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라이시에서 유명한 경치는 아침해가 뜰때 메이리쉐산의 설봉들이 햇빛을 받아 금색으로 빛나는 모습이라고 했다. 어제 오후에 산봉우리에 끼인 구름이 많아져서 걱정이되었기 때문에 눈을 뜨자마자 숙소 베란다에 나가 하늘을 살폈다. 깨끗하고 맑은 날은 아니었지만 산봉우리에는 오히려 구름이 없어서 원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아 다행이었다.


숙소 베란다에서 본 해뜨기 전의 메이리쉐산, 이때가 메이리쉐산이 가장 깨끗하게 보이던 순간이었다.


부랴부랴 채비를 갖추고 밖으로 나갔더니 바람이 심하게 불고 무척 추웠다. 얇은 옷을 여러겹 껴 입고 바람막이까지 갖췄어도 싸늘한 바람이 닿는 느낌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전망대에는 이미 제법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해가 뜨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추위에 손도 떨렸는지 이날 아침에 찍은 사진은 유독 흔들린 사진이 많다.



3000미터가 넘는 고지대에서, 바람이 거센 이른 새벽에 웨딩촬영을 하는 커플이 있었다. 게다가 예비신부는 어깨까지 훤히 드러난 붉은 드레스차림이었다. 일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시절이라고 하지만 저렇게까지 해야하나 싶기도 하고 그런 순간이니 저렇게라도 남기고 싶은게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신부들은 대부분 흰색이나 밝은색 드레스를 많이 입을텐데 중국의 신부들은 모두가 붉은색이다. 실제 결혼식장에서도 붉은색 드레스를 입는지는 모르겠지만 야외촬영하는 예비신부는 모두 그랬다.


아무리 본인이 원한 촬영이라도 추위까지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다. 추위로 굳었는지 신부의 얼굴이 뭔가 어색하다.



전망대 한쪽에는 향을 꽂는 커다란 향로가 몇 개 있고 커다란 가마 같이 생긴 것도 있다. 이곳에서는 하루종일 향 연기가 끊이질 않았는데 아침에는 종교적인 이유로 이곳을 찾은 티벳불교 신자들이 더욱 많았다. 정성스레 준비해 온 타르초를 걸려고 하는 사람들도 종종 눈에 띈다.


타르초를 걸 준비를 하는 사람들과 오체투지를 하는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 무슨 생각을 하고 있으며 어떤 마음일 무척 궁금해졌다.


한 사람이 한 묶음씩 향을 태우다보니 흡사 장작을 태우는 것 같다.


같은 중국사람들이지만 타지에서 온 사람과 이곳에서 살아온 소수민족들은 생김새가 많이 다르다. 소수민족들은 고산지대에서 자외선을 듬뿍(?) 받으며 살아왔기 때문에 까맣게 탄 얼굴색을 보고도 알아볼 수 있지만 풍기는 기운도 억세다. 얼굴 생김새도 코가 높고 눈은 옆으로 긴 사람들이 많았다. 언뜻보면 무뚝뚝하고 무섭게 보이지만 이야기할 땐 잘 웃고 말도 많았다. 머문 기간은 겨우 일주일 남짓이었지만 내가 느낀 인상은 그랬다.




구름이 걷히길 바랬는데 어째 더 많아지고 있었다. 13개의 봉우리 중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들 몇 개를 제외하면 구름에 가려졌다 드러났다 하기를 반복하며 새벽부터 모인 사람들의 애간장을 태웠다.


해발 6740미터의 메이리쉐산 최고봉, 카와거보


언제 해가 떴는지도 모르게 눈쌓인 봉우리 끝에 아주 조금 붉은색 기운이 돌았다. 기다리던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하'하고 내뱉는 탄식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옆에 있던 중국커플은 환호성을 지르고 난리가 났다. 하지만, 사진으로 봤던 붉은 빛이 도는 황금색에 많이 못미쳐서 좀 실망스러웠다. 내 기대가 너무 과했을지도...


기대했던 황금색도 붉은 색도 아니었다. 인터넷에서 본 사진은 보정의 효과인가?



카메라에서 지원하는 필터효과를 설정하고 찍었더니 좀 더 붉게 찍혔다. 그런데 나는 이런 필터효과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사물의 특정부분만을 클로즈업해서 찍을 때는 필터효과로 미쳐 보지못한 부분을 강조할 수 있지만 풍경사진을 찍을 때는 내 눈으로 본 그대로를 남기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냥 내 취향이 그렇다.



구름은 점점 많아져서 산봉우리가 낮은 구름과 높은 구름 사이로 살짝 드러났다.  


해가 뜨고 구름이 많아져서 산봉우리가 완전히 가려지자 사람들도 슬슬 돌아가기 시작했다.


위뻥으로 가는 산행길에 의외의 일행이 합류했다.(아니, 우리가 합류했다.) 어제 같은 숙소에 묵게 된 이십대 중국인들하고 이야기를 하다가 페이라이시에서 시당으로 가는 빠오처를 같이 타기로 한 것이다. 이들이 예약한 빠오처에 우리가 돈을 나눠내고 타게 된 것이다. 일행은 수다스럽고 에너지 넘치는 이십대 중반의 중국여자 다섯, 이들의 친구로 조용하고 과묵한 중국남자 하나, 삼십대 초반의 한국남자 둘, 사십대 초반의 한국남자 하나가 되었다.


작은 빠오처에 억지로 껴서서 시당으로 출발했다. 페이라이시에서 시당까지는 가까운 길이 아니다. 거리는 33킬로미터쯤 되지만 길이 산등성이로 난 꼬불꼬불한 길을 돌아서 가야하기 때문에 한 시간쯤 걸렸다. 그리고 예상했던대로 메이리쉐산으로 들어서는 입구에 매표소가 있었고 차를 막고 표를 검사하는데 시간이 꽤 걸렸다. 시당도 작은 마을이지만 여기까지는 차가 다닐 수 있다. 여기서부터 위뻥까지는 교통편으로 다니는 차가 없어서 말을 타거나 걸어서 가야한다. 하지만 그 전에 대여섯시간의 산행을 위해 식사를 먼저 해야한다.



시당에서 위뻥으로 가는 산길 입구에 나무로 얼기설기 지은 조잡한 나무집이 있는데 여기서 음식을 판다. 뭘 시키는지도 모르고 있다가 중국 여인네들이 시킨 음식을 받았다. 부슬부슬 날리는 쌀 위에 양념해서 구운 돼지고기를 몇 점이 올라가 있었다. 가리는게 없다보니 맛은 나쁘지 않았지만 밥에 비해 올려진 고기가 너무 부족해서 나중에는 밥만 꾸역꾸역 먹어야 했다. 고기만 두배쯤 올려져 있다면 가격을 더 받더라도 좋을 것 같다. 


식사를 하고 오줌이 마려워 일하는 사람에게 화장실이라는 중국어를 이야기했더니(뭐라고 했었는지 잊어버렸다.) 뭐라뭐라 이야기하더니 손가락을 바깥으로 가리키고 휘휘 저었다. 화장실이 없으니 난처해야 정상인데 '이제 산속으로 들어왔구나' 싶어서 오히려 미소가 지어졌다. 


이 많은 밥을 고기 몇 점에 먹으라고? 니네 원래 짜게 먹는 사람들 아니었어?


같은 중국사람들이지만 이들은 도시에서 온 사람들이라 받은 음식이 기대와는 달랐던 것 같다. 영 뜨는게 부실하다.


채비를 점검하고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완만한 오르막이긴 하지만 산소가 부족한 고지대에서 배낭을 매고 오르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다. 이쯤되니 호도협 차마객잔에 두고 온 내 등산용 스틱이 자꾸 그리워졌다. 운동하고는 담을 쌓고 산듯한 중국여인네들은 벌써부터 얼굴이 달아오르고 몇 발짝 걷고 멈추길 반복했다. 그 중에서도 유독 느린 여자의 배낭을 같이 온 중국남자가 받아서 짊어졌다. (나중에는 그 다음으로 힘들어 하는 여자의 배낭을 한국 일행이 받아서 짊어졌다. 나는 그럴 체력이 안되는걸 잘 아니까 만용은 부리지 않기로 했다.)


티벳의 8대 성산이라더니 무척 많은 사람들이 다니고 있었다. 여행자, 등산객들도 있지만 제일 많은 사람들은 종교적인 이유로 이곳을 찾은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차림새에는 흔한 등산화나 아웃도어 자켓은 없다. 낡은 운동화에 일상복을 입고 산길을 간다. 우리는 이곳에 도시에서 찌든 때를 벗고 머리를 비우러 온 것이지만 이들에게는 단지 살아가는 곳이 이곳인 것 뿐이다. 


내려오는 사람과 오르는 사람이 인사를 주고 받는다. 처음에는 뭐라고 하는지 몰라 고개만 꾸벅하고 멋적은 웃음을 지어 줄 뿐이었다. 그런데 계속해서 인사를 주고 받다보니 어느새 나도 그 단어를 흉내내어 인사를 받게 되고 결국에는 내가 먼저 인사를 하게 되었다. 아직도 그 단어가 '짜시탈레'인지 '나시탈레'인지, 혹은 '짜시달레'인지 '나시달레'인지, 어쩌면 다 틀렸는지 알지 못한다. 단어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인사를 주고받는 이들의 얼굴을 보면 내가 하는 서투른 흉내가 충분히 전해지고 있음이 느껴진다. 대화는 단어로 하는게 아니라 의미로 하는 것이니 말이다.


그 중에 한 사람이 내 손에 자기가 짚고 오던 얇은 지팡이를 건네주었다. 자기는 거의 다 내려왔으니 앞으로 갈 길이 많이 남은 네가 가지고 가란 뜻일게다. 지팡이가 도움이 될거란 기대보다는 산길을 가기에 나보다 훨씬 불편한 차림임에도 자신의 것을 선뜻 건네주는 그 마음이 고마워 얼른 받아들었다. 마음이 설레었다. 리장에서 그렇게도 실망했던, 나의 상상속의 윈난성 여행이 조금씩 현실이 되고 있었다.


며칠간 메이리쉐산 주변을 트레킹을 하며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이 자주 생각났다. 만나는 사람마다 '올라'하고 인사하던 기억, 순례자들끼리 도와주고 챙겨주던 모습이 이곳과 무척이나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종교는 다르지만 두 곳이 성지순례 길이라는 것도 같았다. 나는 트레킹을 한 것이 아니라 며칠간 성지순례를 하는 티벳사람들을 따라 다닌 것일지도 모른다.


숲속으로 난 길을 한두시간 오르면 이런 쉼터가 나온다. 이 뒤로는 길이 조금 가파르지만 고도가 높아진 덕에 경치가 좋아진다.



며칠간 메이리쉐산 주변을 트레킹하는 내내 초록색 쓰레기통들이 몇 십미터 간격으로 나무에 매어져 있었다. 이렇게 쓰레기통을 설치하고 쓰레기를 수거할 수 있는 것은 중국의 값싼 노동력 때문이겠지만 덕분에 길에 쓰레기가 거의 없었다.


고도가 높아지니 수목들 사이로 눈덮인 설산이 보이기 시작했다.


말에 오르는 것조차도 힘들어 보이는 나이 많은 노인은 얼마 남지 않은 여생에서 이곳에 오는 것이 마지막 소원이었는지 말에 매달리듯 타고 이곳을 오른다. 백일도 지나지 않은 젖먹이를 안고 있는 아기엄마는 출산으로 몸이 정상이 아닐텐데 아기의 건강과 복을 빌려는지 이곳을 오른다. 이들만이 아니라 아무것도 모를 네댓살된 아이들도 모두 자기 발로 이 곳을 오른다. 길을 걷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어째서 남녀노소가 이 길을 걷고 있는지 무척 궁금해지기 시작했다.(반대로 이 사람들은 여행자들이 굳이 이 먼 곳에 와서 산길을 걷는 이유가 궁금할 것이다.)


어른도 힘들어 하는 길을 개구쟁이 셋이 신나게 걷고 있었다. 요즘 아이들은 버스 한정거장도 걷기 싫어하는데 이녀석들은 얼마나 튼튼한지 자꾸 웃음이 났다.


귀여워서 사진을 찍으려했더니 일렬로 줄을 서버린다.  녀석들 표정이 자연스러워 맘에 든다. 뒤따라오는 할아버지 표정도 좋다.



위뻥으로 가는 고갯길 꼭대기에 다다르자 갑자기 타르초의 물결이 앞을 가로막았다. 나중에 쉔푸(신폭)에서 해일같이 거대한 타르초들을 만나긴 했지만 이곳에서 본 타르초들도 충분히 인상적이었다.


명랑한 중국처자. 몇 마디 알고 있는 한국어를 쓸때마다 웃겨서 혼났다.




드디어 고갯길 꼭대기에 도착했다. 앞으로는 메이리쉐산의 설봉들이 보였다. 고갯길에 있는 휴게소에서 잠시 쉬었다가 위뻥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일행이 된 중국처자들은 친절하고 쾌활했지만 내 여행에서는 썩 반가운 타입이 아니었다. 어딜가든 찍어야 하는 셀피로 걸음을 자꾸 멈춰야하고, 내가 찍으려는 사진에는 자꾸만 섞여들어 방해가 되었다. 나에게는 이번 20일의 여행이 앞으로 몇 년 후에 다시 가질 수 있을지 모를 소중한 시간이라 오로지 나에게 집중하고 싶었다. 내 생각과 발걸음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멈춰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자꾸 반복되는 셀피와 단체 사진으로 조금씩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이들에게 잘못이 있는 건 절대 아니다. 15년의 나이차, 중국인과 한국인의 문화차, 이들의 여행과 내 여행의 목적차이를 무시하고 일행이 되어버린게 문제다.)


메이리쉐산이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구름이 끼긴 했지만 그래서인지 더 거칠고 험해 보였다.



고갯길 아래 상(上)위뻥마을이 보인다.





여섯시간쯤 걸려서 상위뻥에 도착했다. 무리하지 않더라도 천천히, 꾸준히 걸으면 다섯시간쯤이면 도착할 수 있을 거리다. 위뻥은 말그대로 심심산골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었다. 숙소건물 밖에 위치한 화장실과 샤워장은 물이 아주 빈약하게 나왔고(간혹 아예 안나오기도 한다.) 1층에 있는 식당은 맨 바닥에 자그마한 식탁 몇 개가 놓였을 뿐이다. 밤에는 천장을 뛰어다니는 쥐떼들로 쉽게 잠들기 어렵다. 숙박비는 우리돈으로 5000원이 채 되지 않았다. 이렇게 불편함이 잔뜩 모여있는 곳이지만 반드시 다시 가고 싶은 곳으로, 가능하면 많이 변하지 말았으면 하는 곳으로 기억에 남아버렸다.


숙소 뜰에 코스모스가 피어있었다. 아침저녁으로 꽤나 추웠는데 어째 코스모스가 이제야 피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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