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1년에 가까운 여행이 끝나가고 있었고 귀국 날짜가 다가올수록 기분은 복잡미묘해졌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계속해서 여행을 더 하고 싶었다. 여행중에 가끔 짜증이 나거나 힘든 일도 있고 그럴때면 순간 한국으로 돌아갈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몇 분 지나지 않아 여행하고 있다는게 다시금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편한 여행도 아니고 행색은 꽤죄죄 그 자체였지만 철이 든 이후로 이렇게나 스트레스 없이 살았던 시간은 없었다. 더 이상 하기가 싫어질 때까지 할 수 있으면 좋을텐데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시드니에서 묵었던 그 최악의 숙소 사진은 올리지 않으려했다. 내 스스로가 다시 그때 기분을 느끼는 것조차 싫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숙소를 나오던 날 사진을 (더구나 그 날은 몇 장 되지도 않는다.) 정리하다보니 내 매트리스를 찍어놓은 사진이 여러 장 나왔다. 그 당시에는 너무도 화가 나서 우리나라 유명 여행까페에 죄다 올려놓으려고 찍었던 것 같다. 몇 년 지나고 나서 다시 사진을 보니 '이런 최악의 숙소가 있었지' 정도로만 생각된다. 시간이 약인지, 독인지...



이 숙소에 온 뒤로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몸 여기저기가 그렇게 쑤시는 것이었다. 근육통이나 잠을 잘못 자서 그런게 아니라 그냥 여기저기가 찔린듯 아팠다. 귀찮지만 매트리스에 씌워진 시트를 벗기고 보니 어이없게도 매트리스에 커다란 구멍이 숭숭 뚫려있었고 몸을 매트리스에 누이게 되면 스펀지가 내려가면서 아래에서 끊어진 스프링으로 보이는 뾰족한 철심이 몸을 찌를 수 밖에 없는 상태였다. 이런 구멍이 한두개면 시트를 벗기고 매트리스를 확인하려는 생각도 들지 않았을 것이다.


밤새 내몸을 찔러대던 스프링 철사


시트를 걷어보니 매트리스에 총알 세례라도 받은 듯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액션영화에서 주인공이 매트리스를 들어올려 적의 총탄을 막는 장면이 떠오른다.


게다가 매트리스와 시트에는 죽은 빈대와 빈대가 피를 빨다가 눌려 터진 듯한 핏자국이 여기저기 있었다. 이틀째 아침에 이 상태를 보고 나서 바로 짐을 싸서 숙소를 탈출했다. 여행을 하면서 아무리 환경이 안좋은 숙소더라도 환불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숙박비를 포기하고 나온건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이날 폴더에 있는 사진을 보면서 어째서 이렇게 사진이 없을까 의아했었는데 글을 쓰다보니 생각이 났다. 너무 좋지 않았던 숙소의 반대급부에다 여행 마지막 숙소라는 생각으로 이번에는 꽤나 좋은 숙소를 잡았다. (보통의 게스트하우스는 여전히 만원이라 자리를 구할 수 없기도 했다.) 그리고, 모든 짐을 풀어 하루종일 빨래를 돌렸다. 앞 글에서도 썼지만 빈대에 한번 물리면 모든 옷을 다 세탁하고 빨 수 없는 것들은 햇볕에 말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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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글을 쓰고 석달이 넘게 블로그에 글을 쓰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올린 글이 7월 31일이었으니... 일이 갑자기 바빠졌거나 인터넷 접속이 안되는 오지에 떨어진 것도 아니었다. 다만, 블로그에 접속하기 싫었고, 글을 쓰는게 무서웠다. 이제 하루나 이틀이면 1년간의 여행기가 모두 끝날터였다. 그 뒤에는 써야할 무엇도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한동안 아예 묻어놓고 노트북도 켜지 않았다. 가끔 '그래도 마무리는 해야할텐데' 라고 생각하면서도 철저히 외면하고 있었다. 그러다 엊그제 바꾼 아이폰의 백업을 위해 거의 100일만에 노트북을 켰더니 쓰다만 페이지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누가 봐주길 바래서가 아니라 여행을 잊지 않기 위해 시작한 블로그인데 나는 여전히 4년전의 그 여행을 마무리할 마음이 생각이 없었나보다. 어쨌든 다시 시작했다. 그리고, 이 여행이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가 되도록 앞으로도 다녀온 여행을 꾸준히 정리하기로 결심했다.




좋은 숙소로 옮긴 다음 근처 수산물 시장으로 향했다. 이전 숙소는 부엌조차 도저히 음식을 만들 수가 없을 정도로 더럽고 지저분해서 군침도는 해산물들을 보고도 살 생각을 못했었다. 이제 깨끗하고 멋진 부엌이 생긴 김에 몸보신이 하고 싶어졌다. 커다랗고 살이 통통하게 오른 새우와 초밥용으로 다듬어놓은 연어 한토막, 호주산 와인까지 샀다. 남미나 멕시코에 비해서는 비싼 편이었지만 우리나라에 비해서는 무척 저렴한 편이라 돌아가기 전에 실컷 먹어둘 생각이었다.


소금구이도 버터구이도 아니다. 그냥 올리브유를 두르고 구울 뿐이지만 재료가 좋으니 더 바랄게 없다.


뉴질랜드에 이어서 다시 연어초밥에 도전했다. 연어가 살이 무르고 기름기가 많은 생선이라 첫 시도에는 껍질을 벗기고 손질을 하는데 무척 힘들었다. 모양도 엉성했고 힘을 과하게 주다보니 살이 부서지기도 했다. 이번이 세번째 시도였는데 이번에는 모양이 꽤 마음에 들게 나왔다. 그냥 밥을 뭉쳐 연어살을 올린 것을 간장에 찍어 먹을 뿐이지만 지금까지 먹었던 어떤 고급 초밥집의 그것보다 훨씬 맛있게 느껴졌다. 이런 재미가 여행이 주는 커다란 즐거움이다. 호주는 썩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이때 먹은 연어초밥은 평생 기억에 남을 만찬이었다.



얼마전 일주일간 휴가를 다녀왔다. 이번 휴가지는 쓰촨성 청두를 거쳐 주자이거우와 황룽이었다. 와라스 69호수의 감동, 파타고니아의 광활함이나 메이리설산의 웅장함까지는 아니었지만 가을이 완연한 주자이거우는 아름다웠다. 길고 길었던 이 여행기를 마치면 그걸 정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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