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를 떠나는 날이 왔다. 동남아를 떠나던 날도 있었고, 유럽을 떠나던 날도 있었다. 동남아를 떠나던 날에는 불과 두어달 전에 시작된 여행에 대한 설렘과 더위와 모기에 시달렸던 시간 때문에 어느 정도 속시원했다. 유럽을 떠나던 날에는 항상 신경써야 했던 물가 스트레스와(결국 남미에서도 물가에 신경쓰지 않을 수는 없었지만) 미지의 대륙 남미로 떠난다는 긴장감에 아쉬울 틈이 없었다. 그런데, 남미를 떠날 때는 적지않게 아쉽고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아직 가보지 못한 에콰도르, 콜롬비아, 베네주엘라, 그리고 브라질(겨우 2도시 밖에 못가봤으니)에 못 가보고 떠난다는 아쉬움도 있었고, 남미의 아름답고 광활한 풍광과 독특한 문화, 친근감이 드는 사람들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섭섭한 마음도 들었다. (정작 나를 알고 기억할 남미 사람들은 없음에도 나는 남미가 좋아졌다.)



마지막날 오전에는 숙소에서 키우던 커다란 강아지와 놀며 시간을 보냈다. 롯트 와일러라는 견종이 아닌가 싶은데 경비견으로 많이 사용하는 종류라고 한다. 녀석은 1살 밖에 안된 강아지지만 덩치가 이미 보통의 대형견을 넘었다. 처음에는 거칠어보이는 인상에 영화나 대중매체에 워낙 사납게 나오는터라 조금 긴장을 했었지만 어려서 그런지 사람을 무척 잘 따르고 성격도 온순했다. (영화에서 사납게 나오기로는 도베르만과 함께 넘버 1,2를 다툴 것 같다.)


숙소의 브라질 여자매니저가 먹을 것을 준다고 하면 저렇게 손을 내밀어주고 아양을 떤다.


몸을 스다듬거나 두 손으로 얼굴을 잡고 문질러도 가만히 있다. 단점은 몸에 기름기가 많아서 손에 가득 묻는다.


먹을 것만 바라보는 저 집중력


주인이 이 녀석을 키우는 이유는 숙소가 번화가 가까이에 있지만 리마의 치안을 썩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도둑이 녀석의 얼굴과 으르렁거리는 소리만 들어도 몰래 들어온 걸 후회할 것 같다. 그런데 털색이 까맣기 때문이지 자세히 보면 얼굴도 무척 귀엽게 생겼다.


점심은 남은 리마 화폐(솔)을 탈탈 털어 만찬을 즐기기로 했다. 사실 이런 만찬은 유럽에선 언감생심이라 물가가 싼 나라일수록 더욱 즐겨야 한다. 가까이에 있는 꽤 좋아보이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가서 해산물 크림 파스타와 스테이크를 시켰다.


오오~ 가리비, 가리비


육즙을 품은 고기사이에 치즈가 가득이다.




드디어 멕시코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 창밖으로 멀리 구름에 덮인 안데스 산맥이 보였다. 분명 멕시코도 같은 라틴 아메리카인데 이상하게 멕시코는 미국과 지형적으로 가까이에 있어서인지 남미와 많이 다른 나라처럼 느껴졌다. 남미를 떠나는 아쉬움과 멕시코에 대한 기대가 뒤섞인 복잡한 기분이었다.


Adios, América Latina! Hola, Mexico!


리마에서의 이튿날은 구도심을 구경하며 보내기로 했다. 유럽이나 남미의 도시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리마의 구도심도 광장을 중심으로 역사적으로 유명한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리마의 중심 광장은 마요르 광장(Plaza Mayor)으로 이 부근은 198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 광장을 대통령궁, 리마 대성당, 정부 관청이 둘러싸고 있으며, 주위로 산 프란시스코 수도원, 산토 도밍고 교회 등이 있다. 그리고, 마요르 광장과 산 마르틴 광장을 잇는 유니온 거리는 리마의 쇼핑과 문화의 중심지다. 어제 다녀온 곳이 서울의 코엑스나 강남이라면, 유니온 거리는 명동이나 종로처럼 오래전부터 리마 시민들의 중심이었던 곳이다.


오전에 숙소에서 택시를 타고 마요르 광장으로 향했다. 역시나 구도심으로 들어가는 길은 좁아서 꽤나 막혔는데 택시 안에 있는게 갑갑해서 목적지보다 조금 앞서 내려 걸어갔다. 마요르 광장으로 들어서는 길은 대통령궁과는 반대 방향이었는데 대통령궁 앞에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길래 무슨 볼거리가 있는지 궁금해졌다.



아마도 근위대 교대식인 것 같았다. 날마다 하는 것인지, 정해진 날에만 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다시 생각지도 못하게 이런 구경을 하게 되었다. 어제 본 야시장도 그렇고 리마에서는 꽤나 운이 좋았던 것 같다. 한참동안 군악대의 연주가 계속되었다.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엄숙하거나 씩씩한 군가만이 아니라 여러가지 음악을 연주했던 것 같다.



군악대의 연주가 마치자 대통령궁 출입구에 누군가 나타났고, 그 사람에게 보고하는 듯한 절차가 있었다.(아마도 근위대장쯤 되는 직책인가보다.) 절차를 마치고 다시 군악대의 음악에 맞춰 앞마당을 한바퀴 돈 후, 정면 좌우에 있는 부속건물로 들어갔다.


이 의식은 사진으로 몇 장 남기고 대부분은 동영상 파일로 저장되어 있는데 파일 크기상 업로드가 안될 것 같다.



대통령궁 앞에서 교대식 구경을 끝내고 주위를 둘러보니 마요르 광장은 꽤나 깨끗하고 깔끔하게 단장되어 있었다. 리마의 다양한 곳을 가보진 못했지만 적어도 주요 장소들은 부에노스 아이레스나 리우 데 자네이루 같이 더 유명한 도시보다 훨씬 깔끔했다.



정면에 보이는 건물이 페루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이자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리마 대성당이다. 자신들의 조상을 정복하고 복속시킨 인물이자, 그들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오랜 세월 피를 흘려왔음에도 피사로의 시신이 여전히 이 성당안에 잠들어 있는게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독립영웅인 볼리바르와 수크레, 산 마르틴을 존경하고 동상으로 기리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지나간 과거는 과거일뿐이라 생각하는 것인지, 너무나 오랜 세월이 지나서 이들에 대한 감정이 후대에는 희석된 것인지, 남미 사람들의 성향이 반영된 오늘을 사는 방식인지 모르겠다. 세계인으로서의 나는 이들의 성향과 문화일뿐이라 생각하지만, 한국인으로서의 나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또한 이들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내가 성급하게 좋다 나쁘다를 말할 수도 없는 부분이다.)


리마 대성당 (Cathedral de Lima)




대성당 왼쪽에 붙어 있는 리마 대주교 궁(Palacio arzobispal de Lima)



마요르 광장에서 다른쪽으로 접어드는 길목에서 작은 시위대를 만났다. 숫자와 인사정도만 가능한 짧은 스페인어로는 무엇 때문에 시위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무척 평화로운 시위였고, 시위대의 뒤는 말을 탄 경찰들이 조용히 뒤따르고 있었다. 아르헨티나, 칠레 등등에서도 여러차례 시위나 길거리 행진을 하는 모습을 봤지만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남미 사람들의 거친 행동은 본적이 없었다.(운이 좋았을지도 모르지만) 시위대의 폭력성은 과도한 진압이나 그들이 목소리를 내는 것을 방해하는 행위가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목적을 가진 시위가 없지는 않지만 정부기관이 시위의 목적과 행위는 구별하지 않은채, 정책과 반대되는 시위에 대해서만 민감하게 반응하고 과도한 진압을 하는 것은 사회의 질서를 지키고 유지한다는 정부의 목표와 부합되지 않는다.


대통령궁에서 북동쪽으로 가다보면 독특하게 생긴 건물이 나온다. 이 건물은 산 프란시스코 교회 수도원이다. 위키백과에는 이곳에 17세기에 수입한 세비야의 아름다운 타일이 유명하다고 하는데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잘 떠오르지 않는다. 여행을 다닐수록 여간 아름답거나 독특하거나 하지 않으면 잘 기억에 남지 않는다. 사진으로라도 남아 있으면 좋겠지만 가끔은 사진을 찍을 수 없도록 규정한 곳들이 있어서(여기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마저도 없다면...


이 수도원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지하의 카타콤베(catacombae)이다. 카타콤베는 초기 기독교인들의 지하 공동묘지로 로마의 것이 가장 유명하지만 보통 수도원에 있는 지하 공동묘지도 카타콤베라고 하는 것 같다. 크지 않은 수도원이지만 이곳에 묻힌 수많은 해골과 뼈들이 보존되어 있었다. 



구시가 근처에는 차이나타운도 있었다. 어느 도시에나 차이나타운 출입구에는 중국풍 출입문을 세워서 이곳이 차이나타운임을 당당하게 알리고 있다. 언젠가 우리나라도 이곳이 코리아타운임을 알리는 표식이 세계 곳곳에 세워질 수 있기를 바란다.


페루인구의 대부분은 혼혈인 메스티소와 인디오, 유럽계 페루인들이지만 아시아계와 아프리카계 인구도 각각 3% 정도 차지하고 있다. 아시아계는 대부분 중국과 일본인들인데, 이들은 남미의 대농장에서 필요한 노동력을 제공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혹은 속아서 이민을 온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민족끼리 뭉쳐서 그 도시의 자그마한 타운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조선시대 말기부터 일제강점기에 세계의 오지에 노동자로 와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고생했던 역사가 있었다. 예전 쿠바에 있는 우리나라 교포들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농장에서 노예와 다름없는 고생을 했던 이민 초기역사부터 게바라와 카스트로를 도와 쿠바의 혁명에 힘을 보탠 사람들과 그들의 후손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들은 아직도 고향을 그리워하고 잊혀져가는 한국어를 기억해내기 위해 애쓰며 아리랑을 부르고 있었다. 이들뿐만 아니라 사할린에도, 중앙아시아에도 힘없는 조국을 등져야했던 수많은 교포와 자손들이 있다. 쓸모없는 한식의 세계화에 들인 비용을 이들에게 지원했더라면 훨씬 더 가치있을뿐더러 한식의 세계화에도 오히려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차이나타운의 길거리는 각종 한자와 중국풍 문양들, 중국 음식점과 은행이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거리에도, 음식점에도 중국인들보다는 현지인들이 훨씬 더 많다.


오전부터 많이 걸어서인지 배가 많이 고팠다. 물가가 저렴한 페루니 중국음식점에서 맘놓고 시켜도 그다지 부담되는 가격이 아니었다.




성녀 세드가 모셔진 메드세드 성당. 들어가보진 않았지만 외관이 독특해서 눈길이 갔다.


배를 든든히 채우고 구도심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유니온 거리까지 오게 되었다. 이곳은 대부분 상가, 쇼핑몰이라 그다지 눈길을 끄는 것이 없었는데 마침 '007 스카이폴'을 상영하는 영화관 앞을 지나게 되었다. 리마에서 복합상영관이 있는 것도 재밌었고, 내가 좋아하는 다니엘 크레이그가 주연인데다 액션영화니 한글자막이 없어도 대충 볼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1년만에 영화관에 들어가게 되었다.


매표소에 있는 여자직원도 꽤나 당황했고, 나도 많이 당황했다. 여직원은 동양인 여행자가 영화를 보러 온 것에 그랬고, 나는 최신영화 관람료가 이렇게나 저렴할 수 있다는게 그랬다. 그때 환율이 어느 정도였는지 모르겠지만 대충 1000원 미만의 금액으로 표를 살 수 있었다.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론 영화관 시설은 낡고 지저분했다. 냄새도 나고 스크린은 작고 의자는 불편했다. 스크린 때문인지 필름이 문제인지  오래된 필름영화를 보듯이 화면에는 내내 비가 내리고 있었다.(스크레치?) 그렇지만 어렸을 때 동네 영화관이 생각나는 매우 유쾌한 경험이었다. 그 가격이라면 이 정도 불편함은 충분히 감수하고도 남는다. 우리가 얼마나 터무니없이 비싼 값을 치르고 문화생활을 즐기고 있는지도 절실히 알 수 있었다.



영화관에서 나와 유니온 거리를 따라 산 마르틴 광장까지 내려오니 날이 서서히 저물어가고 있었다. 산 마르틴 광장 주변에는 온통 흰색의 건물들이 둘러싸고 있었는데 역사적인 건물인지는 모르겠지만 대부분 비싸보이는 고급 레스토랑과 호텔들로 보였다. 내가 있을 곳은 아닌가보다 싶어 장소를 옮기기로 했다.




다음 목적지로 정했던 곳은 페루의 대학가에서 한국인 청년들이 운영한다는 한식당 '헝그리 타이거'였다. 이곳은 아르헨티나에서 만난 한국인 여행자들이 리마에 가면 꼭 가보라고 몇 번이나 추천한 곳이었다. 한국음식점은 대부분 한국사람 혹은 여행자들을 대상으로 운영하는데 이곳의 손님들은 리마의 대학생들이 많다고 했다. 한국음식을 먹고싶기도 했지만 머나먼 리마에서 한국음식점을 하는 용감하고 멋진 청년들을 보고 싶어서였다.


산 마르틴 광장에서 택시를 타고 주소를 보여줬는데 이 택시기사는 주소가 어딘지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 도로까지 가서는 모르겠다며 신경질을 내길래 나도 울컥해서 뭐라고 하다가 내려버렸다. 그런데 어둠이 내려앉은 그 곳은 왕복 몇 차선이 되는, 리마에서는 제일 큰 듯 싶은 도로였다. 스마트폰 지도를 보고 가다보니 이 도로를 따라 수십 번지나 떨어진 곳이었다. 그래도 여행자들이 추천했던 '한국에서 먹던 그대로의 김치찌개'를 먹기 위해 어두운 도로를 따라 열심히도 걸었다. (아마 한시간은 족히 넘게 걸었던 것 같다.)


드디어 헝그리 타이거라 쓰인 담벼락을 찾고 기뻐하려던 찰나, 뭔가 이상했다. 담장 너머는 어두웠고, 출입구는 쇠창살로 된 문으로 굳게 닫혀있었다. '무슨 일이지? 두세달 사이에 장사를 접었나?' 생각하다보니 오늘은 일요일이었다. 그래서 대통령궁의 근위대 교대식도 했었던 것이고, 어제는 토요일밤의 야시장도 열렸던 것이다. 카톨릭 국가인 페루에서, 더구나 대학생들이 주손님이라는데 일주일에 하루를 쉰다면 바로 일요일일 것이다.


허탈한 마음에 잠시 멍하니 있다가 배도 고프고 정신적인 충격도 커서 택시를 잡아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그날 밤에 무엇을 먹었는지 잘 모르겠다. 아마도 숙소 근처에 있던 도미노 피자가 아니었을까 싶다. 결국 리마에서는 첫날 찾았던 한국식당도, 다음날 찾았던 헝그리 타이거도 모두 실패했다. 이러고나니 먹은지 보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한국음식에 대한 열망이 더욱 강해졌다.(그래서, 멕시코시티에서 실컷 한을 풀었나보다.)


택시로 돌아오던 중에...


이미 블로그에 몇 번을 썼던 말이지만 모든 것이 좋을 수 없고, 모든 것이 나쁠 수도 없다. 리마에 도착했을 때가 주말이었기에 야시장과 근위병 교대식을 볼 수 있었지만, 그랬기에 한시간 넘게 걸어서 찾아간 헝그리 타이거와는 인연을 맺지 못했다. 여행도, 좀 더 비약하면 인생도 그런 것이다. 알고 있는데 여행이 자꾸만 반복학습 시킨다.


와라스에 머문 시간은 3박 4일이었지만 첫날은 저녁에 도착했고, 마지막 날은 점심때쯤 떠나야했기 때문에 실제 머무른 것은 이틀정도였다. 리마에서 사흘후에 멕시코로 가는 비행기를 예매한터라 와라스에 더 머무를 수가 없었다.


리마에서의 일정을 줄이더라도 와라스에 더 머물고 싶었다. 산타크루즈 트레킹을 할 시간은 안되더라도 다른 트레킹이나 투어를 하면서 아름다운 안데스를 더욱 눈에 담아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페루의 수도이자 많은 볼거리를 가진 도시인 리마를 포기하기도 어려웠다. 리마에서의 여행도 무척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생각해보니 어차피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비행기 예약을 취소하고 더 머무르는 것.


아침 식사를 마치고, 버스 출발시간까지 호스텔 옥상에서 시간을 보냈다. 마침 날씨도 그리 나쁘지 않아서 와라스를 둘러싸고 있는 산들과 그 뒤 설산들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위키피디아에서 찾은 와라스 자료에는 인구가 12만명이 넘는 것으로 나오는데 한눈에 봐도 그정도 크기가 아니다. 어제 트레킹을 하기 위해 택시를 타고 가면서 봤던 와라스 주변의 작은 마을들을 모두 합해서 그렇지 도심은 그리 크지않았다.



구름이 걷히고 설산이 모습을 드러내주었으면 했지만, 날씨는 떠나는 여행자에게 그런 선심을 쓰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그게 낫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토레스 델 파이네에서 그렇게 궃었던 날씨가 트레킹 마지막날에서야 평소 쉽게 보기 힘들만큼 좋아져서 속이 쓰렸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아침에 머물렀던 침대를 정리하면서 어제 물통으로 썼던 PET 병이 심하게 찌그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4500미터가 넘는 69호수에서 마지막으로 물을 다 마시고 잠궜는데 3000미터쯤 되는 와라스에서는 기압이 높아져서 PET 병이 찌그러진 것이었다. 다이빙을 할 때도 기압에 대해 설명을 들었고, 우유니 투어때도 아타까마에서 산 감자칩 봉지가 우유니에서는 터져 있어서 놀랬었는데, 여기서는 거꾸로 공기가 줄어드는 경험을 하니 재미있었다.


와라스에서 탄 버스가 출발한지 한참 되고나서 출출한 김에 와라스에서 사둔 감자칩을 먹으려고 꺼냈더니 이 감자칩 통마져 심하게 찌그러져 있었다. PET병보다는 훨씬 탄탄할테고 안에는 감자칩이 가득 차 있는데도 상관없었다. 물론 안에 들었던 감자칩은 심하게 부서져 있었다.


어렸을 때 배운 공기압을 마흔에 가까운 나이에 눈으로, 몸으로 실습을 한다. 머리로 안지 수십년 된 지식을 실습을 통해 그 위력에 놀랜다. 그리고, 이런 압력을 조절하는 신체의 능력에 새삼 감탄한다. 재밌다, 이래서 여행은 더욱 재밌다.



호수가 보이기 시작하자 발걸음이 빨라졌다. 발을 옮길 수록 청록색의 보석이 조금씩 커지더니 모퉁이를 돌자 비로소 완전한 호수의 모습에 눈에 들어왔다.




말로만 듣던 69호수의 물빛은 정말 뭐라 표현하기 어려웠다. 호수는 거무튀튀하고 거친 바위에 둘러쌓여 있는데다가 그 위로 빙하와 만년설이 펼쳐져 있으니 색상이 대비되어 더욱 그랬다. 들리는 것은 빙하에서 녹은 물이 호수로 떨어지는 소리와 바람소리 밖에 없었다. 뭔가 세상과는 이질적이라는 느낌마저 들었다. 먼저 도착한 여행자들도 조용히 물가에 앉아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놀랍고 환상적인이긴 하지만 오랫동안 볼 다양한 경치는 아님에도 시간을 들여 보게 되는 것은 머릿속이 저절로 비워지는 외부와 단절된 이질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도 닦는 사람들이 깊은 산중을 찾는 것처럼.


얕은 곳은 투명한 물빛이지만 조금 깊어진 곳은 바로 깨끗한 청록색이 된다.



69호수의 물빛은 알프스나 파타고니아의 호수에서 본 물빛과 다르고, 트레킹을 시작하기 전에 본 양가누코와도 또 달랐다.


호수만 따로 물감을 칠한 듯하다.


운좋게도 날씨가 맑아 산봉우리까지 모습을 드러냈다.








트레킹을 시작한 높이가 해발 3700미터였고, 69호수까지는 4500미터가 조금 넘었다. 고지대라 힘들긴했지만 보통 체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충분히 오를만했다. 어쩌면 칠레 아타까마에서부터 시작된 안데스 여행으로 몸이 고산지대에 충분히 적응했기 때문일 것이다. 오르는 길에 만난 건장한 대학생들은 서울에서 리마에 도착해 바로 와라스에 왔기 때문에 전혀 적응이 안된 탓인지 오르는 내내 심한 투통에 시달렸다. (그래도 정수리를 움켜잡고 끝까지 올랐다.)


호수를 바라보며 더 시간을 보내도 좋겠지만, 택시 기사와 약속한 시간이 다가왔기 때문에 내려가야 했다. 시간이 얼마 없어 부지런히 내려가면서도 경치에 감탄하고, 사진 찍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옆으로 인사를 날리고 휙 지나가는 사람이 있어서 봤더니 백인 청년이 거의 달리듯이 내려가고 있었다. 더 놀라운건 그의 차림이었다. 청바지에 슬리퍼를 신고 4500미터 높이의 산길을 달려가고 있었다.



내려오는 중에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내려가는 발걸음을 빨리했지만 빗방울은 점점 굵어지고 마침내 완전히 비가 되어 내렸다. 생각해보니 와라스에 도착한 날부터 오후에는 내내 비가 내렸었다. 계절상 그때는 오전에는 맑았다가 오후에는 비가 내리는 것이 아닌가 싶다.맑은 날씨의 69호수를 차분히 만끽하고 내려오는 중에 비를 맞게 된 것이 너무나 다행스럽게 생각된다.




가늘었던 폭포의 물줄기도 이제 굵어져서 제법 커다란 폭포가 되어 있었다. 뛰어서 건널 수 있었던 개울도 혼자서는 건너기 어려울만큼 폭이 넓어져 있었다. 먼저 건넌 여행자들이 산악용 스틱이나 손을 내밀어 건너는 것을 도와주었다. 배낭여행의 좋은 점은 여행자들끼리 국적과 인종을 넘어서 서로 돕는다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자연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좁은 길에서 마주치면 비켜주고, 인사하고, 도와주는 일이 특히나 많았다.


흠뻑 젖은 채, 택시를 타고 와라스 시내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서는 심하게 덜컹거리는 차 안에서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싶게 졸았다. 졸다깨다 하며 내려 온 와라스 시내는 비가 그치고 노을이 곱게 내려앉고 있었다.




젖은 몸은 얼추 말랐지만 비가 온 탓에 기온이 떨어져서 쌀쌀했다. 식당을 찾아 돌아다닐 것 없이 자연히 어제 갔던 레스토랑으로 발길이 옮겨졌다. 레스토랑 안에는 우리의 화목난로 같은 난로가 피워져 있어서 추웠던 몸이 금새 따뜻해졌다.







호수 이름이 왜 69인지는 여행 중에 알지 못했다. 이번 블로그를 쓰며 찾아보니 근방에 있는 호수들에 이름이 없으니 번호를 붙인 결과 69번째 호수라서 그렇게 정해졌다는 글을 보았다.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번호로 69번째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신비하고 아름다운 호수였다.


그리고, 여행 중에는 호수에만 집중한 탓인지 오르고 내리는 중에 본 경치의 뛰어남을 완전히 깨닫지 못했던 것 같다. 당시에도 감탄을 하긴 했지만 이번 글을 쓰며 올릴 사진을 하나하나 고르다보니 호수의 아름다움 못지않게, 혹은 그보다 더욱 안데스의 풍광이 마음에 와 틀어박혔다.

며칠전 터키에서 안타까운 사건이 발생했다. 시리아를 탈출해 터키에서 유럽으로 가려던 가족이 탄 작은 고무보트가 파도에 뒤집히는 바람에 아버지만 살아남고 어린 두 아들과 엄마가 바다에 익사한 사건이었다. 그 중 3살밖에 안된 막내아들이 해변 모래사장에 엎드려 얼굴을 묻고 찍힌 사진은 세계인들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이 슬픈 사건은 지금까지 난민의 입국을 허락치 않았던 영국 정부를 압박해 난민을 받게 만들었고, 세계 각국이 난민들의 문제에 대해 더 관심을 갖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이 가족뿐만 아니라 시리아를 떠난 난민들이 터키를 거쳐 EU로 밀입국을 시도하는 주요 경로가 터키의 보드룸에서 그리스의 코스로 가는 것이라고 한다. 3년 전 터키에서 그리스로 국경을 넘을 때 머물렀던 도시라 그런지 유독 마음에 더 크게 남는다.


짙푸른 에게해와 그에 못지않게 푸르고 맑은 하늘, 수없는 하얀 고급 보트들이 우선적으로 떠오르는 이 아름다운 휴양 도시에 절망적인 상황에서 조국을 등지고 떠나온 수많은 사람들의 고난과 슬픔이 가득하다니 참 아이러니하다.


지도상에서는 무척 가까워보이는 보드룸과 코스지만 한밤중에 작은 고무보트로 이 바다를 건너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수천년전 고향으로 돌아가려던 오딧세우스와 그의 선원들이 목숨을 걸었던 바다에서 지금은 고향을 떠나온 시리아 난민들이 목숨을 걸고 있다.


자국의 경제 성장만이 존재 이유가 되어버린 세계 정상들이 이제는 중동문제에 조금 더 힘을 써주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램이다.


......


여행자들이 와라스로 오는 이유는 이 도시가 Huascaran 국립공원과 가까이에 있는 가장 큰 도시이기 때문이다. 이 국립공원에는 5,6000미터가 넘는 아름다운 안데스의 고봉들이 즐비해서 세계에서 이름난 트레킹 코스들이 많다. 페루에서 가장 높은 Huascaran(6768m), 세계적인 미봉으로 손꼽히는 Alpamayo (5947m), 멋진 암벽으로 이뤄진 Tawllirahu (5830m)가 있고, 이 산들을 3박 4일동안 돌아보는 산타크루즈 트레킹 코스, 푸른 물빛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69호수 당일 트레킹 코스 등 산을 좋아하고 트레킹을 좋아하는 여행자들은 반드시 와야하는 곳이다.


이 글을 쓰면서 왜 와라스에 더 오래 머물지 못했는지 후회가 된다. 한가지는 와라스에서 리마로 간 후에 멕시코로 떠날 비행기 일정이 다가오기 때문이었고, 다른 한가지는 이곳이 그렇게나 아름다운 곳일지 가기 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와라스에서는 69호수 트레킹을 하려고 했는데 도착한 당일은 너무 늦어서 여행사 차편을 예약하지 못했다. 69호수 트레킹이 시작되는 곳은 해발 3700미터 정도 되는 곳인데 안데스 산맥 중턱이라 와라스에서도 두 시간쯤 차를 타고 가야한다. 보통은 여행사에서 마련한 차를 타고 트레킹 장소까지 가는데, 가끔 현지인들의 마을과 마을을 다니는 대중교통편을 이용하는 여행자들도 있다. 돌아올때 차 시간을 맞추지 못하면 곤란한 일을 겪을 것 같아서 여행사의 차편을 이용하기로 했다.


여행사에서 차편을 예약하고, 조그만 광장에 있는 식당에서 식사를 하려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날씨가 좋아야 트레킹하기도 편하고, 산봉우리나 맑은 호수도 볼 수 있을텐데 오후가 되면서 흐려지는 날씨에 마음이 불안해졌다.


안데스 고산지방에서 여행 내내 추운 몸을 녹여주었던 스프



그렇게 불안한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고 이튿날 일어나자 날씨가 거짓말처럼 맑게 개었다. 여행사 앞으로 가니 예약한 사람이 많지 않았는지 기대했던 승합차가 아니라 낡은 택시가 한대 와 있었다. 나를 포함한 여행자 몇몇이 좁은 택시에 몸을 구겨넣고 설레는 마음으로 출발했다. 그때는 이 택시를 타고 그 길을 간다는게 그렇게 힘들 줄은 몰랐다.


와라스에서 69호수 트레킹이 시작되는 곳까지는 길이 형편없었다. 대부분 비포장도로였고, 포장이 되었더라도 길이라 하기도 민망하게 단지 커다란 돌들을 깔아놓은 곳이었다. 택시는 안에 탄 여행자들을 사정없이 내던졌다. 여행자들은 흔들리는 택시에 부딪히지 않으려고 손잡이를 잡고 팔에 온 힘을 다 주고 있어야했다. 게다가 이 택시 운전사는 딴에 편한 길을 가려고 했는지 큰 길에서 벗어나 작은 길로 들어섰는데 어제 내린 비로 진창이 되어 버려서 바퀴가 빠지는 등 오히려 시간이 더 오래 걸렸다.


어려움 끝에 국립공원 입구에 도착해서 입장료를 샀다. 이제 이 험한 길도 끝이다 생각하고 있었지만 다시 택시를 타고 몇 번이나 택시 천장에 머리를 부딪힌 후에야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그때는 다시 돌아갈 생각에 앞이 캄캄했지만, 지금은 그때 봤던 안데스 고산지역에 사는 현지인들의 작은 마을과 집들, 푸른 산과 깊은 계곡이 자꾸 그리워진다.



택시가 커다란 계곡으로 들어서자 눈앞에 청록색의 커다란 호수(Lagunas de Llanganuco)가 나타났다. 감탄을 연발하는 여행자들 때문에 운전사는 택시를 잠시 세우고 호수를 구경하게 해주었다. 이런 호수의 물빛은 파타고니아에서, 알프스에서 여러번 봤지만 4000미터에 가까운 높이에, 거대한 안데스의 고봉을 뒤에 두고, 바로 머리 위로 구름이 지나가는 광경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이 멋진 호수의 물빛도 몇 시간 뒤에 본 69호수에 비하면 단지 평범할 뿐이었다.



그 옛날 거대한 빙하가 산맥을 깎고 지나갔을 바로 그런 계곡이다.






이 양가누코 호수(Lagunas de Llanganuco)는 치난코차와 오르콘코차 두 개의 호수로 이뤄져 있고, 호수 사이에는 이렇게 얕은 물이 흘렀다. 이런 모양의 호수를 어디서 봤더라 싶었는데 스위스의 인터라켄이 생각났다. (물론 호수의 크기는 많이 다르지만)




드디어 택시가 멈췄다. 그리고, 저 골짜기 아래에서 트레킹을 시작하면 된다고 일러주었다. 거대한 골짜기 뒤편에는 훨씬 더 거대한, 만년설에 덮인 고봉이 내려다 보고 있었다.





출발점에서 간단한 설명을 듣고 트레킹을 시작했다. 설명을 해줬던 사람이 국립공원 레인저인지, 운전기사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진 않는다. 사실 빨리 시작하고 싶은 마음에 설명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이 골짜기에는 소가 정말 많았다. 아까 양가누코 호수에서도 많은 소떼들이 물을 마시고 있었는데 여기도 여기저기에 개울을 건너는 소, 풀을 뜯는 소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 소들은 코뚜레도 없고 몸에 표식도 없는데, 사람이 가까이 가도 겁을 내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이들 눈에는 트레킹을 하는 사람들도 매일 왔다가는 한무리의 동물로 보일 뿐인가보다. (이 소들은 방목하던 소들이 무리에서 떨어져나와 자연에서 야생소처럼 살아가게 된 것이라 들은 것 같은데... 정확하진 않다.)



길을 비켜주지도 위협하지도 않는다. 너는 너, 나는 나라는 자세.


산으로, 더 깊은 산으로 들어간다.


4000미터에 가까운 높이와 혹독한 기후 탓으로 키 작은 식물이 대부분인 이곳에 한눈에도 고된 풍파를 겪었음을 알 수 있는 나무가 나타났다. 흐린 날씨에는 꽤 흐스스해 보이겠다.




지금까지는 완만한 경사를 따라 산책하듯 느긋하게 걸어올랐다. 좌우 절벽에서는 안데스 고봉의 만년설이 녹아 폭포를 이뤄 떨어지고 있었다. 오른쪽 폭포를 끼고 본격적인 오르막이 시작되었다. (이때는 작은 폭포에 불과했지만 하산하는 도중 비가 오자 폭포는 거대한 물길을 만들었다.)



폭포가 떨어지는 절벽 위로 한참을 올랐다. 고도가 낮은 곳에서는 그다지 험하다 볼 수 없는 길이지만 고도가 높다보니 숨이 금방 차올랐다. 더 이상은 힘들겠다 싶어 쉬어야겠다는 생각을 할 때, 첫번째 고개 꼭대기에 도착했다. 고개에서 몸을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보니 지나온 거대한 계곡과 함께 폭포가 아주 조그맣게 보였다. 다시 걷기 시작해서 고개 모퉁이를 돈 순간 거대한 설산이 눈앞에 펼쳐졌다.





압도적인 설산의 모습에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생각해보니 이렇게 크고 높은 산을 이처럼 가까이서 바라 본게 이때가 처음이었다. 히말라야의 산들 앞에 서면 어떤 감정이 들지 무척 궁금하다. 갑자기 몸시도 히말라야에 가보고 싶어진다.




69 호수에 도착하기 위해서 이제 마지막 한 고비만 남았다. 스마트폰 지도를 보니 초원 반대쪽에 우뚝 솟은 거대한 바위 뒤편으로 오르면 거기에 69호수가 자리하고 있었다.


사진으로는 풀을 뜯는 소들의 풍경이 무척 목가적으로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그야말로 엄청난 소똥밭이다.




멀리서는 절벽처럼 보였던 것이 가까이 다가서자 엄청나게 큰 바위 덩어리였다.



바위의 크기에 압도되었다. 거대한 자연 앞에서 절로 겸손해지고 숙연해진다. 

이것이 내가 자연을 찾게 된 이유가 되었다.



바위 바로 위까지 산에서 내려온 빙하가 이어져 있었고, 그 옛날 빙하에 의해 깎여진 거친 바위 절벽 아래로 빙하에서 녹은 물이 폭포를 이뤄 떨어지고 있었다. 폭포가 워낙 높아 물줄기는 온전히 지표면까지 닿지 못하고 공중에서 바람에 흩뿌려졌다. 그리고, 그런 물들이 모여 시내를 만들어 흘러갔다.



고도 4000미터가 넘는 곳에 이렇게 화사한 꽃이 피었다. 비록 바람에 키를 키우지 못하고 땅바닥에 찰싹 달라붙어 있지만 뿜어내는 생명력은 꽃중에 니가 최고다.



바위산 왼쪽으로 난 경사면을 힘겹게 올라가다보니 절벽 중간에 커다랗게 뚫린 구멍에서 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영화에서 종종 지하동굴에서 위험을 만난 주인공이 쫓기다 찾은 출구가 절벽 한가운데였던 장면이 생각났다. 당장이라도 인디아나 존스가 구멍에서 나타날 것 같다.


69호수까지 가는 마지막 고개답게 경사를 오르는 것은 힘들었지만 경치는 놀랍도록 뛰어났다. 오르다 뒤를 돌아봐도 좌우를 살펴도 감탄이 나올만한 풍광이었다.




그리고, 고개를 몇 번이나 돌고나서 회색, 흰색의 무채색으로 가득한 시야에 진한 청록색이 빛나는 보석처럼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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