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빙후와 신푸를 한번에 다녀오고나서 신후까지 가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신후는 세 곳중에 위뻥마을에서 가장 멀뿐만 아니라 가장 높은 곳(해발 4000m)까지 올라야한다. 그렇기에 일정상 신후를 뺐던 것인데 한국으로 복귀하는 시간이 촉박해지더라도 이곳에 하루 더 머물면서 다녀올까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번 여행에서 신후는 가지 않았다. 어제 저녁 숙소로 복귀하면서 고생했던 것이 욕심을 지우는데 큰 몫을 한 것 같다. 누군가는 거기까지 갔으면 '무리가 되더라도 마저 다녀왔어야 하지않나'라고 하겠지만 지금 생각해봐도 가지 않은게 잘한 것 같다. 다음에 다시 갈 목적도 생겼고 무리하지 않았기에 별 탈없이 여행을 끝낼 수 있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조금 벗어난 이야기긴 하지만, 여행뿐만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도 우리는 욕심 혹은 욕망을 갖도록 강요 받는다. '넌 왜 공부에 욕심이 없니?', '야망이 그렇게 없어서야 성공하긴 글렀어' 라는 말을 종종 하거나 듣는다. 욕심이나 욕망이 없다고 자신이 하는 일에 게으르거나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도 아닌데도 그렇다. 결과보다는 과정에 의미를 두거나 결과가 주는 열매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사람이 추구하는 목표를 이해하지 못한채 이야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자신과 목표가 같지 않거나 이해하기 어렵더라도 무시하고 폄하하는 일이 없어졌으면 좋겠다. (이것에 대한 이야기는 샹그릴라로 돌아간 후에 더 생각하게 된 일이 있었다.)



위뻥마을을 떠나는 날 아침, 메이리쉐산에 해가 비치는 것을 보기 위해 새벽같이 일어났다. 이틀전 페이라이시에서 맞은 아침과 다르게 이 날은 기가막히게 날씨가 좋아서 황금빛으로 빛나는 멋진 설산을 보게 될 거란 생각에 흥분되었다. 거대한 산 그늘에 가린 마을에는 아직 불이 켜져 있었지만 설산은 이미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메이리쉐산은 주봉이 6740m로 높은 산이긴 하지만 세계에는 이보다 높은 산들이 얼마든지 많이 있다. 그럼에도 이 산은 아직도 등반가들이 오르지 못한 미지의 산으로 남아있다. 1991년에는 중국과 일본 등반대가 큰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티벳의 성산이라서 인간의 발길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하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 7,8000미터가 넘는 산들이 즐비한 히말라야에서는 비교적 낮은(?) 높이에 비해 오르기가 어렵다는 점과 장비와 등반기술의 발달로 8000m 급 산을 등정해도 이슈가 되지 않을만큼 고산 등정이 빈번해졌기 때문에 이 산에 대한 도전자체가 별로 없는게 아닐까 싶다.




본격적으로 날이 밝아오자 마을은 한층 선명해졌음에도 봉우리주변 하늘은 오히려 어두워지는 듯했다. 그러다 갑자기 봉우리 왼쪽끝 부분부터 불그스름하게 물들시 시작했다.










해가 높이 떠오르면서 붉은 기운은 점차 옅어지고 예의 흰 설산으로 돌아왔다.


날씨가 더없이 좋았음에도 아침 햇살을 받은 황금빛 설산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었다. 인터넷에서 본 불타는 듯 붉은 산이 되려면 약간은 보정의 힘을 빌려야 할 것 같다. 해가 완전히 떠오르고 일행은 이틀 묵었던 숙소를 떠날 채비를 마쳤다. 나를 제외한 다른 일행은 하위뻥 마을에 하루를 더 묵으면서 신푸에 다녀올 계획이었고, 나는 산길을 따라 닝농으로 가서 거기서 페이라이시로 가는 빠오처를 탈 생각이었다. 


낮은 구름이 걸린 하위뻥 마을이 아름답고 평화로워 보인다.



구름 한점 없는 하늘이 이곳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날씨였다. 이렇게나 깨끗한 설산 봉우리를 보려면 하늘도 맑아야하지만 산봉우리에 바람도 불지 않아야 하는데 그런 날은 무척 드물다. 설산 봉우리에는 대개 세찬 바람이 불어서 하늘이 맑더라도 봉우리에는 항상 눈이 날리거나 구름이 끼어있기 때문이다. 오늘 신푸에 가면 정말 환상적인 풍경을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괜히 어제 무리해서 갔나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다. 하지만 어제 스러져가는 햇살과 구름속에서 바람에 나부끼는 수많은 타우초가 어우러진 풍경이 신푸에는 왠지 더 어울리는 것 같았다.






일행과 헤어질 시간이 되었다. 니농마을로 가는 길은 갈래길이 몇 군데 있고 잘못된 길로 들어서면 무척 험한 길로 들어서거나 절벽으로 통할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는 말을 여러번 들었다. 일행은 아니더라도 다른 여행자라도 있으면 길동무를 삼으련만 이쪽으로는 여행자들도 보이지 않았다. 겨우 이틀이고 나이와 언어 문제로 말을 섞은 적도 별로 없지만 혼자 일행과 헤어진다니 중국처자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인사했다. 적응이 안되는 면이 있지만 심성은 착한 처자들이다.




마지막으로 메이리쉐산을 눈에 담고 니농으로 가는 길로 들어섰다. 한동안은 평탄한 숲길이 계속되는데 들은 것처럼 길이 갈라지는 곳이 나오는데 이때는 무조건 사람이 많이 다닌 것처럼 보이거나 넓은 길로 가면 된다. 그래도 정 모르겠으면 앞이나 뒤에서 사람들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손가락으로 길을 가리키며 '니농?' 하고 물으면 된다. 길이 확실해질때까지 처음 한두시간은 보이는 사람마다 '니농?'이라고 물으며 다녔다. 길에 대해 주의사항을 여러차례 들은터라 마음속으로 꽤나 긴장을 했었나보다. 초반에 찍은 사진이 한장도 없었다. 길이 확실해지고, 휴게소가 나오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차츰 마음이 놓였다.


아마도 백마설산?






위뻥마을로 들어가는 물자수송은 대부분 말이 담당하기 때문에 산길을 걸으면서 짐을 실은 말들과 마주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때 길을 비켜줄 때는 항상 산쪽에 바짝 붙어서서 길을 비켜야 한다. 비탈이 있어서 비켜서기 어려울 것 같지만 반대편으로 비켜서 말이나 말이 실은 짐과 부딪히게 되면 낭패를 보게 된다. 양호한 곳에서는 계곡물에 발을 적실뿐이지만 위험한 곳에서는 실족해 절벽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 




가는 길에 식당겸 휴게소가 있어서 들렀다. 휴게소는 지금까지 종종 있었지만 이곳은 그냥 지나치지않은 이유는 자리에 앉아서 보이는 경치가 제법 시원스러웠기 때문이다. 맥주 한캔을 시켜놓고 경치를 보고 있는데 뭔가가 다리를 스윽하고 스치고 지나갔다. 놀라서 보니 새끼돼지 두어마리가 손님들이 떨어뜨린 음식물을 주워먹으며 식탁밑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위생적이라 할 수는 없지만 이곳은 개보다 돼지가 더 많이 보이는 곳이니 그런가보다 할 수 밖에. 흘린 음식물을 자동으로 처리해주니 종업원이 할 일이 줄긴 하겠다. 



윈난여행 내내 자주 마셨던 따리맥주. 도수가 낮아서 싱거운 듯하지만 덥거나 목마를 땐 그래서 제격이다.


나를 놀래킨 새끼 돼지들


시땅에서 위뻥으로 올 때도 성산(聖山)으로 향하는 많은 순례자들을 보았지만 위뻥에서 니농으로 가는 길에도 반대편으로 많은 순례자들이 성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니농에서 위뻥으로 오르는 길은 고산에 적응된 이들에게도 쉽지 않은 듯했다. 아이들부터 노인들까지 이 길을 힘겹게 오른다. 그럼에도 반대편에서 오는 사람이 보이면 의례 손바닥을 하늘로 향하게 하고는 '짜시탈레'하고 인사를 한다. 그 중에 얼굴이 검게 타고 주름이 가득한(대부분의 티벳 할머니가 그렇지만) 한 할머니의 미소띈 얼굴이 잊혀지지 않는다. 마치 성인이나 고승처럼 편안하고 자애로운 얼굴이었다.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재벌이나 권력자도,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연예인들도 가질래야 가지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경치는 둘째치고 이런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면 시간을 들여 찾아 올 값어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이 높으니 골이 깊다. 발이라도 미끄러지면 목숨을 보장할 수 없다. 항상 주의하며 걸어야한다.





니농마을에 가까워오자 계곡이 끝나가고 있었는데(더 넓고 큰 계곡과 만날뿐이지만) 그곳은 길과 다리를 놓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저렇게 길과 다리가 놓여진 덕분에 나같은 여행자가 멀리서도 이곳까지 짧은 시간을 들여 올 수 있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이 곳에 사는 현지인들의 삶도 그것에 맞춰 바뀌어 갈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여행전에 봤던 차마고도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이 스치듯 머릿속을 지나갔다. 차마고도를 걸어 도시에서 말과 차를 바꾼 티벳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산중턱에 길을 놓기 위해 폭약이 터지는 광경을 걱정스레 보던 장면이 그것이다. 실크로드와 함께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되었다는 이 교역로에 자동차가 다니는 길이 놓이면 쉽게 물자가 드나들고 재화가 풍부해지겠지만 풍요로워지는 것이 이들은 아닐 것이다. 외지의 거대 자본에 노동력을 제공하는 하급 노동자가 되는 것이 불보듯 뻔하다. 이들이 그것으로 행복하다면 좋겠지만...


다시 짐을 실은 말들은 만났다. 재빨리 산비탈에 붙어 수로에 다리를 벌리고 섰다.


멀리 니농마을이 보인다. 단지 수십 가구가 모여있는 듯, 생각했던 크기의 마을이 아니었다.


메이리쉐산 주변은 수목이 우거진 풍요로운 경치였는데 불과 수킬로미터를 걸어 나오니 산들이 온통 민둥산이다. 고도차이가 나는 것도 아닌데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다. 이미 다 베고 써버린 것인지. 갑자기 황량하게 변한 경치에 적응이 되지 않았다.


걷다보니 비탈 아래에 빠오처들이 모여있는 것이 보였다. 그쪽으로 가면 빠오처를 잡아타고 페이라이시로 갈 방법이 있을 것 같아서 사람들이 다닌 듯한 비탈길을 찾아 조심조심 내려갔다. 위뻥에서 여기까지 오는 것은 무척이나 순조로웠다. 출발전 걱정했던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날 나의 고난은 마음을 놓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우선 여기서 페이라이시로 가는 빠오처가 얼마인지 정보가 없었다. 비탈길을 내려가 이야기를 나눈 빠오처 기사들은 한결같이 똑같은 금액을 이야기했고 에누리나 협상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네댓명이 나눈다면 크지않은 금액인데 혼자 타려니 적잖게 부담되는 가격이었다. 거리로 따지면 한국 택시비와 별 차이가 없으니 꽤나 비싼 가격이다. 일종의 담합, 좋게 말하면 정가였다. 게다가 이 기사들은 대단히 불친절해서 깎을거면 걸어가라는 말을 비웃음을 흘리며 스스럼없이 했다. 나는 그때까지 니농마을에 가면 마을 사람들이 타는 빠오처가 있을거라 생각했고 니농마을까지 다시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힘들게 걸어간 니농마을은 무척 작은 곳이어서 정기적으로 다니는 빠오처가 없었다. 페이라이시까지 가는 빠오처의 가격은 먼저나 도찐개찐이었고 이곳도 어차피 같은 기사들이라 협상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니농 근처에 있는 빠오처 기사들은 배짱 장사다. 어차피 그곳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기들 차를 탈 수 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불친절하고 사람을 기분 나쁘게 만든다.


결국, 비싼 돈을 주고 페이라이시로 오는 빠오처를 타야했다. 만약 혼자서 위뻥에 간 여행자라면 다시 페이라이시로 나올 때는 들어갈 때와 마찬가지로 시땅을 통해서 나오는게 좋을 것 같다. 위뻥에서 니농으로 오는 길이 걷기에 무난하고 경치도 좋지만 그렇다고 비싸고 불친절한 빠오처를 감수하고 볼만큼 대단한건 아니다. 인터넷에 올라온 여행기는 여행한 곳에 대해 대부분 좋게만 쓰는 경우가 많아서 니농으로 오는 길을 제법 기대했지만 실상은 그 글에는 많이 못미쳤다.



니농에서 페이라이시로 가는 길에서 초반부는 여기저기가 공사중이라 엉망이었다. 비포장의 낭떠러지 길을 가는데도 운전사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길이라 별로 조심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 와중에 전화가 오니 한손으로는 전화를 받으며 운전했다. 흔들리는 차 안에서 손잡이를 잡은 손에 은근히 힘이 들어갔다. 그래도 이제는 편안하게 페이라이시로 갈 수 있겠거니 생각했지만 그것도 얼마 못가 깨졌다.


비포장도로를 벗어나니 이 운전사가 졸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차가 조금씩 차선을 벗어나는 것 같아서 운전사를 봤더니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 놀래서 창문을 열고 담배를 한대 꺼내 물었더니 자신도 멋쩍었는지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렇게 줄담배를 피며 니농에서 더친까지는 도착했다. 그런데 더친에서 차가 무지하게 막히기 시작했다. 산비탈에 형성된 더친에서 사고라도 나서 한쪽 길이 막히면 다른 방향으로 우회할 수 있는 길이 별로 없어서 온 동네가 다 막혀버린다. 한참 기다린 끝에 더친을 통과해서 페이라이시로 향했다.


하지만 이날 나의 운수는 무척 나빴나보다. 끝판왕이 길 앞에 기다리고 있었다. 더친에서 페이라이시까지 반쯤 왔을까 차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저 멀리 보니 산비탈 일부분이 무너져 길을 덮고 있었다. 그리고, 흙과 돌을 치우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안풀려도 이렇게나 안풀리는 날이 있을까 싶은데 안그래도 더친에서 막히는 바람에 짜증이 났던 운전사가 이젠 폭발직전이었다. 


중국사람들에게는 아직 서비스의 개념이 없다. 본인이 고객과 한 약속은 어떤 손해를 보더라도 지켜야 하고, 그것을 못지키게 되면 본인이 받을 대가를 받을 수 없다는 것에 대해서도 이들에게는 먼나라의 이야기일뿐이다. 언제 뚫릴지 모르는 길을 보고 있으니 이제 나에게 화를 내기 시작했다. 나도 같이 화를 내고 서로 뜻도 통하지 않는 말싸움을 시작했다. 언뜻 파악한 걸로는 이제 길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걸어가라는 것 같았다. 그래도 6킬로미터는 남았으니 부지런히 걸어도 한시간은 족히 걸어야한다. 게다가 아침부터 식사도 못하고 걸은터에 체력도 바닥이라 처음에는 다시 걷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계속되는 말싸움과 운전사의 짜증에 대꾸하다보니 스스로 참지 못하고는 화가나서 욕을 해주고는 차에서 내려버렸다.


그리고, 걸었다. 흙과 돌을 치우는 공사기계들을 피해서 한참을 걸었다. 처음에는  길이 막혀 있었는데 얼마지나자 차들이 하나 둘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삼십분만 차에서 더 싸우고 있었더라면 편안히 갈 수도 있었겠지만 삼십분을 그러고 있었을 자신은 없었다. 차라리 더 빨리 내려서 차들이 지나다니기 전에 가지 않은게 후회되었다. 다니는 차를 피해서 위험한 도로가를 삼십분 넘게 더 걸었다.


불친절의 끝판왕, 니농의 빠오처 운전사들



우여곡절, 천신만고 끝에 페이라이시에 도착했다. 며칠전 묵었던 숙소로 가서 비싸더라도 더블룸을 배정받아 드러누웠다. 돈을 좀 더 줘서 그런가 이 방에는 베란다도 있어서 밖으로 메이리쉐산이 잘 보였다. 창밖으로 보이는 산의 모습은 제임스 힐턴이 '잃어버린 지평선'을 쓸 때와 변함이 없을텐데 지금 그가 여기에 온다면 그 소설은 절대로 쓰지 못했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곳은 전통의 가치와 믿음을 가지고 변함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과 영리만을 최고의 가치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두 모습을 가지고 있다. 메이리쉐산을 떠나는 날, 니농의 운전사들을 만난 것은 나에게 큰 손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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