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이 트자마자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으로 데려다 줄 여행사의 승합차에 올랐다. 이번 시즌 산장을 오픈한 첫날이라 그런지 승합차에도 사람이 많지 않았다.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은 사진에서 보던 토레스 델 파이네의 거칠고 뾰족한 산이 아니라 평지 한가운데에 있는 국립공원 관리소였다. 여기서 신분 증명과 입장기록을 하고 입장료를 내야 한다. 국립공원 관리소라면 당연히 산밑이나 가까운 어딘가에 있을 줄 알았는데 실제 트레킹이 시작되는 곳은 여기서도 한참을 더 가야했다.


바람은 꽤 불었으나 다행히 날씨는 흐리지 않았다. 이 정도면 꽤 좋은 날씨라고 해도 될 것 같아 이번 트레킹도 운이 따라주나보다 생각했다. 국립공원 관리소에서 한참을 달리다보니 에메랄드 빛 호수와 그 너머 조각칼로 거칠게 파놓은 듯한 토레스 델 파이네의 봉우리들이 보였다.








산쪽에는 아쉽게도 구름이 제법 많아서 산봉우리를 또렷하게 보여주지는 않았다. 


승합차에서 내려 트레커들이 묵을 수 있는 산장까지 걸어들어갔다. 걸으면서 보이는 토레스 델 파이네의 봉우리는 며칠 전에 갔었던 피츠로이나 세로또레와 다른 느낌이었다. 피츠로이나 세로또레는 우뚝 솟은 봉우리가 장엄하다, 아름답다는 느낌이었는데 이 곳은 기괴하다는 느낌이 먼저 들었다.


산장 옆에는 캠핑장도 있어서 텐트를 치는 사람들도 몇몇 보였지만 겨울이 막 지난 파타고니아에서 캠핑을 하려는 열혈 캠핑족들은 많지 않았다. 산장은 도시에서라면 꽤 좋은 호텔에 묵을 수 있을 정도로 숙박비가 비쌌다. 자연이 만들어놓은  절경을 보기위해 세계 각지에서 여행자들이 몰려드니 싸게 운영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돈 없으면 저 추운 들판에서 캠핑해보던가... 라는 느낌이었다.


산장에 짐을 내리고 부랴부랴 당일 계획한 트레킹을 시작했다. 산장은 W 모양의 트레킹 코스에서 오른쪽 아래 꼭지점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오른쪽 윗부분까지 당일치기로 갔다가 내려와야 했다. 원래 W코스 여러곳에 산장이나 캠핑장이 있는데 내가 갔던 시기는 막 봄 시즌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아직 오픈하지 않은 곳들이 많아서 경로를 정하는데 제약사항이 너무 많았다.





나름 부지런히 산을 올랐지만 코스의 절반이 조금 더 되는, 아직 오픈하지 않은 산장이 있는 곳에 도착하니 시간이 애매해졌다. 무리해서 치달리면 못할 것도 없을 것 같았지만 아직 이른 봄이라 해가 빨리 진다는 점, 당일치기 트레킹이 아니라 오늘을 제외하더라도 3박 4일을 더 걸어야 한다는 점이 발목을 잡았다. 본격적으로 시즌이 시작되어 산장이 모두 오픈되는 시기를 맞추지 않고 일정을 세운 탓이었다.


중간에 돌아왔지만 생각보다 그다지 아쉽지 않았다. 어디까지 갔다는 것보다 자연속에서 트레킹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의미있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목적이나 목표보다는 과정의 중요함을 자연속에서 깨달아갔던 것 같다. 사회에서는 과정보다는 결과, 목표달성이 중요했었다. 사회가, 국가가 불굴의 정신으로 노력하면 안될 것이 없다고 강요하지만 거짓말이다.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도 있고 불가항력의 요소로 어쩔 수 없이 실패하는 경우도 있다. 다만 그것을 통해 배우고 점점 더 나아지면 되는 것이다. 다음에 올 때는 더욱 면밀히 계획하고 체력적으로도 충실히 준비하면 된다.


다시 산장으로 복귀해서 저녁식사를 했다. 4박 5일간 계획한 식사 메뉴에서 첫날은 산장에서 식사를 사먹는 것이었기 때문에 비싸더라도 먹을 수 밖에 없었다. 계획대로 하지 않는다면 나중에는 굶어야 할 수도 있다. 저녁을 먹고 나오니 하늘이 더욱 흐려져있었다. 슬슬 날씨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첫날 가장 힘들었던 것은 목표했던 곳에 도달하지 못한 것도, 바쁘게 산길을 오르내린 육체적 피로도 아니라 밤 동안의 추위였다. 토레스 델 파이네의 산장은 난방이 거의 되지 않는다. 우리의 화목난로 같은게 복도에 놓여있는데 장작을 자주 넣지 않기 때문에 밤이 깊어지자 금새 불이 꺼졌다. 그리고 새벽에 추위가 덮쳐왔다. 낮에 트레킹하던 복장 그대로, 봄가을용 오리털 침낭에 들어가서 산장에서 제공하는 얇은 솜이불을 덮었지만 이것들로는 밖에서 들어오는 추위를 막기는 역부족이었다. 자다가 추워서 잠을 깬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렇게 날이 밝도록 몇 시간을 추위에 오돌오돌 떨다가 이틀째 날을 맞았다.(겨울 언저리에 파타고니아를 여행한다면 겨울용 침낭은 필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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