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몇 번의 여행을 다녀오고도 전혀 블로그에 글을 쓰지 않았다. 1년의 여행을 2,3년에 거쳐 정리하고 나서는 이상하리만치 흥이 나지 않았다. 밀린 사진을 보면서 언젠가 해야지 하면서도 좀처럼 의욕이 생기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다 1년이 넘은 지금, 하다보면 다시 생길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일단 시작하기로 했다.


작년 휴가 준비를 하면서 고민이었던 점은 가고 싶은 곳들이 너무 멀어서 적어도 2주는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사정상 그 정도 시간을 내기는 어려웠기에 그나마 가고 싶은 곳과 비슷한 장소로 찾은 곳이 쓰촨성의 주자이거우(구채구)와 황룽(황룡)이었다.


처음에는 너무나 유명한 관광지인 주자이거우가 전혀 끌리지 않았다. 이곳을 대상으로 하는 패키지 여행상품도 많았고, 사람이 바글거리는데다 인위적으로 닦여진 여행지를 싫어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주자이거우의 물빛과 이를 둘러싸고 있는 산들을 보고 한번 가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에서 주자이거우로 가려면 일단 중국내 큰 도시를 거쳐야한다. 주자이거우와 가장 가까운 대도시는 쓰촨의 성도인 청두라는 곳인데 거기에서 주자이거우까지 가는 것도 버스로 8시간이 넘는 거리였다. 일주일 휴가 중에 왕복 이틀을 버스 안에서 보내야 한다. 거기다 인천에서 청두까지 편도로 4시간 가량 걸리는 비행기 탑승시간까지 고려하면 삼사일은 오로지 가고오는데 들어갈 판이었다.


짧은 여행에서는 돈보다 시간이 높은 가치를 가진다. 버스를 타는 것도 재미있겠지만 왕복할 필요는 없으니 청두에서 주자이거우와 가까운 황룽공항까지 가는 편도 비행기만 타고 가기로 했다.


황룽공항에서 주자이거우로 가는 택시


인천에서 청두로 가는 비행기는 대부분 저녁시간에 출발했다. 목적지에 밤늦게 도착하는 일정을 좋아하진 않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처음 가는 곳에 밤늦게 도착하면 마음이 급해지고 서두르게 된다. 치안이 안좋은 곳이라면 위험한 일을 겪을 확률도 높아지고 어두컴컴한 분위기에 그 도시에 대한 인상도 따라서 안좋아진다. 청두에 밤늦게 도착해서 하룻밤을 보내고 이튿날 다시 공항으로 가서 

황룽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황룽공항에 내리니 풍경이 갑자기 완전히 달라졌다. 주자이거우에서 가장 가까운 공항이 황룽공항인데 이 공항은 해발 3,400미터가 넘는 곳에 위치해 있다. 가파른 산지라 공항을 세울만한 평지가 없는 탓인지 산을 깎아서 만든 듯하다. 안그래도 고도가 높은 이 곳에서도 공항은 훨씬 더 높은 곳에 있었다. 가장 가까운 공항이라고는 하지만 황룽공항에서 주자이거우까지도 택시를 타고 한시간 반(인지 두시간인지)을 가야한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안데스와 조금 비슷한 느낌이라 오히려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공항에서 한참 내려오니 얼마 안되지만 평지가 나타났다. 멀리 보이는 만년설에 덮힌 설산에 가슴이 뛴다.


주자이거우 풍경구 근처에 관광으로 개발된 작은 도시가 있다.
















 

윈난을 떠나기 전날은 숙소 주인장과 저녁식사겸 술자리를 했다. 매리설산 위뻥마을에서 세계여행 중이었던 일행과 중국 위안화와 한국 원화를 맞바꿨기 때문에 수중에 돈이 별로 없었지만, 약간의 남은 돈을 털어주고 부족한 건 주인장이 부담하기로 했다. 주인장은 외진 곳에서 사업을 하다보니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지 그날따라 꽤나 술을 마시고 싶었던 것 같다.


그날 나눴던 이야기 중에서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것은 이 곳을 찾는 한국인들, 특히 나이가 지긋하고 예전에 회사에서 괜찮은 직책에 올랐거나 주목 받는 임직원이었다는 사람들이 가진 선입견에 대한 것이다. 일생을 한 방향만 보고 달려 온 사람들은 자신이 해왔던 일에 대한 깊이는 있으되 그외의 것들에 대해서는 의외로 폭이 좁아서 자신이 아는 것 외의 다른 세상은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그 사람들이 보기에는 중국의 외딴 지방에서 숙소를 하고 있는 이 주인장의 일이 하찮게 보이는지 젊은 사람이 야망이 없다는 둥, 이런 일로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둥 별 도움도 안되는 이야기를 조언이라는 명목으로 꽤나 했던 것 같다. 샹그릴라의 숙박시설 중에서 트립어드바이저 상위권에 올라있는 번듯한 숙소와 꽤 커다란 식당을 가지고 있는 사업가인데도 이들에게는 번듯한 대기업 간판과 그럴듯한 직책이 없으면 모두 하찮게 보이나보다. 내가 보기에는 지금까지 이룬 성과나 앞으로 성공 가능성을 보면 숙소 주인장 쪽이 월등해 보임에도 말이다. (한국 사람들이 해외에서 운영하는 숙소중에서 외국여행자들에게도 잘 알려져있거나 트립어드바이저에서 추천하는 숙소는 무척 드물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면 자신에게 맞추려 하지말고 그냥 존중해주었으면, 자신의 시야로 사람들은 판단하려고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이 불문하고 '꼰대'라고 불리지 않으려면 말이다. 꼰대라고 불리지 않는 것, 이것은 나의 희망사항이기도 하다.


샹그릴라 공항 흡연실에 있던 点烟器, 꽤 참신한 아이디어 아닌가요?


이튿날 이른 아침, 숙소 승합차를 타고 샹그릴라 공항에 도착했다. 서울로 돌아가서 시작할 일이 잘 되면 몇 년내에 다시 찾겠다는 이야기를 하고 주인장과 헤어졌다. 그리고 샹그릴라에서 쿤밍으로, 쿤밍에서 서울로 하루종일 걸려서 저녁무렵 서울에 도착했다. 


윈난은 출장을 제외하고 처음 여행한 중국지역이었다. 회사를 그만두게 되면서 갑자기 생긴 3주간의 시간을 위해 급하게 결정한 여행지였지만 훌륭한 풍광과 음식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과 문화가 공존하는 멋진 여행지였다. (비록 여행하기 쉬운 곳은 아니지만...) 지금 내 업무용 노트북의 바탕화면에는 윈난에서 찍은 사진들이 번갈아가며 뜬다. 이 사진들을 볼때면 언젠가 매리설산을 지나 티벳으로 향하는 내 모습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위뻥마을 숙소에서 찍은 한밤중의 매리설산. 어설프지만 노출을 맞추느라 추위에 떨며 고생했다.

이 사진을 보고 있으면 어둠 저편에 있는 거대한 설산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이 얼굴에 와닿는 듯한 기분이 든다.


이렇게 작년 10월에 여행한 18박 19일의 윈난여행기를 마무리한다. 출근중 남는 시간에 짬짬이 하다보니 3주도 안되는 여행기를 정리하는데 석달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이제 아직 마무리하지 못한 세계여행 정리로 돌아간다. 모든 여행을 정리하고나서 더 이상 할 게 없으면 무척 허전할 것 같다.






내일은 18박 19일간의 윈난 여행을 마무리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이다. 무리하면 하루 정도는 메이리쉐산에서 더 보낼 수 있었음에도 샹그릴라로 돌아온 것은 여행 마지막날은 그동안의 여행을 정리하며 보내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메이리쉐산으로 떠나기 전에 가보지 못한 쑹짠린시(송찬림사松贊林寺)에 가보기 위해서였다. 느긋하게 일어나 아침식사를 하고, 숙소에서 알려준 곳에서 버스를 탓다.


샹그릴라에는 시내버스 노선이 몇 개 없으니 잘못 탈 염려는 없다. 우리나라 마을버스 크기의 버스가 다니는 노선이 몇 개 있다.


샹그릴라 시내에서 5킬로미터쯤 떨어진 쑹짠린시도 여느 다른 관광지와 마찬가지로 티켓을 사는 곳과 입장하는 곳이 나뉘어져 있다. 버스가 경찰의 검문소 비슷한 곳에 서더니 제복을 입은 사람이 버스에 탓다. 그리고는 현지인이 아닌 듯한 사람은 내리게 했다. 현지인들은 그 버스를 타고 그대로 들어가고 나머지 사람들은 검문소 옆에 있는 커다란 매표소에서 표를 사야했다. 샹그릴라에 사는 티베티안을 제외하고는 중국사람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매표소에서 표를 사고 뒷문으로 나가면 셔틀이 기다리고 있다. 이 셔틀을 타고 조금 더 들어가면 언덕에 황금빛으로 빛나는 쑹짠린시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곳은 한국사람들도 무척 많이 찾는 듯, 모든 안내표지판이 한국어로도 잘 번역되어 있었다. 따리의 어설프고 웃긴 번역하고는 달랐다. 표지판의 내용을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쑹짠린시는 1679년 청나라 강희 18년에 5세 달레이라마가 황제의 비준을 받아 짓기 시작하였으며, 1681년 준공되었다. 5세 달레이라마는 '갈단 송찬림'으로 이름을 지었고, 청나라 영정 황제는 '귀화사'라는 이름으로 지정하였다고 한다. 외관 구조가 티벳불교의 본산인 포탈라궁전과 비슷하여 '소 포탈라궁'이라 불리기도 한다. '길강', '자창', '주강' 3대 대전이 중앙에 자리잡고 있다.


5대 달라이라마가 머물렀으며 포탈라궁과 비슷해 더욱 유명한 쑹짠린시


버스에서 내린 여행자들에게 간단한 요깃거리를 파는 티벳여인들의 노점

 



솔직히 쑹짠린시에 오게 된 것은 포탈라궁과 비슷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여행매체나 여행자들의 블로그에서 세계의 명소를 볼 때마다 특히 기억에 남았던 곳들을 지난번 세계여행을 하며 제법 많이 가볼 수 있었다. 하지만 1년이라는 시간은 턱없이 부족해서 아직도 많은 곳들이 남아 있는데 그 중에 한 곳이 포탈라궁이다. 시간이 남아돌더라도 포탈라궁을 보기는 어려운데, 소수민족들의 독립운동이 외부로 알려지는게 싫은 중국정부가 외국인들의 티벳여행을 막고 있기 때문이다. 간혹 모험심 많은 여행자들이 몰래 숨어들어간다고 하는데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갈 수야 없다. 어쨌든 사진으로만 보고 그리던 포탈라궁을 간접체험이라도 해볼까하고 쑹짠린시에 가게 되었다.


쑹짠린시 앞에 있는 호수




티벳불교의 중요한 사원이니 화려할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그것을 뛰어넘어 휘황찬란했다.


아이고, 3000미터가 넘는 이곳에서 가파른 계단을 보니 벌써 숨이 차는 듯하다.




우리나라의 절도 건물이 여럿으로 나뉘어 있고 그마다 모시는 부처님이 다른 것처럼 티벳불교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티벳불교는 커녕 불교라는 종교 자체에 무지하다보니 내가 보고있는 불상이 어느 부처님을 모신 것인지도 몰랐다. 티벳불교 사원의 분위기를 느껴보려고 옷차림을 단정히 하고 조용한 발걸음으로 여기저기 둘러 볼 뿐이다. 종교적인 장소에서는 이유불문하고 경건한 마음가짐과 자세만 가진다면 어디든 박대당하지 않는다는게 내 생각이다. 


사원 내부는 사진을 찍을 수 없는데 사방이 막힌 내부는 어둡고 분위기가 무척 엄숙해서 찍을 생각도 들지 않았다. 불상을 중심으로 네 벽면에는 승려들이 앉는 방석이 깔려 있었다. 몇몇 승려들이 앉아서 열심히 불경을 외고 있는데 그 속도가 우리가 흔히 보던 스님이 불경을 외는 속도보다 무척이나 빨라서 조금은 낯설었다. 사원 한 곳에도 승려들이 앉는 방석이 그렇게 많았는데 사원 전체에는 얼마나 많은 승려들이 있을까 궁금해서 찾아보니 700명의 승려들이 이곳에 있다고 한다.





워낙 유명한 사원이고 알려진 곳이다보니 이곳의 승려들도 여행자들을 대하는데 스스럼이 없었다. 지나가는 관광객이 승려를 붙잡고 같이 사진 찍기를 부탁하면 흔쾌히 들어준다. 이 큰 규모의 사원이 이제는 신도들의 시주만으로 유지되지는 않을 것이다. 관광객들의 입장료와 기부가 큰 비중을 차지할테니 어느 정도 그에 대한 배려가 있을 수 밖에 없다.



부탁한 사람이 여성이라 수락했던건... 절대 아닐거다.



사원의 네 벽면은 창이 거의 없고 대부분 막혀있다. 창이 있는 곳은 햇볕이 들지않게 가림막이 쳐져있는데 가림막이 없는 곳은 창틀에 그을음이 묻은 것으로 봐서 주방 같은 곳일 듯하다. 혹독한 겨울 추위 때문에 벽에 창을 많이 내지않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그나마 있는 창문마다 가림막을 치는지는 잘 모르겠다.



사원들은 모두가 비슷비슷해서 금새 지루해졌다. 내부를 봐도 불상의 생김새만 조금 다르지 구조나 모양이 다 비슷하다. 사원 돌아다니기를 그만두고 쑹짠린시의 가장 높은 곳에서 경치를 보고 있으려니 근처 계단에서 두 스님이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한 스님은 십대 초반으로 보였고 다른 스님은 적어도 삼십대 후반은 되어 보였다. 이 두 사람은 승복을 입지 않았다면 부자지간으로 보일 정도였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알아들을 수 없지만 왠지 느낌이 어린 스님의 불만을 나이가 많은 스님이 들어주는 듯했다. 나이로 보면 어린 스님이 나이든 스님에게 매우 공손하고 깍듯해야 할 것 같은데 둘의 이야기는 스스럼이 없었다. 티벳불교의 승려들 사이에도 무척 엄한 서열이 있을테지만 그 서열이란게 나이와는 상관이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이차가 있다보니 큰 형과 막내동생 혹은 아버지와 아들처럼 보였다.


두 스님이 한참 이야기를 나누는데 좀 더 나이든 스님이 지나가다가 본인이 먹고 있던 튀김빵 같은 것을 내밀었다. 삼십대쯤 되어 보이는 스님은 받아들었지만 어린 스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이 든 스님이 빵을 우물거리며 걸어다니는 것도, 봉지에서 주섬주섬 꺼내 아래 스님들에게 건네는 것도 무척 낯설었다. 왠지 발우공양하는 시간에만 음식을 먹고, 항상 몸가짐이나 자세에 신경쓰는 줄 알았는데 서로 이야기하는 태도나 행동거지가 일반 사람들과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내가 이들에 대해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나보다. 이들의 생활은 무척 절제되고 엄격할거라 생각했었는데 항상 그런건 아닌가보다.


한 손에 먹던 빵을 든 나이든 스님, 삐딱한 자세로 서서 이야기하는 스님, 한걸음 떨어져 두 사람의 대화에 신경도 안쓰는 어린 스님...



두 스님은 어디론가 가고 어린 스님만 남았다. 어린 스님은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지 한참을 계단 난간에 기대어 시간을 보냈다. 아무리 종교에 평생을 바치겠다는 각오를 했더라도 어린 나이니 가족이 보고 싶을 수도, 또래의 다른 아이들이 부러울 수도 있겠다. 그 각오조차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을 수도 있다. 아래에 내려다 보이는 어린 스님의 작은 몸집이 외로워 보였다.



어린 스님의 마음을 대변하기라도 하는 듯, 하늘에는 까마귀떼들이 맴돌고 있었다.




쑹짠린시에 다녀오는 것으로 나의 윈난여행 일정이 모두 끝났다. 오후에는 티벳의 햇볕이 내리는 숙소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면서 시간을 보냈다. 쿤밍, 따리, 리장, 샹그릴라, 매리쉐산을 거치면서 더 깊이, 더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교통편은 불편해지고 숙소와 음식도 거칠어졌지만, 그럴수록 윈난이 점점 마음에 들었다. 따가운 햇볕이 받으며 아직 못가본 스촨성과 티벳자치구도 언젠가 가보리라 다짐했다.


내일은 이른 아침에 샹그릴라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쿤밍으로, 쿤밍에서 다시 비행기를 갈아타고 서울로 간다. 여행을 계속 이어가고 싶지만 다음을 기약하고 일상으로 돌아가야한다. 짧았던 윈난 여행이 아쉽게 막을 내리려 하고 있었다.

어제는 위뻥마을에서 페이라이시로, 오늘은 다시 샹그릴라로 돌아가야한다. 이번 여행의 클라이막스도 지나고 이젠 남은 여운을 가지고 일상으로 돌아갈 준비를 해야할 때다. 마지막으로 메이리쉐산을 보기위해 이 날도 새벽에 일어났다. 어째서 항상 돌아가는 날이 되면 이렇게나 날씨가 좋은 것일까. 징크스는 깨지기는 커녕 더욱 심해졌다.





6000미터가 넘는 봉우리들이지만 높이에 따라 햇빛이 비추기 시작하는 시간이 약간씩 차이가 있다. 가장 높은 봉우리가 먼저 붉은 색을 띄기 시작한다.





며칠째 설산과 설산에서 해뜨는 사진만 올려대고 있으니 가끔 들어오는 분이 있다면 지겨우실지도 모르겠다. 사진으로는 흔한 설산일뿐이지만 직접 가서 보고, 걷는 것은 완전히 다른 느낌이다. 고흐의 그림을 미술관에서 처음 보았을 때, 미켈란젤로나 베르니니의 조각상을 처음 마주했을 때도 사진으로는 수없이 봐왔던 작품들이지만 실제로 보면 그 감동이, 느낌의 깊이가 다르다. 자연이 만들어낸 풍광을 직접 보는 것은 인간이 만든 최고의 미술품을 직접 보는 것보다 훨씬 커다란 차이가 난다.





마지막으로 메이리쉐산의 일출을 보고 숙소로 돌아와 따끈한 국수 한그릇으로 몸을 녹였다. 다른 테이블에서 시킨 것을 보고 따라 시킨 것이지만 고기 고명이 올라간 짭짤한 국수는 입맛에도 잘 맛았다.


원래는 오늘 위뻥에서 나오는 헤어진 일행들과 더친에서 합류하여 샹그릴라로 갈 계획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나오는 시간에 맞춰 더친으로 가면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빠오처에 문제가 생겨서 샹그릴라로 바로 가겠다는 전화를 받았다. 나도 좁은 빠오처에 끼어서 활달하기 그지없는 중국처자들과 몇 시간 차를 타고 가는게 썩 내키지 않았기에 상관없지만 문제는 내가 샹그릴라로 가야하는 시간이 촉박해졌다는 것이다. 혼자서 샹그릴라로 가기로 했더라면 페이라이시에서 일출을 보고 떠나는 사람들과 섞여 샹그릴라나 더친으로 가는 빠오쳐를 타면 됐을텐데 이제는 빠오처들도, 사람들도 모두 떠나고 애매한 시간에 페이라이시에 남겨져버렸다. 사정이야 있었겠지만 좀 더 빨리 연락해주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마음이 썩 편하진 않았다.




더친으로 가는 빠오처를 알아보는데 어째서 날씨는 이렇게나 좋고, 설산은 멋진 자태를 보여주는지...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서둘러 사진을 조금 더 찍었다.






페이라이시와 더친은 거리가 가까워서 빠오처를 쉽게 잡을 수 있을 줄 알았다. 며칠전 이곳으로 들어오면서 더친 정류장에 수없이 서있던 빠오처들을 보고 마음을 놓았었는지도 모르겠다. 현실은 이미 아침에 여행자들이 빠져나가버려서인지 빠오처 자체가 보이지 않았고, 어쩌다 오는 빠오처들도 현지인들을 태우고 근처 마을로 가는 차들밖에 없었다. 전망대 매표소에도 물어보고 숙소에도 물어보지만 마땅한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사실 말이 아니라 수첩에 페이라이시->더친이라고 삐뚤삐뚤 쓴 한자였다.)


이렇게 동분서주해보지만 아무 대책이 없어 난감해하고 있을 때 다시 친절한 손길을 내미는 사람들이 있었다. 여행 가방을 앞에 둔 중년 아주머니가 계시길래 가능한 착해보이는 표정으로 인사를 하고 수첩을 내밀었더니 자기도 그쪽으로 간다면서 조금 떨어져있던 남편을 불렀다. 남편은 영어를 조금은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서둘러 불러 준 것이었다. 그 분은 '자신들도 외지(어디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중국의 도시가 한두개란 말인가?)에서 왔는데 더친으로 가는 중이니 자기들과 같이 가면 된다면서, 자기가 빠오처를 잡을테니 걱정말고 여기에 있어라'고 하셨다.


중국은 희한한 나라다. 사람 때문에 실망하거나 화가 나면 그 갚음을 해주려는지 어느새 다른 사람이 나타나서 살뜰하게 도와준다. 보편적인 친절함이나 서비스는 기대할 수 없지만 또 속깊은 배려와 진심어린 도움은 기대할 수 있다. 이거 웃어야 하는 건지 울어야 하는 건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다. 이게 중국의 매력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다.


가방을 옆에 두고 빠오처를 기다리고 있는 친절한 중국 아저씨


왕복에서 편도로 바뀌었지만 산사태로 어제 걸어서 지나야했던 길에 어찌어찌 차가 다닌다.


이 분들은 빠오처 기사에게 요금을 물어보고, 나에게 기사 옆자리에 타라고 자리를 내주고는 자신들은 다른 사람들과 비좁은 뒷자리에 앉았다. 더친 터미널에 도착해서도 매표소까지 나를 데려다 주고는 표를 잘 샀는지 확인까지 해주었다. 물어본 부분에 대한 대답만하고 끝내는게 아니라 이 부부는 정말 친절하게 내가 샹그릴라로 잘 가도록 챙겨주었다. (사실 어느 정도는 과하기도 하지만 받는 입장에서는 고마울 뿐이다.) 부부는 더친에서 하루를 묵고 샹그릴라로 갈 예정이라해서 '셰셰'를 남발하고 헤어졌다.(고마운 분들의 사진이라도 남겼어야했는데 정신이 없었다.)


버스표를 사고나니 어제 위뻥을 나오면서 했던 고생이 끝났구나 싶었지만 그건 내 바램이었을 뿐이었다. 내 자리는 35인승쯤 되는 중형 버스의 가장 마지막 자리 창가석이었다. 맨 뒷자리는 보통 등받이가 뒤로 젖혀지지 않는데 이 버스는 앞뒤로 간격까지 무척 좁았다. 허리를 세우고 앉아야 무릎이 앞 좌석에 닿을락 말락 했다. 게다가 내 옆자리는 100킬로는 한참을 넘을만한 몸무게의 젊은이였다. 버스는 빠오처보다 샹그릴라까지 가는 시간이 더 걸렸다. 장장 5시간동안 불편한 자세로, 옆에서 침범하는 거대한 허벅지를 내 얇은 다리로 막으며 가야했다.(내 다리도 보통에 비해 굵은 편이라 생각했었는데 이렇게나 얇았을 줄이야...)


오후 느지막이 숙소인 자희랑에 도착하니 빠오처로 출발한 일행들은 이미 들러서 짐을 가지고 리장으로 떠났다고 했다. 어째 메이리쉐산을 트레킹하는 것보다 거기서 나오는게 더 힘들게 느껴졌다. 방을 잡고 신발을 벗으니 산길을 걷느라 고생한 양말에 큼직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이 날은 오랫만에 편안하게 잠이 들었다. 자희랑에도 쥐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위뻥이나 페이라이시처럼 자려고 불을 끄면 천장에서 운동회를 벌이는 쥐떼들은 아니었고, 옆에서 밤새 코를 고는 일행도 없었기 때문이다. (위뻥의 숙소는 하룻밤에 4,5천원으로 무척 저렴했기 때문에 쥐떼가 좀 돌아다니더라도 불만을 갖기는 어렵다.)


어제 빙후와 신푸를 한번에 다녀오고나서 신후까지 가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신후는 세 곳중에 위뻥마을에서 가장 멀뿐만 아니라 가장 높은 곳(해발 4000m)까지 올라야한다. 그렇기에 일정상 신후를 뺐던 것인데 한국으로 복귀하는 시간이 촉박해지더라도 이곳에 하루 더 머물면서 다녀올까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번 여행에서 신후는 가지 않았다. 어제 저녁 숙소로 복귀하면서 고생했던 것이 욕심을 지우는데 큰 몫을 한 것 같다. 누군가는 거기까지 갔으면 '무리가 되더라도 마저 다녀왔어야 하지않나'라고 하겠지만 지금 생각해봐도 가지 않은게 잘한 것 같다. 다음에 다시 갈 목적도 생겼고 무리하지 않았기에 별 탈없이 여행을 끝낼 수 있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조금 벗어난 이야기긴 하지만, 여행뿐만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도 우리는 욕심 혹은 욕망을 갖도록 강요 받는다. '넌 왜 공부에 욕심이 없니?', '야망이 그렇게 없어서야 성공하긴 글렀어' 라는 말을 종종 하거나 듣는다. 욕심이나 욕망이 없다고 자신이 하는 일에 게으르거나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도 아닌데도 그렇다. 결과보다는 과정에 의미를 두거나 결과가 주는 열매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사람이 추구하는 목표를 이해하지 못한채 이야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자신과 목표가 같지 않거나 이해하기 어렵더라도 무시하고 폄하하는 일이 없어졌으면 좋겠다. (이것에 대한 이야기는 샹그릴라로 돌아간 후에 더 생각하게 된 일이 있었다.)



위뻥마을을 떠나는 날 아침, 메이리쉐산에 해가 비치는 것을 보기 위해 새벽같이 일어났다. 이틀전 페이라이시에서 맞은 아침과 다르게 이 날은 기가막히게 날씨가 좋아서 황금빛으로 빛나는 멋진 설산을 보게 될 거란 생각에 흥분되었다. 거대한 산 그늘에 가린 마을에는 아직 불이 켜져 있었지만 설산은 이미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메이리쉐산은 주봉이 6740m로 높은 산이긴 하지만 세계에는 이보다 높은 산들이 얼마든지 많이 있다. 그럼에도 이 산은 아직도 등반가들이 오르지 못한 미지의 산으로 남아있다. 1991년에는 중국과 일본 등반대가 큰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티벳의 성산이라서 인간의 발길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하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 7,8000미터가 넘는 산들이 즐비한 히말라야에서는 비교적 낮은(?) 높이에 비해 오르기가 어렵다는 점과 장비와 등반기술의 발달로 8000m 급 산을 등정해도 이슈가 되지 않을만큼 고산 등정이 빈번해졌기 때문에 이 산에 대한 도전자체가 별로 없는게 아닐까 싶다.




본격적으로 날이 밝아오자 마을은 한층 선명해졌음에도 봉우리주변 하늘은 오히려 어두워지는 듯했다. 그러다 갑자기 봉우리 왼쪽끝 부분부터 불그스름하게 물들시 시작했다.










해가 높이 떠오르면서 붉은 기운은 점차 옅어지고 예의 흰 설산으로 돌아왔다.


날씨가 더없이 좋았음에도 아침 햇살을 받은 황금빛 설산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었다. 인터넷에서 본 불타는 듯 붉은 산이 되려면 약간은 보정의 힘을 빌려야 할 것 같다. 해가 완전히 떠오르고 일행은 이틀 묵었던 숙소를 떠날 채비를 마쳤다. 나를 제외한 다른 일행은 하위뻥 마을에 하루를 더 묵으면서 신푸에 다녀올 계획이었고, 나는 산길을 따라 닝농으로 가서 거기서 페이라이시로 가는 빠오처를 탈 생각이었다. 


낮은 구름이 걸린 하위뻥 마을이 아름답고 평화로워 보인다.



구름 한점 없는 하늘이 이곳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날씨였다. 이렇게나 깨끗한 설산 봉우리를 보려면 하늘도 맑아야하지만 산봉우리에 바람도 불지 않아야 하는데 그런 날은 무척 드물다. 설산 봉우리에는 대개 세찬 바람이 불어서 하늘이 맑더라도 봉우리에는 항상 눈이 날리거나 구름이 끼어있기 때문이다. 오늘 신푸에 가면 정말 환상적인 풍경을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괜히 어제 무리해서 갔나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다. 하지만 어제 스러져가는 햇살과 구름속에서 바람에 나부끼는 수많은 타우초가 어우러진 풍경이 신푸에는 왠지 더 어울리는 것 같았다.






일행과 헤어질 시간이 되었다. 니농마을로 가는 길은 갈래길이 몇 군데 있고 잘못된 길로 들어서면 무척 험한 길로 들어서거나 절벽으로 통할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는 말을 여러번 들었다. 일행은 아니더라도 다른 여행자라도 있으면 길동무를 삼으련만 이쪽으로는 여행자들도 보이지 않았다. 겨우 이틀이고 나이와 언어 문제로 말을 섞은 적도 별로 없지만 혼자 일행과 헤어진다니 중국처자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인사했다. 적응이 안되는 면이 있지만 심성은 착한 처자들이다.




마지막으로 메이리쉐산을 눈에 담고 니농으로 가는 길로 들어섰다. 한동안은 평탄한 숲길이 계속되는데 들은 것처럼 길이 갈라지는 곳이 나오는데 이때는 무조건 사람이 많이 다닌 것처럼 보이거나 넓은 길로 가면 된다. 그래도 정 모르겠으면 앞이나 뒤에서 사람들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손가락으로 길을 가리키며 '니농?' 하고 물으면 된다. 길이 확실해질때까지 처음 한두시간은 보이는 사람마다 '니농?'이라고 물으며 다녔다. 길에 대해 주의사항을 여러차례 들은터라 마음속으로 꽤나 긴장을 했었나보다. 초반에 찍은 사진이 한장도 없었다. 길이 확실해지고, 휴게소가 나오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차츰 마음이 놓였다.


아마도 백마설산?






위뻥마을로 들어가는 물자수송은 대부분 말이 담당하기 때문에 산길을 걸으면서 짐을 실은 말들과 마주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때 길을 비켜줄 때는 항상 산쪽에 바짝 붙어서서 길을 비켜야 한다. 비탈이 있어서 비켜서기 어려울 것 같지만 반대편으로 비켜서 말이나 말이 실은 짐과 부딪히게 되면 낭패를 보게 된다. 양호한 곳에서는 계곡물에 발을 적실뿐이지만 위험한 곳에서는 실족해 절벽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 




가는 길에 식당겸 휴게소가 있어서 들렀다. 휴게소는 지금까지 종종 있었지만 이곳은 그냥 지나치지않은 이유는 자리에 앉아서 보이는 경치가 제법 시원스러웠기 때문이다. 맥주 한캔을 시켜놓고 경치를 보고 있는데 뭔가가 다리를 스윽하고 스치고 지나갔다. 놀라서 보니 새끼돼지 두어마리가 손님들이 떨어뜨린 음식물을 주워먹으며 식탁밑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위생적이라 할 수는 없지만 이곳은 개보다 돼지가 더 많이 보이는 곳이니 그런가보다 할 수 밖에. 흘린 음식물을 자동으로 처리해주니 종업원이 할 일이 줄긴 하겠다. 



윈난여행 내내 자주 마셨던 따리맥주. 도수가 낮아서 싱거운 듯하지만 덥거나 목마를 땐 그래서 제격이다.


나를 놀래킨 새끼 돼지들


시땅에서 위뻥으로 올 때도 성산(聖山)으로 향하는 많은 순례자들을 보았지만 위뻥에서 니농으로 가는 길에도 반대편으로 많은 순례자들이 성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니농에서 위뻥으로 오르는 길은 고산에 적응된 이들에게도 쉽지 않은 듯했다. 아이들부터 노인들까지 이 길을 힘겹게 오른다. 그럼에도 반대편에서 오는 사람이 보이면 의례 손바닥을 하늘로 향하게 하고는 '짜시탈레'하고 인사를 한다. 그 중에 얼굴이 검게 타고 주름이 가득한(대부분의 티벳 할머니가 그렇지만) 한 할머니의 미소띈 얼굴이 잊혀지지 않는다. 마치 성인이나 고승처럼 편안하고 자애로운 얼굴이었다.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재벌이나 권력자도,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연예인들도 가질래야 가지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경치는 둘째치고 이런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면 시간을 들여 찾아 올 값어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이 높으니 골이 깊다. 발이라도 미끄러지면 목숨을 보장할 수 없다. 항상 주의하며 걸어야한다.





니농마을에 가까워오자 계곡이 끝나가고 있었는데(더 넓고 큰 계곡과 만날뿐이지만) 그곳은 길과 다리를 놓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저렇게 길과 다리가 놓여진 덕분에 나같은 여행자가 멀리서도 이곳까지 짧은 시간을 들여 올 수 있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이 곳에 사는 현지인들의 삶도 그것에 맞춰 바뀌어 갈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여행전에 봤던 차마고도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이 스치듯 머릿속을 지나갔다. 차마고도를 걸어 도시에서 말과 차를 바꾼 티벳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산중턱에 길을 놓기 위해 폭약이 터지는 광경을 걱정스레 보던 장면이 그것이다. 실크로드와 함께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되었다는 이 교역로에 자동차가 다니는 길이 놓이면 쉽게 물자가 드나들고 재화가 풍부해지겠지만 풍요로워지는 것이 이들은 아닐 것이다. 외지의 거대 자본에 노동력을 제공하는 하급 노동자가 되는 것이 불보듯 뻔하다. 이들이 그것으로 행복하다면 좋겠지만...


다시 짐을 실은 말들은 만났다. 재빨리 산비탈에 붙어 수로에 다리를 벌리고 섰다.


멀리 니농마을이 보인다. 단지 수십 가구가 모여있는 듯, 생각했던 크기의 마을이 아니었다.


메이리쉐산 주변은 수목이 우거진 풍요로운 경치였는데 불과 수킬로미터를 걸어 나오니 산들이 온통 민둥산이다. 고도차이가 나는 것도 아닌데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다. 이미 다 베고 써버린 것인지. 갑자기 황량하게 변한 경치에 적응이 되지 않았다.


걷다보니 비탈 아래에 빠오처들이 모여있는 것이 보였다. 그쪽으로 가면 빠오처를 잡아타고 페이라이시로 갈 방법이 있을 것 같아서 사람들이 다닌 듯한 비탈길을 찾아 조심조심 내려갔다. 위뻥에서 여기까지 오는 것은 무척이나 순조로웠다. 출발전 걱정했던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날 나의 고난은 마음을 놓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우선 여기서 페이라이시로 가는 빠오처가 얼마인지 정보가 없었다. 비탈길을 내려가 이야기를 나눈 빠오처 기사들은 한결같이 똑같은 금액을 이야기했고 에누리나 협상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네댓명이 나눈다면 크지않은 금액인데 혼자 타려니 적잖게 부담되는 가격이었다. 거리로 따지면 한국 택시비와 별 차이가 없으니 꽤나 비싼 가격이다. 일종의 담합, 좋게 말하면 정가였다. 게다가 이 기사들은 대단히 불친절해서 깎을거면 걸어가라는 말을 비웃음을 흘리며 스스럼없이 했다. 나는 그때까지 니농마을에 가면 마을 사람들이 타는 빠오처가 있을거라 생각했고 니농마을까지 다시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힘들게 걸어간 니농마을은 무척 작은 곳이어서 정기적으로 다니는 빠오처가 없었다. 페이라이시까지 가는 빠오처의 가격은 먼저나 도찐개찐이었고 이곳도 어차피 같은 기사들이라 협상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니농 근처에 있는 빠오처 기사들은 배짱 장사다. 어차피 그곳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기들 차를 탈 수 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불친절하고 사람을 기분 나쁘게 만든다.


결국, 비싼 돈을 주고 페이라이시로 오는 빠오처를 타야했다. 만약 혼자서 위뻥에 간 여행자라면 다시 페이라이시로 나올 때는 들어갈 때와 마찬가지로 시땅을 통해서 나오는게 좋을 것 같다. 위뻥에서 니농으로 오는 길이 걷기에 무난하고 경치도 좋지만 그렇다고 비싸고 불친절한 빠오처를 감수하고 볼만큼 대단한건 아니다. 인터넷에 올라온 여행기는 여행한 곳에 대해 대부분 좋게만 쓰는 경우가 많아서 니농으로 오는 길을 제법 기대했지만 실상은 그 글에는 많이 못미쳤다.



니농에서 페이라이시로 가는 길에서 초반부는 여기저기가 공사중이라 엉망이었다. 비포장의 낭떠러지 길을 가는데도 운전사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길이라 별로 조심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 와중에 전화가 오니 한손으로는 전화를 받으며 운전했다. 흔들리는 차 안에서 손잡이를 잡은 손에 은근히 힘이 들어갔다. 그래도 이제는 편안하게 페이라이시로 갈 수 있겠거니 생각했지만 그것도 얼마 못가 깨졌다.


비포장도로를 벗어나니 이 운전사가 졸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차가 조금씩 차선을 벗어나는 것 같아서 운전사를 봤더니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 놀래서 창문을 열고 담배를 한대 꺼내 물었더니 자신도 멋쩍었는지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렇게 줄담배를 피며 니농에서 더친까지는 도착했다. 그런데 더친에서 차가 무지하게 막히기 시작했다. 산비탈에 형성된 더친에서 사고라도 나서 한쪽 길이 막히면 다른 방향으로 우회할 수 있는 길이 별로 없어서 온 동네가 다 막혀버린다. 한참 기다린 끝에 더친을 통과해서 페이라이시로 향했다.


하지만 이날 나의 운수는 무척 나빴나보다. 끝판왕이 길 앞에 기다리고 있었다. 더친에서 페이라이시까지 반쯤 왔을까 차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저 멀리 보니 산비탈 일부분이 무너져 길을 덮고 있었다. 그리고, 흙과 돌을 치우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안풀려도 이렇게나 안풀리는 날이 있을까 싶은데 안그래도 더친에서 막히는 바람에 짜증이 났던 운전사가 이젠 폭발직전이었다. 


중국사람들에게는 아직 서비스의 개념이 없다. 본인이 고객과 한 약속은 어떤 손해를 보더라도 지켜야 하고, 그것을 못지키게 되면 본인이 받을 대가를 받을 수 없다는 것에 대해서도 이들에게는 먼나라의 이야기일뿐이다. 언제 뚫릴지 모르는 길을 보고 있으니 이제 나에게 화를 내기 시작했다. 나도 같이 화를 내고 서로 뜻도 통하지 않는 말싸움을 시작했다. 언뜻 파악한 걸로는 이제 길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걸어가라는 것 같았다. 그래도 6킬로미터는 남았으니 부지런히 걸어도 한시간은 족히 걸어야한다. 게다가 아침부터 식사도 못하고 걸은터에 체력도 바닥이라 처음에는 다시 걷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계속되는 말싸움과 운전사의 짜증에 대꾸하다보니 스스로 참지 못하고는 화가나서 욕을 해주고는 차에서 내려버렸다.


그리고, 걸었다. 흙과 돌을 치우는 공사기계들을 피해서 한참을 걸었다. 처음에는  길이 막혀 있었는데 얼마지나자 차들이 하나 둘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삼십분만 차에서 더 싸우고 있었더라면 편안히 갈 수도 있었겠지만 삼십분을 그러고 있었을 자신은 없었다. 차라리 더 빨리 내려서 차들이 지나다니기 전에 가지 않은게 후회되었다. 다니는 차를 피해서 위험한 도로가를 삼십분 넘게 더 걸었다.


불친절의 끝판왕, 니농의 빠오처 운전사들



우여곡절, 천신만고 끝에 페이라이시에 도착했다. 며칠전 묵었던 숙소로 가서 비싸더라도 더블룸을 배정받아 드러누웠다. 돈을 좀 더 줘서 그런가 이 방에는 베란다도 있어서 밖으로 메이리쉐산이 잘 보였다. 창밖으로 보이는 산의 모습은 제임스 힐턴이 '잃어버린 지평선'을 쓸 때와 변함이 없을텐데 지금 그가 여기에 온다면 그 소설은 절대로 쓰지 못했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곳은 전통의 가치와 믿음을 가지고 변함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과 영리만을 최고의 가치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두 모습을 가지고 있다. 메이리쉐산을 떠나는 날, 니농의 운전사들을 만난 것은 나에게 큰 손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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