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몇 번의 여행을 다녀오고도 전혀 블로그에 글을 쓰지 않았다. 1년의 여행을 2,3년에 거쳐 정리하고 나서는 이상하리만치 흥이 나지 않았다. 밀린 사진을 보면서 언젠가 해야지 하면서도 좀처럼 의욕이 생기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다 1년이 넘은 지금, 하다보면 다시 생길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일단 시작하기로 했다.


작년 휴가 준비를 하면서 고민이었던 점은 가고 싶은 곳들이 너무 멀어서 적어도 2주는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사정상 그 정도 시간을 내기는 어려웠기에 그나마 가고 싶은 곳과 비슷한 장소로 찾은 곳이 쓰촨성의 주자이거우(구채구)와 황룽(황룡)이었다.


처음에는 너무나 유명한 관광지인 주자이거우가 전혀 끌리지 않았다. 이곳을 대상으로 하는 패키지 여행상품도 많았고, 사람이 바글거리는데다 인위적으로 닦여진 여행지를 싫어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주자이거우의 물빛과 이를 둘러싸고 있는 산들을 보고 한번 가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에서 주자이거우로 가려면 일단 중국내 큰 도시를 거쳐야한다. 주자이거우와 가장 가까운 대도시는 쓰촨의 성도인 청두라는 곳인데 거기에서 주자이거우까지 가는 것도 버스로 8시간이 넘는 거리였다. 일주일 휴가 중에 왕복 이틀을 버스 안에서 보내야 한다. 거기다 인천에서 청두까지 편도로 4시간 가량 걸리는 비행기 탑승시간까지 고려하면 삼사일은 오로지 가고오는데 들어갈 판이었다.


짧은 여행에서는 돈보다 시간이 높은 가치를 가진다. 버스를 타는 것도 재미있겠지만 왕복할 필요는 없으니 청두에서 주자이거우와 가까운 황룽공항까지 가는 편도 비행기만 타고 가기로 했다.


황룽공항에서 주자이거우로 가는 택시


인천에서 청두로 가는 비행기는 대부분 저녁시간에 출발했다. 목적지에 밤늦게 도착하는 일정을 좋아하진 않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처음 가는 곳에 밤늦게 도착하면 마음이 급해지고 서두르게 된다. 치안이 안좋은 곳이라면 위험한 일을 겪을 확률도 높아지고 어두컴컴한 분위기에 그 도시에 대한 인상도 따라서 안좋아진다. 청두에 밤늦게 도착해서 하룻밤을 보내고 이튿날 다시 공항으로 가서 

황룽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황룽공항에 내리니 풍경이 갑자기 완전히 달라졌다. 주자이거우에서 가장 가까운 공항이 황룽공항인데 이 공항은 해발 3,400미터가 넘는 곳에 위치해 있다. 가파른 산지라 공항을 세울만한 평지가 없는 탓인지 산을 깎아서 만든 듯하다. 안그래도 고도가 높은 이 곳에서도 공항은 훨씬 더 높은 곳에 있었다. 가장 가까운 공항이라고는 하지만 황룽공항에서 주자이거우까지도 택시를 타고 한시간 반(인지 두시간인지)을 가야한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안데스와 조금 비슷한 느낌이라 오히려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공항에서 한참 내려오니 얼마 안되지만 평지가 나타났다. 멀리 보이는 만년설에 덮힌 설산에 가슴이 뛴다.


주자이거우 풍경구 근처에 관광으로 개발된 작은 도시가 있다.
















 

시드니를 마지막으로 1년 동안의 여행을 마무리했다. 여행으로서는 긴 시간이었지만 세계 이곳저곳을 돌아보기에는 터무니없는 짧은 시간이었다. 사실 금전적인 문제만 아니라면 그대로 지구 한바퀴를 더 돌면서 여행하고 싶은 생각이었다. 시드니를 출발해 인천공항으로 돌아올때는 우리나라 국적기를 탓다. 한국을 떠나던 비행기 이후로 처음이어선지 우리나라 항공사 비행기안에서 들리는 한국말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 비행기에 탄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어깨밑으로 떨어지는 긴 머리에 오랜시간 햇볕에 그을린 시커먼 얼굴, 낡고 후줄근한 옷차림의 내가 오히려 낯설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공항에 도착해서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인 같은 얼굴인데 행색은 한국사람 같지 않은 내 모습을 쳐다보는 눈길이 느껴졌다. 아마도 우리나라를 찾아오는 여행자들 중에서는 이런 류의 여행자가 드물데다 대부분 가까운 중국이나 일본에서 오는 사람들이라 더욱 그럴 것이다. 그동안 여행했던 곳에서 터미널이나 공항에서 수없이 봐왔던, 초라한 행색에 커다란 배낭을 앞뒤로 둘러맨 나와 같은 부류들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지만 1년만에 돌아온 이곳이 오히려 더 낯설게 느껴졌다.


벌써 만 4년이 훌쩍 지난 일이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나는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고 느낀다. 훨씬 건강했고 자신감에 차 있었으며, 사고는 자유분방했다. 하다못해 그 뒤로 매년 겨울이면 고생하는 피부 트러블조차도 없었다. 훨씬 더 건조한 곳들을 여행했음에도 말이다. 그 뒤로 다시 직장을 구하고 일상생활으로 돌아와서 그 전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지금의 나는 더 깔끔한 모습으로 더 좋은 옷을 입고, 통장에는 더 큰 숫자가 찍혀있지만 그때의 나에 비해서 연약하고 생기를 많이 잃었으며 더 이상은 빛나고 있다고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1년간의 여행이 내 일생에 단발적인 생기만을 불어넣은 것은 아니다. 여행의 가기 전의 나와 다녀 온 후의 나는 많은 것이 바뀌었다. 삶을 대하는 태도가 훨씬 자유로워졌으며, 사람을 대할 때는 훨씬 겸손해졌다. 상대방에 비치는 내 모습에 신경쓰는 일도 별로 없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기 전의 나는 여행을 재충전의 시간, 잠시 쉼표를 찍는 시간으로 생각했다면 다녀 온 후의 나는 여행을 내 삶의 목적이자 그 자체로 생각하고 있다.


인천공항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1년만에 창밖으로 본 여의도는 공사하던 빌딩(SFC)이 완공되어 스카이라인이 바뀌어 있었다. 그 고층건물의 불빛을 보면서 들었던 생각은 일상으로 돌아가야하는 아쉬움, 가족과 친지들을 만날 반가움, 직장을 구하고 적응해야 하는 두려움이 아니었다. '다시 긴 여행을 가게 될 때는, 그때는 여행이 곧 삶이 되는 그런 여행을 해볼테다. 그때까지 잠시 안녕...' 하는 생각이었다.


일상을 살아가면서 그런 바램은 희미해지기보다 더 강렬해지고 목표는 더 뚜렷해진다. 찬 바람이 불면 파타고니아에서 오감으로 느꼈던 차고 강렬했던 바람이, 내리쬐는 햇볕 아래서는 스페인의 강렬한 태양이, 한여름의 더운 열기 속에서는 이집트의 숨이 막힐 듯했던 열기가 그리워지며 온 몸이 쩌릿해지며 심장이 쿵쾅거린다. 그리고 조금씩 목표에 다가가고 있다.

 

나는 여행에 완전히 중독되었다.

숙소를 옮기고 몸이 편해지니 마음도 한결 여유가 생겼다. 일정상 호주 여행은 시드니에서 마치게 되었지만 아름답다는 이곳 해변에 가보기로 하고 길을 나섰다. 뉴질랜드에서 오던 비행기에서 봤다시피 시드니는 해안선이 무척 복잡하고 아름다운 곳어서 이름난 해변도 여러 곳이었다. 그 중에서 가장 대중적이고 숙소에서도 가까운 본다이비치로 목적지를 정했다. 이곳은 해변 자체도 아름답지만 파도가 서핑을 하기에 적합해서 시드니의 여러 해변중에서 서퍼들이 좋아하는 곳이라고 했다.

 

숙소가 좋아지니 한여름의 눈부시게 밝은 햇살도 기분 좋게 느껴졌다.


본다이비치로 가는 시내버스에 올랐다. 얼마나 갔는지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창밖을 구경하며 가다보니 금새 해변에 닿았다.


호주도 영연방국가이기 때문인지 크리켓을 하고 있다. 


해변 주위로는 수많은 숙박시설과 레스토랑들이 늘어서있어서 이곳이 꽤나 이름난 해변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길거리에는 이내 바다로 뛰어들거나 방금 물에서 나온 듯한 옷차림으로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다. 본다이비치는 이름난 해변이긴 하지만 이곳을 찾는 사람들을 위한 편의시설(탈의실, 샤워실 등등)은 거의 없었다. 몇몇 곳에 야외 샤워기가 있었지만 (이것도 많이 부족해서 샤워를 하려면 줄을 서야했다.) 탈의실은 좀처럼 찾을 수가 없어서 미리 숙소에서 수영복을 입고 오길 다행이었다. 편의시설이 부족하긴 했지만 우리나라 여름철 성수기처럼 공공해변에 사설 편의시설을 설치해놓고 바가지요금을 받는 경우는 전혀 없다.


절대 한적한 해변을 기대하고 가면 안된다. 어느 정도 불편함과 사람 구경할 각오를 하고 가야한다.


해변 오른쪽에는 유료 해수풀도 있긴하다.



몇몇 사진에 비키니를 입은 여성이 찍혔는데 이건 절대 의도한 바가 아니다. 어디를 찍어도 한두명은 찍힐 수 밖에 없다.


과연 듣던대로 파도가 제법 높고 서핑을 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서퍼들은 먼 바다에서 보드에 앉아 좋은 파도가 오길 기다리고 있다가 파도에 맞춰 보드에 올라탔다. 감탄이 나올만큼 멋있게 타는 사람은 커녕 넘어지지 않고 해변까지 보드를 타는 사람도 그다지 많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 정도 파도는 초급자나 서핑을 하기에 더 좋은 곳에 갈 수 없는 서퍼들이 아쉬움을 달래는 정도인가보다.


해변에 자리를 깔고 일광욕을 하다가 바닷물에 몇 번 들락날락 했는데 멕시코 툴룸에서 소매치기를 당한 경험이 있어서인지 마음을 놓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기대보다 본다이비치는 아름다운 해변으로써 썩 감흥을 주진 못했다. 로도스의 에게해, 카프리의 지중해, 후루가다의 홍해, 멕시코의 카리브해에서 좋은 바다를 너무 많이 봐왔는지 모르겠지만 제주도의 바다보다 나아보이진 않았다. (정말 뛰어난 곳이 아니라면 제주도의 바다도 세계 어디에 뒤지지 않는다.)





유명한 곳이어선지 한여름 성수기여선지 제법 넓은 해변인데 사람들이 꽤나 많았다.


한동안 해변에서 햇살을 받다 뜨거우면 물에 들어가길 반복하다 지루해져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야외 샤워기에서 대충 소금기를 씻어내고 수영복을 갈아입을만한 탈의실이나 장소를 찾았다. 이 많은 사람들이 해변에서 바로 갈아입거나 하진 않을테고 어디엔가 갈아입는 장소가 있을텐데 좀처럼 찾을 수가 없었다. 겨우 찾은 곳이 야트막한 언덕에 있는 공공화장실이었다. 실제로 그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들락날락 하며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완만한 경사를 올라 들어간 화장실은 내가 지금까지 본 화장실 중에서 최고로 더럽고 지저분한 화장실이었다. 동남아의 재래식 화장실이나 어렸을 때 시골에서 거름을 주려고 인분을 모으던 그런 화장실이 그리울 정도였다. 구역질이 올라올듯 했지만 젖은 수영복을 입고 버스를 탈 수는 없으니 숨을 참고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대학교때 봤던 영화 '트레인스포팅'이었다. 극중에 이완 맥그리거가 구토하는 그 변기가 생각났다. 잘 정돈되고 깔끔한 모습의 시드니였지만 모든 곳에서 완벽할 수는 없다.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든 그렇다. 의외의 곳에서 시드니의 허술함을 체험하고 웃음이 났다.



시드니는 여행중 최악의 숙소와 생애 최악의 화장실을 경험한 곳이라 그런지 깔끔하고 정돈된 도시와 아름다운 오페라하우스의 이미지보다는 좋지 않았던 생각들이 먼저 떠오른다. 


처음 여행을 준비할 때 호주에서 꼭 가봐야 하는 곳으로 꼽았던 울룰루와 세계 최고의 해변 중 하나라는 그레이트 베리어 리프는 갈 수 없었지만 그다지 아쉬움이 생기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내일이면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야 한다는 아쉬움만 가득했다. 길게 여겨졌던 여행이 이제 지구 한바퀴를 돌아 단 하루만 남겨두고 있었다.

거의 1년에 가까운 여행이 끝나가고 있었고 귀국 날짜가 다가올수록 기분은 복잡미묘해졌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계속해서 여행을 더 하고 싶었다. 여행중에 가끔 짜증이 나거나 힘든 일도 있고 그럴때면 순간 한국으로 돌아갈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몇 분 지나지 않아 여행하고 있다는게 다시금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편한 여행도 아니고 행색은 꽤죄죄 그 자체였지만 철이 든 이후로 이렇게나 스트레스 없이 살았던 시간은 없었다. 더 이상 하기가 싫어질 때까지 할 수 있으면 좋을텐데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시드니에서 묵었던 그 최악의 숙소 사진은 올리지 않으려했다. 내 스스로가 다시 그때 기분을 느끼는 것조차 싫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숙소를 나오던 날 사진을 (더구나 그 날은 몇 장 되지도 않는다.) 정리하다보니 내 매트리스를 찍어놓은 사진이 여러 장 나왔다. 그 당시에는 너무도 화가 나서 우리나라 유명 여행까페에 죄다 올려놓으려고 찍었던 것 같다. 몇 년 지나고 나서 다시 사진을 보니 '이런 최악의 숙소가 있었지' 정도로만 생각된다. 시간이 약인지, 독인지...



이 숙소에 온 뒤로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몸 여기저기가 그렇게 쑤시는 것이었다. 근육통이나 잠을 잘못 자서 그런게 아니라 그냥 여기저기가 찔린듯 아팠다. 귀찮지만 매트리스에 씌워진 시트를 벗기고 보니 어이없게도 매트리스에 커다란 구멍이 숭숭 뚫려있었고 몸을 매트리스에 누이게 되면 스펀지가 내려가면서 아래에서 끊어진 스프링으로 보이는 뾰족한 철심이 몸을 찌를 수 밖에 없는 상태였다. 이런 구멍이 한두개면 시트를 벗기고 매트리스를 확인하려는 생각도 들지 않았을 것이다.


밤새 내몸을 찔러대던 스프링 철사


시트를 걷어보니 매트리스에 총알 세례라도 받은 듯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액션영화에서 주인공이 매트리스를 들어올려 적의 총탄을 막는 장면이 떠오른다.


게다가 매트리스와 시트에는 죽은 빈대와 빈대가 피를 빨다가 눌려 터진 듯한 핏자국이 여기저기 있었다. 이틀째 아침에 이 상태를 보고 나서 바로 짐을 싸서 숙소를 탈출했다. 여행을 하면서 아무리 환경이 안좋은 숙소더라도 환불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숙박비를 포기하고 나온건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이날 폴더에 있는 사진을 보면서 어째서 이렇게 사진이 없을까 의아했었는데 글을 쓰다보니 생각이 났다. 너무 좋지 않았던 숙소의 반대급부에다 여행 마지막 숙소라는 생각으로 이번에는 꽤나 좋은 숙소를 잡았다. (보통의 게스트하우스는 여전히 만원이라 자리를 구할 수 없기도 했다.) 그리고, 모든 짐을 풀어 하루종일 빨래를 돌렸다. 앞 글에서도 썼지만 빈대에 한번 물리면 모든 옷을 다 세탁하고 빨 수 없는 것들은 햇볕에 말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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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글을 쓰고 석달이 넘게 블로그에 글을 쓰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올린 글이 7월 31일이었으니... 일이 갑자기 바빠졌거나 인터넷 접속이 안되는 오지에 떨어진 것도 아니었다. 다만, 블로그에 접속하기 싫었고, 글을 쓰는게 무서웠다. 이제 하루나 이틀이면 1년간의 여행기가 모두 끝날터였다. 그 뒤에는 써야할 무엇도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한동안 아예 묻어놓고 노트북도 켜지 않았다. 가끔 '그래도 마무리는 해야할텐데' 라고 생각하면서도 철저히 외면하고 있었다. 그러다 엊그제 바꾼 아이폰의 백업을 위해 거의 100일만에 노트북을 켰더니 쓰다만 페이지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누가 봐주길 바래서가 아니라 여행을 잊지 않기 위해 시작한 블로그인데 나는 여전히 4년전의 그 여행을 마무리할 마음이 생각이 없었나보다. 어쨌든 다시 시작했다. 그리고, 이 여행이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가 되도록 앞으로도 다녀온 여행을 꾸준히 정리하기로 결심했다.




좋은 숙소로 옮긴 다음 근처 수산물 시장으로 향했다. 이전 숙소는 부엌조차 도저히 음식을 만들 수가 없을 정도로 더럽고 지저분해서 군침도는 해산물들을 보고도 살 생각을 못했었다. 이제 깨끗하고 멋진 부엌이 생긴 김에 몸보신이 하고 싶어졌다. 커다랗고 살이 통통하게 오른 새우와 초밥용으로 다듬어놓은 연어 한토막, 호주산 와인까지 샀다. 남미나 멕시코에 비해서는 비싼 편이었지만 우리나라에 비해서는 무척 저렴한 편이라 돌아가기 전에 실컷 먹어둘 생각이었다.


소금구이도 버터구이도 아니다. 그냥 올리브유를 두르고 구울 뿐이지만 재료가 좋으니 더 바랄게 없다.


뉴질랜드에 이어서 다시 연어초밥에 도전했다. 연어가 살이 무르고 기름기가 많은 생선이라 첫 시도에는 껍질을 벗기고 손질을 하는데 무척 힘들었다. 모양도 엉성했고 힘을 과하게 주다보니 살이 부서지기도 했다. 이번이 세번째 시도였는데 이번에는 모양이 꽤 마음에 들게 나왔다. 그냥 밥을 뭉쳐 연어살을 올린 것을 간장에 찍어 먹을 뿐이지만 지금까지 먹었던 어떤 고급 초밥집의 그것보다 훨씬 맛있게 느껴졌다. 이런 재미가 여행이 주는 커다란 즐거움이다. 호주는 썩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이때 먹은 연어초밥은 평생 기억에 남을 만찬이었다.



얼마전 일주일간 휴가를 다녀왔다. 이번 휴가지는 쓰촨성 청두를 거쳐 주자이거우와 황룽이었다. 와라스 69호수의 감동, 파타고니아의 광활함이나 메이리설산의 웅장함까지는 아니었지만 가을이 완연한 주자이거우는 아름다웠다. 길고 길었던 이 여행기를 마치면 그걸 정리해야겠다.

다음날, 밤새 빈대로부터 맹렬한 공격받은 줄도 모르고 눈을 떴다. 빈대는 내가 누웠던 침대 벽쪽 어딘가에 서식하는 듯, 벽쪽으로 누웠던 팔, 다리로 집중 흡혈을 하고 사라졌다. 한쪽 팔다리만 수십군데의 붉은 반점이 생겼다. 어떻게 한두군데도 아니고 그렇게 물리는 동안 모를 수 있냐고 할지 모르지만 빈대는 모기보다 훨씬 교묘하게 물고 사라진다. 그리고, 물리고 난 다음 가려움은 모기보다 심하다. 동남아를 여행하면서 숱한 벌레들의 괴롭힘에 면역이 되었기 때문일까, 인터넷에서 본 여행 중 빈대로 고생했던 사람들 괴로운 경험담보다 훨씬 덜 했다는 것이 불행중 다행이었다. 빈대에 물린 자국을 긁으며 시드니에서의 이틀째 여정을 시작했다.


뉴질랜드도 그랬지만 호주에도 타이 음식점이 많았다. (동남아와 지리적으로 가까워서 동남아 사람들이 많이 이주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 중에 사람들로 붐비는 타이 음식점이 있었는데 겉으로 보기에 꽤 비싸보이는 집이라 선뜻 들어가기가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입구에 마련된 메뉴판에 '보트 누들'이라는 이름을 보고나서는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음식 가격도 한국식당의 메뉴보다 훨씬 저렴했다.


보트누들은 방콕과 치앙마이에서 자주 먹었던 고깃국물을 진하게 우려낸 쌀국수다. 영문명이 어째서 보트누들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부들이 고기잡는 중에 보트에서 먹던 국수인가?) 이 국수를 거의 1년만에 지구 한바퀴를 거의 다 돌아 여기에서 먹을 수 있다니... 약간 감격스러웠다.


맛은 있었으나 양이 적다. 하긴 태국음식들은 뭐든 양이 적었다.


아침식사로 태국 쌀국수를 먹고 이 날의 첫 일정으로 찾아간 곳은 시드니의 피쉬 마켓이다. 앞서 여행했던 오클랜드에도 피쉬 마켓이 있었지만 그보다 훨씬 규모가 크고 종류도 많다. 서울 노량진 수산시장이나 부산 자갈치 시장 같은 곳이라 보면 될 것 같다. 머물렀던 곳에서는 조금 떨어져 있었지만 처음 가는 길을 구경삼아 다니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가끔 지도에 있는 길이 실제로는 나타나지 않거나, 건널 수 있을거라 생각했던 길이 중앙분리대가 있는 넓은 차도라 당황스러울 때도 있다.




시드니 피쉬 마켓의 규모는 생각보다 훨씬 컸고 현지인과 관광객들로 무척 붐볐다. 여러 동으로 나뉘어진 건물마다 다양하고 싱싱한 해산물들이 가득 했다. 워낙 해산물을 좋아하다보니 보이는 것마다 모두 사서 먹어보고 싶었다. (물론 고기류도 좋아하지만 고기는 구경하는 재미가 없다.) 하지만 물가가 비싼 동네다보니 다들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사지도 않을 해산물들을 사진만 엄청 찍어놓았다. 우리나라에서 도미로 불리는 스냅퍼, 바다송어, 무지개송어, 연어, 가리비와 바닷가재 등등... 


하지만 아쉬웠던 것은 칠레에서는 너무 싸서 정말 이 가격이 맞나 의아했던 해산물이 여기서는 내 주머니 사정으로는 쉽게 사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이럴 때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 중에서 우리나라와 가장 가격 차이가 많이 나거나 가격대비 저렴한 것을 선택하는 것이 노하우다.


아, 연어.... 크고 먹음직스러운 연어...



피쉬 마켓에서 해산물을 대량으로 사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현지인이고 여행자들은 조금씩 포장해 놓은 해산물을 사서 공용 테이블에서 먹거나 레스토랑에서 해산물 메뉴를 즐길 수 밖에 없다. 연어나 새우, 가리비 등을 무척 사고 싶었지만 그 지저분한 숙소 주방에서 이 좋은 재료를 요리할 수는 없었기에 아쉬움만 가득 안고 레스토랑으로 발길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그 주방에서 연어회를 떴다가는 식중독에 걸렸을 것 같다.


맛있지만 튀김옷이 두텁고 기름졌다.


레스토랑에서 맛 본 메뉴는 갓 탈피를 한 게를 튀김옷을 입혀 바삭하게 튀긴 것이었다. 탈피를 하고 나면 게껍질이 부드럽기 때문에 튀겨서 통째로 먹을 수 있는데 무척 고소하고 맛있다. 피쉬 마켓에서 먹은 이 게튀김도 나쁘지 않았지만 베트남 호치민 로컬 음식점에서 먹은 게튀김에 비하면 소문난 맛집과 쇼핑몰 푸드코드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피쉬 마켓을 구경하고 온 길과는 다른 길로 시내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서 본 선착장에는 특이하게도 크고 작은 요트들 사이로 군함과 잠수함이 정박해 있었다.




서울의 명동과 같은 시드니의 상업지구. 길거리 공연을 하고 있었는데 수준이 높아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폭스바겐의 오래된 미니버스. 성능과 연비는 좋지 않겠지만 이런 단순하면서 클래식한 디자인은 좋다.



번화가 사거리 모퉁이에 고풍스러운 건물이 있어서 사진을 찍고보니 간판이 'PUB'이었다. 그런데 그 위에는 음각으로 'BANK OF AUSTRALASIA'라고 새겨져 있다. (AUSTRALASIA는 호주와 뉴질랜드, 근처의 서남태평양 일대를 모두 포함해 부르는 이름이란다.) 옛 은행건물을 지금은 펍으로 쓰는 모양이었다. 이런 멋진 펍이라니 들어가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약간은 어두운 분위기에 생맥주를 따르는 노즐이 여러 개 붙은 전형적인 영국식 펍이었다. 파인트 잔에 좋아하는 기네스 생맥주를 시키니 아침부터 줄창 걸어 피곤한 몸에 괜히 생기가 돈다.


기네스의 부드럽고 진한 거품을 너무너무 좋아한다. 마치 생크림 같다.


생감자를 바삭하게 튀겨낸 솜씨도 훌륭했다.



이 날 저녁 마무리가 어땠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언뜻 나는 기억으로 밤늦게까지 시드니 시내를 돌아다닌 것 같은데 이 날의 기억인지 다른 날인지 확실하지 않다. 정확한 것은 이 날 밤에도 다시 빈대의 맹렬한 공격을 받았고, 더 이상 거기서 머무는걸 포기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틀간 머문 이 최악의 숙소 때문에 시드니에 대한 기억이 좋게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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