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우포에서 아름다운 호수와 강을 보며 2박 3일을 보낸 후에 국립공원이 있는 통가리로(Tongariro)라는 작은 도시(라기보다 마을에 가까운...) 로 옮겼다. 이곳에 온 이유는 단 하나, 북섬에서 유명한 트레일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뉴질랜드에서 가장 유명한 트레일로는 세계 3대로 꼽히기도 하는 밀포드 사운드의 트레일이 있지만 이번 여행에서 남섬은 제외했기 때문에 북섬에 한정해서 찾다가 '통가리로 알파인 크로싱'을 발견하게 되었다. 뉴질랜드의 트레일이라면 빙하가 깎아놓은 피요르드나 설산을 보며 걷는 코스를 떠올리지만 북섬에는 이런 것들이 없다. 아름다운 피요르드나 설산을 화산폭발로 만들어진 거칠고 기묘한 지형이 대신한다.
통가리로 알파인 크로싱이 있는 통가리로 국립공원은 타우포 호수의 남쪽으로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데 이 곳은 유네스코 자연유산이자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1990년 세계자연유산으로 등록되었으나 1993년 마오리의 성지라는 문화적 가치가 재조명되어 문화유산으로도 등록되었다. 그리고 위키백과에서 본 재밌는 사실은 테헤우헤우 투키노(아마도 마우리족장이 아닐까)가 정부에 토지를 선물하여 1894년 뉴질랜드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항상 원주민과 이주민 사이에 있었던 쟁탈과 침략의 역사만 보다가 원주민이 정부에 토지를 선물해서 지정된 국립공원이라니 놀라우면서 더욱 가치있게 느껴진다. (잠시 말이 좋아 선물이지 강탈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1800년대 말에 황무지 같은 이곳을 정부가 굳이 강탈할 이유는 없었을 것 같다. 이곳이 아니더라도 개척해야 할 땅은 널려있었을테니 말이다.)
게스트하우스에 피어있던 수국. 뉴질랜드에서는 정말 여기저기서 흔하게 볼 수 있었다.
통가리로로 다가가자 산꼭대기가 분화구인 화산들이 많이 보이기 시작했다. 당시 한여름이었음에도 산꼭대기에는 잔설이 남아 있었다.
통가리로는 생각보다 훨씬 작은 마을이었다. 버스는 주유소겸 마트를 겸하는 곳에 사람들을 내려주었는데 숙소로 걸어가면서 보니 띄엄띄엄 있는 건물들은 대부분 게스트하우스나 레스토랑이었다. 숙소는 무척 훌륭했지만 연말이 다가와서인지 묵고 있는 여행자들은 많지 않았다. 뉴질랜드에서 묵었던 숙소 중에서 가장 깔끔하고 훌륭한 곳이었는데 연말에 젊은 서양여행자들의 떠들썩한 분위기에 휩쓸리고 싶지 않아서 다른 곳보다 조금 비용을 더 썼기 때문이었다. 시설도 훌륭했고 주인도 친절했지만 무엇보다 주방이 무척 깨끗하고 조리시설도 잘 갖춰져 있어서 마음에 들었다. 남미 이후로 게스트하우스에서 식사를 만들어 해결하는 경우가 많다보니 주방시설도 매우 중요한 숙소 평가요인이 되었다.
통가리로가 작은 곳이다보니 흔히 보이던 대형 마트도 없어서 다시 버스에서 내렸던 주유소의 작은 마트로 가야했다. 내일 트레킹하면서 먹을 것들, 트레킹 다녀와서 먹을 것들을 모두 사려는 것이었는데 연말 연휴를 앞두고 물건이 얼마 없어서 살 수 있는 것들, 살만한 것들은 빠짐없이 골라야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국립공원 안까지 막걸리, 전, 산채비빔밥 등등을 파는 곳들이 꽉 들어차 있어서 당일치기 산행이라면 간식만 조금 챙기면 되지만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트레킹이나 산행중에 먹거리를 파는 곳이 거의 없다. 그래서 전날 트레킹 중에 먹을 끼니를 반드시 준비해야 한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숙소 뒤편으로 해가 지고 있었다. 저녁놀은 항상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든다.
다음날 아침 통가리로 국립공원으로 가는 버스를 탓다. 통가리로 알파인 크로싱은 해발 1100미터가 조금 넘는 곳에서 시작해 몇 개의 분화구와 호수를 보며 1900미터 가까이 오른 다음 반대편으로 내려가는 총 거리 19킬로미터가 조금 넘는 트레일이다. 이 공원의 주요 산들은 루아페우, 나우루호에, 통가리로 산인데 높이는 2000미터부터 2700미터 남짓으로 높지는 않지만 모두 화산이라서 거칠고 황량해서 기묘한 경치를 볼 수 있다. 그래서인지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프로도가 반지를 없애기 위해 화산으로 가던 장면을 촬영했다고 한다.
해외에서의 트레킹은 항상 날씨 걱정을 하게 된다. 국내에서처럼 날씨에 맞춰 여행스케줄을 조절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역시나 날이 흐리다.
날씨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머리 위로는 구름이 잔뜩 낀 날씨였다. 아직 이른 아침이니 해가 뜨고 기온이 올라가면 구름이 걷히길 기대하며 트레킹을 시작했다. 트레킹 초반은 초원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완만한 경사를 오르는 쉬운 길이었다.
초반에는 길 옆으로 풀들이 빽빽하게 자라고 있었는데 천천히 오르다보니 바위에 달라붙다시피 자라는 식물들만 남아있고 화산활동으로 만들어진 거무튀튀한 돌들이 울퉁불퉁 솟아있었다.
심하진 않지만 조금씩 경사가 가팔라졌다. 오르기 어려운 곳은 어김없이 나무로 만든 계단이 놓여져 있어서 힘들지는 않았다. 뒤돌아보니 봉긋하게 솟은 기생화산과 거무튀튀한 흙과 돌들이 덮인 땅이 보였다. 제주도 오름에 오른 후에 내려다보는 풍경과 비슷해서 낯설게 보이지 않았다.
주변 풍경이 점점 더 거칠고 황량해졌다.
한참 오르막을 올라서 눈앞에 보이는 봉우리를 돌아 지나면 갑자기 평평한 분지가 나온다. 사방이 빙 둘러싸여 있어서 분화구처럼 보이는데 크기가 제법 컸다. 이 분화구처럼 보이는 분지를 가로질러 반대편으로 가야한다. 날씨가 맑아지길 기대했지만 높이 오를수록 구름은 더 짙어졌다.
통가리로 알파인 크로싱에서 가장 높은 지점에 올랐다. 이곳에 검붉고 기괴하게 생긴 분화구가 있는데 당장이라도 땅이 흔들리며 용암을 분출할 것처럼 생겼다. 원래대로의 트레일 코스라면 이곳을 지나서 몇 개의 호수를 감상하며 내리막을 걸어 내려가면 된다. 그런데 하필이면 당시에 감지된 지진활동으로 반대편으로 내려가는 길이 통제되고 있었다. 나머지 절반을 볼 수 없으니 실망스럽지 않을리가 없지만 1년 가까운 여행기간동안 이런 경우를 여러 번 겪다보니 안될건 일찌감치 포기할 줄 아는 마음도 길러졌나보다. 여행도, 인생도 그렇다. 안되는걸 마음속에 담아둘 필요는 없다.
통제하는 길 앞까지만 가보기로 했다. 그런데 갑자기 바람이 심해지고 빗방울도 흩뿌리기 시작했다. 마음이 급해졌다
용암이 분출된 화산이 여러개였던 것 같다. 여기저기 작은 분화구에 물이 고여 작은 호수를 만들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호숫가를 돌아 내려가는 코스였는데 멀리서 눈으로만 봐야했다. 호숫가까지는 갈 수 있지만 갈까말까 고민하다가 내려가지 않았다. 다시 올라오는걸 감수할만큼 호수가 매력적이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려가는 길은 꽤나 고생스러웠다. 내려가기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은 코스의 가장 가파른 경사에서 갑자기 바람이 심하게 불면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얇은 바람막이로는 가려지지 않을만큼 제법 비가 많이 내렸고 바람 또한 심하게 불어서 경사를 내려가기 위험할 정도였다. 다들 길가 바위에 달라붙어 바람이 멎기를 기다렸다. 그 시간이 길진 않았지만 몸이 젖고 체온도 떨어지면서 컨디션이 안좋아졌다. 높지 않더라도 산의 기후는 종잡을 수 없으니 조심해야 한다는 걸 다시 한번 느꼈다.
어느 정도 내려오니 이곳은 햇볕이 쨍쨍했다. 그날의 날씨는 참 야속했다.
트레킹을 마치고 출발점으로 돌아오니 이곳은 뉴질랜드 치고는 꽤나 햇볕이 강렬하게 내리쬐이고 있었다. 일광욕을 좋아하는 서양 여행자들은 여기저기 햇볕아래 등을 대고 누웠다.
이번 여행의 마지막이었을 통가리로 국립공원에서의 트레킹을 마쳤다. 특별히 인상적이거나 훌륭했다는 느낌은 없지만 트레킹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번 다녀올만하다. 당시를 떠올리면 아쉬운 점은 자연을 보고 걷는 것을 좋아하면서 왜 여행을 마무리하는 장소로 시드니를 선택했을까 하는 점이다. 호주에서의 짦은 일정을 생략하고 뉴질랜드 여기저기를 다니며 트레킹을 했다면 훨씬 나은 마무리가 될 수 있었을 것 같다.
트레킹을 할 수록 어디가 최고의 트레일이다 하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장소를 판단하는 개인의 기준은 절대로 객관적이지 않다. 같은 장소라도 그 날의 날씨가 어땠는지, 본인의 컨디션은 어떤 상태였는지, 동행이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따라 좋고 나쁨이 완전히 뒤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직접 가보고 느끼다보면 어디라도 나름의 매력을 가질 것이다. 그 곳의 매력을 반감시키는 것은 자연이 아니라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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