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심했던 마드리드를 떠나 옮긴 곳은 버스로 한시간쯤 떨어진 톨레도였다. 지금은 구시가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작은 도시일뿐이지만 5세기경 서고트 왕국의 수도였으며 무어인들이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한 후에도, 그 뒤로도16세기 마드리드로 수도를 옮길 때까지 천년동안 이베리아 반도의 중심도시였다.


톨레도에 예약한 숙소는 시설에 비해 무척 저렴한 곳이었으나 여행의 중심이 되는 구시가와는 거리가 좀 떨어져 있었다.(시설도 좋고 거리도 가까웠다면 당연히 비쌌겠지) 가장 더운 시간에 톨레도 버스터미널에 내리니 어깨에 맨 배낭무게에 더해 뜨거운 공기가 더욱 숨을 턱 막히게 했다. 생각보다 멀었던 숙소를 간신히 찾아 짐을 내려놓고 늦은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다시 이글거리는 햇살 아래로 나왔다.


당시 톨레도의 한낮 기온은 40도를 넘었는데 햇볕아래 조금만 걸어도 일사병에 걸릴듯 체온이 상승했다. 희안한 것은 그렇게 더워도 땀은 잘 나지 않았는데 저녁에 옷을 벗어보면 하얀 얼룩만 남아있었다. 높은 기온과 건조한 공기가 땀조차도 흘러내릴 틈이 없이 금새 말려버리는 것이었다.


레스토랑을 찾아 온 동네를 헤매고 다녔으나 거리에는 레스토랑은 커녕 물어볼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이미 극심한 더위를 피해 다들 숨어버린 것이다. 공복에 땡볕에서 레스토랑을 찾아서 헤매다보니 이제 쓰러질지경이었다.


겨우 레스토랑으로 보이는 곳을 발견하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자 어두운 실내에 바텐더가 서 있었고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실망스러움이 온몸에 퍼지고 기운이 쫙 빠지는걸 느끼면서도 혹시나 싶어 식사할 수 있냐고 묻자 바텐더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식당 안쪽 문을 가리켰다.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인지 안된다는 것인지 의미도 모른채 혹시나 싶어 안쪽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 


이게 왠일인가, 레스토랑 안쪽에 있는 방에 손님들이 꽉 차 있었다. 어차피 이 더운 날씨에 레스토랑에 오는 손님이 적으니 넓은 홀이 아니라 별실만 운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손님은 전부 동네 사람들로 보였다. 어색함에 쭈뼛거리자 나이가 지긋한 웨이터가 친절히 테이블로 안내해주었다.


'메뉴 델 디아'를 주문하면서 차가운 화이트 와인과 차가운 토마토 스프(살모레호인지 가스파초인지...), 메인으로 생선요리를 선택했다. 이 레스토랑의 음식은 모두 훌륭했지만 그 중에서 최고는 차가운 토마토 스프였다. 삶은 달걀과 하몽을 띄운 이 차가운 스프는 고소하면서도 새콤달콤한게 정말 최고였다. 그 뒤로 여러 도시에서 비슷한 스프를 시켰지만 시큼하기만 한게 이 곳처럼 맛있는 스프를 맛볼 수 없었다.


열에 들뜬 체온을 식혀준 차가운 화이트 와인


스페인에서 맛본 최고의 음식, 살모레호... 였던가...


톨레도에서 먹었던 차가운 토마토 스프가 살모레호인지 가스파초인지 알아보려고 인터넷을 열심히 뒤진 결과, 삶은 달걀과 하몽이 올려져 있었던 것으로 봐서 살모레호에 가까운 것 같다. 두 음식이 거의 비슷한 방법으로 조리되는데 이름이 다른 이유를 잘 모르겠다. 우리나라도 비슷한 음식이 지방에 따라 부르는 이름이 다른 것처럼 스페인도 그런 것은 아닐까...


메인으로 시킨 생선구이와 샐러드


나이든 웨이터는 능숙한 솜씨로 와인 마개를 따서 따라주고 사람좋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동네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는 레스토랑에 행색이 허름한 동양인 여행자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찾아왔으니 어쩌면 불쌍해보였는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음식은 훌륭했고 가격은 10유로 내외로 생각보다 저렴했다.


늦은 점심을 먹고 숙소로 돌아오자 더 이상 밖에서 헤매고 싶지 않았다. 해가 지려면 아직 멀었지만 에어콘을 세게 틀어놓고 뒹굴거리며 남은 시간을 보냈다.


톨레도 관광은 이튿날 아침부터 시작했다. 이른 아침이지만 벌써 공기가 후끈거리기 시작했다. 숙소 근처에서 구시가로 들어가는 버스에 올랐다.


구시가로 통하는 성문





톨레도의 시청사, 박물관들을 보며 돌아다녔다. 톨레도에서 가장 유명한 예술가는 '엘 그레코'다. '엘 그레코'는 그리스 사람이라는 뜻이라는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그리스 태생으로 톨레도에서 활동한 화가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를 나타내는 이름이 되어버렸다. 이 사람의 그림이 톨레도의 성당과 박물관 곳곳에 전시되어 있다.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에서 본 엘 그레코의 작품보다 훨씬 많고 다양했다. 광각렌즈로 아래에서 위로 찍은 듯한 특이한 구도와 어둡고 강렬한 색채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당시의 화풍이나 구도와 무척 다르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현대에 그려진 회화처럼 보였다.





점심으로 구도심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메뉴 델 디아'를 먹었지만 어제 갔던 레스토랑에 비해서 가격은 두배 가까이 비쌌고 맛은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역시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하는 곳에서 만족스러운 식사를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는 사실을 다시 깨달았다.


톨레도도 아시시나 로도스처럼 중세시대의 도시 특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다만, 로도스보다는 조금 작고, 고즈넉했던 아시시보다는 더 번잡했다. 한여름을 피했다면 훨씬 느긋하게 돌아볼 여유가 있었을텐데 한나절도 지나지 않아 금새 체력이 바닥나버렸다.

톨레도도 여느 중세도시처럼 외적의 침입이 어렵도록 한쪽을 제외하고는 강과 절벽으로 둘러져 있었다. 반대편 언덕에서 보는 톨레도 시내의 모습이 멋있다고 했는데 이 더위에 도저히 갈 마음이 생기지 않아서 포기했다.



오후로 접어들자 더 이상 돌아다니다가는 며칠 앓아야 할 것 같아서 숙소로 돌아왔다. 짧은 톨레도 여행은 여기서 끝내고 내일은 그라나다로 떠나기로 했다.


시원한 에어콘 버스를 타고 다니는 패키지 여행이 아니라면 스페인 내륙지역을 한여름에 여행하는 것은 상당한 체력과 인내를 필요로 하는 일인 것 같다. 톨레도는 볼 것도 많았고 인상적인 중세의 고도였지만 더위로 충분히 보고 즐기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 곳이다. 더워서 그랬는지 찍은 사진도 몇 장 없어서 더욱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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