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바닥에 생긴 물집이 많이 좋아진 덕분에 조금은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사실 상태가 좋아졌다기보다는 더 심해지지 않지만 꾸준한 통증에 익숙해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며칠만에 걸으면서 사진을 찍을만큼은...


아직 캄캄한 새벽에 부르고스 대성당을 지났다. 지나고나서 생각하니 화려한 외관을 가진 역사적인 건물임에도 들어가보지 못한게 조금 아쉽다. 그 당시에는 목적지까지 걷는 것을 제외하고 다른 것에는 전혀 관심이 가지 않았다.





아직 추수가 끝나지 않은 밀밭이 펼쳐졌다. 스페인 북부는 산이 적고 산이라고 해도 높지 않아서 이 완만한 구릉을 거의 꼭대기까지 깎아서 밀을 경작하고 있었다. 숨막히는 무더운 날씨에 언덕위에서 지평선 끝까지 펼쳐진 밀밭을 바라보면 마치 사막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밀밭과 함께 인상적이었던 수많은 해바라기들...







아홉번째날은 하루종일 밑밭과 해바라기밭 사이를 걸었다. 풍경의 변화가 적어서 지루한 길이라는 평도 있지만 난 이 밀밭과 해바라기밭이 좋았다. 시기가 달라서 들판에 밀도 해바라기도 없는 길을 걸었다면 나도 지루한 길이라는 평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드디어, 열번째 날이다. 처음 과도한 의욕이 불타올랐을 때는 2주를 꼬박 채워서 레온까지 걸을 생각도  했었지만 불가능에 가까운 거리가 남아 있었고, 순례길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스페인 여행을 하기 전에 며칠 쉬는게 좋겠다 싶어서 오늘까지 걷는 것으로 순례길 맛보기는 끝내기로 했다.


순례길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걷기 위해서는 등산용 폴을 준비하거나 적어도 길에서 파는 순례자용 지팡이라도 사는게 좋다. 나는 이후 여행에서 짐이 될 것이기에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는데 지팡이가 있으면 무릎이나 발목에 훨씬 부담이 덜 간다.




바람이 굉장히 많이 불었던 언덕에 올랐다. 마치 장거리 달리기의 골인지점처럼 사람들이 헉헉거리며 올라와서는 정상에서 주저앉아서 쉰다. 꼭대기에는 순례자들이 남긴 메모들이 빽빽하게 꽂혀있는 게시판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목적을 가지고 길을 걷고 있지만 한 명도 걷게 된 것을 후회한다는 메모는 없었다. 하긴, 후회하는 사람이라면 메모를 남길 이유도 없을테지만.


열흘간 걸으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사람은 며칠간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으며 인사를 하게된 70세가 다된 프랑스인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는 프랑스 남부의 자기 집에서부터 걷고 있다고 했다. 이미 한달이 넘게 걷고 있었고, 아직도 3,4주는 걸어야 한다며 걷게 될 거리는 모두 천 삼사백 킬로미터는 될거라고 했다. 프랑스 남부에서 걱정 없이 살았을 것 같은 백발의 할아버지가 걷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젊은이들도 끝까지 걷기 힘든 이 길을 고통스러워하며 걷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나도 저 나이가 되었을 때도 두려움 없이 하고 싶은 일을 시도할 용기가 남아있길 바랬다.



지평선 끝까지 펼쳐진 밀밭이 마치 사막처럼 보였다.




잠시 쉬어갈 나무그늘도 없는 평평한 들판이 오히려 순례자들을 가장 힘들게 하는 길이다. 이 들판이 끝나고 마을이 나오는 지점에 마을 할아버지들이 음료수와 간단한 요깃거리를 나눠주고 있었다.



고작 열흘동안 2백여 킬로미터를 걸었을뿐이지만 멋진 풍경과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던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스페인 사람들은 무척 친절하고 낙천적이었으며, 순례자들끼리는 항상 돕고 상대방의 안부를 묻고 걱정하고 자신의 것을 나눠주었다.(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올라'와 '부엔 까미노'라는 인사를 저절로 배우게 되고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다. 힘들어서 인상을 찌푸리다가도 인사를 할 때는 저절로 미소를 띄게 된다. 처음보는 사람과도 단지 같은 길을 걷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인종과 국적을 초월해 인사를 하고 안부를 묻는다. 가장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이 그 길 위에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트래킹 길이라는 말이 허언이 아니었다.


나는 그 길을 모두 걷지 못했고, 그 모습을 다 보지 못했다. 내가 아는 것도, 본 것도 일부분일뿐이기에 남은 길이 무척이나 궁금하다. 이 길에 무엇이 있었길래, 무엇을 보고 깨달았길래 어떤 사람들은 수차례 다녀오기도 한다. 등반가들이 산을 떠나지 못하는 것과 비슷한 감정이 아닐까 생각한다. 요즘도 그 열흘간의 기억이 떠오르면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욕구가 스멀스멀 생겨난다. 불행하게도 언젠가 다시 그 길을 걷기 시작할 때까지 계속 그 욕구를 참으면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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