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번째 날은 나흘간의 트레킹을 마치고 푸에르토 나탈레스로 돌아가는 날이다. 이전 글에서도 적었지만 여기로 왕복하는 배가 아직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새벽에 일어나 부리나케 아침을 만들어 먹고는 여행사의 승합차가 도착하는 곳까지 가기위해 길을 나섰다. 그 곳은 마지막 날 머문 산장에서 십수km 떨어진 곳이었고, 정오까지는 거기에 도착해야 했기 때문에 서둘렀다.


   * 넷째날 트레킹을 쓰면서 한가지 빠뜨린게 있어서 우선 여기 적어둔다.

영국에서 신혼여행으로 왔던 젊은 부부는 하루 먼저 트레킹을 마치고 돌아가면서 남은 통조림 몇 개를 주었다. 통조림 몇 개가 뭐가 그리 대단하냐고 할 수도 있지만 실제 해보면 쉽게 이런 친절을 보이기는 쉽지가 않다. 게다가 인종차별까지는 아니더라도 은근히 피부색을 가리는 백인들이 아직도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근엄한 인상의 남편과 선하고 친절한 아내인 이 젊은 부부가 무척 기억에 남는다. 


여행중에, 그 후에 유독 남미를 여행하면서 좋은 사람들, 친절한 사람들을 자주 만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했었다. 현지인들도 그랬지만 배낭여행자들도 유독 다른 대륙에서 만났던 사람들에 비해 친절했다. 남미 여행을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행을 무척이나 좋아하며, 세계 여러곳을 이미 여행했었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다른 민족의 문화를 받아들이는데 적극적인데다 선입견이 적은 편이다. 그래서, 인종이나 민족을 떠나 서로 도움을 주고, 여행 정보를 공유하고, 쉽게 어울리는 것 같다.



숙소에서 출발해 걷다보니 어스름이 걷히고 날이 밝아왔다. 밝아진 하늘에는 구름 한점 없이 깨끗했고, 바람도 전혀 불지 않았다. 나에게 미련을 잔뜩 심어주려는 듯이 돌아가는 날에야 더 이상 좋기도 어려운 날씨를 선물해주었다.


한참을 걸어 야트막한 언덕 위에서 뒤돌아 본 토레스 델 파이네는 다시 발길을 돌리고 싶을 정도로 선명하고 깨끗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돌아갈 때라도 이런 경치를 볼 수 있었던 것을 감사해야할지, 억울해해야할지 모를 기분이었다.





토레스 델 파이네의 W코스에 포함되지 않기에 보통은 트레킹하지 않는 길이었지만 걷는 재미는 충분했다. 산길과 들판이 고루 있었고, 주위의 설산이나 호수가 펼쳐져 있어 전혀 지루하지도 않았다. 도중에 야생마인지 모를 한무리의 말들을 만났다. 덩치 크고 늘씬한 말들이 하필이면 길 한가운데 진을 치고 있었다. 고삐도 없고 안장도 없는 이 말들이 사납지는 않을까, 다가가면 흥분하지는 않을까 조심하며 말들 사이를 천천히 지나쳤다. 녀석들도 생각지 못한 곳에서 마주친 인간들에게 긴장했는지 푸르릉 거리면서도 반보쯤 물러서주었다.



돌아볼수록 자꾸 아쉬움이 커졌다. 혹독하기로 이름난 이곳에서 오늘 같은 날씨를 만나는 것은 분명히 흔치않은 일일터였기 때문이다. 나흘동안 구름을 이고 있던 봉우리가 너무나 선명하게 보였다. 하지만 승합차가 데리러 올 시간이 정해져있었기에 자꾸 뒤돌아보고 시간을 보낼 수도 없었다. 아쉬움을 억누르며 부지런히 발을 떼야했다.






드디어, 약속시간을 조금 앞두고 국립공원 사무소에 도착했다. 픽업하는 시간이 비슷한지 여기저기 흩어져서 트레킹을 했던 사람들이 이 곳에 모여 각자의 여행사 승합차를 기다렸다. 점심시간이 넘었지만 여행사 승합차는 오지 않았다. 간혹 차가 들어올 때마다 혹시나 했지만 다른 여행사였다. 하나 둘 여행자들이 떠났지만 마지막까지도 내가 예약한 여행사 승합차는 오지 않았다. 짐을 줄이느라 먹거리를 오늘 아침까지만 준비했기 때문에 배를 채울 것도 없었다. 약속시간을 한두시간이나 지나서 부아가 치밀즈음에야 도착하더니 운전사는 미안한 기색도 없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승합차에는 일가족으로 보이는 남미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나는 당연히 차를 타면 바로 푸에르토 나탈레스로 돌아가리라 생각했는데 이 여행사가 더블 부킹을 해서 당일치기로 토레스 델 파이네를 투어하는 일가족과 같은 차를 타도록 한 것이다. 더욱 화가 치밀었지만 성질을 부려봐야 다른 차를 타고 갈 방법도 없기에 참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졸지에 차로 토레스 델 파이네 투어를 한번 더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에게 행운이라 볼 수도 있는 일이었다. 기막힌 날씨에 그냥 돌아가기도 아쉬운데 멀리서나마 다시 한번 토레스 델 파이네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때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여행사에 대한 화로 그런 생각은 할 수가 없었다.









트레킹을 좋아하지 않거나 신체적인 고단함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당일치기로 여행사의 투어 상품을 이용해 토레스 델 파이네에 오기도 한다. 그렇지만 몸이 불편하거나 체력이 심하게 약하지 않다면  한번쯤 시도해보라고 적극 권하고 싶다. 나도 궃은 날씨 때문에 제대로 트레킹을 하지는 못했지만 차로 둘러보는 곳과 본인이 시간을 들여서 밟고 지나간 곳의 느낌은 정말 천지차이다. 


한번 해보고도 정말 아니다싶으면 다시 안하면 된다. 하지만 시도해보지 않고 결정해버리면 살아가면서 할 수 있는 여러가지 것들에 대한 선택에 제한을 가져온다. 어쩌면 숨겨진 자신의 취향이나 성향을 찾지 못하고 평생 잊은채 살게 될 수도 있다.


우여곡절 끝에 오후가 한참 되어서야 푸에르토 나탈레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행사에서 트레킹이 어땠냐고 물어보는 직원에게 인상을 팍 써주고 급히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해물잡탕밥? 보기는 이렇지만 맛은 괜찮다.


토레스 델 파이네는 세계 여행을 계획하며 반드시 가야할 곳으로 정했던 몇몇 장소중에 하나였다. 그런 장소들 중에서 어떤 곳은 실망하기도 하고, 어떤 곳은 더욱 놀라움을 주기도 한다. 토레스 델 파이네는 크게 기대했던만큼 큰 만족을 주었고, 더 큰 아쉬움과 미련을 주었다. 다녀왔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다시 가야할 1순위가 되어버린 곳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