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순례길을 걷다가 전날 묵었던 곳이 한눈에 보일 정도쯤해서 뒤돌아보면 기분이 묘해진다. 아직 어두침침하고 사방이 고요한 이른 시간에 내가 왜 이 길을 걷고 있는지 이유가 뭔지 궁금해지기도 하고, 가끔은 무척 외로워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지금까지 일상을 살아오면서 마찬가지다. 추운 겨울 새벽 찬바람을 맞으며 회사 가는 길에 문득 이런 삶이 의미없게 느껴지기도 하고, 주위에 가족이나 친구, 동료들이 있어도 외로울 때가 있다. 일상에서는 어쩌다 짧은 순간 느끼는 자신의 삶에 대한 생각들을 여행중에서는 훨씬 자주, 그리고 길게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여행은 인생의 농밀한 집약과 같다는 말들을 하나보다.


한달을 넘게 걷는 사람들에 비해서는 얼마되지 않지만 걸었던 날의 수가 늘어나고 지나온 길이 길어지면서 주위의 경치를 살피는 횟수는 줄어들고 생각에 잠기는 시간은 더 길어졌다. 게다가 매일 조금씩 쌓이는 몸의 피로는 다른 활동들을 모두 불필요한 것으로 단정하게 만들고 온몸의 에너지를 오로지 걷는데만 집중하게 만들었다.


오늘은 어디까지 걷고, 어디서 잠을 자고, 어떻게 끼니를 해결해야 할지만 고민하다보니 여행중 단순했던 생활이 여기서는 더욱 단순해졌다. 그리고, 내가 여행 전에 불필요한 것들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살아왔는지를 생각하게 되고, 그 불필요한 것들을 갖기 위한 노력이 조금은 가볍게 느껴졌다.


물론, 여행을 끝낸 지금도 회사에 다니며 받는 스트레스에 대한 보상으로 월급을 받고 있다. 하지만 그 목적이나 의미가 여행전과는 많이 달라졌음은 분명하다.



아침에 해가 뜨는걸 보면 항상 힘이 나는 기분이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태양이 햇볕이 퍼붓기 시작하면 힘은 커녕 절로 욕이 나온다.


순례자의 패스포트에 스탬프를 찍어주시는 할머니


출발한지 세시간쯤 되었을 때 팜플로나에서 출발한 후, 처음으로 대도시라 할 수 있는 '로그로뇨'에 도착했다. 로그로뇨에서는 아침식사를 위해 잠시 멈추고 다시 떠났기 때문에 별다른 느낌은 없지만 도착한 시간이 아침이어서였을까, 공원과 운동하는 사람이 많았던 것만 기억이 난다.


순례자의 길을 걸으며 아침식사는 대부분 지나는 마을이나 도시에 있는 까페에서 '메디아 루나'와 '까페 콘 레체(까페라떼)'로 해결했다. '메디아 루나'는 크로아상하고 비슷한 빵인데 스페인어로 반달이라는 뜻이다. 완전한 원의 반쪽은 아니지만 반달 모양이라서 그렇게 부르나 보다. 

로그로뇨 시가지로 들어가는 다리




위 사진을 찍었을 때는 아직 정오가 되기까지 한두시간 남겨두었을 무렵이었다. 그렇지만 이 사진 뒤로 뒷날까지도 찍은 사진이 없다. 전날의 과욕이 부른 화로 인해서 걷는데 신경을 쓰다보니 사진은 신경 쓸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첫날부터 닳아버린 트래킹화 바닥 밑에 닿는 뾰족한 돌멩이의 느낌이 조금 불편하다 싶었다. 인간의 걸음걸이 특성상 특정 부위는 그 자극을 계속 받을 수 밖에 없었고, 며칠간 그게 반복되다보니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 아마도 처음 계획했던대로 20km씩 꾸준히 걷었다면, 그리고 충분히 발에 쌓인 피로를 풀어주었다면 한계가 오는 시점이 훨씬 늦어졌을텐데 어제 과욕으로 계획을 훨씬 초과해버리면서 그 시점이 오히려 앞당겨진 것이었다.


불편함을 넘어서는 통증이 느껴져서 양말을 벗어보니 발바닥의 앞부분에 이미 500원짜리 동전만한 물집이 잡혀있었다. 그 뒤로는 가능한 발바닥에 닫는 압력을 줄이기 위해 조심히 걸어야했다. 숙소에 도착해서 보니 이미 물집은 터졌지만 크기는 오히려 켜져있었다.


트래킹화가 낡지 않았더라면, 계획한만큼만 걸었더라면, 걷기를 끝내고 발에 쌓인 피로를 푸는데 조금 더 신경을 썼더라면 하고 후회했지만 이미 돌이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비상약으로 가져간 연고를 바르고 반창고를 덕지덕지 붙여두는 수 밖에... 과욕이 화를 불렀다.


처음엔 하얀 부분만 물집이었지만 점점 커지더니 발가락 첫째마디까지 거대한 물집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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