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토리니에서 할 일이 별로 없었지만 예약해둔 페리 때문에 떠날 수도 없었다. 게다가 산토리니에서 아테네로 가서 바로 다음날 비행기를 타고 이집트로 갈 예정이었기에 일정을 변경하기가 쉽지 않았다. 터키에서 그리스로, 다시 이집트로 가게 된 이유는 먼저 이야기했듯 중동의 불안정한 정세 때문에 육로로 갈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뉴스에서는 이집트도 대통령 선거로 인해 카이로 시내에 동요하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고 했지만 다이빙을 배우러 갈 이집트 후루가다의 다이빙 샵에서는 별다른 조짐이 없으니 걱정말라고 했다.


이아 마을까지 가려다 그만둔 다음날은 숙소에서 늦잠을 자고 느지막히 일어났다. 숙소에서 점심을 만들어 먹고 그날 있을 EPL 11~12시즌 마지막 경기를 보기 위해 축구 중계를 해주는 펍을 찾아 돌아다녔다. 어렵게 찾은 펍에는 벌써 맨유와 맨시티 팬들이 나뉘어 TV 앞에 진을 치고 있었다.


이 시즌의 마지막 경기가 유독 중요했던 이유는 서로 다른 상대와 경기를 하지만 이 마지막 경기 결과에 의해 그 해의 우승팀이 갈리기 때문이었다. 스포츠 중계를 전문적으로 해주는 펍답게 왼쪽과 오른쪽 TV에서 동시에 두 경기를 보여줬다.


맨유의 경기가 먼저 끝났다. 맨유는 승리한 상태에서 맨시티는 최약팀 중 하나인 QPR에 오히려 한골차이로 지고 있었다. 경기는 거의 끝나가는데 맨시티가 우승하려면 2골이 필요한 상황이었으니 맨유는 경기장에서 미리 우승 축하 세레모니를 펼치고 있었다. 퍼거슨 감독의 웃음띈 얼굴이 계속해서 TV에 나오고 있었고 펍에 있는 맨유 팬들은 맨시티 팬들을 조롱하며 맥주를 들이켰다. 


그러다 갑자기 맨시티가 한골을 넣어 동점을 만들었고 맨시티 팬들은 환호했지만 한 골이 더 필요한 상황이라 맨유팬들은 검지를 까딱이고 고개를 저으며 맨시티 팬들을 놀렸다. 추가 시간도 거의 끝나기 직전 맨시티에서 또다시 한 골을

넣고 승리해버렸다. 맨유 경기장에서 우승 축하를 받던 퍼거슨 감독과 선수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펍은 난리가 났다. 맨시티 팬들은 환호성과 함께 맨유 팬들을 조롱하기 시작했고 맨유 팬들은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마시던 맥주를 놔두고 다들 일어서서 나가버렸다. 한동안은 맨시티 팬들의 축제였다. 드라마도 이런 드라마가 있을까? 이래서 스포츠를 각본없는 드라마라고 하나보다. 평생 기억에 남을 축구 경기를 산토리니의 펍에서 보게될 줄은... 뜻밖에 산토리니에서 좋은 추억을 갖게 되었다. 참 인생은 알수 없는 일의 연속이다.


축구를 보고 나오니 슬슬 해가 지기 시작했다. 이아 마을에서 못 본 석양이 생각나서 근처에 석양이 잘 보이는 벤치를 찾아갔다.







강렬하게 마지막 붉은 빛을 내뿜던 태양이 바다 저편으로 사라졌다. 건너편 섬 너머로 졌으니 바다로 떨어지는 태양은 아니지만 보드룸 풍차 언덕에서 봤던 낙조와 더불어 에게해의 지는 해를 두 번이나 본 것도 행운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다음날은 산토리니에서 머무르는 마지막 날이라 숙소 테라스에서 해가 뜨는 광경을 보려고 일찍 일어났다. 숙소가 절벽 반대편이라 해가 뜨는 광경을 바로 볼 수 있었다. 비싼 숙소에서는 해가 지는 광경이 보이지만 싼 숙소에서는 해가 뜨는 광경을 볼 수 있다는 것도 아이러니하다.


아직 어두운 가운데 갑자기 바다 멀리 해가 솟았다.



야간 버스를 타고 가다가 지평선에서 해가 솟는 광경을 본적은 몇 번 있지만 여행중에 해가 뜨는 것을 본 기억은 썩 드물었다. 해가 지는 것은 낮동안 여행하다가 해가 질 시간만 맞추면 볼 수 있는데 반해 뜨는 광경은 일찍 일어나서 해가 뜨는 곳으로 가야하기 때문에 지는 것을 보는 것보다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산토리니에서는 저렴한 숙소 덕분에 쉽게 볼 수 없는 해가 뜨는 광경을 테라스에 앉아서 편하게 볼 수 있었다.


숙소 테라스에서 제대로 찍은 사진이 없어 아쉽다.

반대편 가파른 절벽과 달리 완만한 경사에 펼쳐진 마을과 그너머 짙푸른 에게해가 보인다.

이 정도 뷰라면 가격대비 나름 훌륭한 편이다.


아테네로 떠나는 페리를 기다리며 항구에서 찍은 고양이

잠시 한눈 파는 사이에 옆구리를 파고들어 앞발로 내 허벅지에 열심히 꾹꾹이를 했던 애교 많은 녀석이다.



떠나는 페리에서 본 마지막 피라 마을

당나귀 변이 가득했던 그 냄새나는 계단도 보인다.



해지는 걸 보러갔던 이아 마을


로도스에 갈 때 탓던 페리보다는 안좋았지만 산토리니 올 때 탓던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배를 타고 몇 시간 지나니 다들 지치고 힘들어 보였다.



몇 군데 섬에 정박해 사람들을 태우고...



어느 덧 해가 저물었다.


아테네에 도착했을 때는 12시가 다 된 시간이라 지하철도 끊어져서 시내로 들어갈 방법이 택시 밖에 없었다. 게다가 아테네 시내 중심가는 밤이 되면 우범지대가 되어서 꽤나 위험하다고 했다. 산토리니에서 찾아본 아테네 여행 정보에도 그런 내용들이 꽤 많았는데 택시 기사도 예약한 숙소에 데려다 주면서 계속 조심하라고 주의를 줬다. 숙소에 도착하면 트렁크에서 배낭을 꺼내 뒤도 돌아보지말고 숙소로 뛰어 들어가라고 했다. 길가에 흑인들이 보이면 '블랙 마피아', '블랙 마피아' 그러면서...(택시비가 꽤 나왔다. 한화로 4,5만원은 나온 것으로 기억한다. 길도 모르는데 밤이라 제대로 가는지도 알 수 없었다. 위험한 길가에 내리기 싫으면 그냥 나오는대로 줄 수 밖에...)


이집트 아래 수단은 경제적으로 매우 빈곤한 국가로 여기서 목숨을 걸고 지중해를 넘어 유럽으로 들어오는 불법 이민자들이 매우 많다고 한다. 비단 수단뿐만 아니라 북아프리카 대부분의 국가에서 넘어오는 불법 이민자들 때문에 유럽 국가들이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르포를 여행 후에 봤다. 유럽 경제가 좋았을 때는 이들이 할 일이 있었지만 경제가 안좋아지니 일거리를 찾을 수 없고 결국 거리를 배회하게 된 듯했다. 자신의 안녕을 위해 타인을 해치는 일은 결코 용납 받을 수 없는 일이지만 이들의 사정도 안타깝다. 실제 낡은 배에 의지해 지중해를 건너다가 목숨을 잃는 사람들도 부지기수라고 한다.


하지만 택시 기사의 관점에서 보면 이들은 자신이 살아가는 환경을 위협하고 치안을 불안하게 하는 불법 이민자일뿐이다. 세상은 이렇게나 불공평하고 불평등한 일로 가득하다.


내일은 이집트로 가야하는데 만사가 피곤하고 귀찮게 느껴졌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