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번째 날도 사진이 없다. 그냥 넘어가도 상관없을 날을 블로그에 기록하는 것은 고마운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다.


하루종일 발바닥은 덴듯이 화끈거리고 아팠다. 매시간마다 앉을 수 있는 곳에서는 양말을 벗고 상태를 확인했다. 진물이 흐르다 굳고, 다시 흐르다 굳었다. 발바닥에서 올라온 열은 몸까지 데우는 듯 했지만 이것도 살면서 마주치는 흔한 고통의 한가지일 뿐이다 생각하고 미련스럽게 걸었다. 하지만 그 날 걷기로 마음 먹었던 마을까지 오자 마음이 놓여서인지 몸도 말을 듣지 않았다.


어디에 더 좋은 알베르게가 있는지 찾을 기력도 없어서 마을 입구에 있는 저렴하지만 무척 오래된 알베르게를 찾아들어갔다. 입구에서 이미 비용을 지불하고 이층 침대를 배정 받았지만 거기는 지금까지 내가 머물렀던 알베르게와는 분위기나 시설이 너무나 달랐다. 지금까지 묵었던 알베르게가 순수히 걷는 목적을 가진 순례자들이라면 이 곳은 젊음을 불사르기 위해 여행하는 젊은 철부지 서양여행자들의 싸구려 게스트하우스 같았다.


정오가 지나지 않았으니 분명 오늘 길을 걸은 순례자가 아닐 젊은이들이 속옷만 입은채 늦은 잠에 빠져 있었고,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마주치는 순례자들끼리의 배려나 흔한 인사마저도 없었다. 몸이 괜찮았다면 참았겠지만 힘이 드니 여기서는 휴식이 힘들겠다 싶어서 이미 지불한 숙박비 몇 유로를 포기하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어디로 갈까 고민하고 있는데 머리를 아주 짧게 깎은 한국인을 만났다. 혼자 수개월째 유럽 여행중이라는 이 친구와 몇 마디 말을 나누고나서, 나는 돈이 좀 들더라도 편하게 쉬기 위해 바로 앞 저렴해 보이는 호텔로 가겠다고 했고 이 청년은 쓸만한 알베르게를 찾겠다고 하고 헤어졌다. 분명 좋은 알베르게가 있을테지만 도무지 찾을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1인실이 거금 40유로였지만 생각할 틈이 없었다.


호텔에서 화끈거리는 발바닥을 물수건으로 찜질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방에 있는 전화가 울렸다. 받아보니 호텔 앞에서 헤어졌던 그 친구가 리셉션에서 전화를 한 것이었다. 자기가 묵는 알베르게에서 순례중인 의사가 순례자들의 물집을 치료해주고 도네이션을 받고 있으니 안내하겠다는 것이다.


맨발에 슬리퍼를 끌고 가보니(알베르게 시설이나 분위기가 먼저 갔었던 곳과는 하늘과 땅차이였다) 라틴계 젊은이가 사람들을 봐주고 있었다. 사실 의사라고 물집 치료를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바늘로 두꺼운 발바닥 피부를 갈라 진물을 뺀 다음, 그 안으로 약을 흘려 넣었다. 그리고 붕대와 반창고로 꼼꼼하게 싸매주었다.


훨씬 움직이기도 편하고 통증도 덜 느껴졌다. 치료비는 도네이션이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전이나 소액 지폐를 통에 넣는데 너무 고마운 나머지 가지고 있던 동전을 모두 넣어주었다. 그리고, 자신도 하루종일 걸어서 피곤할텐데 내 상태를 걱정해 리셉션까지 찾아와 전화해 준 그 청년이 고마워 저녁을 샀다. 별로 대단한 일도 아닌데 미안하다고 했지만 나에게는 일주일 내내 저녁을 사줘도 모자랄만큼 큰 도움이었다.


나보다 나이가 예닐곱살 어렸던 그 친구는 회사를 다니다 그만 두고 유럽에 왔다고 했다. 다른 곳도 아니고 반드시 유럽이었던 이유,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이유는 그 친구의 개인사정이라 쓸 수는 없지만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할 수록 참 착하고 예의바른 사람이었다. 나눈 연락처에는 아직도 그 친구의 카카오톡이 등록되어 있다. 카톡을 쓸 때 간혹 그 친구의 프로필 사진이 보이면 잘 지내고 있구나... 라고만 생각하고 그 뒤로 결국 연락을 하지 못했다. 그런 도움을 준 사람과 끈을 이어나가지 못하는 나는 참 정이 없는 사람인가보다.


아래는 치료를 받은지 며칠 뒤 알베르게에서 찍은 사진인데 얼마나 꼼꼼하게 붕대를 붙여줬는지 며칠 동안 걸었어도 떨어짐이 없이 단단히 고정되어 있다.




여덟번째날, 부르고스에 도착했다. 며칠째 꺼내지도 않았던 카메라에 무슨 일로 손이 갔는지 이 날은 몇 장의 사진이 남아있다.


부르고스 구시내로 들어가는 성문에서 만난 거리의 악사들


부르고스는 옛날 카스티야 왕국의 수도이며, 11세기 이슬람 세력과 싸운 전설적인 영웅 엘 시드의 출생지라고 한다. 부르고스 대성당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부르고뉴의 알베르게도 시설이 무척 좋았고 운영하는 사람들도 친절했다. 지친 몸을 몇 시간 뉘이고 저녁을 먹으러 나오니 그동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끌어오르던 대지가 식으면서 공기중에 사우나처럼 뜨겁고 습한 기운이 가득 했지만 내 몸은 오히려 기운을 차리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맞는 비가 무척이나 반가웠다. 


짧은 순례길 맛보기도 슬슬 종반부로 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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