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 흐렸던 날씨 덕분에 마테호른은 구름에 가려진 희미한 자국밖에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이튿날은 일어나자마자 부랴부랴 날씨부터 확인했는데 흐리다못해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일단 날이 개기를 기다려보기로 하고 아침부터 맥도날드에 가서 죽치고 앉았다. 아침을 먹고 한참을 기다려도 비가 그치기는 커녕 빗발이 더 거세지는 것 같았고, 산꼭대기에는 눈이 내리는 듯 했다.(숙소나 케이블카 정류장에서 산의 각 지점별로 기온은 몇 도인지 날씨는 어떤지 전광판에 보여준다.)


관심도 없는 째르마트의 쇼핑 상가를 구경하며 시간을 보내도 비는 그칠 줄 몰랐다.(산으로 유명한 곳답게 대부분이 아웃도어 용품점이다.) 오늘 마테호른 보는것은 포기하고 어두침침한 숙소 커피숍에서 다음 일정 계획을 세우며 다시 몇 시간을 보냈다. 


좋지 않은 일은 항상 방심했을 때 닥치지만 그것은 좋은 일도 마찬가지였다. 점심 때가 지나 밖으로 나오니 불과 몇 시간만에 하늘이 구름 한점 없이 개어버렸다. 분명히 좋으면서도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 여기는 해발 1600미터, 설악산 대청봉보다 조금 낮은 곳이라 기상도 참 변화무쌍했다.


째르마트 시내에서 마터호른이 잘 보이는 개울 위 다리로 뛰어갔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며칠만에 모습을 드러낸 마터호른을 사진에 담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도 몇 번의 사진을 찍고 트래킹을 하기에는 너무 늦어버린 시간이지만 내일 다시 이런 기회를 가질 수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어제 트래킹을 시작했던 곳으로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갔다.


참고로 바젤에서 산 패스는 케이블카도 반값에 탈 수 있는 패스여서 많은 도움이 되었지만 케이블카 가격이 워낙 비쌌기 때문에 지갑은 금새 바닥을 드러내곤 했다. 베트남에서는 ATM기에서 한번 출금하고는 떠날 때까지 보름동안 쓸 수 있었는데 여기서는 그보다 훨씬 큰 돈을 찾아도 얼마가지 못했다.


사방이 막혀 날이 개는 줄도 몰랐던 커피숍에서 나오니 마터호른이 보였다.


마터호른이 잘 보이는  곳을 찾아 부리나게 걸었다.


드디어 마테호른이 깔끔한 모습을 드러냈다.

사진기가 조금만 더 좋았어도... 보통때는 무겁고 거추장스러울 dslr이 이럴 때만 무척 아쉽다.


어제 트래킹을 시작했던 곳에 올라왔다. 탁 트인 전망에 마터호른만 악마의 발톱처럼 우뚝 솟아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주변의 설산까지 너무나 깨끗하게 잘 보였다. 그 뒤로 스위스에서는 이보다 좋은 날은 만날 수 없었다.


한편으로는 4500미터의 산이 주는 위용이 이 정도인데 두 배 가까이 높은 히말라야는 어느 정도일지 무척 궁금해졌다. 언젠가 히말라야 트래킹을 가보고싶다고 생각하게 된 순간이다.








높은 곳이라 해가 금새 기울었다. 어두워지기 전에 내려가야 했다. 케이블카가 올라 온 방향으로 내려갈 수도 있지만 표지판은 다른 곳을 가르키고 있었기에 조금 고심하다 표지판을 믿고 내려가기로 했다. 그런데 표지판이 잘못된 것인지, 내가 잘못 본 것인지 아니면 첫번째 표지판 뒤에 다른 표지판을 보지 못했던 것인지 가다보니 길이 사라져버렸다.


사람들이 다닌 자국은 있으니 가다보면 나오겠지 생각하고 계속 가기로 했지만 길이 꽤 험했다. 아까 길이 사라졌을 때 다시 거슬러 올라가야 했을까 싶었지만 오르는 것보다는 내려가는게 편할 것 같아서 계속 걸었다. 한참을 걸어 내려오니 드디어 제대로 된 길이 나왔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도저히 갈 수 없는 길이 나올까 싶어 잠시 긴장했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길이 없어져버렸을 때, 모험하지 않고 다시 제대로 된 길을 찾았어야 했다. 여행은 모험이  아니니 굳이 험한 길을 택할 필요가 없었다. 자신의 선택을 굽히는 것도 용기인데 난 그 때 그러지 못했다. 사실 지금도 그럴 수 있을지 확실하게 장담할 수는 없지만 한번 더 고민할 수는 있을 것 같다.


걷다보니 마테호른과 째르마트가 같이 보인다. 잘못된 길로 왔지만 경치만큼은 좋았다.


내일은 융프라우로 떠나기 전에 조금 더 가까이에서 이 산을 마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마테호른 전망대로 가는 케이블카를 타기로 했다. 부디 내일도 날씨가 좋기를 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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