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박 9일은 스위스를 여행하기에 말도 안되게 짧은 시간이었다. 처음부터 마터호른과 융프라우에 초점을 맞추고 이 정도 일정이면 되겠거니 하고 왔지만 더 다양한 곳을 트래킹하고 가보지 못한게 아쉬웠다. 다음 여행지인 스페인행 저가항공편을 구입해 놓지 않았더라면 일정을 조정했을지 모르겠지만 유럽의 저가항공편은 무척 저렴한 대신 취소하는데 드는 비용이 너무 높았다.


그린델발트에서 스위스의 마지막 여행지 제네바로 가는 기차를 탔다. 제네바는 UN산하의 국제기구가 많은 곳이며 각종 국제적인 행사가 열리는 도시라는 점은 알고 있었지만 아무런 관심이 가는 곳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제네바로 갔던 이유는 바르셀로나로 가는 저가항공편이 제네바에서 출발하기 때문이었다.


그린델발트에서 묵었던 숙소에서 떠나는 날 아침은 스위스에 온 뒤로 가장 화창한 날이었다. 산은 이제야 여행자에게 마음을 풀고 보여줄 준비가 되었는데 조급한 여행자는 벌써 떠날 준비를 마쳐버린 것이다. 많이 아쉬웠다.


숙소 거실에서 보이는 풍경. 마치 산장 같은 분위기다.


오늘은 산허리에 구름도 두르지 않고 말끔한 모습을 드러냈다.


제네바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본 호수



제네바에서는 하루를 묵고 이튿날 이른 새벽에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야했기 때문에 공항 근처에 있는 숙소를 예약했다. 가격이 무척이나 비싸서 그동안 여행하면서 묵었던 숙소중에 가장 비싼 곳이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제네바는 물가가 어찌나 비싼지 스위스에서도 숙박비가 독보적으로 비쌌다.


공항에 내려 배낭을 짊어지고 숙소를 찾았지만 좀처럼 찾을 수가 없었다. 고도가 높은 째르마트나 그린델발트에서는 늦여름 혹은 초가을 날씨였는데 고도가 낮은 제네바는 한여름이었다. 


한시간이나 헤매고 다닌 끝에 찾은 숙소를 앞에 두고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숙소에서 먼저 보인 것은 20대의 서양 여자애들이 베란다에서 부서진 차양과 씨름하는 모습이었다. 게다가 겉보기에도 무척 낡고 음침해 보였다. 마음을 추스르고 들어가니 어두컴컴한 리셉션에 젊은 흑인이 앉아 있었다. 마음속으로는 선입견을 갖지 말자고 다짐하고 있었지만 머릿속에는 영화에서 본 뉴욕의 할렘가에 있는 어느 호텔을 떠올리고 있었다. 어차피 잠만 잘거니까, 내일 새벽에 떠날텐데, 얼마나 비싼 돈을 지불했는데 등등을 생각하며 체크인을 마쳤다.


방에 짐을 던져 놓고 바로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제네바 시내로 가서 호숫가 잔디밭에 누워 시간을 보내다 편의점에서 간단히 저녁을 먹고 다시 들어가기 싫은 그 호텔로 돌아왔다. 나중에 제네바는 프랑스와 국경 근처에 있어서 버스만 타면 국경을 넘을 수 있기 때문에 프랑스쪽에서 빈민층이 많이 넘어와서 도시 분위기가 그다지 좋지 못하다고 들었다. 멀리 알프스가 보이는 아름다운 도시지만 살인적인 물가와 도시 분위기는 썩 오래 머무르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이튿날 새벽(아마도 네다섯시쯤 되었을 것 같다) 배낭을 매고 공항까지 걸었다. 길에는 사람도, 차도 없었기에 느긋하게 티케팅을 마치고 스페인에서의 일정이나 세워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공항 대합실에 들어서니 사람들로 발디딜틈이 없었다. 거의 두시간동안 줄을 섰지만 아직도 두시간은 더 기다려야 내 차례가 될 것 같았다. 이러다 절대로 비행기를 탈 수 없겠다 싶어 지나가는 항공사 직원을 붙잡고 이야기하니 날 맨 앞에 데려다 주었다. 짐을 부치고 탑승구까지 전력질주하니 출발까지 겨우 몇 분 남아있었다.


호텔에선 거의 뜬 눈으로 지샌데다가 새벽부터 비행기를 타느라 고생했더니 제네바에서 바르셀로나로 가는 4시간 동안 비행기가 언제 뜨고 내렸는지 아무 기억도 없이 쓰러져 잠들었다. 그리고 바르셀로나에 예약한 한인민박에 짐을 풀고 다시 침대에 쓰러졌다.


제네바에서 바르셀로나까지 가는 비행기 편이 100유로정도였다. 가방이나 짐의 무게에 따라 추가 운임을 내야 하는데 배낭이 커서 30유로쯤 더 들었던 것 같다. 유럽의 저가항공사는 우리나라 저가항공사처럼 대충 짐을 받아주는 일은 절대로 없기 때문에 돈을 조금 아끼겠다고 표를 예매할 때 추가 운임까지 지불하지 않으면 나중에 그보다 훨씬 많은 비용을 내야한다.


드디어 유럽의 마지막 여행지 스페인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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