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에서 그리스로 돌아오면서부터 시작된 유럽여행은 벌써 두달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이제 유럽에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은 1달밖에 남지 않았다. 쉥겐조약에 가입한 유럽국가들은 무비자로 입국할 수 있는 편리함이 있지만 이 국가들을 모두 합해서 90일을 넘길 수 없다. 인터넷에 찾아보니 가끔 90일을 넘기더라도 다른 대륙으로 출국하는데 문제가 없었다는 여행자도 있었지만 혹시 모를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영국이나 모로코 같은 북아프리카로 잠시 넘어갔다가 다시 돌아오면 90일이 리셋되긴하지만 쓸데없이 교통비를 들이는 것보다 남은 30일을 충실히 보내는게 낫겠다 생각했다.(당시는 2012년이라 지금은 이 쉥겐조약이 어떤 변화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리고, 유럽에서 머무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앞으로 가야할 남미에 대한 기대가 더 커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행을 떠나며 가장 해보고 싶었던 일중에 하나가 산티아고 데 까미노 즉, 산티아고까지 가는 순례자의 길을 걷는 일이었다. 이 길을 완주하려면 빨리 걸어도 한달 남짓한 시간이 걸리므로 남은 한달을 오롯이 다 써야했다. 고민을 하다가 결국은 2주씩 나누기로 했다. 순례자의 길은 꼭 어디서부터 걸어야 한다고 정해진 것도 아니니 이번에는 2주동안 걸을 수 있을만큼 걷고 남은 2주는 스페인의 다른 곳을 여행할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문제는 또 있었다. 25kg이 넘는 배낭을 짊어지고는 도저히 순례자의 길을 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먼저 다녀온 사람들의 여행기를 보면 걷다보면 힘들어서 1g이라도 덜어내고 싶은 생각이 든다면서 절대로 10kg을 넘기지 말것을 권장하고 있었다. 고민 끝에 바르셀로나의 민박집에 미리 연락해서 사정을 이야기하고 2주만 나머지 짐을 보관해 줄 수 있는지 문의했고 다행히 사정을 이해해주는 민박집을 찾을 수 있었다.


스위스 트래킹과 새벽부터 제네바 공항에서 체력을 다 소모해버렸기 때문에 민박집에서 몇 시간 더 눈을 붙이고 오후 이른 시간에 바르셀로나 시내 여행을 시작했다. 바르셀로나에 대한 정보도 찾아놓지 못했지만 바르셀로나하면 떠오르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부터 찾아갔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성당 중 하나이니 당연히 사람들이 무지 많았고 입장 티켓을 사려는 줄은 이미 모퉁이를 돌아서 이어져 있었다. 땡볕에 기다렸다 티켓을 사서 들어가더라도 오늘의 멍한 정신으로는 제대로 머리에 들어올 것 같지가 않았다. 어차피 순례자의 길을 다녀온 후, 짐을 찾으러 돌아올터이니 그때 다시 와야겠다 생각하고 이 날은 성당의 겉모습만 날림으로 보고 돌아섰다.


바르셀로나는 가우디의 도시다. 가우디가 만든 건물들은 100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그의 자연을 형상화한 건축물의 독특함은 독보적으로 평가 받는다. 그가 만든 건물중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만 7개라니 르네상스 시대의 미켈란젤로나 베르니니와 맞먹는 근대 최고의 건축가인 것만은 분명하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 신경 쓰지도 않고 걷다보니 사진에서 많이 본 건물이 보였다. 까사 밀라였다. 주거용으로 지어진 가우디의 건축물은 지금도 주거용으로 사용되거나, 박물관, 전시관 등으로 사용되는데 입장료가 하나같이 무척이나 비쌌다. 단기여행으로 주머니가 두둑했다면 당연히 들어갔겠지만 주머니도 가벼운데 그 가격을 지불하고 입장하고 싶지 않았다. 이때 이미 인간이 만든 예술품보다는 자연이 만들어낸 풍경에 마음이 기운 상태였던 것 같다.




조금 더 걸어내려가니 까사 바트요가 나왔다. 역시나 입장료가 만만치 않다.



해변쪽으로 걸어내려오니 바르셀로나의 구시가가 나왔다. 뒤에 있는 건물이 바르셀로나 대성당이다. 유럽 대부분의 도시에서 가장 유명한 건물은 그 도시의 대성당인데 바르셀로나에서는 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에 가려 있다. 스페인의 성당은 이탈리아나 독일, 오스트리아의 성당과는 구조나 모양이 또 달랐다.






구도심의 골목을 걷다보니 옛날 아라곤의 왕이 살았다는 주택이 나온다. 왕이 살았으니 궁전이어야 할텐데 그리 규모가 크거나 화려하진 않았다. 아마도 스페인이 유럽의 다른 나라들처럼 강력한 중앙집권국이었던 적이 별로 없었고 이슬람이나 다른 국가의 침입을 많이 받아왔기 때문인 것 같다.



걷다보니 어느새 바르셀로나 항구까지 도착했다. 항구에는 콜럼버스가 타고 신대륙으로 향했던 산타 마리아호를 복원한 배가 떠 있었다. 콜럼버스는 당시 카스티야 왕국을 지배했던 이사벨 여왕의 후원으로 신대륙을 향해 떠날 수 있었다고 한다. 





복원한 산타 마리아호를 지나 조금 더 걸으니 대서양을 가리키고 있는 콜럼버스의 동상이 보였다.




바르셀로나에서 여행자들이 많이 모이는 리세우 거리까지 왔다. 여기는 리세우 극장외에 여러 공연장과 레스토랑, 여행자를 위한 다양한 숙소들이 있어서 항상 여행자들로 붐빈다. 서늘했던 스위스의 날씨에 적응했던 몸이 스페인의 뜨거운 태양에 아직 적응을 못했는지 여기까지 와서는 녹초가 되어 버렸다.


민박집에서 알려준 플라멩코 공연을 보고 스페인의 대표적인 음식 빠에야를 먹고 숙소로 돌아왔다. 플라멩코는 생각과는 전혀 달랐다. 오래전 핸드폰 CF에서 유명한 여배우가 빨간색의 레이스장식의 드레스를 입고 추던 그 춤과는 완전히 다른 춤이었다. 플라멩코라하면 막연히 정열적인 춤이라고만 들었었는데 나에겐 종교적인 느낌이 강했다. 댄서의 빠른 몸놀림과 환희에 찬 표정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좀 더 심하게 이야기하면 이슬람의 수피댄스처럼 접신하는 듯한 느낌까지 들었다. 기대하고 달라서 그런지 아름답다고 할 수 없는데 꽤 충격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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