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에르토 바라스에서 묵은 숙소는 특별한 곳은 아니었다. 조용한 주택가에 위치해 있는 깔끔한 목조건물이었으나 내부는 아무래도 오래되어서인지 호스텔 중에서도 상급이라고 할 수는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이 곳이 꽤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짧지만 좋은 여행자들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날 저녁 준비를 하는 시간이 되자 부엌이 다양한 여행자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호스텔에서는 늘상 있는 일인데 낮동안 흩어져 돌아다니다 저녁이 되면 각자 사온 먹거리들로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기 때문이다. 낯선 여행자들끼리 마주치면 보통은 눈인사만 주고받거나 간단히 안부인사만 하는 정도인데, 여기서 만난 사람들은 음식을 준비하는 동안 다양한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어떤 이야기였는지는 생각나지 않는 것으로 봐서는 별다를 것 없는 일상적인 대화였지만 서먹함이나 경계가 없는 자연스러운 대화였다.


대개 음식이 만들어지면 우선 식사를 하고, 그 뒤에 조리기구와 그릇들을 설거지를 해서 뒷사람이 이용하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하는게 일반적이다. 만약, 본인이 쓴 조리기구를 뒷사람이 사용해야 한다면 식사전에 미리 씻어두기도 한다. 이 날도 조리를 마친 후, 식사를 하고 그릇들을 모아 설거지를 하려고 했다. 그런데, 싱크대에 놔둔 조리기구들이 없는 것이었다. 이상해서 찾아보니 이미 깨끗하게 씻겨져 정돈되어 있었다. 알고보니 먼저 식사를 마친 여행자가 본인 그릇을 설거지하면서 싱크대에 있는 내가 쓴 조리기구까지 해놓은 것이었다. 별다른 내색없이 다른 사람의 것까지 해놓고도 티내지 않는 사람이라면 훌륭한 인품이 아닌가 싶었다.


친절하고 살갑게 대하면서도 정작 본인이 해야 할 일은 빠지거나 미루는 경우는 많이 봤어도 처음보는 사람의 몫까지 자발적으로 하는 사람을 보는 일은 회사에서도 사회에서도 굉장히 드문 일이다. 비록 여행지에서 만나서 지속적인 인간관계를 맺지는 못하더라도 이런 사람을 만나게 되면 적어도 자신을 뒤돌아보게 만드는 좋은 계기가 된다.


푸에르토 바라스의 숙소 창문

낡은 천을 고리에 걸어야하는 엉성한 커튼이지만 좋은 기억이 남은 숙소였다.


숙소 근처의 주택가. 집이 넓고 길거리가 깨끗하다.


푸에르토 바라스에서 하루밖에 머물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하고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3시간 정도 예정된 비행시간에서 2시간이 넘어 산티아고에 꽤 가까워졌을 무렵, 창밖으로 강한 빛이 쏟아져들어왔다. 저물어 가는 햇빛이 바다와 강물에 반사되어 비행기안까지 들이쳤다. 구름 사이로 보이는 강과 바다가 온통 금빛으로 빛났다. 그동안 비행기를 꽤 여러번 탓어도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산티아고에 예약한 숙소에 도착했을 때는 꽤 늦은 시간이었다. 번화가 가까운 곳에 숙소를 잡더라도 어두운 밤거리에서 방향을 익히고 숙소를 찾아가는 일은 늘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어렵사리 찾아간 건물은 20층이 넘는 고층 오피스텔 건물이었다. 건물 앞에는 경비원이 지키고 있다가 들어오는 사람이 있을 때만 커다란 창살을 밀어 문을 열어주었다. 이 건물을 오가는 사람들이 대부분 외국인으로 보이는 것으로 봐서는 많은 오피스텔이 여행자용 숙소로 사용되는 것 같았다.


숙소 관리인과 만나서 방을 안내 받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무척 반가워했다. 자신은 태권도를 배웠고, 유단자 심사를 받기 위해 국기원을 방문한적이 있다고 했다. 잠시 기다리라면서 나가더니 다시 가지고 온 것은 과립으로 된 인삼차 네포였다.


세상에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라에서 현지인에게 인삼차를 선물받게 될 줄이야. 한국에서는 얼마 하지않는 인삼차겠지만 이 사람에게는 그렇게 쉽게 내어줄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연이어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친절을 받으면서 칠레라는 나라가 점점 더 좋아졌다.


이 숙소를 예약하면서 사용했던 메일 계정으로 아직도 가끔 안내 메일을 보내온다. 숙소에 묵었던 모든 이들에게 보내는 스팸메일이지만 나에게는 그의 친절을 떠올리고 미소짓게 만드는 매개체이다. 이렇듯 좋은 기억이란 사소한 일들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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