했다. 뾰족하게 솟은 봉우리 사이로 마치 눈사태라도 난 것처럼 거대한 빙하가 자리잡고 있었다. 엘 찰텐에 당일치기로 오는 여행자들은 이 전망대까지만 왔다가 다시 돌아가는 것 같았다. 파타고니아에 오는 여행자라면 대자연을 보고 느끼려는 사람들일테니 일정이 촉박하더라도 엘 찰텐에 이틀 정도 머무르면서 세로 또레와 피츠로이 트레킹을 하고 돌아가는게 후회없는 여행이 될 것이다.


전망대에서 본 세로 또레는 3000m가 조금 넘는 높이지만 봉우리 아래까지 만년설에 덮여 있었다. 여행 후에 본 기후와 관련된 다큐멘터리에서 북반구는 대륙이 많아서 연중 기온에 변화가 심하지만 남반구는 대부분이 바다이기 때문에 연중 기온 변화가 심하지 않다고 했다. 그래서, 적도를 중심으로 같은 위도상이라 하더라도 남쪽이 훨씬 춥다고 한다. 북반구에서는 해발 3000미터에 가까워야 생성 가능한 빙하가 파타고니아에서는 해발 1500미터에서 생성되고 해발 200미터까지도 빙하의 모습을 유지한 채 흘러내릴 수 있는 것이다.



봉우리 아래까지 내려온 빙하가 마치 산사태가 난 듯 하다.



세로 또레 트레킹 코스에는 인공적으로 세운 표지판이 거의 없다. 사람들이 걷으면서 생긴 파인 길이나 레인저들이 죽은 나무나 주위의 돌을 가져다 만든 간단한 표식이 전부지만 길을 잃을 염려는 없었다.



드디어 세로 또레 트레킹의 종점에 도착했다. 마지막 언덕을 넘으면 갑자기 호수가 나타나고 호수 너머에는 산에서 내려온 빙하가 보였다. 겨울에는 호수가 얼어있었던 듯, 주변으로는 아직 채 녹지못한 두터운 얼음들이 남아있었다. 아마추어가 가이드의 도움없이 올 수 있는 곳은 여기까지다. 아직은 찬 바람에 볼이 빨개졌지만 걷느라 몸은 후끈 달아올라 땀이 났다.


비록 세로 또레 봉우리에는 끝없이 구름이 생겨나서 완전한 모습을 보여주진 않았지만, 이 정도 모습을 보는 것도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산을 좋아하지 않았고 등산 경험도 별로 없지만 이렇게 거대한 산을 마주하고 서보니 바다를 볼 때하고는 다른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등반을 한 것도 아니고, 힘들게 오른 것도 아니지만 산에 가까이 온 것 만으로도 이렇게 좋을 수 있다는걸 처음 느꼈다.





돌아올 때는 해가 질 것 같아서 걸음을 빨리해야 했다. 산에 대한 경험은 적지만 산에서는 해가 빨리 진다는 것은 알고 있으니 자칫 위험한 일을 맞는 것보다는 아쉽더라도 서두르는 편이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었다. 아직은 꽤 해가 높이 있다고 생각하고 출발했지만 엘 찰텐에 도착했을 때는 거의 어두워있었다. 겨울을 완전히 벗어나지 않았는지 해가 무척 빨리 저물었다.



엘 찰텐에 무사히 도착했지만 저녁식사를 해야하기 때문에 일정은 끝나지 않았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수퍼마켓을 찾을 수 없었다. 하다못해 문을 연 레스토랑도 보이지 않았다. 현지인에게 물어물어 찾아간 수퍼마켓에는 식료품이 거의 없었다. 요리는 고사하고 허기를 채울 수 있는 몇 가지만을 사서 돌아와야했다. 내일은 피츠로이 트레킹을 해야하는 마당에 끼니를 거를 수는 없기 때문에 무엇이든 먹어둬야했다. 이른 봄에 엘 찰텐에 갈 때는 엘 칼라파테에서 식료품을 사서 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세로 또레 트레킹은 험하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왕복할 수 있다. 체력이 약해 걱정이 되는 사람은 조금 더 일찍 출발해서 천천히, 꾸준히 걸으면 어렵지 않게 다녀올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힘들게 걸어서 고작 멀리서 산을 바라보다 올 것이면 뭐하러 가냐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로 또레뿐만 아니라 피츠로이나 토레스 델 파이네에서 트레킹을 하고 나서 기억에 남은 것은 산봉우리의 모양이 아니라 그 곳을 걸으면서 발에 밟히는 얼음, 뺨에 느낀 바람과 콧속으로 들어오는 찬 공기까지 포함한 모든 것이다. 몇 달전 유럽에서 편하게 다녔던 알프스와 비교한다면, 시간을 들여서 직접 걸어야만 하는 안데스의 트레킹이 훨씬 기억에 남는다. 원래 트레킹이든, 캠핑이든 시간과 육체적인 노력을 들여 자연에 가까이 가는게 목적이기 때문이다.

이튿날, 남극과 그린란드에 있는 빙하들을 제외하고 가장 큰 빙하라는 모레노 빙하 투어에 나섰다.  모레노 빙하 투어는 크게 전망대와 유람선에서 빙하를 관람하는 투어와 직접 빙하 위를 트레킹하는 투어 두 가지가 있다. 빙하 트레킹은 TV 여행 프로그램에도 여러번 소개되었고, 제법 구미가 당겼지만 가격이 너무 비쌌다. 이럴 경우에는 내가 이것을 얼마나 원하는가를 잠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러면 대부분의 적당한 욕구는 억제된다.


1년동안 여행을 다녔다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고 싶은대로 다 하면서 마음 내키는대로 다녔을거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일상 생활보다 훨씬 다양하고 많은 선택을 해야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데 욕구나 욕심을 적절히 제어하지 못한다면 계획보다 훨씬 일찍 돌아와야 한다.

이 날, 아쉽게도 하늘이 흐렸다. 햇살 아래서라면 어쩌면 파랗게 보였을지도 모르는 호수도 하늘과 마찬가지로 칙칙한 색을 띄고 있었다. 


모레노 빙하는 대부분 엘 칼라파테에서 출발하는게 가장 가깝지만 그래도 2시간 정도 버스를 타고 가야한다. 예전에는 렌트카를 이용해서 공원 매표소가 열리기 전에 입장하는 방법으로 입장료를 절약하는 여행자들도 많았던 것 같은데, 그런 사람들이 많아져서인지 내가 갔을 당시에는 입구에서 승용차나 렌트카의 입장을 막는 것 같았다. 현지의 헛점을 이용해 표를 사지 않는 것은 여행 경비를 절약하는 방법으로 가장 나쁜 방법이다. 보는 것에 대해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 공정여행의 출발점이라는 생각이다.


드디어 모레노 빙하가 보이기 시작했다. 너무 멀어서 아직은 그다지 커 보이지 않는다.


비가 내리다 멈췄는지 무지개까지 떴다. 이 날 하루종일 비가 내리다 그치다를 반복했다.


버스는 언덕 꼭대기에서 멈췄고, 비가 추적추척 내리는터라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기념품을 파는 건물로 들어갔다. 기념품에 관심이 없으니 비를 맞으며 모레노 빙하가 있는 방향으로 걸었다. 건물 반대방향까지 걸어가서 아래를 내려다보자 저절로 나지막한 탄성이 나왔다.


거대한 빙하가 구름이 껴서 보이지 않는 지평선 너머까지 펼쳐져 있었다. 얼마나 큰지 말로는 실감할 수 없었는데 직접 보니 실로 어마어마했다.(위키에서 찾아보니 모레노 빙하의 넓이가 부에노스 아이레스 시와 비슷하다고 한다.) 여행을 다니면서 여러 곳에서 많은 것들을 봤지만 절로 감탄사가 나오게 되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이구아수 폭포에 이어 다시금 자연의 경이로움을 느끼고 겸손해지는 순간이었다.








빙하에 가까이 가기위해 뛰다시피 내려가며 사진을 찍었다. 투어 가이드가 돌아오라는 시간 때문에 바쁘게 보고는 다시 언덕을 뛰어 올라가야했다. 


버스는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 보트 선착장에 도착했다. 여기서 보트를 타고 빙하에 접근하는 것이다. 접근이라고 해봐야 상당히 멀리서 보는 것이지만 전망대에서 볼 수 없는 빙하의 전체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빙하가 언제 부서져내릴지 모르기 때문에 배로 접근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폭이 5km에 달하는 빙하는 육지 전망대를 중심으로 좌우로 나뉘어져 있는데 내가 탄 보트로는 좌측에 있는 빙하로 접근했다.





옛날 빙하가 할퀴고 지나간 자욱이 거대한 바위에 그대로 남아있다.


높이가 60m에 달하는 빙하에 다가가니 그제야 크기가 가늠이 되었다. 앞에 있는 다른 배가 조그맣게 보였다. 가까이서 떨어지는 빙하라도 맞게되면 침몰이 아니라 손쉽게 두동강이 날것 같았다. 


이쯤되니 보트위에서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한 자리 싸움이 치열해졌다. 도저히 해치고 나갈 수 없어서 손을 치켜올리고 대충 찍고는 좋은 사진이 나오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햇빛에 따라 푸른색이 오묘하게 바뀌었다. 언덕 위에서는 궃던 날씨가 보트 위에서는 제법 맑아져서 다행이었다.



하늘이 가장 맑았던 순간에 찍은 사진이었는데 하필 앞사람의 뒷통수가 찍혔다.



이 날의 가장 극적인 순간이 갑자기 다가왔다. 보트에서 사진을 찍고 구경하는 와중에 천둥 소리를 내며 빙하가 무너져내렸다. 보트에서 가까운 쪽이 아니라서 정신없이 사진기를 돌렸지만 무너져내린 빙하가 일으킨 물보라만 간신히 찍혔다.


빙하가 무너질때 천둥소리가 난다는, 모레노 빙하를 다녀온 여행 블로그를 보면서 설마 천둥소리까지야 했었는데 정말로 그에 못지않은 큰 소리가 났다.


짧은 보트 투어를 마치고 다시 전망대로 돌아갔다. 이번엔 전망대에서 빙하를 볼 수 있는 넉넉한 시간이 주어졌다.

전망대로 돌아가는 버스안에서 점점 날씨가 맑아지리라 기대를 가지고 있었지만...



보트에서 봤던 빙하가 무너져내린 자리. 몇 년 전에는 전망대와 빙하가 붙어 있었는데 무너져내렸다고 한다. 기념품점에서는 이때 찍힌 사진을 엽서로 팔고 있었는데 오늘 무너진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컸다. 지구 온난화 때문인지 그 이후로는 빙하가 내려와 전망대와 붙는 경우는 없었던 것 같다.

무너진 빙하의 잔재들이 가득하다.


아쉽게도 보트에서 좋았던 날씨는 오래가지 않았다. 전망대로 돌아왔을 때는 다시 흐리고 간혹 빗방울도 떨어지고 있었다. 파타고니아의 날씨는 정말로 종잡을 수가 없었다. 


가만히 귀기울이고 있으면 간혹 '쩌쩍', '쩌정'하는 빙하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린다. 높은 곳에서 만년설이 쌓여 만들어진 빙하가 낮은 곳으로 천천히 밀려내려와 결국 갈라지고, 갈라짐의 한계를 넘어서면 무너져서 다시 물로 돌아가는 것이다.


한동안 빙하가 갈라지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자연이 만들어낸 경이로운 모습을 바라보다보니 어느새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돌아가는 버스 창밖으로 모레노 빙하를 바라보며 언젠가 머지않은 때에 다시 한번 마주할 수 있기를 바랬다.










돌아가는 길에 다시 하늘이 맑아졌다. 이번에는 나에게 맑은 날에 모레노 빙하를 볼 수 있는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지만 돌아가는 길에 멋진 파타고니아의 평원을 보여주었다. 평생 남을 멋진 기억을 간직하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잠이 들었다.


계절이 너무 이른탓에 목적했던 토레스 델 파이네 트레킹을 미뤄야했다. 일단, 모레노 빙하와 피츠로이부터 다니고1주일쯤 지나서 다시 푸에르토 나탈레스로 돌아오기로 했다. 모레노 빙하를 보기 위해서아르헨티나 엘 칼라파테로 가야하기 때문에 이른 아침 버스에 올랐다.

작고 조용한 푸에르토 나탈레스 중심가의 새벽


버스가 출발한지 얼마되지 않아 해가 뜨려는지 한쪽 하늘이 붉게 변하기 시작했다. 눈이 쌓인 산봉우리와 잔잔한 바다까지 붉은 빛이 비쳐서 주변이 황금빛으로 빛났고, 버스에 탄 배낭여행자들은 서둘러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좋지않은 카메라로 흔들리는 버스안에서 찍은 사진이라 썩 좋진 않지만 당시의 느낌을 생생하게 되살리기에는 충분하다.


곧이어 버스는 아르헨티나를 향해 거친 들판을  내달렸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소나 양을 키우는 목장인듯 엉성하나마 철책이 들판을 가로지르고 있었지만, 아직 겨울이 완전히 끝나지 않았기 때문인지 들판은 텅비어있었다.








한참을 달리다 들판한가운데 덩그러니 서있는 건물 앞에 버스가 섰다. 국경임을 알리는 철책이나 지키는 군인은 없지만 이곳은 엄연히 아르헨티나와 칠레를 구분하는 국경이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아르헨티나의 여자 대통


출입국 관리소 주변 풍경



체제와 이념이 다른 국가로 분단되어 있는 우리의 현실에서는 철책도, 군인도 없는 국경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꽤 많은 국가의 국경은 이처럼 삼엄함과는 거리가 멀다.


드디어 멀리 눈쌓인 산봉우리들과 커다란 호수가 보이기 시작했다. 엘 칼라파테는 아르헨티노 호수와 접하고 있는 도시라 바릴로체처럼 아름답울 것이라는 기대가 커졌다.



엘 칼라파테에서 예약한 호스텔에 짐을 풀고 한국과 일본 배낭여행자에게 유명한 후지식당을 찾아갔다. 이 식당은 한국인 아주머니와 일본인 아저씨 부부가 운영하는 곳으로 남미에서 맛보기 힘든 초밥류를 먹을 수 있기 때문에 인기가 높았다. 결과적으로 맛은 나쁘지 않았지만 배낭여행자에게는 부담되는 가격이었고 양도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냥 여행중에 맛보기 힘든 별식을 먹은 것으로 위안해야 했다. 


이 곳은 송어낚시를 주선해주는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 하루에 가격이 10만원으로 꽤 비쌌다. 사실 이곳에 오기전에는 꼭 해보고 싶은 일이었지만 가격때문에 고심하다가 그만뒀다. 나중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엘 칼라파테에서 송어낚시를 하기 위해서는 라이센스가 있어야하고, 라이센스 발급을 받기 위해서는 현지 업체를 통해야 한다. 이곳은 라이센스가 없는듯하며, 송어낚시를 한 사람들의 블로그를 봐도 제대로 잡았다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당시에는 많이 아쉬웠지만 안하길 잘한 것 같다.


(벌써 2년도 더 지난 일이므로 지금은 라이센스가 있을 수도 있고, 송어가 잘 잡히지 않은 것도 계절적인 영향일 수도 있기 때문에 관심있는 분들은 이 글만 보고 판단하지 않으셨으면...)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사진의 2인분 초밥 가격이 4만원 정도였던 것 같다.



배를 채우고 엘 칼라파테에 접한 호수 구경에 나섰다. 그런데, 겨울이라 수량이 줄었는지 호숫물은 너무 멀리 있었고, 가까이에는 물이 빠져 질척한 뻘이 대부분이어서 아쉬웠다. 전망을 보려고 마을 언덕에 올랐지만 그다지 멋진 전경을 볼 수 없었다. 이곳이 모레노 빙하를 보기 위해 들르거나 송어낚시를 하는 것을 제외하고 바릴로체처럼 유명한 관광지가 되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나보다.



다음날 갔던 모레노 빙하는 정말 대단했고 잊기 힘든 자연의 절경을 보여주는 곳이었지만 엘 칼라파테에 대해서는 별다른 인상을 받지 못했다. 모레노 빙하는 다시 가보고 싶지만 엘 칼라파테는 글쎄...


이튿날 오전 푸에르토 몬트에서 푼타 아레나스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푸에르토 몬트는 칠레의 로스라고스의 주도이며 인구도 20만명이 넘는 큰 도시이기 때문에 크진 않지만 현대식의 훌륭한 공항이 있었다.


이날 탓던 비행기는 남미의 저가항공사인 SKY항공이었는데 기상이 나빠서인지 연착되었다. 남미의 항공사 중에서는 LAN항공이 가장 크고 유명하지만 거의 독점이다시피해서 가격이 무척 비쌌다. SKY항공도 유럽의 저가항공사에 비해서는 매우 비싼편이다. 남미에서는 왠만한 장거리 이동이 아니라면 버스를 타는 편이 나을 수 있다. 


푸에르토 몬트에서 푼타 아레나스까지 비행시간이 세시간 정도였는데, 구글맵의 길찾기로 검색해보니 칠레에서 아르헨티나를 경우해서 다시 칠레로 들어가는 방법으로 33시간, 2600km가 나왔다. 버스로 이동한다면 실제로는 훨씬 더 긴 시간이 걸릴 것이다.


아담하고 깔끔하게 지어진 공항. 남미 색채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 비행기는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를 출발해 푸에르토 몬트에서 잠시 정착했다가 

푼타 아레나스까지 간다.


푼타 아레나스는 칠레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도시이며, 아르헨티나의 우수아이아에 이어 두번째로 세계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도시이다. 어느 도시가 세계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도시냐를 두고 두 나라가 신경전을 벌였다고 하는데 칠레에서는 우수아이아가 작아서 도시라고 할 수 없다는 주장을 했지만 우수아이아의 인구가 5만명을 넘김으로써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고 한다.(푼타 아레나스는 10만명이 훨씬 넘는 제법 큰 도시다.) 실제 푼타 아레나스는 남위 53도 10분, 우수아이아는 54도 48분으로 박빙이다.


푼타 아레나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택시에서 운전사가 도로 옆으로 펼쳐진 바다를 가리키며 '마젤란 해협'이라고 알려주었다. 스페인에서 출발한 마젤란이 대서양을 건너고 남미 해안선을 따라 내려오다가 대륙의 남쪽 끝 해협에서 폭풍우를 만났는데, 한척이 침몰하고 가까스로 고비를 넘겼다는 거친 바다가 이 곳 마젤란 해협이다. 이 곳을 지나서 나온 거대하지만 잔잔한 바다를 태평양이라 이름지었다는 일화가 있다.


지금 택시로 지나고 있는 이 곳이 이번 여행의 가장 남쪽이며, 한국에서 가장 먼 곳일거라는 생각에 잠겨 정작 사진 찍는 것은 잊어버렸다.(우수아이아가 지구상에 있는 가장 남쪽의 도시이긴하지만 그런 상징성을 제외하면 그다지 매력이 없었던 점, 물가가 매우 비싸다는 점 때문에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푼타 아레나스에서 버스를 타고 푸에르토 나탈레스에 가기 전에 칠레 페소로 환전을 하고, 이 먼 곳에서 신라면을 판다는 한국 식당을 찾아 푼타 아레나스의 거리를 헤매고 다녔다. 분명히 얼마전에 누군가 올린 여행기에서 따끈한 신라면 사진을 봤는데 가게를 좀처럼 찾을 수 없었다. 흐리고, 추운 이 곳에서 한국의 얼큰한 라면맛을 보려고 했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지만 대신에 엄청나게 큰 칠레의 샌드위치(우리나라에서는 햄버거라고 불릴 모양)로 든든하게 배를 채웠다.


아침부터 비행기와 버스에 녹초가 된 몸으로 도착한 푸에르토 나탈레스는 이미 어둠에 잠겨 있었고 차가운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저장해 놓은 구글맵의 이미지를 보고 어두운 길거리를 헤매가며 겨우 찾아들어간 숙소는 훈훈한 열기로 가득했고 매니저가 친절하게 맞아주었다. 여행중에 가격대비 훌륭했던 숙소중에 몇 곳을 꼽자면 반드시 넣고 싶은 숙소가 바로 이곳이었다.



숙소에서 키우던 개가 차우차우였다. 보라색 혓바닥을 보니 틀림이 없었다. 이렇게 먼 곳에서 중국 토종견이라는 차우차우를 보니 괜히 반가웠다. 풍성하고 빽빽한 목의 갈기와 곰처럼 생긴 커다란 머리가 무척이나 귀여웠다. 가까이서 스다듬어도 가만히 있다가 영 귀찮아지면  스윽 일어나 자리를 피할만큼 온순하고 착했다. 



파타고니아 여행에서 빠뜨릴 수 없는 유명한 곳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트레킹 코스인 '토레스 델 파이네'와 세계에서 가장 큰 빙하 '모레노', 그리고 유네스코가 선정한 세계 5대 미봉인 '피츠로이'가 있다. 


푸에르토 나탈레스에서 바로 갈 수 있는 곳은 토레스 델 파이네이므로 숙소 매니저에게 트레킹을 문의했다. 하지만 아직 산장이 오픈되려면 일주일정도 더 기다려야 한다는 답변을 받았다. 텐트를 빌려 캠핑을 해도 되지만 동계용 침낭과 오리털 패딩도 없이 캠핑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는 수 없이 산장이 열릴 때까지 모레노 빙하와 피츠로이에 먼저 다녀오기로 했다.


빙하가 떠 있어도 어색하지 않을 푸에르토 나탈레스의 바다






푸에르토 나탈레스의 조그만 시내와 항구를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봄은 오는지 나무에는 새잎이 돋기 시작했지만 날씨는 우리나라의 겨울날씨만큼 춥고 쌀쌀했다.


시내를 걷다가 찾아들어간 레스토랑. 우연히 메뉴 델 디아가 있다는 간판을 보고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을 때 생각이 나서 들어갔다.



따끈하고 보드라운 빵도 좋았지만 추운 겨울날씨에는 뜨끈한 수프가 최고였다. 고기 육수에 각종 야채가 들어간 스프는 우리나라의 갈비탕이나 곰탕과 비슷한 맛이어서 하얀 쌀밥을 말아 적당히 익은 김치와 뚝딱 먹고싶은 생각이었다.




식전빵과 스프, 메인요리에 디저트까지 그다지 비싸지 않은 가격에 맛 본 훌륭한 식사였다. 괜히 기분이 좋아져 레스토랑 이름(EL BOTE - 보트)도 멋져보였다.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았다면 유치한 이름이라고 투덜거렸을텐데.


마지막으로 앞으로 있을 거친 트레킹을 위해 트레킹화를 샀다. 그동안 신었던 신발은 회사를 그만두고 제주도 올레길과 한라산 등반을 위해 샀던 저렴한 트레킹화였다. 고급스런 고어텍스도 아니고 가죽이라 젖으면 잘 마르지도 않는, 장기여행에는 적합하지 않은 신발이었지만 1년동안 내 발을 감싸느라 엄청나게 고생했었다.


불과 1년만에 밑창이 닳아서 맨들맨들해졌지만 그냥 버리기가 아쉬웠다. 원래 물건에 애착을 갖지 않는 성격이지만 이 헌신발에는 무척 애착이 가서 이걸 남은 여행동안 들고다닐까 생각까지 했었다. 그러지는 못하고 쓰레기통에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 기념사진으로 마무리했다.


지금은 이때 샀던 트레킹화가 똑같이 낡아있다. 회사에서 나눠준 새 트레킹화를 집에 고이 모셔두고도 칠레에서 온 이 트레킹화와 정이 들어서 아직도 산에 갈때 신고 다닌다. 물건에 애정이 생기는 것은 비싸거나 새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했던 추억이 그 물건에서 고스란히 느껴지기 때문이다. 아직도 집 출입구 한쪽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신발을 볼 때마다 여행에서의 기억이 떠오른다. 이런 물건이 하나 둘 사라져가는 것이 안타깝다.



신발을 처음 샀을 때 찍어둔 사진이 스마트폰에 남아있다.

셀카 한장도 없는 스마트폰으로 신발은 왜 찍어뒀는지... 참 별일이다.




본격적인 파타고니아 여행을 위해서는 남미 대륙의 남쪽 끝에 있는 칠레의 푸에르토 나탈레스나 푼타 아레나스로 내려가야 했다. 하지만, 버스를 타고 가려면 꼬박 2박 3일이 걸리는데다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긴거리는 비행기, 짧은 거리는 버스를 이용할 계획을 세웠다. 아르헨티나인 바릴로체에서 일단 버스로 칠레 푸에르토 몬트로 가서 하루를 묵은 뒤, 비행기로 푼타 아레나스로 가고, 다시 거기서 푸에르토 나탈레스로 가기로 했다.


파타고니아는 특정 국가에 속한 지역이 아니기 때문에 이 지역을 여행하려면 칠레와 아르헨티나 국경을 빈번히 넘나들어야 한다. 세어보니 이번 여행 중 총 다섯번쯤 국경을 넘은 듯하다.


이른 아침, 푸에르토 몬트로 출발하는 버스를 기다렸다. 파타고니아의 바람이 어찌나 센지 이곳의 나무들은 주로 부는 바람의 방향에 따라 나뭇가지들이 한쪽 방향으로만 자란다.




바릴로체와 푸에르토 몬트를 넘어가는 길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칠레와 아르헨티나를 나누는 안데스 산맥을 넘는 길인데,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숙소 주인장도 추천했었고 여행책자에도 그렇게 나와있었다. 초반에는 황량한 황무지와 멀리 눈쌓인 안데스 산맥만 보였다.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잠시 잠이 들었다가 깨어보니 온 세상이 눈밭이었다. 한참 안데스의 고개를 넘느라 꽤 높은 고도로 올라온 듯하다.



남미의 장거리 버스들은 대부분 운전석과 승객석이 문으로 차단되어 있어 운전자가 문을 열어줘야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구조다. 버스를 운전하는 동안 운전자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것 같은데, 사고나 뜻밖의 사태에서 승객이 어떻게 밖으로 나갈 수 있는지 궁금해졌다.


창밖으로 눈쌓인 숲을 바라보다 다시 까무룩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에 깼을 때는 아름답다는 바릴로체와 푸에르토 몬트를 잇는 길은 끝나있었다. 내가 잠든 동안 아름다운 길을 지나왔을지도 모르지만, 이 길이 특별히 아름다운 이유는 잘 모르겠다. 아름다울 때는 봄이나 여름에 신록이 우거질때가 아닐까 싶었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는 국경을 맞대고 있지만 민족과 문화가 매우 다르듯이 아르헨티나와 칠레도 무척이나 다르다. 칠레는 아르헨티나보다 백인 비율이 낮고 인디오와 백인의 혼혈인 사람들의 비율이 높다.  (볼리비아와 페루로 가면서 인디오의 비율이 더욱 높아진다.) 해안선이 단순하고 대서양에 접한 아르헨티나의 주식은 육류인데 반해 해안선이 무척 복잡하고 섬이 많은 칠레는 해산물 요리도 다양하다. 음식의 다양성으로 따지면 칠레의 음식이 훨씬 흥미롭다.(하지만 칠레의 소고기와 와인은 아르헨티나의 소고기와 와인에 비해 몇 수 뒤진다.)


남미의 숙소에는 대부분 부엌을 포함하고 있어서 여행자들이 자유롭게 요리하고 끼니를 해결할 수 있다. 푸에르토 몬트의 숙소도 마찬가지여서 근처의 대형마트에서 재료를 사다가 요리를 만들었다. 칠레의 대형마트는 우리나라의 대형마트 못지않게 다양한 제품으로 가득한데, 특히나 저렴하고 신선한 해산물들과 훌륭하지만 또한 저렴한 빵과 케잌류가 눈길을 끌었다. 그리고, 칠레 내에서 생산되는 에일 맥주도 무척 다양했다.


이것은 파타고니아 여행을 끝내고 다시 푸에르토 몬트에 왔을 때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는데, 이 부근에 독일 이민자들이 터를 잡았기 때문에 이들이 독일에서 가져온 맥주 생산기술과 제과/제빵 기술이 전파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후에 쓰겠지만 푸에르토 몬트 근처의 푸에르토 바라스에서 먹은 케잌은 지금까지 우리나라 어디서 먹은 케잌보다 맛있었지만 가격은 절반 이하였다.)



마트에서 조개와 게를 사다가 가지고 있던 고추장으로 해물탕을 끓였다. 내일이면 다시 푸에르토 나탈레스로 떠나야하므로 다양한 재료를 넣을 순 없었지만, 아르헨티나에서 보기 힘들었던 해산물을 보니 너무나 반가운데다 고기류 음식에 질렸기 때문에 얼큰한 국물이 먹고 싶어서였다. 거기다가 여러가지 맥주까지 곁들이니 위에 낀 기름기가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았다.



파타고니아 여행을 마치면 다시 푸에르토 몬트로 와서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로 갈 예정이라 여기서는 단 하루를 머물렀을 뿐이다. 하지만, 저렴한 식재료와 훌륭한 숙소 시설 때문에 돌아갈 때는 여기서 며칠 더 머무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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