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코르도바에서 출발한 버스는 이튿날 아침에 살타에 도착했다. 아무리 좌석이 180도 가까이 펼쳐지는 가장 좋은 등급의 버스라 하더라도 야간버스를 타고나면 한동안은 멍하니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20대의 팔팔한 나이였으면 이렇지 않을텐데 생각하지만 곧 남들이 쉽게 갖지 못하는 기회를 갖게 된 것에 감사하게 된다.
살타는 인구 50만명 정도되는 아르헨티나에서 여덟번째로 큰 도시다. 아르헨티나 북부도시라서 위도상으로는 열대지방에 속하기 때문에 꽤 더우리라 생각했지만 안데스 산맥 동쪽 산자락 해발 1100미터가 넘는 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코르도바나 멘도사보다 오히려 덥지 않았다. 코르도바에서 출발한 버스는 살타에 거의 가까워질 무렵부터 갑자기 산길을 오르기 시작하는데 고갯길을 다 오르면 갑자기 너른 분지에 커다란 도시가 나타났다.
위키에서 찾아본 살타는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스페인다운 도시로 유명하다고 한다. 그러고보니 살타에 있었던 성당이나 독특한 건축물들, 묵었던 숙소의 구조가 스페인에서 보던 그것과 매우 유사한 점이 많았다.
묵었던 숙소의 입구는 사진처럼 타일들이 붙여져 있었고, 스페인 세비야나 그라나다에서 봤던 집들처럼 건물이 사방을 둘러싸고 그 가운데 작은 뜰이 있는 구조였다. 내부 장식이나 인테리어는 다르지만 세비야에서 플라멩코를 봤던 그 저택과 구조가 비슷했다.
오전에 호스텔에서 잠깐이나마 편안하게 수면을 취해 정신을 차리고서는 살타에서 유명한, 도시의 전망이 훤히 내려다보인다는 언덕에 오르기 위해 길을 나섰다.
유럽의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케이드도 있다.
남미의 사막, 야마, 원주민 여인의 모습을 그린 벽화
아마추어가 그린 것이지만 그래피티가 아닌 이런 벽화가 여행자 입장에서는 왠지 더 반갑다.
산 프란시스코 성당
7월 9일 광장(Plaza 9 de Julio)을 중심으로 유럽풍의 커다란 건물들이 늘어선 지역에서 외곽으로 조금만 벗어나면 일반 사람들이 살고있는 낮은 단층집들이 주를 이룬다.
언덕에 올라가는 케이블카를 타기 위해 지도를 보며 꽤 걸었다. 걷는 동안 보니 살타에는 공원이 많았고 휴일인지 사람들도 많이 나와있었다.
케이블카 승강장에 설치된 유리로된 오벨리스크. 무엇을 기념하는 것인지는...
조금은 낡은 듯한 작은 케이블카에 오르면 점차 높아지면서 살타의 전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16세기 후반 스페인 정복자에 의해 전략적으로 건설된 도시라서 그런지 도로는 쭉 뻗어있고, 도시 구역은 잘 정비되어 있다. 의도적으로 만든 도시가 아니라 사람들이 살다보니 필요에 의해 커진 도시에서는 보기 힘든 모습이다.
언덕은 그다지 높지는 않았지만 살타라는 도시가 고산지역의 분지에 형성된 까닭에 도시 전체를 훤히 조망할 수 있었다. 높은 건물도 거의 없어서 도시 반대편에 있는 산맥까지 보인다.
이 언덕은 여행자들뿐만 아니라 현지인들에게도 인기있는 장소인 것 같았다. 케이블카 승강장에도 사람들로 꽤 붐볐는데 언덕 위에는 걷거나 차를 타고 온 사람들까지 합해져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이제 막 시작된 봄을 즐기기 위해 가족, 연인, 친구들끼리 이곳을 찾고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언덕위에 헬스장에나 설치되어야 어울릴 듯한 운동기구가 있어서 힘깨나 쓰는듯한 남자들이 돌아가며 운동기구에 달라붙는 모습도 있었고,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에어로빅을 가르쳐주는 사람도 있었다.
언덕을 내려와서 다시 7월 9일 광장으로 돌아왔다. 광장에는 이 도시에서 가장 큰 살타 대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도시의 번화한 광장에 도시에서 가장 큰 성당이 있고, 광장 주변으로 레스토랑이나 박물관, 미술관이 자리잡은 모습은 유럽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도시구조이다.
7월 9일 광장에 있는 분홍빛의 살타 대성당(Catedral Basilica de Salta)
남미의 지방도시에 있는 성당치고 꽤 크고 화려하다.
살타에서의 첫째날을 기분좋게 보내고 있었지만 자꾸만 몸에 생기는 울긋불긋한 반점이 걱정스러웠다. 개수도 점점 늘어나고 있는데다 가려움까지 심해졌다. 이게 소위 말하는 베드벅(빈대)이라면 혹시 배낭이나 다른 옷가지에 옮아 있을 경우, 골치가 아파진다. 이 베드벅이라는 녀석은 피를 빨 대상이 없어도 끈질긴 생명력으로 버티고 있다가 언젠가 그 옷을 꺼내 입거나 살에 닿으면 다시 흡혈활동을 재개하게 때문이다. 이 베드벅은 저렴한 숙소를 이용하는 배낭여행자들에게는 어쩔 수 없이 취약한 부분이다. 베드벅에 물리면 모든 짐을 꺼내 햇볕에 말리고 옷가지는 세탁해야 한다고 들었었고, 여행중에 만난 여행자 몇 명은 베드벅 때문에 고생했던 사례를 치를 떨며 이야기했었다.
(모기에 물리는 것도 어떤 사람은 보통보다 심하게 불풀어 오르거나 더 가렵듯이 빈대도 마찬가지다. 베드벅에 물려서 병원에서 치료 받고 약도 먹었지만 한달 넘게 고생했다는 사람도 있었다. 게다가 모기는 한번 물고나면 끝이지만 이 베드벅은 엄청난 식욕과 성욕으로 수없이 피를 빨고 새끼들을 번식한다. 절대 만만히 봐서는 안될 녀석이다.)
숙소 주인에게 반점을 보여주었더니 자기가 보기에는 베드벅이 맞는 것 같다면서 의사를 불러주겠다고 했다. 갑자기 의사를 불러준다니, 왕진비가 엄청 나오는건 아닌가 걱정이 됐지만 어쨌든 진료는 받아야하니 기다려보기로 했다.
두어시간이 지나서 왕진 온 의사는 물린 자국과 증상을 꼼꼼하게 살피고, 이전에 어느 도시에서 왔는지, 어디서 묵었는지, 어떤 교통수단을 이용했는지 상세히 물었다. 예상했던대로 검진결과는 베드벅이라면서 처방전을 주었다. 그리고, 아무런 비용청구 없이 그냥 돌아갔다.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숙소 주인에게 물어보니 아르헨티나에서는 간단한 의료진료는 무료라고 했다. 그것은 여행자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무료진료이기 때문에 의료 수준은 조금 미흡해서 좋은 병원에서 진료를 받기 위해서는 예약하고 오래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우리나라보다 소득수준이 낮은 아르헨티나가 (왕년에는 세계 5위 안에 드는 강국이었다 하더라도) 무료 의료라니... 노동자와 서민을 위한 복지정책(물론, 그로인한 폐해도 적진 않았지만)을 폈던 후안 페론과 에바 페론의 영향일까?
잠깐 인터넷을 찾아보니 아르헨티나의 의료와 교육은 전액 무료라고 한다. 다만, 응급조치가 필요한게 아니라면 의사의 진료를 받기 위해 몇 시간쯤은 기다려야 하고, CT나 MRI 같은 고가의 장비를 이용한 검사는 몇 개월 전에 예약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의사의 진료는 환자의 증상을 듣고 대충 처방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매우 꼼꼼하게 이루어진다고 한다.
군사정권과 그 뒤를 이은 정부의 무능, 부패로 현재까지도 아르헨티나는 경제적으로 매우 힘든 상황이지만 국민의 의료와 교육을 국가가 책임지고 있다. 확실히 구분해 생각해야 할 것은 기득권층의 욕심으로 국민의 삶이 피폐해진 것이지 국민에 대한 무상 의료와 교육 때문에 아르헨티나의 경제가 파탄지경에 이르게 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기득권층의 욕심과 위정자의 무패가 나라를 망치는 것이지 복지 때문에 망가지는 국가는 없다.
약국에서 의사가 처방해준 약을 사고, 근처에서 현지 사람들이 많이 들어찬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샐러드와 스테이크, 치즈를 올린 두꺼운 면이 세트로 나오는 메뉴였는데 보기보다 맛이 매우 훌륭했다. 정확하게 기억할 수는 없지만 가격도 꽤 저렴했었다.
아르헨티나의 소고기야 훌륭하다는걸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치즈만 올린 두터운 국수(우리나라 칼국수 면발이다)마저 맛있을 수 있다는건 몰랐다.
저녁에는 오랜만에 한국 음식이 먹고 싶어서 대신으로 근처에 봐둔 중국 식당으로 갔다. 중국 음식점은 남미라하더라도 왠만한 도시라면 적어도 몇 군데는 있었다. 중국사람들이 세계 각지에 살고 있지 않은 곳이 없어서 그렇겠지만... 그리고, 중국음식의 현지화도 잘 진행되어서 현지 사람들도 많이 이용하고 있었다.
메뉴판을 보고 대충 시킨 음식은 다행히 탕수육과 꽤 비슷했다. 탕수육의 단맛은 많이 빠지고 대신 짠맛이 좀 더해진 음식이었다. 보험드는셈 시킨 만두도 좀 타긴했지만 썩 괜찮았다.
코르도바에서 가져 온 베드벅으로 살타에서는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자신의 숙소에 베드벅을 옮겼을지도 모르는 여행자에게 친절했던 숙소주인과 아르헨티나의 무상의료제도 덕분에 베드벅과의 첫번째 만남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다행인 것은 벌레에게 잘 물리는 체질이긴 하지만, 물리면 심하게 덧나지 않고 금방 가라앉는다는 것이다. 내가 여행에 적합한 체질이란게 슬슬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제, 우유니 투어의 전초기지인 산 페드로 데 아타까마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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