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에서 가장 큰 두 도시인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를 잇는 교통수단은 여러가지가 있을텐데 숙박비도 절약할겸 밤기차를 타기로 했다. 하지만 저렴한 밤기차는 밤새 많은 역에 정차했기 때문에 시간도 많이 걸리고 잠도 깊게 들지 못했다. 버스를 타거나 비싸더라도 고속열차를 타는게 더 나았을 것 같다.


마드리드에 예약한 숙소는 중국 이민자들이 모여사는 지역에 있었다. 오전에는 밤새 쌓인 피로를 풀고 오후에는 스페인에서 가장 유명한 미술관인 프라도 미술관에 갔다. 미술관 근처에 있는 던킨 도너츠에서 도너츠와 아이스커피로 끼니를 때우는데 거기서 근무하던 여자 점원이 마드리드에는 소매치기가 많으니 뒤에 맨 백팩을 조심하라고 몇 번이나 일러주었다.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데 간다한 영어 단어와 몸짓, 표정을 섞어가며 알려주는게 고맙기도 하고 재밌기도 했다.


내가 본 스페인 사람들은 몇몇 유럽국가 중에서 가장 친절했다. 예의상 베푸는 친절이 아니라 이 사람들 성격자체가 낙천적이고 친절한 편이었고, 동서양 인종에 대한 낯가림도 심하지 않았다. 소매치기나 도둑이 많기로 유명한 스페인이지만 한달동안 여행하면서 한번도 좋지 않은 일을 당하지 않았던 것은 매사 주의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차림새가 워낙 없어보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주위에 잘 차려입은 여행자들이 많은데 굳이 초라한 행색의 여행자를 털 필요는 없을테니 말이다.


세계적인 미술관인 프라도 미술관에는 잘 알려진 유명 미술작품들이 무척 많다. 학창시절 미술책에서 봤던 벨라스케스의 '하녀들', 고야의 '옷을 입은 마야'와 '옷을 벗은 마야'뿐만 아니라 르네상스 시대의 유명 화가들의 작품도 무척 많아서 이곳은 미술에 관심이 많은 여행자들의 필수 방문 코스다. 하지만 나에게 이 미술관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작품을 고르라면 독특한 구도와 색채를 지닌 '엘 그레코'의 작품이었다. 아쉽게도 프라도 미술관은 사진 촬영을 허가하지 않기 때문에 제대로 남긴 사진이 없다.


이튿날은 국립 소피아 왕비 예술센터에서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보는 것에서부터 시작했다. 워낙 미술에 조예가 없는데다 더우기 현대미술작품을 주로 전시한 곳이라 크게 기대하진 않았지만 생각보다도 훨씬 남은 기억이 없다. 벽면 가득 들어찬 게르니카를 보면서도 '크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고 어째서 이 작품이 그토록 뛰어나다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몇 년전 파리를 여행할 때 퐁피두 센터에서 느낀 감상과 비슷했다.


그 뒤로는 스페인의 구시가를 별 생각없이 여기저기 걸어다녔다. 그러다 우연히 가장 오래된 츄러스 집이라는 곳을 지나게 되었다. 츄러스라고는 놀이공원에서 파는 설탕 바른 밀가루 튀김이라는 것밖에 몰랐는데 여기서는 달콤한 초콜렛 시럽에 츄러스를 찍어 먹는 것이었다. 배가 고파서인지 생각보다 훨씬 맛있었다.




시청사가 있는 마요르 광장을 지나고 발길 닫는대로 다니다보니 유리로 된 인상적인 시장 건물이 나왔다.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스페인의 먹거리들을 파는 곳이었는데 주로 하몽, 치즈, 해산물, 와인등을 팔고 있었다. 그 중에도 인상적이었던 것은 뿔뽀(pulpo)라고 부르는 문어였다. 서양 문화권에서는 문어나 오징어같은 연체동물을 잘 먹지 않는데 스페인은 문어를 데쳐서 올리브에 고추가루(?) 같은 것을 뿌려서 먹는게 매우 유명하다.


관광객을 대상으로하는 시장이니 가격이 저렴하진 않겠지만 맛을 보지않고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날씨도 가장 더운 시간이라 뿔뽀 한접시와 글라스 와인을 시켜놓고 시간을 보냈다. 쫄깃하면서도 부드러운 문어와 차가운 화이트 와인이 꽤나 좋은 궁합이었다. 올리브 오일을 뿌려 느끼할 것 같지만 레몬즙과 고추가루 같은게 뿌려져 있어서 느끼하지도 않았다. 생각해보니 우리나라에서 문어숙회를 시키면 얇게 썬 문어가 넓게 펼쳐져서 나오는데 몇 만원은 가볍게 부른다.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10유로 정도에 이 정도 양이라면 그리 비싼 것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스페인은 여행자들이 가볍게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요리가 많은 편이다. 서유럽치고는 물가도 저렴한 편이라 상대적으로 부담없이 여러가지 요리를 맛볼 수 있다. 게다가 고기류뿐만 아니라 문어, 새우, 굴 등등의 해산물 요리들도 많아서 좋았다.


비싼 돈을 지불하지 않아도 맛볼 수 있는 요리들로는 잘 알려진 쌀요리 빠에야, 빵에다 여러가지 다양한 것들을 올려서 먹는 타파스, 멜론과 함께 먹는 하몽에 이름을 알 수 없는 각종 해산물 요리들이 있고 음료도 와인, 맥주뿐만 아니라 와인에 여러가지 과일들을 섞은 상그리아, 사과담은 술인 세리주 등등이 있다.


마드리드는 도시 크기에 비해 그다지 구경거리가 많지 않은 편이어서 미술관을 제외하고는 딱히 유명한 명소나 유적도 없었다. 하지만 금방 떠날 수도 없는게 예약해 놓은 숙소에서 이틀은 더 머물러야 했기 때문이다. 마드리드 근교에 가볼만한 곳을 검색하니 풍차로 유명한 두 마을, 캄포 데 크라프타나와 콘수에그라가 나왔다.


두 마을 모두 스페인의 유명한 작가 세르반테스의 '동키호테'의 배경이라고 선전하고 있었는데 사실 세르반테스가 활동하던 당시에는 스페인 어디를 가더라도 곳곳에 풍차가 있었을테니 딱히 어디가 진짜라고 할 수는 없을 듯했다.


마드리드에서 두번째날, 캄포 데 크라프타나에 당일치기로 다녀오기로 했다. 기차를 타고 캄포 데 크라프타나 기차역에 내려서 다시 택시로 갈아타고 풍차가 있는 언덕에 올랐다. 이제는 사용하지 않는 듯, 깔끔하게 정돈된 풍차가 여러 개 있긴 했지만 실제 돌고 있지는 않았다. 언덕 꼭대기에는 풍차에 대한 조그만 박물관이 운영되고 있어서 약간의 입장료를 내고 관람했다.






한낮이 되니 밖은 온통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언덕 위로 불어오는 바람은 시원하기는 커녕 피부에 남은 물기를 마저 말려버리려는 듯이 뜨거웠다. 몇 달전 이집트에서 느낀 열기가 다시 생각날 정도로 뜨거웠다. 불과 지난주에 스페인 북부를 걸을 때만해도 이정도는 아니었는데 마드리드가 이베리아 반도의 한가운데 위치해 있다보니 훨씬 더운 것 같았다.


이런 날씨에 무리하다가는 큰 낭패를 볼 것 같아서 더위를 피해 언덕에 있는 조그만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차가운 맥주 한잔과 타파스를 시켜놓고 아랫쪽으로 시원하게 펼쳐진 경치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한두시간을 그렇게 보내다 마드리드로 돌아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언덕을 걸어내려왔다. 점심시간이 막 지난 시간이라 모두 시에스타 중인지 길에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뜨거운 태양아래, 적막한 마을을 걷고 있으려니 세상 사람들이 모두 사라진 듯, 묘한 기분이 들었다.




마드리드로 가는 기차가 오려면 아직도 몇 시간이나 더 있어야 했다. 마을 광장에서 가져간 과일을 먹고 시간을 보내도 뜨거운 열기만큼이나 시간도 느리게 흘렀다. 광장은 쥐죽은 듯 조용해고 가게 문은 모두 닫혀 있었다. 더위에 지쳐 인내력이 바닥날 때쯤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서 광장에 있는 펍의 문을 열어봤더니 사람들 몇몇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가게 문을 닫은게 아니라 지독한 더위를 피해 차양을 내리고 장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펍은 동네 사람들이 주로 오는 곳인듯, 동양 여행자가 들어오자 뜻밖이라는 표정이 역력했다. 고맙게도 안에는 에어콘 바람이 시원하게 불고 있었다. 이 시원함을 맛본 이상, 주인이 나가라고 밀어내도 절대 순순히는 나갈 수가 없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기차가 올 때까지 맥주를 마시고 축구 중계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천국과도 같은 펍이었다.



작열하던 태양도 많이 기울고 드디어 기차가 올 시간이 되었다. 한 여름에 스페인을 여행하면서 왜 여행자들이 스페인의 태양을 이야기하는지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 날의 태양은 그 전의 것들을 뛰어넘는 경험이었다. 숙소에 돌아와 티브이를 보니 뉴스에서 오늘 기온이 41도였다고 방송하고 있었다. 아프리카도 아닌 유럽에서, 서울보다 위도가 높은 마드리드에서 41도의 여름이라니... 스페인 사람들의 열정적이면서도 낙천적인 성격이 이해가 되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