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날 사진을 보고 기억을 되살리다보니 과욕을 부린 날은 세번째 날이었다. 앞서 썼던 블로그 내용을 수정했다.


이 날도 마찬가지로 비슷한 시간에 걷기 시작했다. 오늘 걸어야 할 경로에서 기대되었던 것은 이라체라는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와이너리 앞을 지나는 것이었다. 이 곳은 와이너리 앞에서 순례자를 위해 포도주를 제공하는 것으로 순례자의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는 꽤 유명한 곳이다. 




묵었던 마을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서 동이 틀때쯤 이라체에 도착했다. 나보다 먼저 이 곳에 도착한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알려진 것처럼 왼쪽은 포도주가, 오른쪽은 물이 나오는 수도꼭지가 두개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사진만 찍을 뿐, 포도주도 물도 받을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여서 다가가 돌려보니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다. 이런... 너무 일찍 와서 그런지 포도주도 물도 나오지 않았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는 커녕 물도 못얻어마실 지경이 되었다. 이 곳에서 기념으로 포도주라도 한잔 할 요량이면 너무 이르거나 늦은(늦으면 포도주가 다 떨어질지도...) 시간대는 피하는게 좋겠다.



이 곳은 드물게도 아직 밀 수확을 마치지 않았다.


한참 걷다 뒤돌아보니 이제야 해가 뜨기 시작했다. 순례자의 길이 대략 스페인의 동쪽에서 서쪽 방향으로 나있다보니 오전에는 대부분 해를 등지고 걷게 된다.







그림자가 무척 짧아졌다. 이제 오늘 일정을 마무리하고 숙소를 찾아야 할 시간이 되었다. 하지만 오늘은 길이 평탄해서인지 24킬로를 걸었는데도 아직 정오가 되지 않았다. 레스토랑에서 '메뉴 델 디아'를 먹으며 더 갈 것인가, 멈출 것인가를 고민했다. 여기서 멈췄어야 했다. 하필 여기서 다음 마을까지는 8킬로가 넘었고, 그러면 이 날은 30킬로를 걷는 셈이었다. 게다가 가장 더울 때 걸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걷는데 너무 흥이 난 나머지 무리하기로 결심해버린 것이다.



이후로 다음 마을에 도착할 때까지 사진이 없다. 사진은 커녕 물도 다 떨어져 큰일날뻔 했다. 가장 더운 시간에 걷는 것은 절대 해서는 안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만약 목표한 곳까지 도착하지 못했다면 나무 그늘에 앉아 해가 기울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더위와 갈증으로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가까이 보이는 가게에서 생수 두 병을 들이켜고 나니 그제야 주위를 돌아볼 정신이 돌아왔다. 아이부터 어른까지 하얀 옷에 빨간색 머플러를 하고 있었다. 게다가 마을을 관통하는 도로(라고 해도 작은 골목 수준이지만)에는 펜스가 쳐져있었고 마을의 조그만 광장에는 가수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뭔가 축제를 하는 것 같았다. 무리해서 걸은 보람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숙소에서 짐을 내려놓고 저녁식사를 하려고 나오니 축제가 한창이었다. 축제는 팜플로냐에서 하는 소몰이 축제의 축소판이었다. TV에서 봤던 것처럼 잔뜩 흥분한 황소가 거칠게 내달리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소 앞을 뛰어다니며 가끔 위험하다 싶으면 펜스 위로 몸을 날렸다. 펜스에 매달린 사람들은 소들이 지나갈 때마다 환호하며 웃음을 떠뜨렸다.


똑딱이 카메라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폰4로 찍은 해상도 낮은 사진으로 밖에 남겨두지 못한게 아쉽다.

작은 광장 한쪽에서는 스페인 가수(유명 가수는 아닐테지만)의 무대가 펼쳐지고 있고, 반대편 길에는 달리는 소가 사람들에게 뛰어들지 못하도록 펜스가 처져있다.



사람과 소의 경주를 보기 위해 사람들이 펜스에 매달려 있다.



이미 살짝 취한듯한 여자들이 사진을 찍고 있는 나에게 자기들을 찍으라고 강요아닌 강요를 했다.


큰 도시의 성대한 축제도 아니고 볼거리가 많지도 않았지만 마을 사람들이 즐기기 위한 소박하고 흥겨운 축제였다.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축제가 가장 많은 나라라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하지만 우리네 축제는 준비한 사람들이 즐기기 위한 축제가 아니라 외지 관광객을 위한 축제이고 돈을 벌기 위한 축제라는 것이 많이 달랐다. 자생적으로 생긴 세계의 유명한 축제들은 대부분 그들이 즐기기 위한 축제에서 발전되지 않았나 싶다. 그런 축제여야 국가나 지자체의 예산지원 없이도 오랫동안 지속되며 결국은 그 축제를 즐기러 관광객들이 찾아오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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