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인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로 바뀌고 산업화가 진행되면 기존 전통사회에서 가치있는 것으로 여겨지던 것들과 산업사회에서 가치있는 것들이 충돌하게 되고 사회구성원들은 가치관의 혼란을 겪게 된다. 대부분의 나라들이 그런 과정을 거치게 되지만 특히 빠르게 산업화가 진행된 국가들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분위기 같은 것이 있다. 우리나라는 세계 역사상 손꼽히게 빠른 속도로 산업화와 경제발전을 이룬 나라이기 때문인지 앞에서 이야기한 그런 나라를 방문하게 되면 그 분위기에 묘한 동질감이 느껴진다.
이런 느낌은 여행한 20여개 나라들 중에서 특히 베트남과 칠레에서 많이 들었는데, 베트남이 6,70년대의 우리나라와 비슷하다면 칠레는 90, 2000년대의 우리나라와 느낌이 유사하다. 우리는 지나칠 정도의 빠른 산업화가 경제적인 풍요로움을 주지만 정신적으로 가치있는 많은 것들이 사라지고, 동시에 사회적인 문제점들도 낳는다는 사실을 경험해 보았다. 그렇기에 나는 이들 국가에서 느껴지는 분위기에서 우리와 같은 동질감을 느끼지만 조금은 안타까운 생각도 든다.
앞선 글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칠레에서는 정말 다양한 해산물들이 잡히고 또 이를 이용한 요리들이 있다. 그 중에서도 유명한 것은 해산물 스프다. 우리나라 뚝배기와 비슷한 그릇에 해산물을 잔뜩 넣어서 매콤하게 끓여내는 이 음식은 맛이 해물탕과 아주 비슷하다. 조개류, 생선류, 오징어, 게살 등을 워낙 많이 넣어서 끓이기 때문에 스프와 빵만 먹어도 한끼 식사로 거뜬하다.
(이름은 잊어버렸지만)칠레 시내에는 이 음식을 파는 가게들이 몰려있는 곳이 있는데 워낙 유명한 곳이라 현지에서 물어보더라도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뜨끈하고 얼큰한 국물이 해물탕과 정말 비슷하다.
해물탕과 비슷한 칠레의 해산물 스프말고도 남미에는 우리나라와 비슷한 음식이 몇 가지 더 있다. 아르헨티나의 엠빠나다는 군만두와 약간 비슷하고, 페루에는 물회와 비슷한 새콤한 세비체, 양념치킨과 거의 똑같은 치킨요리도 있다. 이런 음식들을 맛보며 이들의 식문화를 경험하는 것은 빼놓을 수 없는 여행의 묘미다.
며칠간 흐리고 쌀쌀했던 산티아고의 하늘이 떠나기 전날에는 화창하게 개었다. 이날은 볼리비아 입국비자를 받기 위해 산티아고에 있는 볼리비아 대사관을 찾아갔다. 볼리비아 대사관은 산티아고에서 현대적인 건물들이 들어선 오피스 지구과 멀지않은 곳에 있었는데, 현대적인 빌딩의 한켠을 차지하고 있을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소박하게도 길거리의 주택건물을 대사관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주택의 응접실과 같은 곳에 잠시 대기했다가 들어간 방에는 볼리비아 대사로 보이는 아저씨가 앉아있었다. 아저씨가 내미는 몇가지 서류를 작성하고 황열병 예방접종 증명서를 보여주면 여권에 비자발급 도장을 직접 찍어준다. 게다가 친절하게도 마르지않은 도장이 반대편 페이지에 묻지 않도록 두루마리 휴지 한칸을 여권에 끼워서 건네주었다.
산티아고의 볼리비아 대사관은 내가 가 본 가장 소박하고 친절한 대사관이었다. 행색이 남루한 외국인 여행자에게도 이정도로 친절하다면 자국민에게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간혹 우리나라 외교부가 자국민에게 '갑질'하는 행태가 뉴스로 나온다. 외교부와 외교관의 첫번째 임무는 해외에 체류하는 국민들을 돕고 이들의 안전에 힘쓰는 것일텐데 말이다. 비뚤어진 엘리트 의식에 젖은 일부 우리나라 외교관들은 이 볼리비아 대사관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건기인지 시내 중심을 흐르는 대부분의 하천에 누런 흙탕물만 조금 흐르고 있었다.
높은 건물들이 늘어선 산티아고의 상업지구에서도 가장 잘 보이는 건물은 코스타네라 센터이다. 남미에서 가장 높고, 남반구에서는 두번째로 높다는 이 건물은 62층 건물인데 높이는 63빌딩보다 높은 300미터에 달한다고 한다. 위키에는 2010년 완공예정이라고 되어 있지만 어쩐일인지 방문했던 2012년에도 건설중이었다.
코스타네라 센터 근처에서 커다란 쇼핑몰에 잠시 들렀다. 여행지에서 쇼핑몰이나 백화점은 잘 들르지 않는 편이지만 라오스에서 샀던 스마트폰 케이스가 더 이상 버티기 힘들 정도로 깨져버려서 하나 구매해야 했기 때문이다.(스마트폰이 없으면 여행이 훨씬 힘들어지기 때문에 무엇보다 소중하다.)
쇼핑몰은 깨끗하고 넓었으며 다양한 브랜드들이 입점해있었다. 산티아고의 지하철도 아르헨티나나 브라질보다 깨끗하고 편리한 편이고, 장거리를 운행하는 버스들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FTA가 체결된 칠레의 해산물과 와인은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수입하고 있다. 우리나라와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산티아고는 우리 생각보다 훨씬 현대적인 도시였고, 칠레는 경제적으로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나라였다.
산티아고에는 대형 박물관, 미술관 혹은 전시장들도 여러 곳이 있다. 당시에는 도시의 명소들을 하나하나 찾아다니는 여행스타일이 지겨워져서 발길 닿는대로 내키는대로 다녔기 때문에 그런 곳들을 별로 가지 않았다. 한군데 갔던 곳이 Centro Cultural Palacio del la Moneda 였는데, 전시물보다 지하지만 자연광이 잘 들도록 지어진 건축물이 더 인상적이었다.
Palacio del la Moneda
Centro Cultural Palacio del la Moneda 입구
산티아고는 주변이 산들로 둘러쌓인 분지형 지형이다. 그래서 도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언덕이나 산들이 많은데 도심 한가운데에도 나지막한 언덕이 하나 있다. 당시에는 이름조차 모르고 올랐는데 찾아보니 산타루시아 언덕이라고 하나보다. 이 언덕은 어느 정도 높이까지는 대로변에 설치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갈 수 있다.
언덕 꼭대기로 오르는 길은 좁은데다 많은 관광객들이 지나다니는데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잠을 잔다.
워낙 야트막한 언덕이기 때문에 도시 전체를 위에서 내려다 본다는 느낌은 별로 들지 않는다. 하지만 도심 가까이에 있고, 언덕에 오르는 길이 산책로 같아서 부담없이 가볼 수 있다. 도시를 조망하기 좋은 곳은 산 크리스토발이라고 한다.
언덕을 내려와 저녁을 먹기 위해 한국교민들이 운영하는 식당이나 잡화점이 많은 거리까지 걸었다. 여행하는 동안 한국음식이 그리울 때나 비상식량이 필요할 때 먹을 라면과 통조림, 카레가루를 사고 한국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음식은 분명 한국 음식이지만 재료가 한국산이 아니라서 그런지 아니면 현지인들의 입맛에 맞게 약간 변형되었는지 맛이 미묘하게 차이가 났다. 썩 맛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인스턴트 음식을 제외하고는 부에노스 아이레스 이후로 처음 먹는 한국음식이라 정신없이 먹었다.
산티아고는 부에노스 아이레스나 히우 지 자네이루 같은 다른 남미의 대도시에 비해 훨씬 치안이 안정되어 있고, 깨끗한 곳이다. 도심이라면 늦은 저녁에도 큰 걱정없이 길을 걸을 수 있고, 여러가지 편의시설도 잘되어 있다. 그런데 이 훌륭한 도시는 나에게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아마도 너무 보편적으로 현대화된 모습 때문에 여행자에게는 특색을 잃어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고작 며칠 머물렀던 내가 이런 판단을 내리는 것은 너무 섯부르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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