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찍 숙소에서 나와 아르마스 광장 뒤쪽에서 여행사 버스에 올랐다. 그리고 어딘지 모를 곳으로 한참 내달렸다. 안데스의 아름답고 독특한 고산 풍경을 감상하는 중에 버스는 몇개의 마을을 지나고도 한참 더 달리고 나서 어떤 마을 건물앞에 도착했다.


어제 투어를 예약하면서 쿠스코 근교에 있는 잉카유적 모라이와 살리네라스만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그 외에 다른 곳에 간다는 생각은 해보질 않았다. 그런데, 모라이가 아니라 건물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는게 좀 마뜩잖았다. 들어가는 입구에 털실로 짠 목도리나 장갑, 모자들이 가판대에 널려져 있는 것을 보니 역시나 물건을 팔려는 수작이구나 싶어서 기분이 더 상했다.


건물안 빈터에는 안데스 고산족 복장을 한 현지여인들이 뭔가를 준비하고 여행자들을 기다리고 있었고, 여행자들이 그 여인들을 중심으로 준비된 의자에 앉고나자 준비한 것들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것은 알파카나 양털로 실을 잣는 것, 그 실들을 현지에서 나는 선인장이나 식물들로 염색하는 것이었다. 


선인장과 몇 가지 재료를 섞으니 신기하게도 투명했던 액체가 금새 붉은 빛이 도는 염료로 바뀌었다.

(선인장 재료로 실을 염색하는 모습은 한달 뒤 멕시코에서 다시 한번 보게 되었다.)








인디오 여인은 실을 붉은 색으로 염색하는 방법을 보여주었는데, 여인 주위에 있는 바구니에 갈색, 회색, 노란색, 초록색 실들이 그 색을 내는 천연재료와 같이 놓여 있었다. 인디오 여인들이 입은 원색의 알록달록한 옷들은 이런 방법으로 물들인 실을 써서 만든 모양이다. (사실 지금도 이렇게 예전 방법대로 의복을 만드는지는 모르겠다.) 천연재료로 실을 물들이는 방법이 놀랍기도하고 실들의 색이 생각보다 다양하고 예뻐서 처음 들어올때 나빴던 기분이 누그러들었다.



원주민 여인의 설명과 시연이 끝나고나자 예상했던대로 가판에서 물건을 사게끔 유도했다. 여행중에 뭔가를 사지않는 편이지만, 이들이 전통적인 방법으로 실을 잣고 염색하는 것을 보여준 것에 대한 관람료라고 생각하고 알파카로 짠 얇은 목도리를 하나 샀다. 감촉도 생각보다 부드러운데다 우리나라 돈으로 2천원인가 4천원인가 했던 것 같으니 그다지 비싼 것은 아니었다. (나중에 다른 곳에서 비슷한 목도리의 가격과 비교해보니 조금 더 비싸긴 했지만 관람료가 포함된 가격이라 별로 아깝지 않았다.)


이 마을에서 나와서 다시 안데스 고원을 한참 달려 모라이에 도착했다. 모라이는 잉카인들이 농업기술을 연구하던 동심원 모양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계단식 밭이다. 올해 방송되었던 '꽃보다 청춘'에서 윤상, 윤종신, 이적씨가 액션캠을 들고 빙글빙글 돌던 그 곳이다.(정규방송은 본 적이 없고 방송예고에서는 그랬다.) 이 곳은 잉카제국 멸망 후, 사람들에게 잊혀져 수풀로 뒤덮여 있다가, 1930년대 미국인 탐험가의 항공촬영 중에 발견되었다고 한다.


입구에서 입장료를 산 다음, 조금 걸어들어가면 갑자기 화산 분화구처럼 움푹 들어간 곳이 나온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아주 조그맣게 보이는게 꽤 높아보였다. 이곳에서 잉카인들이 무슨 농경기술을 연구했다는 것인지 선뜻 감이 오지 않았다.





계단식 논밭이라지만 한칸이 사람의 키와 비슷한 높이라 어떻게 오르내릴 수 있는지 궁금했는데 가까이 다가가보니 쌓아서 만든 돌벽 중간에 돌이 네 개씩 튀어나와 있었다. 난간도 없고 밑이 뚫려 있어 좀 불안했지만 실제로는 무척 튼튼하게 만들어져 있어서 조금 주의가 필요하긴 했지만 오르내리는데 전혀 문제가 없었다. 잉카인들의 석조기술은 인정해줄만하다.




어느 정도 내려오고 나서 가이드가 이곳에서 잉카인들이 했던 연구를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잉카인들은 계단식 밭으로 이뤄진 모라이에서 농작물을 키웠는데, 맨 아래층 밭과 맨 위층 밭의 높이(차이가 100미터가 훨씬 넘는다.)에 의한 기온도 차이를 이용해서, 추운 곳에서 잘 자라지 못하는 작물을 아래쪽에 심었다가 점차 윗쪽으로 옮겨 심으면서 작물이 추위에 강해지도록 개량했다고 한다. (반대도 마찬가지로...) 농사짓는 방법을 연구한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그때 벌써 품종개량을 시도한 것이다. 비록 잉카인들은 다른 대륙과 동떨어진 지리적인 문제로 선진문명의 유입없이 독자적인 문명밖에 이룰 수 없었지만, 자연을 이용하고 극복하기 위한 훌륭한 문화수준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페루의 잉카유적을 여행하면서 잉카문명에 대해 실망했었다. 이전에 마추픽추에 대한 여행기에서도 썼었지만 잉카문명이 다른 지역의 고대문명보다 느리게 발전하고 있었고, 때문에 거대한 유적이나 지금으로서도 놀랍게 느껴지는 기술을 축적하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행 후에 이들의 문명화가 천천히 진행된 것은 이유가 있었고, 이들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문명을 발달시키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도 마추픽추가 과장된 면이 많다는 것은 사실이다.)



중간에 박혀진 돌계단을 이용해 계단식 밭을 한칸한칸 내려와야 한다.



맨 아래에 있는 밭의 한가운데에는 태양의 정기가 모인다는 설이 있어서 둥그렇게 둘러앉아 명상을 하는지 주문을 외우는지 자신들만의 의식을 치르는 여행자들이 있었다.


제발 아무데나 동전을 버리고 가지 말았으면...


계단식 밭 벽에 난 홈은 수로로 이용한 것 같았다. 마추픽추에도 비슷한 물길이 있었다.


나가는 길에서 보니 모라이의 규모가 더욱 커 보였다.


이런 동심원의 계단식 밭은 한군데가 아니었던 듯, 다른 곳에서는 복원작업이 진행중이었다.


모라이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살리네라스로 향했다. 같은 안데스 고원지대지만 모라이가 구릉 같았다면 살리네라스는 훨씬 깊은 산골짜기에 위치해 있다.


갑자기 골짜기 도로가에 버스를 세우더니 내리라고 했다. 창밖으로 보이는건 깊은 골짜기 밖에 없는데 왜 내리라는지 이유도 모른채 엉겁결에 내렸다. 내려서도 보이는건 산밖에 없으니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데 가이드는 골짜기 아랫쪽을 보라고 했다. 세상에 깊은 골짜기 아래가 온통 하얀색이었는데, 자세히 보니 하얀색은 한 덩어리가 아니라 칸칸이 작게 나뉘어진 염전이었다.




골짜기에서 내려와 염전으로 들어가기 전에 가이드가 이곳에서 나는 옥수수와 바나나 말린 것들을 먹어보라고 나누어주었다. 물론 관심있으면 사라는 이야긴데 사지는 않지만 궁금하긴하니 종류별로 골라서 먹어보았다.



옥수수, 고추, 감자 등등 남미가 원산지인 작물들은 꽤 많지만, 쌀이나 밀이 남미로 전파되고 남미산 작물들이 다른 대륙으로 퍼져나간 것은 스페인이 남미를 식민지로 둔 이후의 일이기 때문에 잉카인들은 옥수수나 감자를 주식으로 하고 살았다. 그래선지 옥수수 품종도 다양해서 어떤 것은 한알이 내 엄지손톱보다 더 큰 것도 있었다. (남미 여행을 하면서 우리가 먹는 밥처럼 요리에 같이 나온 옥수수들을 여러번 먹어봤지만 우리가 먹어 온 옥수수와 다르게 퍽퍽하고 찰기가 없어서 그다지 입맛에 맞지는 않았다.)



좁은 길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다보면 갑자기 골짜기가 넓어지면서 햐얀 염전이 펼쳐진다. 잉카인들은 이곳에서 바다가 융기하면서 땅속에 스며든 염분이 우기에 내린 비에 씻겨 소금물이 되고, 이 물을 수많은 조그만 염전에 가두었다가 건기에 수분이 증발되고 소금만 남으면 채취했다고 한다.


내가 살리네라스에 갔을 때도 염전에 가두어진 물이 모두 하얀색을 띄지는 않았지만, 인터넷에서 우기에 찍은 사진을 보니 대부분이 황톳빛 물만 채워져 있었다. 염전을 따라 골짜기 안으로 걸어갈 수 있는데 걷기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갑자기 굵은 빗방울이 떨어져서 부랴부랴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언뜻보면 그리스 산토리니와 색감과 구도가 비슷하다. 

하지만, 산토리니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하얀색이라면 이곳은 자연의 색을 띄고 있다는 차이가 있다.



제법 굵은 빗방울이 쏟아지는데 아랑곳하지않고 사진을 찍고 있는 여행자들





살리네라스에 기념품점에서는 이곳에서 캔 소금, 주변에서 발견된 조개화석(3000미터가 넘는 이곳이 바다였음을 알 수 있다), 양이나 알파카로 짠 신발이나 작은 장신구들을 팔고 있었다. 조개화석이나 간단한 장신구들은 기념으로 몇 가지 사고 싶었지만 나중에 모두 짐이 될거란 생각에 선뜻 실행하지 못했다.



투어를 마치고 돌아오니 점심시간이 훨씬 지나있었다. 현지인들이 꽤 많았던 레스토랑에서 덮밥같은 음식을 먹고, 엊그제 가보려고 생각했던 코리칸차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르헨티나를 제외하고 남미국가에서 쇠고기는 썩 좋은 선택이 아니다. 꽤 질긴 편이다.


이날은 여러 곳을 다니다보니 중간중간 사진이 빠진 곳이 많다. 코리칸차 입구나 들어갈 때는 사진을 찍지 않았는지 아예 없었다. 아마도 이때쯤엔 꽤나 지치기도 했고, 너무 여러가지 것들을 본터라 왠만큼 인상적이지 않으면 사진을 찍을 이유를 못느꼈을지도 모르겠다.


갑자기 나온 사진은 코리칸차 내부에 진열된, 벽을 쌓는 돌들을 전시해 놓은 곳이었다. 겉으로는 직육면체의 돌을 깨끗하게 잘라 쌓은 것처럼 보이지만 돌과 돌이 닿는 곳은 사진처럼 돌에 홈을 파서 돌과 돌이 맞물리게 만들어져 있었다. 그래서, 잉카의 성벽은 대지진에도 끄덕없이 수백년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청동기 도구를 사용하는 문명인들의 석조기술이 이렇게 대단한 것이 놀라웠다. 이런 예는 아마도 세계역사상 보기 드물지 않을까.



돌들이 마치 퍼즐조각처럼 되어 있다.



지금 쿠스코에서 성당이 있는 자리의 대부분은 잉카제국 시절에 신전, 왕의 궁전 등 주요건물들이 있던  곳이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이 건물들을 파괴하고 그들이 믿는 종교의 건축물들을 쌓았지만 잉카인들의 석조기술이 훨씬 더 대단했기 때문에 태양의 신전(코리칸차)이 있던 자리에 지어진 산토 도밍고 성당은 잉카인들이 만든 기반위에 다시 성당을 지은 것이다. 1650년 대지진 당시, 산토 도밍고 성당은 무너졌지만 잉카인들이 만든 벽은 틈하나 없이 그대로 남아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대단한 석조기술을 가졌던 잉카인들도 바닥을 만들거나 벽을 세우는 기술은 뛰어났으나 돌로 지붕을 얹는다던지, 아치형태의 지붕을 만드는 기술은 없었던 것 같다. 당시 잉카의 건물들을 보여주는 모형들을 보면 지붕이 모두 갈대같은 것으로 되어 있었다.

코리칸차에서 내려다 본 쿠스코



중정이 있는 내부의 구조와 아치형 기둥, 갈색 기와가 올려진 모습은 전형적인 스페인풍 건물이다. 다만 중정 가운데 우물은 잉카때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코리칸차 내부 신전의 벽들을 보면 짜여지고 맞춰진 기술이 놀랍도록 정교하다.


철기도 갖지 못한 잉카에 금과 은은 그리도 많았던 것인지... 잉카의 마지막 왕인 아따우알파가 스페인 정복자들의 요구에 따라 방을 가득 채울 만큼의 금을 내어주고도 이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목숨을 잃은 비극적인 곳이다. 잉카인들로부터 빼앗은 금붙이들은 수 톤에 달했다고 하는데 이것들을 녹여 금괴로 만들어 스페인으로 보냈다고 한다.



잉카인들의 세계관, 우주관을 보여주는... 유물인지 복원품인지 모르겠다.



잉카 여인의 전통복장인데 어쩐지 아시아 고산족의 복장과 비슷하게 보인다.




쿠스코 자체도 매력적인 곳이지만 근교에는 내가 갔던 모라이와 살리네라스뿐만 아니라 잉카 거석문명을 제대로 볼 수 있다는 사크사이와만 유적 등 다양한 유적이 있다. 다만, 일부 책자나 언론이 잘못 만들어 놓은 잉카문명에 대한 환상을 가진다면 좀 시시할 수 있다. 무엇이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오히려 많은 것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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