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밤새 빈대로부터 맹렬한 공격받은 줄도 모르고 눈을 떴다. 빈대는 내가 누웠던 침대 벽쪽 어딘가에 서식하는 듯, 벽쪽으로 누웠던 팔, 다리로 집중 흡혈을 하고 사라졌다. 한쪽 팔다리만 수십군데의 붉은 반점이 생겼다. 어떻게 한두군데도 아니고 그렇게 물리는 동안 모를 수 있냐고 할지 모르지만 빈대는 모기보다 훨씬 교묘하게 물고 사라진다. 그리고, 물리고 난 다음 가려움은 모기보다 심하다. 동남아를 여행하면서 숱한 벌레들의 괴롭힘에 면역이 되었기 때문일까, 인터넷에서 본 여행 중 빈대로 고생했던 사람들 괴로운 경험담보다 훨씬 덜 했다는 것이 불행중 다행이었다. 빈대에 물린 자국을 긁으며 시드니에서의 이틀째 여정을 시작했다.


뉴질랜드도 그랬지만 호주에도 타이 음식점이 많았다. (동남아와 지리적으로 가까워서 동남아 사람들이 많이 이주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 중에 사람들로 붐비는 타이 음식점이 있었는데 겉으로 보기에 꽤 비싸보이는 집이라 선뜻 들어가기가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입구에 마련된 메뉴판에 '보트 누들'이라는 이름을 보고나서는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음식 가격도 한국식당의 메뉴보다 훨씬 저렴했다.


보트누들은 방콕과 치앙마이에서 자주 먹었던 고깃국물을 진하게 우려낸 쌀국수다. 영문명이 어째서 보트누들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부들이 고기잡는 중에 보트에서 먹던 국수인가?) 이 국수를 거의 1년만에 지구 한바퀴를 거의 다 돌아 여기에서 먹을 수 있다니... 약간 감격스러웠다.


맛은 있었으나 양이 적다. 하긴 태국음식들은 뭐든 양이 적었다.


아침식사로 태국 쌀국수를 먹고 이 날의 첫 일정으로 찾아간 곳은 시드니의 피쉬 마켓이다. 앞서 여행했던 오클랜드에도 피쉬 마켓이 있었지만 그보다 훨씬 규모가 크고 종류도 많다. 서울 노량진 수산시장이나 부산 자갈치 시장 같은 곳이라 보면 될 것 같다. 머물렀던 곳에서는 조금 떨어져 있었지만 처음 가는 길을 구경삼아 다니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가끔 지도에 있는 길이 실제로는 나타나지 않거나, 건널 수 있을거라 생각했던 길이 중앙분리대가 있는 넓은 차도라 당황스러울 때도 있다.




시드니 피쉬 마켓의 규모는 생각보다 훨씬 컸고 현지인과 관광객들로 무척 붐볐다. 여러 동으로 나뉘어진 건물마다 다양하고 싱싱한 해산물들이 가득 했다. 워낙 해산물을 좋아하다보니 보이는 것마다 모두 사서 먹어보고 싶었다. (물론 고기류도 좋아하지만 고기는 구경하는 재미가 없다.) 하지만 물가가 비싼 동네다보니 다들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사지도 않을 해산물들을 사진만 엄청 찍어놓았다. 우리나라에서 도미로 불리는 스냅퍼, 바다송어, 무지개송어, 연어, 가리비와 바닷가재 등등... 


하지만 아쉬웠던 것은 칠레에서는 너무 싸서 정말 이 가격이 맞나 의아했던 해산물이 여기서는 내 주머니 사정으로는 쉽게 사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이럴 때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 중에서 우리나라와 가장 가격 차이가 많이 나거나 가격대비 저렴한 것을 선택하는 것이 노하우다.


아, 연어.... 크고 먹음직스러운 연어...



피쉬 마켓에서 해산물을 대량으로 사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현지인이고 여행자들은 조금씩 포장해 놓은 해산물을 사서 공용 테이블에서 먹거나 레스토랑에서 해산물 메뉴를 즐길 수 밖에 없다. 연어나 새우, 가리비 등을 무척 사고 싶었지만 그 지저분한 숙소 주방에서 이 좋은 재료를 요리할 수는 없었기에 아쉬움만 가득 안고 레스토랑으로 발길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그 주방에서 연어회를 떴다가는 식중독에 걸렸을 것 같다.


맛있지만 튀김옷이 두텁고 기름졌다.


레스토랑에서 맛 본 메뉴는 갓 탈피를 한 게를 튀김옷을 입혀 바삭하게 튀긴 것이었다. 탈피를 하고 나면 게껍질이 부드럽기 때문에 튀겨서 통째로 먹을 수 있는데 무척 고소하고 맛있다. 피쉬 마켓에서 먹은 이 게튀김도 나쁘지 않았지만 베트남 호치민 로컬 음식점에서 먹은 게튀김에 비하면 소문난 맛집과 쇼핑몰 푸드코드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피쉬 마켓을 구경하고 온 길과는 다른 길로 시내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서 본 선착장에는 특이하게도 크고 작은 요트들 사이로 군함과 잠수함이 정박해 있었다.




서울의 명동과 같은 시드니의 상업지구. 길거리 공연을 하고 있었는데 수준이 높아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폭스바겐의 오래된 미니버스. 성능과 연비는 좋지 않겠지만 이런 단순하면서 클래식한 디자인은 좋다.



번화가 사거리 모퉁이에 고풍스러운 건물이 있어서 사진을 찍고보니 간판이 'PUB'이었다. 그런데 그 위에는 음각으로 'BANK OF AUSTRALASIA'라고 새겨져 있다. (AUSTRALASIA는 호주와 뉴질랜드, 근처의 서남태평양 일대를 모두 포함해 부르는 이름이란다.) 옛 은행건물을 지금은 펍으로 쓰는 모양이었다. 이런 멋진 펍이라니 들어가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약간은 어두운 분위기에 생맥주를 따르는 노즐이 여러 개 붙은 전형적인 영국식 펍이었다. 파인트 잔에 좋아하는 기네스 생맥주를 시키니 아침부터 줄창 걸어 피곤한 몸에 괜히 생기가 돈다.


기네스의 부드럽고 진한 거품을 너무너무 좋아한다. 마치 생크림 같다.


생감자를 바삭하게 튀겨낸 솜씨도 훌륭했다.



이 날 저녁 마무리가 어땠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언뜻 나는 기억으로 밤늦게까지 시드니 시내를 돌아다닌 것 같은데 이 날의 기억인지 다른 날인지 확실하지 않다. 정확한 것은 이 날 밤에도 다시 빈대의 맹렬한 공격을 받았고, 더 이상 거기서 머무는걸 포기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틀간 머문 이 최악의 숙소 때문에 시드니에 대한 기억이 좋게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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