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다녀온 후, 사람들에게 가장 빈번하게 들은 말은 '어디가 제일 좋았어?' 였다. 이것처럼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 또 있을까? '당신은 먹어 본 음식중에 어디서 먹은 무슨 메뉴가 가장 맛있었습니까?'라는 질문과 마찬가지다. 어떤 날은 스테이크가 먹고 싶더라도 어떤 날은 청국장이 먹고 싶기도 하다. 게다가 같은 음식이라 하더라도 만드는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여행지도 마찬가지라서 어떤 날은 모든 것을 녹여버릴듯 강렬하게 내리쬐던 스페인의 태양이 생각날 때가 있고, 어떤 날은 맹렬한 칼바람에 온몸을 비틀거리며 트래킹했던 파타고니아가 사무치게 그리워지기도 한다. 많은 곳들 중에서 싫었던 곳은 이야기 할 수 있지만 제일 좋았던 곳을 딱 집어 이야기하긴 어렵다. 그렇다하더라도 이번에 이탈리아에서 머문 3주동안, 적어도 이탈리아에서는 아시시가 제일 마음에 남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나폴리에서 기차를 타고 로마에 가서 거기서 아시시행 기차로 갈아탔다. 아시시는 작은 도시기 때문에 기차가 많지 않으므로 시간을 잘 맞춰야하는데 유럽은 각 나라마다 스마트폰이나 컴퓨터에서 예약할 수 있는 시스템이 무척 잘 갖춰져 있어서 편리했다.(게다가 결제하기 위해 액티브엑스를 설치하거나 자질구레한 확인 사항들이 없어 무척 편리하다.)
하지만, 나폴리에서 아시시로 가는 가장 편리한 방법은 버스다. 기차 예매를 마치고 나서 민박집 아주머니께 말씀드렸더니 버스가 있다고 하셨다. 여행자에게는 주위 사람들 특히, 숙소 주인장께 이것저것 물어보고 정보를 얻는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걸 다시 느끼게 되었다.
아시시의 아침은 수백마리의 새들과 함께 맞는다. 제비처럼 생긴 수많은 새들이 벌레를 잡기 위해 활강한다.
위 사진에 찍힌 검은 먼지처럼 보이는 것들이 그 새들이다.
산타 키아라 대성당 앞 광장에서 바라 본 풍경
아시시는 완만한 구릉 위에 형성된 작은 도시이다. 중세에는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대부분의 도시들이 높은 곳에 있고, 맨 위에는 그 지역의 지배자가 사는 성이 위치해 있는데 아시시도 전형적으로 이런 모습이다. 어제 오후 느지막하게 도착했을 때는 어스름한데다 사람들도 다니지 않아서 정말 중세 도시에 와 있는 느낌이었는데 다음날 아침 화창한 햇살 아래에서 보니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경치가 무척 아름다웠다.
마침 숙소가 산타 키아라 성당 앞 광장에 위치해 있었다. 싼 방이라 방에서 경치가 내다보이진 않았지만 숙소 밖으로 나오면 언제든 멋진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산타 키아라 대성당 앞 광장의 분수대
아침부터 아이들이 분수대에서 물장난을 시작할만큼 햇살이 강하다.
산타 클라라 대성당 앞 광장
산타 키아라 대성당
아시시는 잘 알려진 것처럼 프란체스코 성인이 프란체스코회를 설립한 곳이지만 이 곳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수도사나 수녀들 중에 교황으로부터 인정 받은 성인이 여러 명 있다. 13세기 초 키아라 수도회를 만든 키아라(클라라) 성인도 그 중에 한 명이다. 키아라 수녀 사후에 성인으로 시성되고 그녀를 기리기 위해 성당을 지었다고 한다.
아시시는 중세 도시의 면모를 유지하고 있지만 깨끗하게 정돈된 느낌이다. 로도스가 전쟁터 한 가운데 있었던 중세 도시의 느낌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면 아시시는 훨씬 현대적으로 다듬어진 느낌이다. 집마다 창가에 꽃이 핀 화분들을늘어놓았고 가로등도 중세풍이지만 최근의 것인듯했으며 길도 평탄하게 잘 다듬어져 있었다. 골목골목을 다니며 구경하는 것으로 아시시에서의 일정을 시작했다.
이름을 잊어버린 성당의 정문. 사자가 사람을 누르고 머리를 무는 형상의 조각이 있다.
신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이런 벌을 받을 것이라 협박하는 용도였을 듯하다.
나이 들어보이는 부모와 어린 아들들(부모가 아니라 조부모일지도...)
유럽에서는 나이든 부모가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여행하는 모습이 굉장히 흔하게 보였다.
오래된 건물의 벽에는 사진에서 보이는 것처럼 쇠로 만든 구조물이 굉장히 많이 박혀 있었다.
정확한 것은 모르겠지만 건물벽이 갈라지거나 훼손되는 것을 막는 용도인 것 같다.
이리저리 골목을 돌아 코무네 광장으로 나왔더니 중세 도시와 어울리지 않게 최신형 오토바이 수십대가 서 있었다. 오토바이가 모두 유명한 이탈리아 브랜드인 두카티였다. 두카티 동호회라도 하는듯. 그 중에는 멋진 라이더 복장을 한 여성 라이더들도 여럿 보였다.
오전임에도 날이 무척 더워서 코무네 광장에 있는 까페에서 쉬기로 했다. 카페 문화가 발달한 유럽에서 '아메리카노' 특히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흔치않은 메뉴다. 유럽에서는 대부분 에스프레소나 에스프레소에 우유를 탄 라떼 종류를 마시고 물을 탄 아메리카노는 메뉴조차 없는 경우가 많다.
이탈리아는 유럽에서도 커피 문화가 발달한 곳이며, 세계에서 처음 생긴 카페가 베네치아 산 마르코 광장에 있는 카페일 정도로 카페도 굉장히 많다. 게다가 대부분의 물가는 비쌌지만 커피 값은 무척 싸서 에스프레소나 카페라떼는 1~1.5유로면 마실 수 있다. 이탈리아를 여행하는 사람들에게는 화장실이 급하다면 돈내고 공공 화장실을 사용하지 말고 근처 카페에서 커피 한잔 시켜놓고 카페의 화장실을 이용하라는 여행팁까지 있을 정도다.
커피는 당연히 따뜻하게 마시는 음료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커피에 얼음을 넣은 메뉴도 없다. '아이스...'로 시작하는 메뉴 자체가 없었다. 더운 날씨라 시원한 것을 마시고 싶어서 궁색하게도 '시원한 커피'가 있냐고 했더니 나온게 사진의 커피 아이스크림 같은 것이었다. 처음에는 황당했지만 커피향도 진하고 무척 맛있었다.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스페인에서도 프랑스에서도 볼 수 있었던 스타벅스를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는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다.
남미의 유명한 예술가 보테로의 전시회를 하고 있었다. 관심이 있었지만 관람료가 꽤 비싸서 포기했다.
산 프란치스코 대성당
12세기 말 아시시에서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프란치스코 성인은 로마 카톨릭에 귀의하여 청빈, 소박을 강조하는 프란치스코회를 세웠다고 한다. 산 프란치스코 성당은 성인의 사후에 지어졌으며 그의 유해가 안치된 곳으로 많은 유물을 보관하고 있으나 실제 성인이 가르침을 전한 곳은 아니다. 성인이 아시시에 처음 세운 교회는 구릉 아래 아시시 역 근처에 있는 산타 마리아 데글리 안젤리 성당에 있다. 얼마나 청빈함을 강조했는지 이 작은 교회는 안젤리 성당 본당 내부에 있다. 교회내에 교회가 있는 것이다. 아시시를 떠나기 위해 기차를 기다리며 사전 정보없이 방문했던 성당에서 운 좋게 볼 수 있었다.
산 프란치스코 성당은 성인에 대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으며, 성당내에 프란치스코회의 수도원도 있었다. 내부는 사진을 못찍게 되어 있는지 찍은 사진이 없다.
산 프란치스코 성당의 입구
성당으로 들어가는 입구와 출구가 따로 있다. 성당을 나오면 그 유명한(산 프란치스코 성당 사진에 항상 포함되는) 아름다운 회랑이 나온다.
산 프란치스코 성당의 회랑
스페인에는 돼지 뒷다리를 말린 후, 아주 얇게 잘라서 과일이나 빵에 얹어 먹는 하몽이라는 음식이 있다. 베이컨과 비슷하지만 훨씬 얇고 덜 짜다. 나같이 모르는 사람은 그게 그것인 것 같은데 가격도 천차만별이다. 이탈리아에도 비슷한(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음식이 있는데 아시시에도 이 지방에서 만든 치즈와 햄 같은 훈제 음식들을 파는 커다란 가게가 있었다. 위 사진에서 벽에 걸린 것들이 돼지 뒷다리이고, 잘린 단면에 붉게 박힌 것들은 후추열매다. 나중에 스페인을 여행하면서 깨닫게 된 것이지만 이탈리아와 스페인은 문화적으로 매우 유사한 점이 많으며, 언어도 비슷한 단어들이 많았다.
아시시의 기념품점에는 프란치스코회 수도사들을 모델로 한 캐릭터 상품들이 대단히 많다. 하지만 청빈, 검소함을 강조한 단체의 수도사라고 해서 근엄한 표정을 하고 있는게 아니다. 차림새는 프란치스코 수도사의 복장 그대로 거친 천을 둘러쓰고 허리띠만 졸라맸지만 익살맞고 유머러스한 표정의 캐릭터들이 다양한 모양을 하고 있어서 하나하나 구경하는게 무척이나 재미나다.
이 날 느지막하게 점심을 먹고 마지막으로 한 것은 아시시에서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서 해지는 광경을 본 것이다. 지금은 거의 찾는 사람도 없고 완벽히 복원된 것도 아니지만 위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아시시에도 가장 높은 곳에는 옛 성이 있다.
성으로 오르는 길에서 내려다 본 아시시의 전경
성채는 꽤 컸지만 완벽하게 복원되지는 않은 것처럼 보였다. 찾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은데다 도착한 시간이 오후 느지막해서 성 안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사실 성을 보러 온 것이 아니라 들어가고 싶은 생각도 별로 없었다.
밀밭, 포도밭, 올리브밭...
성벽이 무너진 자리, 밤에 성을 비추는 조명이 설치된 구조물 위에 이집트에서 모래바람을 피하기 위해 산 보자기 같은 헝겊을 펴고 앉았다. 처음 도착했을 때 몇 명 있던 사람들도 어느새 내려가고 없었다. 주위는 고요하고 가끔 새소리만들렸다. (아시시에는 새들이 무척 많다. 아침에는 벌레를 잡기 위해 나르는 수백마리의 새들을 볼 수 있다.)
한참 아시시를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으니 해가 지고 있었다. 긴 여행을 떠나기 전에 나는 도시에서 유적이나 예술품들을 보고, 도시를 구경하는걸 좋아한다고 생각했었다. 여행을 마치고 나니 내가 좋아했던 것은 자연에서 느끼는 고요함, 평화로움, 장엄함이었다. 40년 동안 모르고 살았던 나를 여행을 통해 만나게 된다. 여행은 그런 것인가보다.
물론 중세 도시의 아시시, 프란치스코회의 종교 도시 아시시의 모습도 포함되지만, 내가 아시시를 이탈리아에서 가장 좋아하게 된 첫번째 이유는 성채에서 내려다 본 아시시의 풍경과 해질녘의 고즈넉함이 좋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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