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녘에 잠깐 잠에서 깼다. 어제보다는 덜했지만 역시나 깊이 잠들기에는 잠자리의 온기가 부족했다. 기왕 잠에서 깬 김에 그렇게 별이 많이 보인다는 토레스 델 파이네의 밤하늘을 보기 위해 스마트폰 불빛에 의지해 산장 밖으로 나왔다. 산장 테라스에는 나처럼 추위에 잠에서 깼는지 몇몇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불빛이라고는 세상 어딜 봐도 찾을 수 없는 까만 밤하늘에 별이 가득했다. 하늘 어느 부분에 별이 많다거나 어디가 유독 빛난다는게 아니라 그냥 하늘 전체에 별이 가득 박혀 있었다. 십년 전, 강원도에서 받은 예비군 야간훈련 중에 훈련이 지겨워져서 엎드려 대기하라는 지시를 무시하고 풀밭에 드러누웠다. 그때 문득 보게된 밤하늘에는 별이 가득했다. 그런데, 그때보다 훨씬 많은 별들을 여기서 보게 되었다. 서울에서는 맑은 날이라도 하나 찾기 힘들었던 별들이 실상은 매일 우리 머리 위에서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절로 감탄이 나왔다. 먼저 보고 있던 사람들이 돌아보며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었다. 잠시 후, 나보다 뒤에 나온 사람들이 다시 나지막하게 뱉는 감탄사를 듣고 나도 돌아보며 웃었다. 어차피 내 똑딱이 카메라로는 아무것도 찍히지 않겠지만 시도조차 해 볼 생각을 못하고 마냥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 한동안 고개를 쳐들고 있었더니 안그래도 무거운 머리를 평생 받쳐 온 목이 고통을 호소했다. 에라, 그냥 드러누워버렸다.
여행을 하며 몇몇 곳에서 별들이 가득한 밤하늘을 볼 수 있었는데, 특히나 기억에 남는 두 곳이 아타카마 사막으로 잘 알려진 '산 페드로 데 아타카마'와 이곳 토레스 델 파이네였다.(아타카마는 세계에서 가장 건조한 곳이라 별들을 관찰하기 적합한 환경이기 때문에 NASA를 비롯한 천문연구기관들이 이곳에 세계에서 가장 큰 천문대를 짓고 있었다.) 언젠가 다시 이런 곳에 가게 된다면 반드시 밤하늘을 찍을 수 있는 수동 기능이 있는 카메라를 가지고 가서 부족한 실력이나마 사진으로 기억을 남기고 싶다.
별빛으로 가득한 밤하늘은 좋았지만 추위로 떨리는 몸까지 데워줄 수는 없었다. 다시 침낭 안으로 들어가 방금 본 밤하늘을 생각하다 잠이 들었다.
밤하늘에 별들이 가득했다면 당시에는 분명 맑았을 하늘이 몇 시간 자는 동안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햇살이 두터운 구름을 뚫고 산장 뒤편 절벽을 금색으로 물들였지만 금새 힘을 잃었다. 아침을 짓는 사이에 빗방울까지 떨어지기 시작했고, 바람이 점점 심해졌다. 오늘은 W 코스의 가운뎃 부분을 갔다가 다시 왼쪽 아랫부분으로 내려와야 했기 때문에 다른 날보다 걸어야 할 거리도 길었다. 오늘 트레킹이 만만치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잠시 무지개를 보고 좋아했지만 뒤이어 따라오는 비바람에 얼굴이 어두워졌다.
산장을 출발한지 얼마 안되어 호숫가에 내려오니 바람에 호숫물이 밀려 파도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어마어마한 바람이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숙소 주인장이 토레스 델 파이네의 바람 이야기를 하며, 바람 때문에 선글라스가 벗겨지면 아래로 떨어지는게 아니라 위로 날아간다고 할때 솔직히 말하면 믿지 않았다. 그런데 직접 경험해보니 선글라스는 커녕 내가 날아가지 않는게 다행이라 생각될 정도였다.
강한 바람이 계속 불지만 가끔 특히나 센 바람이 밀어닥칠 때가 있었다. 이때는 서 있는게 불가능해서 몇 번이나 넘어지고 쓰러져야했다. 트레킹을 위해 빌린 등산용 폴을 땅에 대고 버텨봐야 소용이 없었다. 이렇게 한동안 맞바람을 헤치며 나가다보니 한가지 깨닫게 되었다. 센 바람이 불어닥칠 때는 예측 가능하게 된 것이다.
윗 사진을 보면 호수 멀리에서 하얗게 물보라가 생기는걸 볼 수 있는데, 호수 반대편에서 강한 바람이 불면 호수 표면이 온통 하얀 물보라로 변하면서 이쪽으로 다가온다. 이때는 걷는 것을 멈추고 냉큼 그자리에 웅크리고 주저앉아야했다. 한바탕 바람이 불어 닥치고나면 몇 초 후에 호수 표면에서 공중으로 올려진 물방울들이 소나기처럼 떨어져내렸다.
강한 바람을 맞으며 한발한발 걷다가 더 센 바람이 올 기세면 자리에 웅크리고 앉기를 수십차례나 했다. 안그래도 걸어야 할 거리가 많은데 이렇게 가다보니 좀처럼 거리가 줄지 않았다. W코스에서 가운데 윗쪽으로 갈라지는 곳에 도착했을 때는 벌써 점심시간이 되어있었고, 몇 시간을 바람과 비와 싸우며 걷다보니 속옷까지 완전히 젖어버렸다.
바람만 겨우 피하도록 되어있는 대피소에서 버너에 물을 올려 라면을 끓이며 이번 토레스 델 파이네는 나에게 허락되지 않는 곳이라는 생각을 했다. 오늘 가야할 곳이 토레스 델 파이네에서 가장 훌륭한 경치를 볼 수 있는이지만 이런 날씨에는 제대로 볼 수도 없을 것이고 흠뻑 젖은 옷에 기온마저 떨어지면 큰 문제가 생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점심식사 후, 오늘 숙소가 있는 곳으로 바로 가기로 결정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오후가 되니 바람이 제법 잦아들었다. 그래도 오늘 포기한 트레킹이 아쉽기는 했지만 안전을 담보할 수 없는 트레킹은 절대 해서는 안되기 때문에 결정을 후회하진 않았다.
토레스 델 파이네 W코스으 서쪽 부분을 걷다보면 갑자기 까맣게 타버린 숲을 만나게 된다. 몇 년 전, 이 곳에서 이스라엘 트레커가 규정을 무시하고 숲에서 야영을 하다가 산불을 냈다고 한다. 척박한 자연속에서 오랫동안 만들어진 자연이 인간의 이기심과 욕심(고작 캠핑장 사용료를 아끼려고 그랬다니...) 때문에 순식간에 파괴된 것이다. 죽어버린 나무들 사이로 이제야 파란 순이 돋고 있었다. 자연은 느리지만 부지런히 복구를 하고 있는 것이다. 다녀온지 2년 반이 넘는 시간이 흘렀으니 지금은 훨씬 나아졌으리라 기대해본다.
드디어 뻬오에 호수 앞에 있는 산장에 도착했다. 이 곳의 시설은 앞서 묵었던 두 산장보다 좋았다. 화목난롯 가에는 소파가 있어서 여행자들이 그날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거나 책을 읽거나 하면서 휴식을 취할 수 있어서 더욱 좋았다. 영국에서 신혼여행으로 파타고니아에 왔다는 젊은 신혼부부는 처음엔 캠핑을 했다가 적잖게 고생을 했다고 한다. 특히 캠핑에 익숙하지 않아보이는 여자는 상당히 힘들어 보였다. 그래도 남편에게 투덜대거나 불평을 늘어놓지 않고 사근사근 대하는 모습이 무척 보기 좋았다.
산장 앞에 있는 뻬오에 호숫가로 나갔다. 오전보다 바람이 많이 잦아졌고 더 이상 흰 물결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바람이 약한 것은 아니었다. 산장 앞에 있는 꽤 커다란 칠레 국기가 한번도 처지지 않고 쉴새없이 펄럭였다. 바람 때문에 끊임없이 펄럭이다보니 국기 끝이 헤어져서 꽤 짧아져있었다.
호수 앞에는 선착장이 있는데 며칠 뒤면 배가 다니기 시작할터였다. 이 배를 타고 들어와서 트레킹을 시작하거나 트레킹을 마치고 나가면 훨씬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데 며칠 차이로 십 수km를 걸어서 차를 타러 가야했다.
하늘은 맑아졌고 푸른 호수와 산들이 아름다웠다. 불과 반나절 전에 그런 혹독한 바람이 불었다는게 직접 겪지 않았으면 생각도 할 수 없었을 것 같았다. 그날 불었던 바람의 최고 풍속은 25km/h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산장마다 며칠간의 날씨와 풍속에 대해 트레커들이 볼 수 있도록 칠판에 써놓고 있었다.) 비록 이 날의 목적했던 코스로 트레킹하지는 못했지만 토레스 델 파이네의 거센 바람만큼은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힘들었지만 꽤 재밌는 경험이었다. 어차피 모든 일을 생각대로, 맘 먹은대로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다시 생각해봐도 이곳의 바람은 정말 대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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